2) 문인 형(文人型): 소설평점의 주체성
‘문인’이라는 단어는 그 함의가 경계를 규정하기 어려운데, 중국 고대에는 그 상황이 더욱 복잡하다. 중국 고대에는 직업적인 문학가가 비교적 적었고, 문학 창작으로 생계를 이어간 작가는 더욱 적었다. 그래서 이른바 문학 창작은 정사를 돌보는 여유 시간에 회포를 풀고 자신의 뜻을 서술하거나 생계 이외의 영역에서 오락의 차원에서 소일거리 삼아 했던 것이다. 송원 이래로 속문학이 일어남에 따라 문학의 상품화가 점차 대두되어 송원 시기 구란(勾欄)을 위해 전문적으로 극본을 엮어내는 ‘서회재인(書會才人)’과 같은 직업적인 창작자들이 출현했다. 명 중엽 이후에는 통속소설이 흥성함에 따라 직업적인 소설가가 먼저 서방 주인의 주변에서 형성되었고, 명말청초에는 하층 문인민들이 주체가 된 전업적인 창작 계층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속문학의 흥기는 고대 문학 창작 계층의 분화를 촉진했고, 아울러 창작 계층은 날로 다양화되고 직업화로 나아갔다. 당연하게도 진정으로 직업화된 작가는 근대 문화의 산물로 근대의 신문과 잡지, 그리고 인쇄업의 발전에 따라 점차 정형화되어 갔다. 고대의 문학 비평가의 상황 역시 대체로 이와 같았으니, 다양화된 비평가 계층 역시 속문학이 발전한 뒤에야 나타나기 시작했다.
통속소설의 문인 평점은 명대에 그 기원을 두었는데, 리줘우(李卓吾)가 그 선구가 된다. 리줘우에서 진성탄(金聖嘆)에 이르기까지 문인 평점은 눈부신 역사를 거치게 된다. 이것은 명대 소설평점이 서방의 통제에서 벗어나 사상적 가치가 가장 풍부했던 일련의 평점 계열로, 사람의 숫자는 많지 않지만, 영향력은 매우 커서 청대 통속소설의 문인 평점의 개조가 되었다.
문인이 평점한 통속소설은 처음에는 흥취에서 출발했다. 리줘우는 “《수호전》의 비점도 사람을 무척 상쾌하게 만들지만, 《서상기》와 《비파기》의 가필과 수정 작업은 더한층 오묘합니다(《水滸傳》批點得甚快活人, 《西廂》, 《琵琶》涂抹改竄得更妙.)”[리줘우, 《속분서(續焚書)》 1권 <여초약후(與焦弱侯)>]라고 말했으며, 또 “《파선집》은 내가 직접 교정을 보고 주석을 단 책입니다. 매번 열어볼 때마다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니, 나에게는 마음을 상쾌하게 하고 병을 물리쳐주는 종류의 책이라 하겠습니다.(《坡仙集》我有披削旁注在內, 每開卷便自歡喜, 是我一件快心却疾之事.)”[리줘우, <기경우서(寄京友書)>, 《분서(焚書)》 2권]라 하였다. 이것으로 통쾌함을 추구하고 흥취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 리줘우 평점 문학의 기본적인 특색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진성탄이 소설을 비점한 것 역시 우선은 《수호전》에 대한 강렬한 흥미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수호전》을 재자지서(才子之書)로 보았기에 재자의 마음으로 그것을 읽고 비했다. 청대에 들어선 뒤에는 문인들 사이에서 통속소설의 지위가 날로 높아져서, 문인들이 통속소설을 읽는 일이 이미 통상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위로는 왕공 귀족이나 고관대작으로부터 아래로는 낙제수재(落第秀才)나 민간의 문인에 이르기까지 통속소설은 이미 서안(書案)에 올리는 상비(常備)의 책이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은 문인들의 소설에 대한 평점을 자극했다. 청대에 문인들이 끊임없이 소설을 평점했던 현상은 바로 이렇듯 소설을 열독했던 환경을 근거로 한 것이다. 근대에는 문인들이 소설을 창작하는 것보다 소설을 평점하는 것을 더 즐거운 일로 여겼다. 멍성(夢生)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설을 짓느니 소설을 평하겠다. 대저 작자로서의 나는 얼마나 많은 계획과 기획을 기울였는지 모르지만, 결국은 나보다 앞선 사람이 지은 것만 못하니, 차라리 앞선 사람이 계획하고 기획한 것을 가지고 내 멋대로 평을 하고 나에게 평을 하라고 시키면 좋겠다. 그러면 온몸이 통쾌해서 책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일텐데……평범한 소설을 평하느니 가장 훌륭하고 가장 아름다운 소설을 평하겠다. 평범한 소설을 평하려면 다소간의 생각을 쏟아야 하고 온몸이 불쾌한 것을 느끼게 되어 가장 훌륭하고 가장 아름다운 소설을 평하다가 모든 게 들어맞아 나도 모르게 손과 발을 움직여 춤을 추는 것만 못하다.(與其作小說, 不如評小說. 蓋以我之作者, 不知費幾許經營籌劃, 尙遠不能如前人所作, 不如擧前人所經營籌畵成就者, 而由我評之, 使我評而佳, 則通身快活, 當與作書相等.⋯⋯與其評尋常小說, 不如評最佳最美之小說, 蓋評尋常小說, 旣需我多少思量, 且感得一身不快, 不如評最美最佳之小說, 頭頭是道, 不覺舞之蹈之.)[멍성, <소설총화(小說叢話)>, 1914년 《아언(雅言)》 제1권 제7기]
소설평점사에서 이렇게 독서의 흥취를 평점의 기초로 삼은 문인 평점자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특히 소설사상 우수한 작품에 대한 평점은 더욱 그러하다. 이런 평점들은 대부분 소설평점의 상업적 전파성을 내던져 버렸기에, 소설평점에서 이론과 사상적 가치가 가장 풍부하다.
소설평점에 문인이 대량으로 뛰어듦으로 해서 소설평점 계층의 사회적인 수준이 명백하게 제고되었다. 만약 명대의 소설평점이 ‘명사’들에 탁명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 문인 평점은 개별적인 진실성은 제외하고도 대부분 허구성이 농후했다고 말한다면, 청대의 문인 평점은 상대적으로 실제적이다. 《요재지이》를 평한 왕스전(王士禎), 《여선외사》를 평한 훙성(洪昇) 그밖에도 두쥔(杜濬), 자지쭤(査繼佐), 황저우싱(黃周星) 등과 같은 문학계의 명사나 쟝시(江西) 염사(廉使)였던 류팅지(劉廷璣), 쟝시 난안(南安) 군수 천이시(陳奕禧), 광저우 태수로 《여선외사》를 평한 예난톈(葉南田), 감찰어사 쉬바오산(許寶善)과 같이 관직에 있으면서 문학을 했던 인사들은 모두 당대에 일정한 영향력이 있었던 인물들이었다. 이렇게 문인들이 소설평점에 종사한 것은 소설의 지위 제고와 소설의 영향력 확대에 중요한 작용을 했다. 동시에 명대와는 비교되는 것이 청대의 소설가들의 사회적인 수준 역시 이에 상응하게 제고되었다는 사실이다. 문인들이 독창적으로 작품을 엮고 창작해내는 방식과 문인적인 품위를 갖춘 소설 작품들 역시 점차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소설평점자의 문인화는 이러한 창작 현상과 서로 맞물려 이로부터 소설 예술의 발전을 공동으로 추진해나갔다.
‘문인형’ 소설평점은 소설평점사에서 뿌리깊은 근원을 갖고 있다. 리줘우는 소설평점 중 문인 평점의 초기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소설평점이 서방 주인의 통제 하에 완만하게 전진해 가면서 서방 주인들이 소설에 대해 간략하고 공리적인 감상평과 주석을 해나갈 때 리줘우는 그 혜안과 탁견으로 소설평점에 새로운 피를 주입했다. 그는 먼저 그 자신의 광기 어린 오만(狂傲)한 성격과 정감의 핵심을 소설평점에 융합시켜 소설평점이 개체의 창조성을 띤 비평 활동이 되게 했다. 리줘우는 명 중엽의 중요한 사상가로 그의 이단적인 사상에는 농후한 사상 해방과 인문주의적 색채가 담겨 있는데, 명 중후기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므로 그는 한 명의 사상가의 신분으로 소설을 돌아본 것이기에, 기교라는 차원에서 소설을 주목한 게 아니라 높은 건물에서 병에 든 물을 쏟아 붓듯 [기왕의 평점가들과는 차원이 다른] 감상 평을 하고, 그 전체적인 사상의 하나로 통일된 지도 하에 소설에 대해 의미를 중시하고 주체를 중시한 비평을 한 것이다. 리줘우의 소설평점사에 대한 영향은 심원한 것이어서, ‘문인형’의 소설평점은 그에게서 비롯되어 소설평점사에 연면히 이어오다 사상과 주체의 특성이 풍부한 평점 계열을 이루게 되었다.
