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둥성 화교 조루 – 돈을 벌면 고향에 집을 짓겠소
베이징에서 출발해 상하이를 거쳐 안후이, 저장, 푸젠성까지 해안을 따라 가면서 중국 백성들의 특색 있는 전통 살림집을 둘러보았다. 이러한 집들은 누가 봐도 중국 건축이라고 느껴지지만 광둥성에는 중국 건축인지 서양 건축인지 구분하기도 모호한 아주 독특한 민가가 있다.
넓은 논밭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호리호리한 5∼6층짜리 콘크리트 빌딩. 멀리서 보면 망루인지 주택인지, 아니면 창고인지 쉽게 구분되지도 않는다. 가까이 보면 대문, 지붕, 난간, 창틀 등등이 서구적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어 중국이 아니라는 착각을 일으키는 집들이다. 바로 조루碉樓라고 하는 살림집이다.
조루의 조碉는 돌집 또는 군사용 망루라는 뜻인데 실제로 망루를 주택으로 변형한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런 조루 또는 망루형 건축물을 주택이나 창고로 이용하는 것은 티베트에도 있고 쓰촨의 한족 거주지나 장시성, 푸젠성의 객가 지역에서도 발견되기는 한다. 그런데 광둥성 조루는 실내외 장식이 서구풍의 화려한 문양이라 중국에 이런 민가가 있다는 것 자체가 의아스러울 정도다.
광둥성에서 조루가 밀집된 곳은 카이핑开平, 허산鹤山, 신후이新会, 타이산台山, 언핑恩平 등 광저우시 서남부에 있는 장먼시江门市의 다섯 개 지역이다. 이 다섯 개 지역을 오읍五邑이라고 하는데 화교의 고향이라고도 부른다.
이 지역 출신 화교들은 동남아시아는 물론 미주, 유럽까지 이주해서 살았는데 돈을 벌어 성공한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와 집을 새로 짓거나 가족·친지에게 집을 지어줄 때 자신들이 보았던 서구 주택의 외관을 임의로 차용했다. 그 결과 이 지역에는 온갖 서구풍의 건축양식과 장식 문양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중국 화교사 또는 이민사의 한 단면을 조루에서 읽을 수 있다. 타이완의 한 건축학자는 광둥성의 조루를 하이브리드 모더니티Hybrid Modernity라고 이름 붙였는데 꽤 적절한 해석이다.
광둥성 조루에 차용된 서양의 건축양식에는 그리스, 로마는 물론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고딕 양식 등 각양각색이다. 각지에 나가 살던 화교들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건축물의 사진이나 그림엽서 또는 설계도를 가져와서는 고향의 주택 기술자들에게 똑같이 지어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30%는 건축주의 요구에 따라, 70%는 현지 토박이 건축가들의 전통적 손기술에 의해 중국의 향촌鄕村 건축과 서구적 건축 외양이 임의로 융합된 것이다.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중국 문화와 서구 문화가 융합된 것을 중서합벽中西合壁이라고 하는데, 조루는 중서합벽 가운데서도 아주 독특한 존재다.
오읍 가운데 조루가 가장 많고 유명한 곳은 카이핑이다. 카이핑은 오읍의 다른 네 지역이 교차하는 곳이라 네 곳의 행정력과 치안력이 모두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라서 사불관四不管이라고 칭할 정도였다. 청 말기에서 중화민국 시대에 사회가 혼란에 빠지면서 사불관의 치안 부재는 곧 도적 떼로 나타났다. 이 지역 출신 화교들이 고향의 가족·친지들에게 돈을 보내온 덕에 부유한 편이었으니 도적 떼들의 주된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도적 떼에게 시달리던 화교들은 집에 방어기능을 보강하기 시작하면서 망루 형태로 지었다. 여러 사람이 대피할 수 있는 대피용 조루는 마을 뒤편에 지었고 가족 단위로 사는 일반 주거용 조루는 마을 안쪽에 지었다.
조루는 푸젠성의 토루나 위룡옥과 같이 방어성이 상당히 강조되어 있으나 종법제도에 따른 대가족 집단거주가 아니라 소가정 단위로 거주하는 주택이라는 면에서는 다르다.
방어기능이 적용된 것은 외벽 곳곳에 만들어진 사격공이 대표적이다. 일자형, 티자형, 원형, 반원형 등 다양하다. 대문은 이중 철문이고, 대문 바로 위에는 별도의 사격공을 뚫어 대문 앞의 도적에게 총을 쏠 수 있게 했다. 창문은 작지만 이중창으로 만들었는데, 바깥 창문은 쇠판으로 완전히 덮을 수 있고 이중창의 중간에는 쇠창살(위 사진)을 설치했다.
도적들에게 응사하기 좋게 층마다 외부로 돌출된 연자와燕子窩(아래 좌측 사진: 연자와 내부)를 만들었다. 개인 참호와 비슷한데 측면은 물론 바닥에도 사격공이 있다. 최악의 경우에는 옥상으로 대피한다. 이를 위해 옥상으로 올라가는 문과 통로를 무쇠로 만들고는 위에서 완전히 폐쇄할 수 있게 했다(아래 우측 사진).
