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제漢武帝
3. 회남왕 유안이 남월(南越)을 정벌하라고 간언한 것은 사심을 품고 무제에게 간계를 부린 것이다
회남왕 유안이 남월(南越)을 정벌하라고 간언한 것은 따져 보지 않아도 그의 속내를 알 수 있다. 그의 상소문을 읽어 보면 천자의 과실을 들추어 비방하며 인심을 흔들면서 한 왕실을 비난하면서 자신을 미화하고 있으니, 거기에 어찌 나라를 염려하고 백성을 구휼하려는 어질고 의로운 마음이 들어 있겠는가!
남월 지역이 중국 판도에 들어올 수밖에 없는 것은 천지가 원래 그렇게 정해 놓은 형세이니, 천하를 차지한 군주가 당연히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천지의 정은 산천에 형상을 나타내고 그 안에 정이 깃들어 있다. 강물이 휘감아 흐르거나 산맥이 웅크린 곳이 합쳐져서 한 지역을 이루면 백성의 기운은 서로 감응할 수 있다. 중국의 지리적 형세는 북쪽에는 사막이 막고 있고, 서북쪽에는 황하라는 천연적인 해자(垓字)가 있으며, 서쪽은 큰 산맥으로 막혀 있고, 남쪽 끝은 뜨거운 바다이니 광서(廣西) 합포(合浦)에서 북쪽으로 곧장 가서 하북(河北)의 갈석산(碣石山)에 이르기까지 모두 바다가 둘러싸고 있다. 지리적 형세가 합쳐지니 바람이 서로 통하고, 바람이 통하니 사람이 타고나는 성질도 서로 비슷하다. 또 사람의 타고난 성질이 서로 비슷하니 성정(性情)도 같아서 느낌으로 통하게 된다.
남월은 본디 해내(海內) 즉 중국의 땅이다. 오령(五嶺)이라는 것은 높낮이가 다르게 쌓인 흙담에 지나지 않으니 태항산(太行山)이나 함곡관(函谷關), 검각(劍閣), 민액새(黽阨塞)와 같은 험한 지형을 넘어서지 못한다. 동구(東甌)는 오(吳)와 회계(會稽)에 인접해 있고 민(閩)·월(越)은 여간(餘干)이 잇닿아 있으니 더욱 허벅지와 손바닥이 신체에서 뗄 수 없는 부분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곳 백성들은 닭울음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리고, 밭이랑이 서로 섞여들고, 저자에서 서로 교역하고, 통혼(通婚)해 왔으니, 구획을 나누어 교화에서 제외하면 그곳 사람과 생물의 성질이 어긋나고 천지의 기운이 차단될 것이다.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중국의 문화로 오랑캐를 변화시켰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吾聞用夏變夷者.(《孟子》 〈滕文公上〉)
제왕의 지극한 어짊과 대의(大義)는 변화에 달려 있는데, 유안은 이렇게 말했다.
“(남월과 중원은) 천지가 안팎으로 격리해 놓았다.”
이야말로 본말이 전도된 것이 아닌가! 그의 저서에서는 팔팔의 먼 변경[八殥]과 구주(九州)의 광대함에 대해 한껏 과장해 놓았는데 이제 또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땅을 분할했으니,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는 그 언사(言辭)가 부끄럽다.”라고 했듯이, 그 역시 마음속으로는 응당 부끄러웠을 것이다.
나라 안의 일을 다 하고 나서 바깥에 힘쓰라는 것은 나라를 가진 군주가 크게 경계해야 할 교훈이니, 이는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고 서쪽으로 사막을 넘는 일을 가리킨다. 《상서》에서는 “남쪽 삼묘(三苗)의 거주지와 인접한 곳에 동쪽을 향해 제단을 지어라.”라고 했으니, 교지(交址, 지금의 베트남 북부)까지 요임금의 봉토였으니, 남월은 당연히 그 안에 들어감을 알 수 있다. 월(越)이라는 것은 대우(大禹)의 후예로서 선왕이 의친(懿親)으로 봉한 곳이니, 황량하고 먼 곳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새로 개척한 영토에 중원과 똑같은 부세를 부과할 수는 없으니, 유안도 이렇게 말했다.
“(월 땅에서) 바치는 술은 황궁에 들어가지 않고, 천자를 섬기는 병졸이 한 명도 없다.”
확실히 그런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성곽을 쌓고, 수비병을 주둔시키고, 관청을 건설하고, 학교를 세우는 비용은 오히려 현(縣)의 관리에게 받아 쓸 것이니, 이익을 계산하면 작으나마 손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 변경에서 도적질하고 우리 농사에 해를 끼치면 병력을 주둔시켜 지키고, 심한 경우에는 군대를 일으켜 억제하면 된다. 그렇게 해서 백 년 동안의 이익을 모두 계산해 보면 성곽을 쌓는 등의 일은 소탐대실(小貪大失)일 뿐인지라 성명(聖明)한 군주라면 천하게 여길 것이다. 그런데 어진 사람이 차마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군자는 짐승을 대할 때 개나 말처럼 가까운 것들이라도 재갈을 물리고 고삐를 달아 길들이고 달래서 타고 다닌다. 산과 바다에 둘러싸이고 같은 하늘과 땅에 사는 백성으로서 선왕의 교화가 미쳤던 이들인데 매정하게 천륜의 밖으로 내몰아 제어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고, 천자를 대신해 백성을 다스리는 이가 그들을 버려두어도 괜찮단 말인가! 무제가 구(甌)과 민(閩)을 평정하고 남월을 개척하여 이제 그곳들도 문명의 교화를 입은 군현(郡縣)이 되었다. 그리고 송나라 때에는 하삭(河朔)과 연주(燕州, 지금의 베이징 일대), 운주(雲州)의 백성을 거란과 여진(女眞)이 횡행하는 지역에 두고 황하와 삼관(三關)을 경계로 중원과 소통을 끊어 버림으로써 그들이 점차 오랑캐 풍속에 물들고 천륜이 사라지게 했다. 이에 따라 천지에 퍼진 문명의 기운이 나날이 남쪽으로 옮겨 가니. 하늘도 한나라의 공적을 기꺼워하면서 송나라의 구차함을 미워하게 되었다. 그런데 유안은 사적인 목적으로 무제의 과실을 들추어 비방했으니, 언사(言辭)는 배끄럽고 조리가 있었으나 현명한 이라면 믿지 않을 것이었다.