‘문인형’ 소설평점의 근본적인 특성은 평점자의 주체 의식을 강화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소설평점은 소설의 함의를 드러내는 동시에 소설에 규정되어 있는 상황을 통해 자신의 정감과 사상, 그리고 현실에 대한 감개와 정치 이상을 풀어내는 것을 중시했다. 이런 근본적인 특성에 바탕해 ‘문인형’의 소설평점은 몇 가지 분명한 특징을 만들어냈다.
우선 문인형 소설평점이 막 시작되었을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설평점을 자기 자신의 오락 활동으로 여겼는데, 이후에 자기 오락적인 성분은 점차 감소했지만, 평점으로 개인의 감정을 서사(抒寫)하는 것이 점점 더 문인형 평점의 주류가 되었다.
소설평점을 공리적인 목적을 띠지 않는 자기 오락적 활동으로 본 것이 문인들이 소설을 읽으면서 감상평을 쓰게 된 최초의 동기다. 리줘우가 그랬다. 그의 소설평점은 소설을 읽는 가운데 생각나는 대로 “비말(批抹)”한 것이다. 《분서》 6권 중에서 리줘우는 <독서락(讀書樂)>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소설을 읽으며 감상평을 쓰는 행위의 특색을 다음과 같이 개괄했다.
하늘이 룽후(龍湖)를 만드사 줘우를 기다리셨네. 하늘이 줘우를 낳으사 룽후가 존재하는구나. 룽후에 줘우 있으니 그 즐거움 어떠한가? 사시사철 책만 읽을 뿐 그 밖의 일은 모르는구나. 독서란 무엇인가? 나를 많이 만나는 기회. 오롯이 마음과 만나서 혼자 웃고 노래하네. 노래하길 그치지 않다 연이어 부르짖기도 하지. 통곡하고 울부짖다 눈물범벅이 되기도 하지. 노래함에 이유가 없질 않으니, 책 속에 사람이 있어서이네. 나는 그 사람을 보지만 사실은 내 마음을 얻는 것이라.……(天生龍湖, 以待卓吾. 天生卓吾, 乃在龍湖. 龍湖卓吾, 其樂何如? 四時讀書, 不知其余. 讀書伊何? 會我者多. 一與心會, 自笑自歌. 歌吟不已, 継以呼呵. 勁哭呼呵, 涕泅謗沱. 歌匪无因, 書中有人. 我觀其人. 實獲我心.⋯⋯)
<기경우서(寄京友書)>의 한 문장 속에서 리줘우는 또 “대저 나의 저서는 모두가 내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 쓴 것으로, 남을 위해 짓지는 않았습니다.(大凡我書皆爲求以快樂自己, 非爲人也.)”[리줘우, <기경우서(寄京友書)>, 《분서(焚書)》 2권]라고 하였다. 리줘우의 소설평점은 이런 열독 감상평과 서로 일치하는데, 그가 추구했던 것은 바로 “오롯이 마음과 만나서 혼자 웃고 노래하네. 노래하길 그치지 않다 연이어 부르짖기도 하”는 경계로, 작품에 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내심의 정신적 쾌락과 위로를 구하기 위한 것이고, 이러한 정신적 쾌락과 위안은 마음 속에 울결되어 있는 정감과 사상을 직접 풀어내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리줘우 평본의 진위를 가려내기는 어렵지만, ‘룽위탕(容與堂) 본’ <비평《수호》술어>에서는 “나의 심사는 시의에 들어맞지 않았으나, 《수호전》만은 나의 분노를 풀어내기에 족했으므로, 특히 상세하게 평했다(和尙一肚皮不合時宜, 而獨《水滸傳》足以發抒其憤慈, 故評之爲尤詳)”고 말했고, 또 “내가 평한 《수호전》에 의하면, 세상을 조롱하는 사가 열 일곱이요, 세상을 지지하는 말이 열 셋이다. 그러나 세상을 조롱한 곳에도 세상을 지지하는 마음이 있지만, 실없는 소리에서 나온 것일 따름이다(据和尙所評《水滸傳》, 玩世之詞十七, 持世之語十三, 然玩世處亦俱持世心腸也, 但以戲言出之耳)”라고 말했다. 이것들은 모두 리줘우 평점의 정신적 실질을 반영하고 있다. 소설평점사에서 이런 평점 정신이 끼친 영향은 심원한데, 특히 진성탄과 장주포 등 평점 대가들의 몸에 더욱 깊은 낙인을 찍어 놓았다. 건륭 연간의 저우양(周昻)은 진성탄의 《서상기》 평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술했다.
나 역시도 성탄이 어느 해 어느 달에 이 책의 비(批)에 착수해 후대 사람에게 남겨주려고 했는지 모른다. 어느 날 아침 거침없이 써내려 가 붓놀림을 멈추지 않았으니, 실사(實寫) 한 번에 공사(空寫) 한 번이라. 실사라는 것은 《서상기》의 일이면 《서상기》의 말로 권점과 평주를 하니, 눈 속의 동자와 같고 뺨 위의 터럭과 같이 생생한 것이다. 공사라는 것은 자기의 필묵으로 자기의 심령을 묘사하고 자기의 의론을 펴나간 것으로, 《서상기》의 정절을 들어 그것을 채우고, 《서상기》의 문장으로 그것을 증명한 것이다.(吾亦不知聖嘆于何年何月發愿動手批此一書, 留贈後人. 一旦洋洋灑灑, 下筆不休, 實寫一番, 空寫一番. 實寫者, 《西廂》事卽《西廂》語, 點之注之, 如眼中睛, 如頰上毫. 空寫者, 將自己筆墨, 寫自己心靈, 抒自己議論, 而擧《西廂》情節以實之, 《西廂》文字以證之.)[<《관화당제육재자서서상기》후후(<《貫華堂第六才子書西廂記》後候)> 총비지비(總批之批), 《차의각증정김비서상(此宜閣增訂金批西廂)》]
저우양이 “실사 한번”, “공사 한번”이라는 말로 진성탄의 《서상기》 평점을 개괄한 것은 자못 식견이 있는 것이다. 사실 “자신의 심령을 묘사하고, 자기의 의론을 풀어내는” 특색은 《수호전》 평점 중에 더욱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다. 첫째, 《수호전》 평점은 진성탄의 초기작으로, 개체의 감정이 비교적 풍부하고, 광기와 오만(狂傲)의 개성 역시 비교적 현저하기에 그의 평점은 곳곳에서 급하게 표현하고자 한 주체적 특성이 드러나 있다. 《서상기》 평점은 상대적으로 비교적 평화롭고 은인자중하고 있다. 둘째, 《수호전》의 정감의 함의는 명말의 사회 상황 및 진성탄의 당시의 사상 정감과 더욱 맞아떨어졌기에, 진성탄은 《수호전》에 규정되어 있는 상황을 빌어 자신의 현실에 대한 감개를 풀 수 있었다. 장주포가 《금병매》를 평점한 것 역시 그러하다. 그는 우선 《금병매》의 창작이 “작자가 불행해 그 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것을 토해낼 수도 삼켜버릴 수도 없고, 아둥바둥해도 소용없고 비탄에 빠져 울부짖어도 무익하매, 이것을 빌어 스스로 풀어낸 것이라(作者不幸, 身遭其難, 吐之不能, 呑之不可, 搔抓不得, 悲號無益, 借此以自泄.)”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래서 그 평점 역시 “빈곤과 슬픔으로 마음이 짓눌리고 염량세태에 부대껴(窮愁所逼, 炎脈所激)”, 평점을 빌어 “답답한 소회를 풀고(排遣悶懷)” 감정을 배설했던 것이다[<주포 한화(竹坡閑話)>]. 이런 식으로 평점을 빌어 개인의 감정을 배설하는 행위야말로 문인형 소설평점의 중요한 특색이고, 소설평점이 시종일관 문인들의 시선을 끌어 들였던 중요한 원인이다. 이러한 배설적인 성격과 일치하게 문인형 소설평점에는 사회와 도덕, 그리고 역사에 대한 평론과 비판 및 정치 이상의 선전으로 가득했다. 총괄하자면 그들은 소설을 빌어 그들이 사상과 정감을 표현하는 창구로 삼았다. 근대의 소설평점 중에서 이러한 특색은 극에 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소설평본들 속에서 평점은 이미 그들이 정치 이상을 선전하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옌난상성(燕南尙生)이 광서 34년(1908년)에 내놓은 《신평수호전(新評水滸傳)》이다. 이 해는 청나라 조정이 9년 입헌을 선포한 기간으로 옌난상성은 그의 평점 속에서 이런 정치 주제를 대량으로 쏟아냈는데, 심지어 멋대로 날조하기까지 했다. 이제 그가 《수호전》의 인물에 대한 ‘이름 풀이(釋名)’를 몇 가지 보기로 하자.
쑹쟝: 쑹은 송 왕조의 쑹이고 쟝은 강산의 강이다. 공은 사적인 것의 반대이고 명은 어둠의 반면이다. 송 왕조의 사적을 기록했기에 쑹쟝을 주인공으로 갖다 쓴 것이니 스나이안(施耐庵)이 급진파의 일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견을 깨뜨리고 공리를 드러내 밝혀 암흑의 지옥에서 백성들을 구해내고 사람들을 문명 세계로 교화해 입헌군주국을 세우고자 했다.(宋江: 宋是宋朝的宋, 江是江山的江.公是私的對頭, 明是暗的反面.紀宋朝的事偏要拿宋江作主人公, 可見耐庵不是急進派一流人物.不過要破除私見, 發明公理, 從黑暗地獄里救出百姓來, 敎人們在文明世界上, 立一個立憲君主國.)
