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후이성·저장성 휘파건축 – 남자들의 금고金庫, 여자들의 금고禁錮
중국에서는 상인집단을 상방商邦이라고 하는데, 가장 융성했던 상방으로 진상晉商, 조상潮商, 휘상徽商을 꼽는다.
휘상은 안후이성 남부 후이저우徽州의 상인들인데, 옛날의 후이저우는 지금의 황산시와 그 인근이다. 이들은 장사를 하면서도 유학을 숭상하고賈而好儒, 장사로 돈을 벌고 유학으로 이름을 높인다賈爲厚利, 儒爲名高는 말과 같이 유학의 기풍이 아주 짙게 배어 있었다. 중국에서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가 바로 이곳 사람이다.
후이저우가 유학과 장사로만 유명한 것은 아니다. 중국 고전을 연구하는 박학朴學과 각서刻書도 유명하고, 특산물로 붓, 먹, 벼루, 종이 등 문방사우가 손꼽히는 것 역시 후이저우의 유교적 기풍과 밀접하다. 의학에서의 신안의학新安醫學도 그렇고, 후이저우의 요리 휘채徽菜는 중국 8대 요리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후이저우의 전통건축을 휘파건축이라 한다. 휘파건축은 장쑤성 동북부에서 안후이성과 저장성, 그리고 푸젠성 북부에 이르기까지 창강 하구 강남 지역의 민가건축에서 중심적 지위를 차지한다. 한국인들이 황산을 다녀오면서 근처의 훙춘宏村이나 황산 시내의 라오제老街를 들러 오기도 하는데, 그곳에서 보는 전통주택들이 휘파건축이다. 좁은 골목 또는 상점 거리 양쪽으로 백색의 벽이 높고, 지붕에는 까만 기와를 얹었으며, 그 위에 비녀를 여러 개 꽂은 것 같은 집들이다.
휘파건축에서는 살림집뿐 아니라 사당과 패방牌坊도 유명한데, 이 셋을 일컬어 휘파 삼절三絶이라 한다.
패방은 패루라고도 하는데, 마을을 나서는 길의 출발점이고 멀리서부터 내방객의 시선을 끌어 인도하는 대문과 표지의 기능도 갖고 있다. 간단하게는 두 개의 기둥 위에 도리를 얹고 마을 이름을 써넣으면 한 칸짜리 패방이다. 기둥을 네 개를 세우면 세 칸짜리가, 여섯 개를 세우면 다섯 칸짜리가 된다. 높이에서도 1층, 2층, 3층 모양을 내기도 한다. 멋을 내기 위해 두공과 작체를 설치하거나 기와를 얹기도 한다.
패방은 우리나라의 열녀문과 같이 기념비 성격으로도 진화했다. 주민들의 시선이 가장 많이 모이는 도로에 누군가의 공적을 새긴 패방을 세워 그 사회의 지배적 가치가 마을 전체에 스며들게끔 하는 것이다. 후이저우에는 이런 패방이 다른 지방에 비해 상당히 많다.
황산시 서현歙县의 휘주고성 안에 있는 허국석방許國石坊(위 좌측 사진)이 대표적이다. 휘주고성에서 서쪽 6km 거리에 있는 탕웨촌의 패방군棠樾牌坊群 역시 패방군으로 중국에서 제일로 쳐준다(위 우측 사진).
허국석방은 허국이란 개인의 공적을 기리는 패방이다. 이와는 달리 일곱개가 줄지어 세워진 탕웨촌의 패방군은 포鮑씨 가문의 충효절의를 기리는 것들이다. 포씨 마을 입구에 명대의 패방 세 개와 청대의 패방 네 개가 차례대로 세워져 있어 보는 이들을 감탄케 한다.
돌을 재단하여 깎은 다음 못이나 리벳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정교하게 맞물려서 세운 것이다. 세운 지 수백 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은 것을 보면 석공술이 꽤 뛰어났던 것 같다.