마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망루를 설치하기도 하는데, 이것을 갱루更樓라고 한다. 갱루에는 탐조등과 경보기를 설치하는데, 도적 떼를 발견하면 경보기를 울려 주변 마을의 자위대에게 신속하게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다. 실제로 1922년 12월 일군의 도적 떼들이 카이핑중학교를 습격했는데 근처에 있던 갱루에서 야간 탐조등을 사용해 도적 떼가 접근하는 것을 미리 발견했다. 인근 마을의 자위대들이 신속하게 출동하는 바람에 도적 떼에게 잡혀갈 뻔했던 교장과 학생들을 구해낸 일도 있었다고 한다. 시골 사람들의 놀라운 승전은 해외 화교들에게도 경이로운 소식으로 전해졌고, 화교들이 고향에 조루를 지어주는 열풍이 불기도 했다고 한다.
기후도 조루의 특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지역은 태풍이 잦은 탓에 침수 피해가 많았다. 이를 감안해 위층으로 대피해서 물이 빠질 때까지 충분히 견딜 수 있도록 5∼6층으로 높게 지은 것이다.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당옥을 옥상에 둔 것도 홍수를 염두에 둔 것이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층마다 주방(아래 사진)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분조불분가分竈不分家라고 한다. 부엌을 나눴을 뿐이지 집 안이 갈라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주방이 많으면 아궁이가 많고, 아궁이가 많으면 후손이 번성한다廚房多竈口多人丁旺고도 한다. 각 세대가 한 층씩 쓰면서 평소에는 세대별로 식사를 한다. 이것은 화교들이 들여온 서구 문화가 세대별 분화에 영향을 준 것이기도 하고, 홍수가 나서 아래층이 침수되면 위층 어디서든 조리를 할 수 있게 대비한 것이기도 하다.
건축 재료에서도 전통적인 석재나 벽돌, 항토 등으로 지은 것도 있지만 당시 서구에서 새로 들어온 철근 콘크리트를 많이 사용했다. 이 역시 방어성과 내구성을 모두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지금도 조루는 많이 남아 있으며, 2004년 7월에는 카이펑에서 개최된 중국근대건축사학회의 학술대회를 통해 집중적으로 재조명되었다. 2007년에는 1800여 개에 달하는 카이핑의 조루와 촌락 전체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조루를 찾아본다면 광저우시 서남쪽의 장먼시 카이핑을 찾아가는 것이 좋다. 카이핑에서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가면 누리촌努力村과 리위안立園에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쳐 지어진 많은 조루를 둘러볼 수 있다.
누리촌은 열다섯 채의 서로 다른 양식의 조루가 잘 보존되어 있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 20세기 전반 이 지역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실내장식이나 생활용품들도 전시되어 있다. 서구식 트렁크는 물론이고 당시 잘사는 화교 집안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서양 물건들도 눈길을 끈다. 그 가운데 돌아가는 것 세 가지와 소리 나는 것 한 가지三轉一響라는 말이 있다. 돌아가는 세 가지는 자전거·괘종시계·재봉틀이고, 소리 나는 한 가지는 바로 축음기였으니 당시 부자들의 표상이었다.
리위안은 미국 화교인 셰웨유謝曰佑 집안의 별장이었다. 원대에 인근에서 이주해 온 집안으로 이 지역에서만 70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19세기 말 셰웨유가 단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철도공사판을 거쳐 장사를 하기 시작했고, 1906년부터 형제들을 차례로 데려갔다. 셰웨유 형제들은 시카고와 고향을 오가면서 국제무역으로 많은 돈을 벌었고, 고향에서 결혼해 처자식을 두고 있다가 1940년대에는 전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전형적인 부유한 화교 집안으로 지금도 후손 300여 명이 미국, 캐나다 등지에 살고 있다.
활용품들도 전시되어 있다. 서구식 트렁크는 물론이고 당시 잘사는 화교 집안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서양 물건들도 눈길을 끈다. 그 가운데 돌아가는 것 세 가지와 소리 나는 것 한 가지三轉一響라는 말이 있다. 돌아가는 세 가지는 자전거·괘종시계·재봉틀이고, 소리 나는 한 가지는 바로 축음기였으니 당시 부자들의 표상이었다.
이들은 도적 떼들의 약탈에 시달리다가 1917년 처음 자신들의 조루를 지었고, 주변의 땅을 사들여 별장촌을 짓기 시작해 1931년 지금의 면모로 완성했다고 한다. 멋진 호수도 있고 산책로도 잘 만들어져 있는데, 중국식·서양식 정자들이 제각기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조루와 화교 그리고 셰웨유 집안의 역사를 보여주는 박물관이 있어 20세기 전반 화교들의 생활상을 세밀하게 볼 수 있다. 셰웨유 집안사람들은 20세기 후반 리위안 전체를 중국 정부에 위탁하고 지방정부가 관리하는 방식으로 일반에게 공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