스진: 스는 《사기》를 의미하고 진은 진화를 의미한다.……헌정국가를 세우면 중국의 역사는 자연스럽게 문명으로 나아가게 된다.(史進: 史是史記的意思, 進是進化的意思.⋯⋯鑄成一個憲政國家, 中國的歷史, 自然就進于文明了.)
차이진: 차이는 우리들을 의미하는 단어 ‘오제(吾儕)’의 ‘제(儕)이고 진은 ’진취‘적이라 할 때의 ’진‘이다. 차이진을 후주 세종의 후손으로 꾸며낸 것은 우리가 이러한 계급에 따라 나아갈 때에만 황제의 자손으로서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柴進: 柴是吾儕的儕, 進是進取的進.柴進捏成周世宗的後代, 犹言吾儕沿着這個階級進取, 才不愧是黃帝的兒孫.[아잉(阿英) 《청말문학총초․소설희곡연구권(晩淸文學叢鈔․小說戲曲硏究卷)》]
이상의 이른바 ‘이름 풀이(釋名)’는 그 억지스럽게 날조한 의미야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평점자가 이것을 그의 정치 이상의 선전으로 삼았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현상은 문인 소설평점의 일관성을 체현하고 있는 동시에 근대소설과 소설 비평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문인형 소설평점은 그 정감과 사상을 표현해내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기에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에 있어 ‘석의(釋義)’가 그들의 평점의 주요한 내용이 된다. 진성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호전》에서 서술하고 있는 108 명의 경우 그 사람들은 녹림 출신에 불과하고, 그들의 사적 역시 사람을 겁탈하고 죽인 것에 불과해 예의에서 벗어나고 이성을 잃은지라 진정 교훈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홀로 그들의 외형의 자취를 살펴보고 그 안에 담긴 신묘한 이치를 펼쳐내고자 한다. 대개 이 소설은 70회에 수십만 단어에 이르러 [그 분량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그 신묘한 이치를 펼쳐보이자면, 바로 《논어》의 한 두 구절과 같아 급히 흐르는 물처럼 맑고, 깊은 물처럼 밝으며, 드높은 하늘처럼 가볍고, 말끔히 씻어내리는 듯 새롭다. 이 어찌 《장자》나 《사기》와 같은 부류가 아니겠는가?(《水滸》所叙, 叙一百八人, 其人不出綠林, 其事不出劫殺, 失敎喪心, 誠不可訓. 然而吾欲獨略其形迹, 伸其神理者. 蓋此書七十回數十万言, 可謂多矣, 而擧其神理, 正如《論語》之一節兩節, 瀏然以淸, 湛然以明, 軒然以輕, 灌然以新, 彼豈非《莊子》․《史記》之流哉.) [<제오재자서수호전(第五才子書水滸傳)》 <서삼(序三)>]
여기서 진성탄은 소설 작품 속의 ‘외형의 자취(形迹)’과 ‘신묘한 이치(神理)’의 차이를 구분했다. 이른바 ‘외형의 자취(形迹)’는 소설 작품의 외재적인 정절의 틀거리이고, 이른바 ‘신묘한 이치(神理)’는 작품의 정절 속 심층에 감추어져 있는 ‘의(義)’를 가리킨다. 진성탄이 ‘신묘한 이치’의 탐구에 중점을 둔 것은 소설평점의 ‘석의성’을 강조한 것이다. 진성탄이 이러한 평점 관념을 내놓은 것은 그의 소설 창작의 주체성에 대한 인식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수호전》 평점 속에서 그는 ‘문(文)’과 ‘사(史)’를 구별했다. 진성탄은 “대저 사서를 편찬하는 것은 국가적인 차원의 일이고, 붓을 놀려 문장을 쓰는 것은 문인의 일(夫修史者, 國家之事也, 下筆者, 文人之事也)”이며, “국가적인 차원의 일은 사건의 서술에 그칠 따름이고, 문장은 힘써 할 일이 아니(國家之事, 止于叙事而已, 文非其所務也)”라고 여겼다. 문인이 하는 일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진정 사건의 서술에 그쳐서는 안되고(固當不止叙事而已)” 마땅히 “마음을 날실로 삼고, 손을 씨줄로 삼아 주저하며 변화하는 가운데 힘써 절세의 기이한 문장을 엮어 이루어내야 하는 것(心以爲經, 手以爲緯, 躊躇變化, 務撰而成絶世之奇文)”이다. 곧 ‘사건(事)’의 기초 위에 창작 주체의 ‘지(志)’의 함의를 융합시킬 수 있는 것인데, 이를테면, 《사기》에서 “쓰마쳰이 전하는 보이(伯夷)는 그 사적은 보이나, 그 뜻은 반드시 보이일 필요가 없는 것(馬遷之傳伯夷也, 其事伯夷也, 其志不必伯夷也)”이다. 그렇다면 “뜻은 어디에 있는가? 문장이 바로 그것이다(惡乎志? 文是也)” 바꾸어 말하자면, 문장이 곧 뜻(志)이다. 그래서 주체의 창작으로서 ‘문’은 반드시 심각한 주체성이 있어야 하고, 그런 까닭에 소설평점 역시 ‘사건(事)’에 대한 해석일 뿐만 아니라 주체의 특성을 체현하는 ‘뜻(志)’의 천명이어야 하는 것이다. 다음 문장은 진성탄의 이러한 비평적 주장을 대표한다.
“내가 특히 슬퍼한 것은 독자의 정신이 일어나지 않아 작자의 뜻을 다 펼쳐내지 못하고 그 마음의 고통을 모르는 것인데, 실제로는 훌륭한 기교를 부린 것이었기에 나의 불민함을 사양치 않고 이렇게 비(批)한 것이다.(吾特悲讀者之精神不生, 將作者之意思盡設, 不知心苦, 實負良工, 故不辭不敏而有此批也.)”[진성탄 평 《수호전》 권지오(卷之五) <설자(楔子)>]
진성탄의 이런 주장은 문인형 소설평점 가운데 일정한 대표성을 띠고 있다. 그래서 이른바 ‘석의’ 역시 문인형 소설평점의 중요한 내용이고, 특히 소설사상의 몇몇 중요한 작품들은 그들이 흥미진진하게 논하고 반복적으로 해석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명청대의 소설평점사에서 《수호전》과 《금병매》, 《서유기》, 《삼국연의》, 《홍루몽》은 평점자들로부터 가장 주목을 받았던 소설 작품들이다. 특히 문인 평점은 작품에 대한 그들의 선택이 그들의 정감의 수요와 밀접하게 연관이 있었기에, 이런 류의 풍부한 내용과 심각한 사상을 담고 있는 작품들이 평점의 주요 대상이 되었고, 각자의 정감의 수요에 근거해 작품이 표현하고 있는 함의를 해석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수호전》의 경우 리줘우(李卓吾)는 ‘충의’를 근거로 ‘수호’의 영웅들을 찬미하는 동시에 《수호전》이 작자의 ‘발분지작(發憤之作)’이라 여겨, “분노를 풀어낸 이는 누구인가? 전날에 수호에 울부짖으며 모여들었던 강도들이다(泄憤者誰乎? 則前日嘯聚水滸之强人也)”라고 말했다. 그가 보기에 ‘충의’라고 하는 것은 수호에서는 좋은 일이 아니었기에, 그는 ‘충의’가 조정에 있고 군주의 곁에 있어 당시의 조금 똑똑한 자가 사람들을 부리고(小賢役人) 대단히 현명한 자가 남에게 부림을 당하는(大賢役于人) 상황을 바꿀 수 있기를 바랐다[리줘우, <충의수호전서(忠義水滸傳序)>, 《분서》 3권]
이런 관점의 영향은 매우 컸다. 진성탄 평점 《수호전》은 리줘우의 ‘발분지작’의 사상 전통을 계승했는데, 리줘우가 ‘충의’로 ‘수호’의 영웅들을 용납한 것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했다. 그래서 ‘수호’라는 단어에 대한 이름 풀이에서 《수호전》을 요참하고 ‘악몽에 깨어나다(驚惡夢)’라고 하는 한 절을 멋대로 증보한 것까지 진성탄은 이성적인 측면에서 세상을 어지럽히고 분란을 일으킨 데 대해 불만을 표출했다. 그 구체적인 평점에서 우리는 진성탄 사상 가운데 두 가지 측면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명말 사회의 암흑에 대한 강렬한 분개와 반란의 기치를 내건 자들이 여기 저기서 일어나는 현실에 대한 깊은 우려다. 이런 사상은 이미 명말의 독특한 사회 현실을 반영하고 있으며, 또 영달하지 못한 문인이 고요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희구하는 특수한 심리 상태를 절실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사상에 바탕해 진성탄은 《수호전》이 표현하고 있는 함의에 대해 새로운 ‘석의’를 하고 있다. 그는 ‘반란은 위에서부터 일어난다(亂自上作)’고 주장해 작품이 갖고 있는 사회 현실에 대한 강렬한 비판성을 드러냈으며, 아울러 수호 영웅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어 량산보에 올랐다(逼上梁山)’는 논리로 깊은 동정과 이해를 표명했다. 하지만 동시에 ‘악몽에 놀라 깨어나다(驚惡夢)’라는 절을 멋대로 증보함으로써 이러한 행위의 현실적인 합리성을 부정했다. 그래서 《수호전》의 평점에서 진성탄은 깊은 모순에 빠지게 되는데, 현실에 대한 그의 불만은 수호 영웅에 대해 찬미의 말을 아끼지 않게 했고, 명말의 분란에 빠진 사회 현실은 또 그가 심리적으로 이런 행위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든 것이다. 이에 그 구체적인 평점 속에서 우리는 자못 흥미로운 모순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반란 행위에 대한 전체적인 부정과 개별적인 영웅들에 대한 적극적인 찬미다. 이것은 진성탄이 시대의 상황과 개인의 심리라고 하는 이중의 제약 속에서 그것을 뛰어넘을 수 없어 발생한 모순이다. 그렇기에 그의 ‘석의’ 역시 독특한 시대와 개인의 성질을 체현하고 있는 것이다.