패방 일곱 개 하나하나마다 충효절의忠孝節義의 공덕이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을 잠시 들여다보면 이 지역에 유교적 기풍이 얼마나 깊숙하게 배어 있는지 알 수 있다.
첫 번째 패방인 포찬효자방鮑燦孝子坊은 포찬의 효도를 기리는 것이다. 포찬은 명대 가정嘉靖연간에 살았던 사람으로 책을 많이 읽어 학식은 높았으나 부모를 봉양하고 자식을 가르치기 위해 과거에 나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모친의 두 다리에 심각한 종기가 생겨 수년간 고생을 했으나 포찬이 혈농을 입으로 빨아내기를 계속하여 어머니의 병을 고쳤고, 자손들을 잘 교육시켜 증손자 포상현이 훗날 공부상서工部上書까지 올랐던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두 번째 패방 자효리방慈孝里坊은 송말의 포여암, 포수손 두 부자를 기념한 것이다. 원대 말기 이 지역 반란군에게 부자가 함께 포로로 잡혔다. 반군이 둘 가운데 하나를 죽일 것이니 누가 죽을지를 스스로 결정하라고 윽박지르자 부자가 서로 죽음을 마다치 않다가 이를 참지 못한 반군들에게 둘 다 죽임을 당했다. 훗날 명나라 영락제가 이들을 기려 패방을 세우게 했다고 한다.
필자가 보기에 사실 여부가 갸우뚱한 패방도 있다. 1797년에 세워진 포봉창 효자방이 그것이다. 포봉창의 부친은 명말 전란을 피해 집을 떠났으나 소식이 끊겼다. 얼마 후 14세였던 아들 포봉창이 아버지를 찾아 집을 나섰고, 전국을 헤매다가 간쑤성 어느 사찰에서 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150년 전의 일로 패방을 세웠다는 것도 그렇고, 후이저우에서 간쑤성까지는 직선거리로도 1500km가 넘는데 당시의 교통통신을 감안해보면 집 떠난 부친을 그곳까지 가서 찾았다는 것은 기적 속의 기적이라고 해도 충분치 않은 것 같아 오히려 진위가 의아스러워진다.
적지 않은 돈을 들여서 정책적으로 세운 패방도 있다. 낙선호시방樂善好施坊은 청조 가경嘉慶연간에 세운 것이다. 당시 이 마을에는 충, 효, 절에 해당하는 패방은 이미 있었으나 의義의 패방은 아직 없었던 터라 이를 크게 아쉽게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포뢰방이란 사람이 고위직에 올랐을 때 양곡 10만 석과 은 3만 량을 출연하여 경항대운하의 제방 800리를 수리하고는 조
정에 패방을 청원해서 세운 것이다. 충효절의라는 네 글자를 패방으로 채워 가문의 영광을 드높이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자신의 명예를 돈으로 산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패방 두 개의 주인공은 여자를 위한 것이다. 패방군에서 세 번째 패방은 포문령의 처 강씨의 수절을 기린 것이다. 굶어 죽는 것은 사소한 일이고, 정절을 잃는 것이 큰일餓死事極小, 失節事極大이라는 정주리학程朱理學의 가부장적 도덕규율이 당시 후이저우 사회에서 얼마나 강력한 이데올로기였는지 보여준다. 본처가 아닌 후처의 패방도 하나 있다.
이처럼 줄지어 늘어선 패방은 모두 유교적 가치를 고양하는 것들이다. 이 마을에는 사당 역시 잘 보존되어 있다. 돈본당敦本堂이라고 하는 사당이 있는데, 그 옆에 포씨 집안의 부인들을 기리는 청의당清懿堂이 따로 있다는 게 특이하다. 전자를 남사男祠라 하고, 후자를 여사女祠라 한다. 여자를 위한 사당은 중국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여사도 있고 일곱 개의 패방 가운데 두 개가 부녀자였으니 유교적 기풍이 아무리 강했다고 해도 여자가 상당한 대접을 받았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누군가의 수절과 희생을 찬양한다는 것은 나머지 여성들에게 이를 따르라는 강력한 압박이다. 정호와 정이를 거쳐 주희에 이르러 성리학은 이미 교조적 이데올로기로 굳어져서 여성들에 대한 억압은 더욱 심해졌던 것이다.
