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소설 평점 간론 – 소설평점의 변천 2

2) ‘룽위탕 본(容本)’과 ‘위안우야 본(袁本) 《수호전》 평점

만력 연간의 가장 가치 있는 소설 평본은 만력 38년(1610년)과 39년 경에 각각 간행된 ‘룽위탕(容與堂) 본’과 ‘위안우야(袁無涯) 본’ 《수호전》이라 해야 마땅할 것이다. 이 때는 리줘우(李卓吾)가 옥에서 자결한 지 이미 8, 9년의 시간이 흘렀기에 진위를 따지기 어렵다. 명말에서 지금까지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고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으며, 특히 근 10년이래 탐색이 더욱 심화되었다. 다만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은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는 ‘룽위탕 본’이 진짜라 하고, 어떤 이는 ‘위안우야 본’이 진짜라 주장하는데, 그들이 제기한 이유는 모두 근거가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상대방을 압도할 만큼 철저하지는 못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조성한 근본 원인은 현존하는 재료가 이미 기본적으로는 다 드러났음에도 이 문제를 철저하게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데 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 직면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기해도 무방할 것이다. 곧 리줘우는 만력 24년 경에 《수호전》 평점을 완성했고, 그 뒤에는 친구들 사이에 돌려보았다. 리줘우가 죽은 뒤에는 점차 넓게 유포되었는데, 혹은 전본(全本)이, 혹은 부분적으로 혹은 직접 평점 문장으로 흘러다녔다. 그러므로 만력 38년 이전에 리줘우의 《수호전》 평점은 이미 밖에서 나돌았을 것이고, 이에 서방 주인들이 그의 명성을 빌어 그가 평점한 것을 바탕으로 문인들을 청해다 모방하고, 더하고 고치고, 확충하고, 정형화해서 완전한 《수호전》 평점 본을 만들어낸 것이다. ‘룽위탕 본’은 혹은 예저우(葉晝)가 한 것이라 하고 ‘위안우야 본’은 혹은 위안우야나 펑멍룽(馮夢龍)이 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이러한 가설의 결론은 ‘룽위탕 본’이나 ‘위안우야 본’ 모두 리줘우의 진짜 평본은 아니지만, 동시에 모두 리줘우의 《수호전》 평본을 기초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는 그 가운데 리줘우의 정신과 혈맥이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소설평점사의 각도에서 말하자면, ‘룽위탕 본’과 ‘위안우야 본’은 사실상 진짜 리 씨의 손에 의해 나온 것인지 여부에 따라 그 가치가 폄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만력 시기 소설평점의 쌍벽으로 보는 것 역시 지나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두 판본이 이렇듯 확고한 지위를 얻게 된 것은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 기인한 것이다.

우선 만력 연간의 소설평점은 서방 주인의 통제 하에 상업성과 공리성이라고 하는 길을 따라 그 주도적인 실마리가 발전해왔다. 리줘우가 소설평점의 행렬에 가입한 뒤 이러한 틀거리가 깨졌는데, 다만 리 씨에게는 그가 한 것이라 믿을 만한 평본이 세상에 전하는 것이 없어 여전히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리줘우 평점의 정신 풍모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룽위탕 본’과 ‘위안우야 본’은 리 씨의 평점을 기초로 모방하고 발전시켜 확장한 것으로, 이로부터 참신한 면모가 소설평점사에 나타났던 것이다. 이것은 주체의 창조성과 감정이 투입된 비평 정신을 강화한 것으로 소설평점의 새로운 길을 연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후대의 진성탄(金聖嘆)과 마오쭝강(毛宗崗), 장주포(張竹坡) 등 평점의 대가들은 모두 이에 바탕해 소설평점을 발전시켰고, 이로부터 소설평점의 성가가 장대해졌던 것이다.