마오 씨 부자가 《삼국연의》를 평점한 것 역시 그러하다. 촉과 위나라의 관계상 그들은 천서우(陳壽)와 쓰마광(司馬光)이 차오차오(曹操)의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은 것을 비판하고 주시(朱熹)의 《통감강목》이 촉한을 정통으로 떠받들었던 관점을 긍정했다. 이러한 취사선택은 명확하게 청초의 한족 지식인들이 명나라를 위해 정통성을 다투었던 현실적인 함의를 반영한 것이다. 청대 이후에는 《서유기》와 《홍루몽》에 대한 석의가 한 바탕 뜨거운 쟁점이 되었는데, 건륭과 가경 시기의 류이밍(劉一明)은 《서유기》의 여러 평점가들을 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샹쉬는] 멋대로 의론하고 사사롭게 의심하여 단지 한 쪽 반의 [적은] 분량만을 취해 마음가는 대로 전서의 대지를 다하였다.……그것에 이어서 혹은 ‘완공(頑空)’으로 보거나, 혹은 ‘집상(執相)’을 가리킨다 하고, 혹은 ‘규단(閨丹)’이라 의심하거나, 혹은 ‘채보(采補)’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 모든 것들이 각각 그 자신의 설을 내어 마음에 의지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니, 그 기괴함이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汪象旭]妄議私猜, 僅取一葉半簡, 以心猿意馬畢其全旨, ……繼此, 或目以頑空, 或指爲執相, 或疑爲閨丹, 或猜爲采補. 千枝百葉, 各出其說, 憑心自造, 奇奇怪怪, 不可枚擧.)
바로 이런 배경 하에 류이밍은 “우둔함을 헤아리지 않고(不揣愚魯)”, “재삼 퇴고하고 세밀하게 해석하여(再三推敲, 細微解釋)” 석의를 더했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 그 석의가 “사물 발전의 기원과 결과를 탐구한 것이 일목요연하며(原始要終, 一目了然)”, 《서유기》의 요지는 “세 가지 종교가 하나의 이치로, 본성과 명운을 동시에 닦는 도(三敎一家之理, 性命雙修之道)”라고 과장했다. 그는 심지어 “문장이 뛰어나고 졸렬하고는 내가 알 바가 아니(至于文墨之工拙, 則非予之所計也)”라고까지 선언했다[류이밍, <서유원지서(西遊原旨序)>].
《홍루몽》에 대한 석의는 건륭 이후에 쏟아져 나왔는데, 고거(考據)와 색인(索引)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도광 연간의 왕시롄(王希廉), 장신즈(張新之) 두 사람은 특히 “[작품의] 함의의 소재를 드러내 밝히는 것(括出命意所在)”[위안후웨츠쯔(鴛湖月痴子), <먀오푸쉬안 평 석두기 서(妙復軒評石頭記序)>]을 임무로 삼아 평점자의 주관적인 추단과 연역에 근거해 《홍루몽》을 성리(性理)를 부연해 설명하는 권선징악의 작품으로 해석했다. 《서유기》와 《홍루몽》의 석의는 평점자의 주관적인 바람에 의거해 해당 작품들을 ‘유희’나 ‘음탕함을 가르치는 것(誨淫)’으로 보는 사회적인 편견을 깨기 위한 것이었다. 다만 이런 석의는 작품의 실제 함의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석의는 문인 평점소설의 주요한 내용이고, 문인이 소설평점에 종사하는 기본적인 목적이다. 석의는 일종의 문화 현상으로 고대의 문화 연원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유가의 경전에 대한 주석에 뿌리를 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경전의 원래 의미가 어느 한 시대의 수요에 부합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견강부회하거나 심지어 고서를 멋대로 고쳐 경전을 당시의 특수한 수요에 들어맞게 했다. 이런 류의 예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 송대의 유학자들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피시루이(皮錫瑞)는 “송대 유학자들은 [전대 사람들이나 혹은 성현의 글을 읽으면서 그 속에 담겨있는] 의미[글 속의 뉘앙스]를 이해하는 능력은 그 이전 [한대(漢代)와 당대(唐代)] 사람들보다 낫지만, 엄연히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바꾸거나 어지럽게 한 것 등을 배워서는 안 될 것이다.(宋儒體會語氣勝于前人, 而變亂事實不可爲訓)” 이런 행위는 실용성을 근본으로 하고 있지만, 어느 정도는 경전의 국부적인 가치를 “자극해 살려냄으로써(激活)” 당대의 수요에 들어맞게 할 수 있다. 동시에 이것은 일종의 세계적인 행위이기도 해 고대 중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수전 손택(Susan Sontag, 1933~2004년)은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해석은 과학적 계몽주의의 ‘사실주의적’ 세계관이 신화가 지녔던 권능과 신화에 대한 믿음을 깨부숴버린 고대의 후기 고전주의 문화에서 처음 나타난다. 신화 이후 시대의 의식에 이 의문-종교적 상징의 고상함에 대한 의문-이 들어서자, 더 이상 옛 형식 그대로 옛 텍스트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됐다. 그러자 옛 텍스트를 ‘현대적’ 요구에 일치시키기 위해 해석이 필요하게 됐다.……인간의 의식을 역사적으로 바라보는 관점 안에서, 해석 자체도 분명히 평가를 받아야 한다. 어떤 문화적 맥락으로 보면 해석은 해방 행위다. 거기서 해석은 수정하고 재평가하는, 죽은 과거를 탈출하는 수단이다. 다른 문화적 맥락에서 보면, 이는 반동적이고 뻔뻔스럽고 비열하고 숨통을 조이는 훼방이다.
소설평점 중의 석의의 출현과 변이(變異)는 상술한 관점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평점의 정감 표현을 추구하고 석의에 중점을 두는 것은 사실상 문인형 소설평점들 모두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측면이다. 그것은 석의가 평점자의 정감 수요를 귀착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명청대 소설평점사에서는 문인형 평점이라는 하나의 노선이 나타났으니, 특히 문인형 평점은 석의를 그 으뜸가는 임무로 삼아 소설평점에 이론적인 심도와 사상적인 역량을 더해주었다. 중국의 고대 문화사상사에서 속문학은 어느 정도 전체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를테면 희곡과 예술 가운데 보이는, 전통적인 윤리 사상에 대한 애정관이나, 전통적인 의리 관념에 대한 가치관, 그리고 농민 반란에 대한 인식이나 역사 진화에 대한 사고 등은 모두 독창적인 사상적 가치를 갖고 있다. 이런 일련의 사상은 비록 전통 문화에서는 주류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지 않았지만, 오히려 심원한 의의를 갖고 있는 사상 체계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소설평점은 석의를 임무로 삼았는데, 그 가운데 사상적으로는 다 일치하지 않지만, 몇몇 뛰어난 평점 작품들은 오히려 속문학에 담겨 있는 이런 사상적 의의를 심각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서로 표리를 이루는 가운데 그것을 크게 빛냈다.
문인형 소설평점은 한 가지 생각, 하나의 유형으로 표현되는데, 개별적인 평점본으로 말하자면, 정감과 석의만을 토로한 평점본은 극히 드물게 보인다. 소설평점사에서 비교적 전형적인 ‘문인형’ 평점은 리줘우의 《수호전》 평점과 왕단이(汪憺漪), 류이밍(劉一明), 천스빈(陳士斌), 장수선(張書紳) 등의 《서유기》 평점, 장신즈(張新之), 왕시롄(王希廉) 등의 《홍루몽》 평점과 청말 량치차오(梁啓超), 옌난상성(燕南尙生) 등의 소설평점이다. 그리고 이에 그치지 않고 수많은 평점들, 이를테면 진성탄, 마오 씨 부자, 장주포 등의 소설평점이 모두 그러했다. 따라서 이상의 분석은 하나의 현상, 한 가지 생각만을 드러내 보여줄 따름이다.
