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이라는 면에서 내가 그와 접했던 것은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쇼와 6년(1931년) 3월부터 같은 해 12월 말까지인데, 매일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면 그의 집으로 가서 저녁때까지 그의 서재에서 지내는 일과 외에도 때로는 같이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고, 그림 전람회도 같이 가고, 비어홀에도 갔다. 또 나의 하숙에 와서, 콘 비프 깡통을 따고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그 뒤 나는 상하이를 떠나고 나서도 대체로 한 달에 두 차례 정도 그에게 편지를 썼고, 그때마다 답장을 받았다. 그렇게 하는 게 쇼와 11년(1936년) 그가 사거死去할 때까지 이어졌는데, 그의 마지막 편지는 죽기 4, 5일 전에 쓴 것이라서 내 손에 건너온 것은 그의 죽음을 라디오에서 알고 난 며칠 뒤였다.
편지는 주로 『소설사략』에 관한 질의와 응답이었는데, 별도로 서로 간의 가정의 근황을 알려주는 한 두 장도 반드시 첨부하는 것이 상례였다. 때로 아들인 하이잉海嬰 군의 사진을 보내준 것도 석 장이 있다. 또 나의 장남이 태어났을 때는 일부러 선물을 보내주었다. 그래서 나는 루쉰이라면, 아무래도 먼저 일상생활에서의 면모가 가장 강하게 떠오른다. 문장 속에서의 그보다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던 그의 모습과 목소리가 내게 먼저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런 일상의 그를 지금도 몸 가까이에서 느끼고 있는 나에게는 문장 속의 그가 다른 사람이라고까지 생각되는 일조차 있다. 하지만 그의 진면목은 물론 문장 속에서, 집필한 저작을 통해서 말하자면 공적 생활에서 찾아봐야만 할 것이고, 그의 작품을 읽는 것이 곧 진짜 그를 아는 것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이제 내가 일상적인 그에 관해 그 어떤 추억이나 인상을 써 본들, 그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데 아무 것도 더해줄 수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내가 루쉰 연구자에게 주의를 환기해 두고 싶은 것은 자신은 스타일리스트이지만, 아직 한 사람의 비평가밖에 그것을 감지한 이가 없다고 그가 말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를 문필가로서 볼 때, 스타일리스트로서의 붓놀림에 현혹되어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나 개인적으로는 내가 이제까지 접했던 어떤 사람―물론 일본인도 포함해서, 그 어떤 사람보다도 인간적으로 루쉰을 가장 존경하고 있으며, 친밀감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누차에 걸쳐 사람들에게 말했던 것이지만, 지금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문필가로서 그를 의식해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일상적인 사람으로서 직접 그와 친근하게 지내며 내가 받았던 감명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왜 그 정도로 존경하는 마음이 내게 각인되어 있는지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물론 나 자신을 위주로 한 주관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나에게 그는 어떤 말도 할 수 있고, 또 어떤 것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성실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상당한 정도로 가깝게 지냈고, 또 존경했고, 신뢰할 만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혹시라도 외람된 말인지도 모르겠지만)고 굳게 믿고 있지 않았다면, 그 어떤 것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어떤 것도 들어줄 수 있다고 믿고 있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나는 그의 죽음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의 의지처의 일부가 빠져나간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 정도로 나는 그냥 왠지 모르게 그에게 의지했고, 그에게 기댔던 거 같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중국에 관해 뭔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나오면, 나는 루쉰에게 편지를 보내 묻는 등 말하자면, 늘 곁에 두고 보는 사전과 같이 의지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