여자로 태어나면 좁은 2층 구석방에서 거의 갇힌 채로 살아야 했다. 외출은 상상도 할 수 없었으며, 나이가 들어 50세를 넘어서야 겨우 자유로운 외출이 허용되었던 삶이었다. 게다가 남편이 장삿길을 떠나 몇 개월 혹은 몇 년씩 집을 비우면 한눈 한번 팔 겨를 없이 시부모 봉양과 자식 양육에만 집중해야 했다. 집을 비운 채 장기간 출타를 하기 때문에 이들 부녀자를 얽어매는 데 유교적 도덕규율이 강력한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집성촌 자연부락으로서 종중이 마을의 자치권을 갖고 있던 당시에 종법에 서는 부녀자의 희생을 고상한 것이라고 추켜세웠다. 신체에서는 전족纏足으로 여성들의 활동성을 잡아맸고, 건축에서는 좁디좁은 구석의 규방閨房에 여자들을 가두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중국에서 휘파건축을 설명할 때, 남자에게는 금고金庫지만 여자들에게는 금고禁錮였다는 말까지 하겠는가. 휘파건축의 살림집은 외지에서 돈을 벌어 오는 남자들에게는 돈을 채워 넣는 돈통이지만, 여자들에게는 감옥살이였던 것이다.
화려하고 웅장하게 서 있는 패방군을 보면서 그것이 세워진 뒷면에서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효와 절의 명분 아래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수하며 살아왔는지 상상해볼 수 있다. 유적은 아름답고 위대한 이야기만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탕웨촌 마을을 걷다 보면 낡은 담벼락(아래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처음엔 산뜻한 회칠이었겠지만, 색이 바래면 덧칠하기를 수없이 반복한 탓에 온전한 것은 없다. 찰과상에 딱지가 앉고, 딱지조차 다시 긁히고, 긁힌 상처 위에 또 딱지가 앉으면서 굳은살이 담벼락을 다 덮은 듯하다. 이제는 굳은살마저 군데군데 조각조각 떨어져 나가면서 과거의 상처를 층층이 드러내 보여주는 게 아마도 세월의 풍화작용인 듯싶다.
휘파 삼절을 둘러보기 위해 저장성 란시시兰溪市 외곽에 있는 제갈촌诸葛村도 찾아갈 만하다.
제갈촌은 제갈량이 죽고 1000년이 지난 송대 말기 제갈량의 후손이 이곳에 자리를 잡아 오늘날까지 700여 년의 삶을 이어온 마을이다. 5000여 명의 주민 가운데 2700여 명이 제갈씨로서 제갈씨 집성촌 가운데 가장 크고 잘 알려진 마을이다.
제갈량은 중국인의 마음속에서 지혜와 충성의 화신이다. 어려서 일찍 부모를 여의었으나 총명하여 공부를 잘했다. 때를 기다렸다 세상에 나와 보잘 것없는 무장집단에 지나지 않던 유비를 도와 조조, 손권과 대등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어린 유선을 두 번째 황제로 모셔 충성스럽게 보필하다가 전장에서 병사했다. 그의 아들과 손자 역시 밀물처럼 몰려드는 적군에 맞서 장렬히 전사함으로써 대를 이어 충성하는 명예로운 가문으로 추앙받는다.