중국 고대소설 평점 간론 – 소설평점의 유형 2
2) 문인 형(文人型): 소설평점의 주체성
‘문인’이라는 단어는 그 함의가 경계를 규정하기 어려운데, 중국 고대에는 그 상황이 더욱 복잡하다. 중국 고대에는 직업적인 문학가가 비교적 적었고, 문학 창작으로 생계를 이어간 작가는 더욱 적었다. 그래서 이른바 문학 창작은 정사를 돌보는 여유 시간에 회포를 풀고 자신의 뜻을 서술하거나 생계 이외의 영역에서 오락의 차원에서 소일거리 삼아 했던 것이다. 송원 이래로 속문학이 일어남에 따라 문학의 상품화가 점차 대두되어 송원 시기 구란(勾欄)을 위해 전문적으로 극본을 엮어내는 ‘서회재인(書會才人)’과 같은 직업적인 창작자들이 출현했다. 명 중엽 이후에는 통속소설이 흥성함에 따라 직업적인 소설가가 먼저 서방 주인의 주변에서 형성되었고, 명말청초에는 하층 문인민들이 주체가 된 전업적인 창작 계층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속문학의 흥기는 고대 문학 창작 계층의 분화를 촉진했고, 아울러 창작 계층은 날로 다양화되고 직업화로 나아갔다. 당연하게도 진정으로 직업화된 작가는 근대 문화의 산물로 근대의 신문과 잡지, 그리고 인쇄업의 발전에 따라 점차 정형화되어 갔다. 고대의 문학 비평가의 상황 역시 대체로 이와 같았으니, 다양화된 비평가 계층 역시 속문학이 발전한 뒤에야 나타나기 시작했다.
통속소설의 문인 평점은 명대에 그 기원을 두었는데, 리줘우(李卓吾)가 그 선구가 된다. 리줘우에서 진성탄(金聖嘆)에 이르기까지 문인 평점은 눈부신 역사를 거치게 된다. 이것은 명대 소설평점이 서방의 통제에서 벗어나 사상적 가치가 가장 풍부했던 일련의 평점 계열로, 사람의 숫자는 많지 않지만, 영향력은 매우 커서 청대 통속소설의 문인 평점의 개조가 되었다.
문인이 평점한 통속소설은 처음에는 흥취에서 출발했다. 리줘우는 “《수호전》의 비점도 사람을 무척 상쾌하게 만들지만, 《서상기》와 《비파기》의 가필과 수정 작업은 더한층 오묘합니다(《水滸傳》批點得甚快活人, 《西廂》, 《琵琶》涂抹改竄得更妙.)”[리줘우, 《속분서(續焚書)》 1권 <여초약후(與焦弱侯)>]라고 말했으며, 또 “《파선집》은 내가 직접 교정을 보고 주석을 단 책입니다. 매번 열어볼 때마다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니, 나에게는 마음을 상쾌하게 하고 병을 물리쳐주는 종류의 책이라 하겠습니다.(《坡仙集》我有披削旁注在內, 每開卷便自歡喜, 是我一件快心却疾之事.)”[리줘우, <기경우서(寄京友書)>, 《분서(焚書)》 2권]라 하였다. 이것으로 통쾌함을 추구하고 흥취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 리줘우 평점 문학의 기본적인 특색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진성탄이 소설을 비점한 것 역시 우선은 《수호전》에 대한 강렬한 흥미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수호전》을 재자지서(才子之書)로 보았기에 재자의 마음으로 그것을 읽고 비했다. 청대에 들어선 뒤에는 문인들 사이에서 통속소설의 지위가 날로 높아져서, 문인들이 통속소설을 읽는 일이 이미 통상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위로는 왕공 귀족이나 고관대작으로부터 아래로는 낙제수재(落第秀才)나 민간의 문인에 이르기까지 통속소설은 이미 서안(書案)에 올리는 상비(常備)의 책이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은 문인들의 소설에 대한 평점을 자극했다. 청대에 문인들이 끊임없이 소설을 평점했던 현상은 바로 이렇듯 소설을 열독했던 환경을 근거로 한 것이다. 근대에는 문인들이 소설을 창작하는 것보다 소설을 평점하는 것을 더 즐거운 일로 여겼다. 멍성(夢生)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설을 짓느니 소설을 평하겠다. 대저 작자로서의 나는 얼마나 많은 계획과 기획을 기울였는지 모르지만, 결국은 나보다 앞선 사람이 지은 것만 못하니, 차라리 앞선 사람이 계획하고 기획한 것을 가지고 내 멋대로 평을 하고 나에게 평을 하라고 시키면 좋겠다. 그러면 온몸이 통쾌해서 책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일텐데……평범한 소설을 평하느니 가장 훌륭하고 가장 아름다운 소설을 평하겠다. 평범한 소설을 평하려면 다소간의 생각을 쏟아야 하고 온몸이 불쾌한 것을 느끼게 되어 가장 훌륭하고 가장 아름다운 소설을 평하다가 모든 게 들어맞아 나도 모르게 손과 발을 움직여 춤을 추는 것만 못하다.(與其作小說, 不如評小說. 蓋以我之作者, 不知費幾許經營籌劃, 尙遠不能如前人所作, 不如擧前人所經營籌畵成就者, 而由我評之, 使我評而佳, 則通身快活, 當與作書相等.⋯⋯與其評尋常小說, 不如評最佳最美之小說, 蓋評尋常小說, 旣需我多少思量, 且感得一身不快, 不如評最美最佳之小說, 頭頭是道, 不覺舞之蹈之.)[멍성, <소설총화(小說叢話)>, 1914년 《아언(雅言)》 제1권 제7기]
소설평점사에서 이렇게 독서의 흥취를 평점의 기초로 삼은 문인 평점자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특히 소설사상 우수한 작품에 대한 평점은 더욱 그러하다. 이런 평점들은 대부분 소설평점의 상업적 전파성을 내던져 버렸기에, 소설평점에서 이론과 사상적 가치가 가장 풍부하다.
소설평점에 문인이 대량으로 뛰어듦으로 해서 소설평점 계층의 사회적인 수준이 명백하게 제고되었다. 만약 명대의 소설평점이 ‘명사’들에 탁명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 문인 평점은 개별적인 진실성은 제외하고도 대부분 허구성이 농후했다고 말한다면, 청대의 문인 평점은 상대적으로 실제적이다. 《요재지이》를 평한 왕스전(王士禎), 《여선외사》를 평한 훙성(洪昇) 그밖에도 두쥔(杜濬), 자지쭤(査繼佐), 황저우싱(黃周星) 등과 같은 문학계의 명사나 쟝시(江西) 염사(廉使)였던 류팅지(劉廷璣), 쟝시 난안(南安) 군수 천이시(陳奕禧), 광저우 태수로 《여선외사》를 평한 예난톈(葉南田), 감찰어사 쉬바오산(許寶善)과 같이 관직에 있으면서 문학을 했던 인사들은 모두 당대에 일정한 영향력이 있었던 인물들이었다. 이렇게 문인들이 소설평점에 종사한 것은 소설의 지위 제고와 소설의 영향력 확대에 중요한 작용을 했다. 동시에 명대와는 비교되는 것이 청대의 소설가들의 사회적인 수준 역시 이에 상응하게 제고되었다는 사실이다. 문인들이 독창적으로 작품을 엮고 창작해내는 방식과 문인적인 품위를 갖춘 소설 작품들 역시 점차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소설평점자의 문인화는 이러한 창작 현상과 서로 맞물려 이로부터 소설 예술의 발전을 공동으로 추진해나갔다.
‘문인형’ 소설평점은 소설평점사에서 뿌리깊은 근원을 갖고 있다. 리줘우는 소설평점 중 문인 평점의 초기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소설평점이 서방 주인의 통제 하에 완만하게 전진해 가면서 서방 주인들이 소설에 대해 간략하고 공리적인 감상평과 주석을 해나갈 때 리줘우는 그 혜안과 탁견으로 소설평점에 새로운 피를 주입했다. 그는 먼저 그 자신의 광기 어린 오만(狂傲)한 성격과 정감의 핵심을 소설평점에 융합시켜 소설평점이 개체의 창조성을 띤 비평 활동이 되게 했다. 리줘우는 명 중엽의 중요한 사상가로 그의 이단적인 사상에는 농후한 사상 해방과 인문주의적 색채가 담겨 있는데, 명 중후기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므로 그는 한 명의 사상가의 신분으로 소설을 돌아본 것이기에, 기교라는 차원에서 소설을 주목한 게 아니라 높은 건물에서 병에 든 물을 쏟아 붓듯 [기왕의 평점가들과는 차원이 다른] 감상 평을 하고, 그 전체적인 사상의 하나로 통일된 지도 하에 소설에 대해 의미를 중시하고 주체를 중시한 비평을 한 것이다. 리줘우의 소설평점사에 대한 영향은 심원한 것이어서, ‘문인형’의 소설평점은 그에게서 비롯되어 소설평점사에 연면히 이어오다 사상과 주체의 특성이 풍부한 평점 계열을 이루게 되었다.