4. 급암(汲黯)은 지나친 욕심을 구제하는 것이 인의를 행하는 데에 달려 있음을 몰랐다
말에는 형적(形跡)은 근사한 듯하지만 실질이 다른 것이 있으니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한나라의 경학가 신배(申培)는 이렇게 말했다.
정치는 말을 많이 하는 데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얼마나 힘써 행하는지를 살필 뿐이다. 爲治者不在多言, 顧力行何如耳.(《史記》 〈儒林列傳〉)
급암(汲黯)은 무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마음속에 욕심이 많으면서 밖으로는 인의를 펼치시는데, 어찌 요·순의 정치를 본받으려 하시옵니까! 陛下內多欲而外施仁義, 奈何欲效唐虞之治乎.(《史記》 〈汲鄭列傳〉)
무제가 유학을 숭상한다는 헛된 명분을 내세우면서 내실이 없음을 비판한다는 측면에서는 두 사람의 견해가 비슷한 듯하다. 그러나 다른 점은 신불해의 말이 유학자가 성신(誠信)에 바탕을 두고 한 것인 데에 비해 급암의 말은 정통을 해치는 이단의 주장이라는 사실이다.
급암이 직접 정치를 주관할 때는 오로지 황로 사상을 스승으로 삼고, 병을 핑계로 집에 누어 소속 관리에게 일을 맡겼다. 이것은 조참(曹參)의 하찮은 지혜일 따름인데 그는 오히려 오만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어찌 요·순의 정치를 본받을 수 있겠”느냐는 말은 직접적으로 요·순은 본받을 필요가 없으니 예악과 문장(文章)을 폐지하고 구차하게 백성과 더불어 편안히 지내라고 권유한 셈이다. 마음속에 욕심이 많으면 인의를 행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 싶어도 마음의 주인으로 삼을 인의가 없으니 억압하면 할수록 더 빨리 폭발하게 된다. 하물며 만승(萬乘)의 군주인 천자가 자신의 욕망을 소통시킬 방도가 없겠는가? 그러므로 인의를 행하지 않아서 자신을 수양할 예법이 없고 마음을 기를 음악이 없음을 염려할 따름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인의의 감화를 받아 장중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육신을 통제하면 더욱 강하고 단단해질 것이다. 즐거움으로 자신의 기개를 씻으면 더욱 맑고 온화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욕망에 대해서도 달이 태양의 빛을 받지만 밝은 달이 떠오르면 달의 흐린 빛은 보이지 않게 되는 것과 같으니, 욕망이 정도(程度)를 넘어서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을까 염려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과다한 욕망에 빠진 이를 구제하기 위해서는 오직 인의를 행하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황로 사상은 인의를 찢어 없애고, 요·순을 비난하고, 유약한 태도로 세상을 사는 방식을 바꾸지 않은 채 구차하게 살아가니, 이것은 불을 끄려 하면서 물을 쓰지 않고 미리 건물을 철거하여 들판에서 노숙하면서 자신은 재앙을 당하지 않는다고 자랑하는 것과 같다. 급암은 잘못된 이단의 학설을 끼고 요·순을 비난하고 모욕하면서 군주에게 자신의 말을 따르라고 협박하고, 선왕이 겨우 남겨 놓은 훌륭한 전례(典禮)를 파기(破棄)해 버렸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의라는 것은 이미 요, 순, 삼대에 이미 쇠락해 버린 도덕이다. 仁義者, 乃唐虞三代已衰之德.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입만 열면 선왕의 도리를 비난하고……우리 군주가 잘하지 못한다고 여기는 것을 일컬어 군주를 해치는 행위라고 한다.言則非先王之道……吾君不能謂之賊.(《孟子》 〈離婁上〉)
이것은 급암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무제가 결국 유학을 숭상하며 정치에 적용하지 못하고 방사(方士)에게 미혹되어 신선이 되고자 했던 것은 사실상 급암이 계기를 열어주었다.
엄조(嚴助)는 이렇게 칭송했다.
“급암은 어린 군주를 보좌했으니, 맹분(孟賁)이나 하육(夏育)과 같은 용맹한 장수도 그 공적을 빼앗지 못할 정도이다.”
이것은 그저 기분에 치우친 말일 따름이다. 유안은 급암을 꺼리고 승상인 공손홍(公孫弘)을 경시했다. 그는 본래 황로 사상을 추종했으니 자신이 숭상하는 것을 외경(畏敬)하면서 유학을 경시했을 뿐, 정말 급암이 큰 절조를 지니고 있다고 믿거나 공손홍의 비루함을 알아챘기 때문은 아니었다. 군주가 어리면 백성이 우려하니 오직 인의를 행하는 사람만이 혼란을 끝낼 수 있다. 주공은 성대한 의례와 제사를 거행하니 어린 군주가 안심했다. 황로 사상의 절조를 견지하고 “(위대한 도는) 널리 퍼져 있어서 어디에든 이를 수 있으니” 어딘들 이르지 못하겠는가? 급암이 어찌 이런 소임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