수많은 황제는 신하들이 제갈량의 충성을 본받기를 바랐고, 수많은 부모는 제갈량의 총명함을 바랐으니 누구든 제갈량을 칭송했던 것이다. 젊어서는 키 큰 미남에 공부도 잘하고 겸손했으니 요즘 말로 ‘엄친아’였다. 세상에 나와서는 황제 다음의 승상으로서 후대의 존경까지 받는 인물이 되었으니 ‘가장 출세한 샐러리맨’이었다. 일인자 자리를 넘볼 역량과 기회가 있었지만 이인자로 마감함으로써 ‘주주들이 가장 좋아하는 충직한 CEO’이기도 했다.
제갈촌에는 제갈량의 흔적이 사당뿐 아니라 촌락의 가로 구조와 풍수지리적 평면 배치에서도 나타난다(위 그림 참조).
이 마을은 제갈량이 북벌전쟁에서 사마의와 맞설 때 썼다는 구궁팔괘진九宮八卦陳을 차용했다고 한다. 마을 중앙에 종지鐘池를 두고 이 연못에서 여덟 갈래의 길이 수레바퀴 모양으로 뻗어나가고 마을 바깥으로 여덟 개의 작은 산이 둘러싸고 있다. 이와 같은 전체 모양이 곧 팔괘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팔괘촌으로 부르기도 한다.
종지(아래 사진)는 태극 모양인데, 태극의 반은 물이고 나머지 반은 뭍으로 된 독특한 형태다. 물과 뭍에 우물이 각각 하나씩 있어 마치 물고기의 눈과 같고, 전체 형태는 물고기 두 마리가 서로의 꼬리를 문 것 같아 어형태극魚形太極이라고도 한다.
마을의 여덟 갈래의 골목은 내內 팔괘진에 해당하는데, 진지 안으로 들어온 적을 유인하여 혼돈에 빠뜨리는 길이라고 한다. 마을 골목을 걸어보면 이어진 듯 끊어진 길도 있고, 통하지 않을 것 같은데 통하는 길도 있어 도적 떼가 침입해도 쉽게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다. 도적 떼가 수시로 출몰하던 시대에 향촌의 자연부락은 방어 기능이 중요했는데, 복잡한 골목이 일부 그런 기능을 담당한 것이다.
마을 바깥의 산들은 외外 팔괘진을 이뤄 외부의 시선을 차단해줌으로써 마을을 감싸며 보호한다. 실제로 제갈촌 뒷산 너머로 330번 국도가 시원스레 통과하고 있지만 작은 산의 울창한 숲이 가리고 있기 때문에 국도의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면 이런 곳에 과연 유명한 마을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길 정도다. 1930∼40년대 일본 군대가 침략했을 때에도 이 지역에 꽤 부유한 마을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탓에 약탈을 면했다고 전해진다.
마을에 들어서면 제갈량 사당이 중심이다. 우리도 곳곳에서 사당을 만나기는 하지만, 사당은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 지역은 원래 고융高隆이라 불렀으나 명대 후엽부터 성씨를 지명으로 사용하기 시작해 제갈촌으로 굳어져 왔다. 이것은 당시 중앙집권 체제에서 지역사회를 조직화하는 정책과 밀접하다. 자연부락 하나하나마다 행정력이 미치기 어렵기에 마을의 어른을 임명장 없는 촌장으로 임명한 것과 같았다. 다시 말하면 각 마을의 주된 성씨의 존경받는 연장자 또는 종손을 실질적인 행정적 촌장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들은 관청의 지시를 공지하고 교육하거나 준수 여부를 감독하기도 하고, 병력이나 부역의 차출을 직접 집행하기도 했다. 마을 안의 분쟁을 조정하거나 사건·사고를 판결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자연부락의 연장자 또는 마을 어른을 행정관 역할로 활용하면서 종사宗祠 건립을 적극적으로 허용했던 것이다. 결국 가문을 규율하는 종법宗法이 실정법으로 군림하면서 선조를 모시는 사당은 혈연을 넘어서서 행정적·제도적 권위를 갖게 되었고, 마을마다 사당이 만들어진 것이다.
제갈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제갈량을 제사 지내는 승상사당丞相祠堂(아래 좌측 사진)과 제갈량 기념관에 해당하는 대공당大公堂이 마을 중심을 차지하고 있고, 그 외의 작은 사당들도 많다.