‘문인형’ 소설평점의 근본적인 특성은 평점자의 주체 의식을 강화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소설평점은 소설의 함의를 드러내는 동시에 소설에 규정되어 있는 상황을 통해 자신의 정감과 사상, 그리고 현실에 대한 감개와 정치 이상을 풀어내는 것을 중시했다. 이런 근본적인 특성에 바탕해 ‘문인형’의 소설평점은 몇 가지 분명한 특징을 만들어냈다.
우선 문인형 소설평점이 막 시작되었을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설평점을 자기 자신의 오락 활동으로 여겼는데, 이후에 자기 오락적인 성분은 점차 감소했지만, 평점으로 개인의 감정을 서사(抒寫)하는 것이 점점 더 문인형 평점의 주류가 되었다.
소설평점을 공리적인 목적을 띠지 않는 자기 오락적 활동으로 본 것이 문인들이 소설을 읽으면서 감상평을 쓰게 된 최초의 동기다. 리줘우가 그랬다. 그의 소설평점은 소설을 읽는 가운데 생각나는 대로 “비말(批抹)”한 것이다. 《분서》 6권 중에서 리줘우는 <독서락(讀書樂)>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소설을 읽으며 감상평을 쓰는 행위의 특색을 다음과 같이 개괄했다.
하늘이 룽후(龍湖)를 만드사 줘우를 기다리셨네. 하늘이 줘우를 낳으사 룽후가 존재하는구나. 룽후에 줘우 있으니 그 즐거움 어떠한가? 사시사철 책만 읽을 뿐 그 밖의 일은 모르는구나. 독서란 무엇인가? 나를 많이 만나는 기회. 오롯이 마음과 만나서 혼자 웃고 노래하네. 노래하길 그치지 않다 연이어 부르짖기도 하지. 통곡하고 울부짖다 눈물범벅이 되기도 하지. 노래함에 이유가 없질 않으니, 책 속에 사람이 있어서이네. 나는 그 사람을 보지만 사실은 내 마음을 얻는 것이라.……(天生龍湖, 以待卓吾. 天生卓吾, 乃在龍湖. 龍湖卓吾, 其樂何如? 四時讀書, 不知其余. 讀書伊何? 會我者多. 一與心會, 自笑自歌. 歌吟不已, 継以呼呵. 勁哭呼呵, 涕泅謗沱. 歌匪无因, 書中有人. 我觀其人. 實獲我心.⋯⋯)
<기경우서(寄京友書)>의 한 문장 속에서 리줘우는 또 “대저 나의 저서는 모두가 내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 쓴 것으로, 남을 위해 짓지는 않았습니다.(大凡我書皆爲求以快樂自己, 非爲人也.)”[리줘우, <기경우서(寄京友書)>, 《분서(焚書)》 2권]라고 하였다. 리줘우의 소설평점은 이런 열독 감상평과 서로 일치하는데, 그가 추구했던 것은 바로 “오롯이 마음과 만나서 혼자 웃고 노래하네. 노래하길 그치지 않다 연이어 부르짖기도 하”는 경계로, 작품에 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내심의 정신적 쾌락과 위로를 구하기 위한 것이고, 이러한 정신적 쾌락과 위안은 마음 속에 울결되어 있는 정감과 사상을 직접 풀어내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리줘우 평본의 진위를 가려내기는 어렵지만, ‘룽위탕(容與堂) 본’ <비평《수호》술어>에서는 “나의 심사는 시의에 들어맞지 않았으나, 《수호전》만은 나의 분노를 풀어내기에 족했으므로, 특히 상세하게 평했다(和尙一肚皮不合時宜, 而獨《水滸傳》足以發抒其憤慈, 故評之爲尤詳)”고 말했고, 또 “내가 평한 《수호전》에 의하면, 세상을 조롱하는 사가 열 일곱이요, 세상을 지지하는 말이 열 셋이다. 그러나 세상을 조롱한 곳에도 세상을 지지하는 마음이 있지만, 실없는 소리에서 나온 것일 따름이다(据和尙所評《水滸傳》, 玩世之詞十七, 持世之語十三, 然玩世處亦俱持世心腸也, 但以戲言出之耳)”라고 말했다. 이것들은 모두 리줘우 평점의 정신적 실질을 반영하고 있다. 소설평점사에서 이런 평점 정신이 끼친 영향은 심원한데, 특히 진성탄과 장주포 등 평점 대가들의 몸에 더욱 깊은 낙인을 찍어 놓았다. 건륭 연간의 저우양(周昻)은 진성탄의 《서상기》 평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술했다.
나 역시도 성탄이 어느 해 어느 달에 이 책의 비(批)에 착수해 후대 사람에게 남겨주려고 했는지 모른다. 어느 날 아침 거침없이 써내려 가 붓놀림을 멈추지 않았으니, 실사(實寫) 한 번에 공사(空寫) 한 번이라. 실사라는 것은 《서상기》의 일이면 《서상기》의 말로 권점과 평주를 하니, 눈 속의 동자와 같고 뺨 위의 터럭과 같이 생생한 것이다. 공사라는 것은 자기의 필묵으로 자기의 심령을 묘사하고 자기의 의론을 펴나간 것으로, 《서상기》의 정절을 들어 그것을 채우고, 《서상기》의 문장으로 그것을 증명한 것이다.(吾亦不知聖嘆于何年何月發愿動手批此一書, 留贈後人. 一旦洋洋灑灑, 下筆不休, 實寫一番, 空寫一番. 實寫者, 《西廂》事卽《西廂》語, 點之注之, 如眼中睛, 如頰上毫. 空寫者, 將自己筆墨, 寫自己心靈, 抒自己議論, 而擧《西廂》情節以實之, 《西廂》文字以證之.)[<《관화당제육재자서서상기》후후(<《貫華堂第六才子書西廂記》後候)> 총비지비(總批之批), 《차의각증정김비서상(此宜閣增訂金批西廂)》]
저우양이 “실사 한번”, “공사 한번”이라는 말로 진성탄의 《서상기》 평점을 개괄한 것은 자못 식견이 있는 것이다. 사실 “자신의 심령을 묘사하고, 자기의 의론을 풀어내는” 특색은 《수호전》 평점 중에 더욱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다. 첫째, 《수호전》 평점은 진성탄의 초기작으로, 개체의 감정이 비교적 풍부하고, 광기와 오만(狂傲)의 개성 역시 비교적 현저하기에 그의 평점은 곳곳에서 급하게 표현하고자 한 주체적 특성이 드러나 있다. 《서상기》 평점은 상대적으로 비교적 평화롭고 은인자중하고 있다. 둘째, 《수호전》의 정감의 함의는 명말의 사회 상황 및 진성탄의 당시의 사상 정감과 더욱 맞아떨어졌기에, 진성탄은 《수호전》에 규정되어 있는 상황을 빌어 자신의 현실에 대한 감개를 풀 수 있었다. 장주포가 《금병매》를 평점한 것 역시 그러하다. 그는 우선 《금병매》의 창작이 “작자가 불행해 그 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것을 토해낼 수도 삼켜버릴 수도 없고, 아둥바둥해도 소용없고 비탄에 빠져 울부짖어도 무익하매, 이것을 빌어 스스로 풀어낸 것이라(作者不幸, 身遭其難, 吐之不能, 呑之不可, 搔抓不得, 悲號無益, 借此以自泄.)”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래서 그 평점 역시 “빈곤과 슬픔으로 마음이 짓눌리고 염량세태에 부대껴(窮愁所逼, 炎脈所激)”, 평점을 빌어 “답답한 소회를 풀고(排遣悶懷)” 감정을 배설했던 것이다[<주포 한화(竹坡閑話)>]. 이런 식으로 평점을 빌어 개인의 감정을 배설하는 행위야말로 문인형 소설평점의 중요한 특색이고, 소설평점이 시종일관 문인들의 시선을 끌어 들였던 중요한 원인이다. 이러한 배설적인 성격과 일치하게 문인형 소설평점에는 사회와 도덕, 그리고 역사에 대한 평론과 비판 및 정치 이상의 선전으로 가득했다. 총괄하자면 그들은 소설을 빌어 그들이 사상과 정감을 표현하는 창구로 삼았다. 근대의 소설평점 중에서 이러한 특색은 극에 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소설평본들 속에서 평점은 이미 그들이 정치 이상을 선전하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옌난상성(燕南尙生)이 광서 34년(1908년)에 내놓은 《신평수호전(新評水滸傳)》이다. 이 해는 청나라 조정이 9년 입헌을 선포한 기간으로 옌난상성은 그의 평점 속에서 이런 정치 주제를 대량으로 쏟아냈는데, 심지어 멋대로 날조하기까지 했다. 이제 그가 《수호전》의 인물에 대한 ‘이름 풀이(釋名)’를 몇 가지 보기로 하자.
쑹쟝: 쑹은 송 왕조의 쑹이고 쟝은 강산의 강이다. 공은 사적인 것의 반대이고 명은 어둠의 반면이다. 송 왕조의 사적을 기록했기에 쑹쟝을 주인공으로 갖다 쓴 것이니 스나이안(施耐庵)이 급진파의 일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견을 깨뜨리고 공리를 드러내 밝혀 암흑의 지옥에서 백성들을 구해내고 사람들을 문명 세계로 교화해 입헌군주국을 세우고자 했다.(宋江: 宋是宋朝的宋, 江是江山的江.公是私的對頭, 明是暗的反面.紀宋朝的事偏要拿宋江作主人公, 可見耐庵不是急進派一流人物.不過要破除私見, 發明公理, 從黑暗地獄里救出百姓來, 敎人們在文明世界上, 立一個立憲君主國.)
