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은 성격적으로 성실했는데,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로 착실한 사람을 좋아했다. 이를테면 언젠가 경향이 아주 심하게 다를 것 같은 젊은 작가와 공동으로 일을 하려고 하기에, 왜 저 사람하고 함께 하냐고 물으니, 그 남자는 다른 사람에 비하면 성실하다고 하는 것이 신용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는 착실하고―성실한 것을 가장 사랑했다. 이와 동시에 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대는 것을 싫어했다. 스스로도 항상 뭔가 일을 했다. 잡지의 편집도 열심히 하면서 부탁을 받으면 다른 사람의 번역 같은 것도 교정해주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게 가장 좋지 않다. 설사 네로와 같은 폭군이라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인간보다 낫다. 이 세상에 태어나 무위라고 하는 게 가장 의미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라오쯔老子의 “하지 않으나 하지 않는 것이 없다”라는 말은 사람을 기만하는 것으로 여겨 증오했다. 그는 그런 무위의 가르침을 설파하는 라오쯔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출관出關」이라는 소설로 라오쯔를 희화화했다. 나는 폭군 네로라도 좋으니, 적극적으로 무슨 일이건 하는 사람이 좋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중국인 중에서도 유한 지식인의 성격의 한 면에 있는 ‘무위’의 사상(나는 이것이 고래로 자연의 폭력에 대한 인간의 노력의 공허함이라는 인식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하는데)에 대한 그의 항의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어떻든지 간에 이 세상에서는 뭘 어떻게 하든지 뻔하다고, 자칫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중국을 언제까지나 애매하게 진보가 없는 나라로 만들어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부지런히 노력할 것을 극력 제창했다. 아무렇거나 뭔가를 하고 몰두해서 고생스럽게 일을 해나가는 것을 가장 귀중한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것을 중국인에게 강하게 요구했다. 또 스스로도 그대로 실행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알고 있을 무렵은 하루의 사분의 일 정도를 한 켠에 제쳐두고 있다고 했는데 정오 전에 일어나 [다음날] 동틀 무렵까지 독서를 하거나 집필하며 서재에 있었다. 언젠가 한밤중 2시 경에 나는 그가 살고 있는 빌딩(이층 이상은 주거 공간이었다) 아래 거리를 지나간 적이 있다. 그 빌딩의 다른 창은 모두 불이 꺼지고 잠들어 있었지만, 그의 집만 훤하게 전등이 켜져 있었다. 나는 선생이 아직 공부하고 있구나 하고 감탄하며 그의 창에서 나오는 불빛을 올려다보았다. 50여 세 된 사람이 밤늦도록 공부하고 있는 것은 젊고 게으른 나를 강하게 자극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언제나 책상에 들러붙어 있기만 하는 경직된 모습만을 장려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우인 졘런建人 씨가 이따금씩 들렀는데, [루쉰은] 곧잘 함께 영화관에 데려가 주었다. 아우는 직장인으로 하루 종일 얽매여 살았기에, 가끔은 기분전환 삼아 놀아야 한다고 말하며 위로했다. 영화 보러 갈 때 대체로 나도 데려가 주었는데, 실사 영화實寫映畫나 기록영화, 또는 문학작품을 영화화 한 것을 보았다. 또 가끔은 회화 전람회에도 갔었는데, 돌아올 때는 비어홀에도 들렀다. 어떤 때는 댄스홀을 구경하려고 하는데 가보지 않겠냐고 나를 꼬드겨, 쉬광핑 여사와 셋이서 구경한 적도 있다. 그냥 맥주를 마시며 잠시 구경했는데, 바보 같은 짓이라고 말하고 십분도 못 돼서 돌아왔던 것이 기억난다. 중국인이 하는 서양풍의 무용도 표를 받은 게 있다고 해서 함께 보러 간 적도 있는데, ‘천박하다肉麻’라고 말하고는 이것도 막이 오르고 5분도 지나지 않아서 돌아와 버렸다.
문학 이외에 그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회화였다고 생각한다. 골동품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었던 듯해서, 당시 그의 집은 어떤 방(이라고는 해도 빌딩의 일부로 세 칸짜리에 부엌이 있는 정도의)에도 장식품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액자에 들어 있는 판화가 덕지덕지 아무 방에나 걸려 있었다. 판화는 상당히 많이 수집했다. 외국 것은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 부탁해, 판원版元으로부터 주문해 들여왔고, 또 해외의 친우들로부터도 보내왔던 듯하다. 그로스(George Grosz, 1893-1959년)의 작품 등 대형의, 넘버가 매우 빠른 판화집도 가지고 있고 콜비츠의 것도 직접 그녀로부터(혹은 콜비츠의 지인이었는지, 또는 루쉰의 지인이었는지 간에 어떤 사람을 통해서인지) 보내왔고, 소련의 판화도 그 나라의 영사관(?)의 알선으로 중국 종이와 교환해 작자로부터 보내왔다고 들었다. 중국의 판화에도 애착을 가져 정전둬鄭振鐸와 공동으로 『베이핑전보北平箋譜』를 수집해 출판하고(출판할 때 나에게도 보내주었다), 『십죽재전보十竹齋箋譜』도 복각했다(이것은 그의 생전에는 완성되지 못했는데, 그 견본쇄 2책을 나에게도 보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