제갈촌 안으로 들어서면 연못 가장자리에 흰 벽에 까만 기와를 얹은 집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휘파건축의 전형적인 살림집들이다.
휘파건축의 살림집은 밖에서 보면 푸른 빛이 도는 벽돌, 회색 기와가 촘촘하게 덮인 지붕, 집과 집을 분절시킨 듯한 백색 외벽이 인상적이다. 내부의 목구조에는 뚱뚱한 보와 두툼한 기둥의 조각이 화려하고, 2층의 규방은 작은 것이 특징이다. 청전회와마두장青塼灰瓦馬頭墻 비량반주소규방肥梁胖柱小閨房이라고 한다. 좁은 골목에서 하늘을 쳐다보면 흰 몸뚱이에 뽀글뽀글 파마를 한 검은 머리가 얹혀 있고, 머리에 여러 개의 비녀가 도도하게 꽂힌 것같이 보이기도 한다(위 우측 사진).
집 안으로 들어서면 두툼한 대들보(아래 좌측 사진)에는 목공예가 화려하고, 채색한 마룻대가 고색창연하다. 대문 바로 안쪽에는 좁은 천정이 하늘로 뚫려 있고, 천정 옆의 2층 구석에는 좁고 작은 여자의 침실 규방이 자리 잡고있다(아래 우측 사진).
제갈촌의 살림집은 휘파건축이라 하고, 사회경제적·문화적 풍토 역시 앞에서 본 휘주문화와 같다.
이 지역은 구릉지대로 인구에 비해 농지가 모자라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12세기 초반 송나라가 금나라에 밀려 창강을 넘어 항저우로 천도하자 “강을 건넌 사람들이 길 위에 넘쳐난다”고 할 만큼 강남 지역에 인구가 급증했다. 이 때문에 란시에서도 농사에만 매달리지 못하고 객지로 나가 장사를 하거나 수공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증가했다.
우선은 교통이 편리했다. 안후이성의 후이저우, 장시성의 도자기 생산지 징더전景德镇, 쑤저우와 항저우가 수로로 잘 연결되어 있었고, 베이징에서 푸젠성으로 가는 육로 역시 란시를 통과하는 등 교통의 요지였던 것이다.
이미 수공업적인 배경도 있었다. 명대 이전에도 술, 중국식 햄, 동광, 조선, 목각 등 수공업이 발달했었는데, 명대 후기부터는 제갈촌에서 약재업이 전문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청대에는 인근 지역에 300여 개에 달하는 약재상을 경영했고, 서양 의학이 쏟아져 들어온 후인 1947년에도 제갈촌 출신들이 외지에서 200여 개의 약재상을 운영했다고 한다. 그래서 휘주 사람은 돈寶을 알고 제갈촌 사람들은 풀草을 안다고 했다.
란시에서 가장 약재업이 흥성했던 제갈촌은 부유한 마을이었다. 이들은 외지에 나가 돈을 벌었지만 엄격한 종법 규율에 따라 장사도 남자만 나갔다.
현지에서 결혼하거나 외지인 처자를 데리고 오지도 않았으며, 다만 돈을 가져와 고향을 부유하게 했다. 동시에 상업 발달과 함께 외지인들이 들어오면서 인구구성은 혈연부락에서 지연부락으로 넘어가고 있다. 지금은 제갈씨와 타성이 반반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부유했던 만큼 주택 안팎을 화려한 목공으로 장식하는 한편 집이 곧 금고인 터라 방호 기능을 높였다. 문짝은 두꺼운 나무판으로 만들었고, 겉면에 철판을 대고 못을 박아 고정하기도 했다. 상업의 발전과 외지인의 증가, 도적떼의 출몰 등이 결합하여 나타난 것이다. 상하이 이롱주택의 튼튼한 석고문이 바로 휘파건축의 대문에서 비롯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