스진: 스는 《사기》를 의미하고 진은 진화를 의미한다.……헌정국가를 세우면 중국의 역사는 자연스럽게 문명으로 나아가게 된다.(史進: 史是史記的意思, 進是進化的意思.⋯⋯鑄成一個憲政國家, 中國的歷史, 自然就進于文明了.)
차이진: 차이는 우리들을 의미하는 단어 ‘오제(吾儕)’의 ‘제(儕)이고 진은 ’진취‘적이라 할 때의 ’진‘이다. 차이진을 후주 세종의 후손으로 꾸며낸 것은 우리가 이러한 계급에 따라 나아갈 때에만 황제의 자손으로서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柴進: 柴是吾儕的儕, 進是進取的進.柴進捏成周世宗的後代, 犹言吾儕沿着這個階級進取, 才不愧是黃帝的兒孫.[아잉(阿英) 《청말문학총초․소설희곡연구권(晩淸文學叢鈔․小說戲曲硏究卷)》]
이상의 이른바 ‘이름 풀이(釋名)’는 그 억지스럽게 날조한 의미야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평점자가 이것을 그의 정치 이상의 선전으로 삼았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현상은 문인 소설평점의 일관성을 체현하고 있는 동시에 근대소설과 소설 비평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문인형 소설평점은 그 정감과 사상을 표현해내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기에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에 있어 ‘석의(釋義)’가 그들의 평점의 주요한 내용이 된다. 진성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호전》에서 서술하고 있는 108 명의 경우 그 사람들은 녹림 출신에 불과하고, 그들의 사적 역시 사람을 겁탈하고 죽인 것에 불과해 예의에서 벗어나고 이성을 잃은지라 진정 교훈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홀로 그들의 외형의 자취를 살펴보고 그 안에 담긴 신묘한 이치를 펼쳐내고자 한다. 대개 이 소설은 70회에 수십만 단어에 이르러 [그 분량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그 신묘한 이치를 펼쳐보이자면, 바로 《논어》의 한 두 구절과 같아 급히 흐르는 물처럼 맑고, 깊은 물처럼 밝으며, 드높은 하늘처럼 가볍고, 말끔히 씻어내리는 듯 새롭다. 이 어찌 《장자》나 《사기》와 같은 부류가 아니겠는가?(《水滸》所叙, 叙一百八人, 其人不出綠林, 其事不出劫殺, 失敎喪心, 誠不可訓. 然而吾欲獨略其形迹, 伸其神理者. 蓋此書七十回數十万言, 可謂多矣, 而擧其神理, 正如《論語》之一節兩節, 瀏然以淸, 湛然以明, 軒然以輕, 灌然以新, 彼豈非《莊子》․《史記》之流哉.) [<제오재자서수호전(第五才子書水滸傳)》 <서삼(序三)>]
여기서 진성탄은 소설 작품 속의 ‘외형의 자취(形迹)’과 ‘신묘한 이치(神理)’의 차이를 구분했다. 이른바 ‘외형의 자취(形迹)’는 소설 작품의 외재적인 정절의 틀거리이고, 이른바 ‘신묘한 이치(神理)’는 작품의 정절 속 심층에 감추어져 있는 ‘의(義)’를 가리킨다. 진성탄이 ‘신묘한 이치’의 탐구에 중점을 둔 것은 소설평점의 ‘석의성’을 강조한 것이다. 진성탄이 이러한 평점 관념을 내놓은 것은 그의 소설 창작의 주체성에 대한 인식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수호전》 평점 속에서 그는 ‘문(文)’과 ‘사(史)’를 구별했다. 진성탄은 “대저 사서를 편찬하는 것은 국가적인 차원의 일이고, 붓을 놀려 문장을 쓰는 것은 문인의 일(夫修史者, 國家之事也, 下筆者, 文人之事也)”이며, “국가적인 차원의 일은 사건의 서술에 그칠 따름이고, 문장은 힘써 할 일이 아니(國家之事, 止于叙事而已, 文非其所務也)”라고 여겼다. 문인이 하는 일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진정 사건의 서술에 그쳐서는 안되고(固當不止叙事而已)” 마땅히 “마음을 날실로 삼고, 손을 씨줄로 삼아 주저하며 변화하는 가운데 힘써 절세의 기이한 문장을 엮어 이루어내야 하는 것(心以爲經, 手以爲緯, 躊躇變化, 務撰而成絶世之奇文)”이다. 곧 ‘사건(事)’의 기초 위에 창작 주체의 ‘지(志)’의 함의를 융합시킬 수 있는 것인데, 이를테면, 《사기》에서 “쓰마쳰이 전하는 보이(伯夷)는 그 사적은 보이나, 그 뜻은 반드시 보이일 필요가 없는 것(馬遷之傳伯夷也, 其事伯夷也, 其志不必伯夷也)”이다. 그렇다면 “뜻은 어디에 있는가? 문장이 바로 그것이다(惡乎志? 文是也)” 바꾸어 말하자면, 문장이 곧 뜻(志)이다. 그래서 주체의 창작으로서 ‘문’은 반드시 심각한 주체성이 있어야 하고, 그런 까닭에 소설평점 역시 ‘사건(事)’에 대한 해석일 뿐만 아니라 주체의 특성을 체현하는 ‘뜻(志)’의 천명이어야 하는 것이다. 다음 문장은 진성탄의 이러한 비평적 주장을 대표한다.
“내가 특히 슬퍼한 것은 독자의 정신이 일어나지 않아 작자의 뜻을 다 펼쳐내지 못하고 그 마음의 고통을 모르는 것인데, 실제로는 훌륭한 기교를 부린 것이었기에 나의 불민함을 사양치 않고 이렇게 비(批)한 것이다.(吾特悲讀者之精神不生, 將作者之意思盡設, 不知心苦, 實負良工, 故不辭不敏而有此批也.)”[진성탄 평 《수호전》 권지오(卷之五) <설자(楔子)>]
진성탄의 이런 주장은 문인형 소설평점 가운데 일정한 대표성을 띠고 있다. 그래서 이른바 ‘석의’ 역시 문인형 소설평점의 중요한 내용이고, 특히 소설사상의 몇몇 중요한 작품들은 그들이 흥미진진하게 논하고 반복적으로 해석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명청대의 소설평점사에서 《수호전》과 《금병매》, 《서유기》, 《삼국연의》, 《홍루몽》은 평점자들로부터 가장 주목을 받았던 소설 작품들이다. 특히 문인 평점은 작품에 대한 그들의 선택이 그들의 정감의 수요와 밀접하게 연관이 있었기에, 이런 류의 풍부한 내용과 심각한 사상을 담고 있는 작품들이 평점의 주요 대상이 되었고, 각자의 정감의 수요에 근거해 작품이 표현하고 있는 함의를 해석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수호전》의 경우 리줘우(李卓吾)는 ‘충의’를 근거로 ‘수호’의 영웅들을 찬미하는 동시에 《수호전》이 작자의 ‘발분지작(發憤之作)’이라 여겨, “분노를 풀어낸 이는 누구인가? 전날에 수호에 울부짖으며 모여들었던 강도들이다(泄憤者誰乎? 則前日嘯聚水滸之强人也)”라고 말했다. 그가 보기에 ‘충의’라고 하는 것은 수호에서는 좋은 일이 아니었기에, 그는 ‘충의’가 조정에 있고 군주의 곁에 있어 당시의 조금 똑똑한 자가 사람들을 부리고(小賢役人) 대단히 현명한 자가 남에게 부림을 당하는(大賢役于人) 상황을 바꿀 수 있기를 바랐다[리줘우, <충의수호전서(忠義水滸傳序)>, 《분서》 3권]
이런 관점의 영향은 매우 컸다. 진성탄 평점 《수호전》은 리줘우의 ‘발분지작’의 사상 전통을 계승했는데, 리줘우가 ‘충의’로 ‘수호’의 영웅들을 용납한 것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했다. 그래서 ‘수호’라는 단어에 대한 이름 풀이에서 《수호전》을 요참하고 ‘악몽에 깨어나다(驚惡夢)’라고 하는 한 절을 멋대로 증보한 것까지 진성탄은 이성적인 측면에서 세상을 어지럽히고 분란을 일으킨 데 대해 불만을 표출했다. 그 구체적인 평점에서 우리는 진성탄 사상 가운데 두 가지 측면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명말 사회의 암흑에 대한 강렬한 분개와 반란의 기치를 내건 자들이 여기 저기서 일어나는 현실에 대한 깊은 우려다. 이런 사상은 이미 명말의 독특한 사회 현실을 반영하고 있으며, 또 영달하지 못한 문인이 고요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희구하는 특수한 심리 상태를 절실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사상에 바탕해 진성탄은 《수호전》이 표현하고 있는 함의에 대해 새로운 ‘석의’를 하고 있다. 그는 ‘반란은 위에서부터 일어난다(亂自上作)’고 주장해 작품이 갖고 있는 사회 현실에 대한 강렬한 비판성을 드러냈으며, 아울러 수호 영웅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어 량산보에 올랐다(逼上梁山)’는 논리로 깊은 동정과 이해를 표명했다. 하지만 동시에 ‘악몽에 놀라 깨어나다(驚惡夢)’라는 절을 멋대로 증보함으로써 이러한 행위의 현실적인 합리성을 부정했다. 그래서 《수호전》의 평점에서 진성탄은 깊은 모순에 빠지게 되는데, 현실에 대한 그의 불만은 수호 영웅에 대해 찬미의 말을 아끼지 않게 했고, 명말의 분란에 빠진 사회 현실은 또 그가 심리적으로 이런 행위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든 것이다. 이에 그 구체적인 평점 속에서 우리는 자못 흥미로운 모순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반란 행위에 대한 전체적인 부정과 개별적인 영웅들에 대한 적극적인 찬미다. 이것은 진성탄이 시대의 상황과 개인의 심리라고 하는 이중의 제약 속에서 그것을 뛰어넘을 수 없어 발생한 모순이다. 그렇기에 그의 ‘석의’ 역시 독특한 시대와 개인의 성질을 체현하고 있는 것이다.
