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阿Q正傳] 번역본을 살펴보면 ‘阿Q’를 ‘아Q’로 번역한 판본과 ‘아큐’로 번역한 판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말을 사랑하는 분들은 ‘아큐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한다. ‘아Q’로 쓰든 ‘아큐’로 쓰든 무슨 상관이 있냐고 반문하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루쉰의 세심한 문학적 의도가 숨어 있으므로 ‘아Q’로 번역하느냐 ‘아큐’로 번역하느냐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내포되어 있다.
우선 1930년 우리나라 최초로 [阿Q正傳]을 번역한 양백화(梁白華)는 원문 그대로 ‘阿Q’라고 썼다. 이후 정래동, 김광주, 화국량, 이가원 등이 모두 이를 따랐다. 초기에는 ‘阿Q’가 대세였던 셈이다. 이들이 ‘阿Q’에 내포된 루쉰의 세밀한 의도를 의식했는지 아니면 한자 또는 외국어 고유명사를 원어 그대로 써주던 당시 관행을 따랐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부터 [阿Q正傳] 번역에 나선 분들, 즉 장기근, 허세욱, 김시준 같은 분들은 모두 ‘아큐’라고 번역했다. 심지어 1980년 정성환은 ‘아큐우’라고 쓰기도 했다. 1970년대부터 한글 전용 운동이 본격화하면서 외국 고유명사를 순우리말로 표기하려는 경향에 따른 것이 아닌가 한다. 어쩌면 번역자분들은 ‘阿Q’ 또는 ‘아Q’로 썼는데 출판사에서 한글 전용 원칙에 따라 일괄 ‘아큐’로 고쳤을 가능성도 있다.
1980년 이후 국내 루쉰 읽기가 세밀화하면서 전공 학자들 사이에서 ‘阿Q’를 ‘아Q’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세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阿Q正傳] 뿐만 아니라 루쉰의 전체 텍스트를 읽어보면 루쉰이 만주족 풍습인 변발에 대해서 엄청난 반감을 가졌다고 한다. 실제로 루쉰의 소설 [머리털 이야기(頭髮的故事)]는 직접 변발을 다룬 소설이며, 루쉰의 [자제소상(自題小像)]이란 시도 변발을 자른 기념으로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루쉰 문학에서 변발은 타율, 압제, 무지, 굴종의 상징으로 묘사되고 있다.
흥미롭게도 영어와 프랑스어에 ‘queue’란 단어가 있다. 발음이 ‘Q’와 똑 같다. ‘queue’의 뜻이 바로 ‘변발, 꼬리, 줄’ 등이다. 따라서 루쉰이 [阿Q正傳]에서 ‘阿貴’인지 ‘阿桂’인지 주인공의 본명을 알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아Q’로 썼다고 한 진술은 기실 문학적 시치미라고 해야 한다. 순진한 독자는 흔히 작가의 문학적 시치미에 속는다. 즉 루쉰은 ‘queue’에 포함된 변발이란 뜻에다 ‘Q’자가 드러내는 변발 꼬리의 형상을 문확화했음에 틀림없다. ‘아Q’라는 번역과 ‘아큐’라는 번역에는 ‘阿Q’라는 문학적 상징을 제대로 읽어냈느냐 아니냐는 매우 큰 차이가 포함되어 있다.
루쉰의 문학은 이처럼 본질적이고 세밀하다. ‘아Q’와 ‘아큐’의 차이를 아는 일이야말로 루쉰 문학의 본질에 다가가는 출발점이라 할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