다음으로 ‘룽위탕 본’과 ‘위안우야 본’은 실제로 소설평점 형태의 틀을 잡았다. 일종의 독특한 비평 형식으로서 소설평점은 그 자체의 형태적인 특징을 갖고 있는데, 이러한 형태적인 특징은 또 그 자체의 발전 과정 속에서 점차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룽위탕 본’과 ‘위안우야 본’이 틀을 잡은 소설평점의 기본 형태는 다음과 같다. 첫머리(開首)에는 서(序)가 있다. 서의 뒤에는 전편을 총괄하는 문장 몇 편이 있는데, 이를테면 ‘룽위탕 본’에는 “사미승 화이린(小沙彌懷林)”이라 서(署)한 문장 네 편이 있고, ‘위안우야 본’에는 양딩졘(楊定見)의 <인(引)>과 위안우야의 <발범>이 있다. 본문 부분에는 미비(眉批)와 협비(夾批), 총비(總批)가 있는데, 이러한 형태는 후대 소설평점의 정해진 틀이다.

셋째 ‘룽위탕 본’과 ‘위안우야 본’은 고대 소설평점의 비평 함의 상의 변화를 완성했다. 만력 연간의 소설평점은 일반적으로 문장을 훈고하고 역사적인 사실을 소증(疏證)하는 것을 벗어나지 못했고, 소설에 대해 예술적이고 정감 있는 감상 평을 한 것은 그렇게 많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룽위탕 본’과 ‘위안우야 본’은 이러한 틀을 근본적으로 뒤바꿔 놓았다. 전체적인 경향으로 말하자면, ‘룽위탕 본’의 이론 비평적 가치는 ‘위안우야 본’보다 높은데, 왕왕 유리한 입장에 서서 가치 있는 이론적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그렇기에 ‘룽위탕 본’은 소설에 대한 구체적인 감상과 분석에서 자못 공력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특히 주의할 만한 것은 ‘위안우야 본’이 소설평점사상 비교적 이른 시기에 팔고문법을 차용해 소설문법을 귀납한 비평 저작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제기한 ‘서사양제(叙事養題)’와 ‘역법(逆法)’, ‘이법(離法)’ 등은 큰 가치는 없지만, 소설평점사에서 문법을 총결한 하나의 단초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소설평점의 탄생은 그 최초의 동기가 소설의 유포를 촉진하기 위한 것이었기에, 분명하게 상업적인 목적을 띠고 있었다. 이것은 중국의 고대소설과, 특히 통속소설 특유의 예술 상품적 성질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소설평점은 서방 주인의 통제 하에 항상 주석으로 소통하고 인도하는 것을 그 주체로 삼았고, 그 목적 역시 주로 독자, 특히 하층 독자의 열독을 돕는 데 있었다. 이것이 만력 연간 소설평점의 주류였다. 문인들이 참여함에 따라 소설평점은 이론 비평적 차원에서 분명하게 향상되었다. 다만 최초에 문인들이 소설평점에 종사했던 것은 오히려 소설을 읽는 과정에서 마음으로 느낀 바를 기록하고 감정적으로 공감하는 바였기에 다른 사람들의 열독을 인도한다든가 방법을 전수하려는 뜻은 없었다. 이것은 소설평점이 성숙하고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인들이 소설을 읽는 과정에서 자기 감상적인 차원에서 마음으로 느낀 바와 상업적이고 공리적인 차원에서 열독을 인도하는 것이 결합되었을 때, 소설평점은 최종적으로 공공적인 성격을 띤 문학비평 사업이 될 수 있었다. 만력 연간의 소설평점 중에서 이러한 결합은 리줘우 평점 《수호전》이 ‘룽위탕 본’과 ‘위안우야 본’ 《수호전》 평점으로 공개적으로 출판됨으로써 완성될 수 있었다.

소설평점의 맹아 시기로서 만력의 소설평점은 그 이론 비평적인 성취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지만, 후대에 대한 영향은 오히려 매우 심각했는데, 특히 리줘우 등 저명한 문인들의 참여는 소설평점의 발전에 대해 더욱 큰 호소력과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만력 이후에 소설평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장대한 기세로 발전해 하나의 비평 형태로서 점차 중국 소설비평의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지위를 다진 것은 의심할 바 없이 만력 연간의 소설평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