마오 씨 부자가 《삼국연의》를 평점한 것 역시 그러하다. 촉과 위나라의 관계상 그들은 천서우(陳壽)와 쓰마광(司馬光)이 차오차오(曹操)의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은 것을 비판하고 주시(朱熹)의 《통감강목》이 촉한을 정통으로 떠받들었던 관점을 긍정했다. 이러한 취사선택은 명확하게 청초의 한족 지식인들이 명나라를 위해 정통성을 다투었던 현실적인 함의를 반영한 것이다. 청대 이후에는 《서유기》와 《홍루몽》에 대한 석의가 한 바탕 뜨거운 쟁점이 되었는데, 건륭과 가경 시기의 류이밍(劉一明)은 《서유기》의 여러 평점가들을 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샹쉬는] 멋대로 의론하고 사사롭게 의심하여 단지 한 쪽 반의 [적은] 분량만을 취해 마음가는 대로 전서의 대지를 다하였다.……그것에 이어서 혹은 ‘완공(頑空)’으로 보거나, 혹은 ‘집상(執相)’을 가리킨다 하고, 혹은 ‘규단(閨丹)’이라 의심하거나, 혹은 ‘채보(采補)’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 모든 것들이 각각 그 자신의 설을 내어 마음에 의지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니, 그 기괴함이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汪象旭]妄議私猜, 僅取一葉半簡, 以心猿意馬畢其全旨, ……繼此, 或目以頑空, 或指爲執相, 或疑爲閨丹, 或猜爲采補. 千枝百葉, 各出其說, 憑心自造, 奇奇怪怪, 不可枚擧.)
바로 이런 배경 하에 류이밍은 “우둔함을 헤아리지 않고(不揣愚魯)”, “재삼 퇴고하고 세밀하게 해석하여(再三推敲, 細微解釋)” 석의를 더했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 그 석의가 “사물 발전의 기원과 결과를 탐구한 것이 일목요연하며(原始要終, 一目了然)”, 《서유기》의 요지는 “세 가지 종교가 하나의 이치로, 본성과 명운을 동시에 닦는 도(三敎一家之理, 性命雙修之道)”라고 과장했다. 그는 심지어 “문장이 뛰어나고 졸렬하고는 내가 알 바가 아니(至于文墨之工拙, 則非予之所計也)”라고까지 선언했다[류이밍, <서유원지서(西遊原旨序)>].
《홍루몽》에 대한 석의는 건륭 이후에 쏟아져 나왔는데, 고거(考據)와 색인(索引)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도광 연간의 왕시롄(王希廉), 장신즈(張新之) 두 사람은 특히 “[작품의] 함의의 소재를 드러내 밝히는 것(括出命意所在)”[위안후웨츠쯔(鴛湖月痴子), <먀오푸쉬안 평 석두기 서(妙復軒評石頭記序)>]을 임무로 삼아 평점자의 주관적인 추단과 연역에 근거해 《홍루몽》을 성리(性理)를 부연해 설명하는 권선징악의 작품으로 해석했다. 《서유기》와 《홍루몽》의 석의는 평점자의 주관적인 바람에 의거해 해당 작품들을 ‘유희’나 ‘음탕함을 가르치는 것(誨淫)’으로 보는 사회적인 편견을 깨기 위한 것이었다. 다만 이런 석의는 작품의 실제 함의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석의는 문인 평점소설의 주요한 내용이고, 문인이 소설평점에 종사하는 기본적인 목적이다. 석의는 일종의 문화 현상으로 고대의 문화 연원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유가의 경전에 대한 주석에 뿌리를 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경전의 원래 의미가 어느 한 시대의 수요에 부합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견강부회하거나 심지어 고서를 멋대로 고쳐 경전을 당시의 특수한 수요에 들어맞게 했다. 이런 류의 예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 송대의 유학자들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피시루이(皮錫瑞)는 “송대 유학자들은 [전대 사람들이나 혹은 성현의 글을 읽으면서 그 속에 담겨있는] 의미[글 속의 뉘앙스]를 이해하는 능력은 그 이전 [한대(漢代)와 당대(唐代)] 사람들보다 낫지만, 엄연히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바꾸거나 어지럽게 한 것 등을 배워서는 안 될 것이다.(宋儒體會語氣勝于前人, 而變亂事實不可爲訓)” 이런 행위는 실용성을 근본으로 하고 있지만, 어느 정도는 경전의 국부적인 가치를 “자극해 살려냄으로써(激活)” 당대의 수요에 들어맞게 할 수 있다. 동시에 이것은 일종의 세계적인 행위이기도 해 고대 중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수전 손택(Susan Sontag, 1933~2004년)은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해석은 과학적 계몽주의의 ‘사실주의적’ 세계관이 신화가 지녔던 권능과 신화에 대한 믿음을 깨부숴버린 고대의 후기 고전주의 문화에서 처음 나타난다. 신화 이후 시대의 의식에 이 의문-종교적 상징의 고상함에 대한 의문-이 들어서자, 더 이상 옛 형식 그대로 옛 텍스트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됐다. 그러자 옛 텍스트를 ‘현대적’ 요구에 일치시키기 위해 해석이 필요하게 됐다.……인간의 의식을 역사적으로 바라보는 관점 안에서, 해석 자체도 분명히 평가를 받아야 한다. 어떤 문화적 맥락으로 보면 해석은 해방 행위다. 거기서 해석은 수정하고 재평가하는, 죽은 과거를 탈출하는 수단이다. 다른 문화적 맥락에서 보면, 이는 반동적이고 뻔뻔스럽고 비열하고 숨통을 조이는 훼방이다.
소설평점 중의 석의의 출현과 변이(變異)는 상술한 관점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평점의 정감 표현을 추구하고 석의에 중점을 두는 것은 사실상 문인형 소설평점들 모두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측면이다. 그것은 석의가 평점자의 정감 수요를 귀착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명청대 소설평점사에서는 문인형 평점이라는 하나의 노선이 나타났으니, 특히 문인형 평점은 석의를 그 으뜸가는 임무로 삼아 소설평점에 이론적인 심도와 사상적인 역량을 더해주었다. 중국의 고대 문화사상사에서 속문학은 어느 정도 전체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를테면 희곡과 예술 가운데 보이는, 전통적인 윤리 사상에 대한 애정관이나, 전통적인 의리 관념에 대한 가치관, 그리고 농민 반란에 대한 인식이나 역사 진화에 대한 사고 등은 모두 독창적인 사상적 가치를 갖고 있다. 이런 일련의 사상은 비록 전통 문화에서는 주류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지 않았지만, 오히려 심원한 의의를 갖고 있는 사상 체계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소설평점은 석의를 임무로 삼았는데, 그 가운데 사상적으로는 다 일치하지 않지만, 몇몇 뛰어난 평점 작품들은 오히려 속문학에 담겨 있는 이런 사상적 의의를 심각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서로 표리를 이루는 가운데 그것을 크게 빛냈다.
문인형 소설평점은 한 가지 생각, 하나의 유형으로 표현되는데, 개별적인 평점본으로 말하자면, 정감과 석의만을 토로한 평점본은 극히 드물게 보인다. 소설평점사에서 비교적 전형적인 ‘문인형’ 평점은 리줘우의 《수호전》 평점과 왕단이(汪憺漪), 류이밍(劉一明), 천스빈(陳士斌), 장수선(張書紳) 등의 《서유기》 평점, 장신즈(張新之), 왕시롄(王希廉) 등의 《홍루몽》 평점과 청말 량치차오(梁啓超), 옌난상성(燕南尙生) 등의 소설평점이다. 그리고 이에 그치지 않고 수많은 평점들, 이를테면 진성탄, 마오 씨 부자, 장주포 등의 소설평점이 모두 그러했다. 따라서 이상의 분석은 하나의 현상, 한 가지 생각만을 드러내 보여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