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제漢景帝
7. 한나라 초기의 부유는 상인을 곤욕스럽게 하는 데에서 시작했다
반고(班固)는 한나라 초기의 부유한 상황을 상세히 서술했다. 6국의 뒤를 이어 천하를 통일함으로써 전쟁이 종식되고, 관리가 줄어들고, 제사상의 차림도 간소화되고, 우역(郵驛)도 간략하게 설치되어 온 천하가 한 사람만을 섬기고, 한 명의 군주가 천하를 다스리게 되었다. 포백(布帛)이며 곡식, 재화(財貨)가 유통되고 국경 관문의 검색도 느슨해져 정체가 생기지 않으니 위아래가 모두 여유로운 것은 당연했다. 아! 후세의 천하가 한나라와 같다면 어찌 이렇게 빈약함을 걱정하며 위아래에서 끊임없이 번갈아 부세를 징수하겠는가! 반고가 그 근본적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 규명해 보니 부유는 정략과 검소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고조는 상인에게 비단옷을 입고 수레를 타지 못하게 하고, 조세를 무겁게 징수하여 곤욕스럽게 했다. 혜제(惠帝)와 여태후는 그런 금령을 완화해 주기는 했지만 상인의 자손은 벼슬길에 나아가 관리가 될 수 없었다. 관리의 봉록을 헤아리고 관청의 지출을 계산하여 백성에게 무세를 징수했다. 산천과 정원, 못, 시장의 조세 수입은 천자에서 제후왕까지 모두 각자의 영토에서 거둔 것으로 각자의 살림을 꾸렸고, 나라에서는 경비를 수령하지 않았다.”
이는 참으로 식견 있는 말이 아닌가!
더욱 중요한 것은 상인을 곤욕스럽게 하는 데에서 시작했다는 점이다. 상인의 지나친 사치는 백성을 그물질하여 탈취한 것으로서, 일곱 제후국에서 시작되었다. 일곱 제후국은 각기 군주가 자기 봉토를 지니고 있어서 물산이 많고 적고 차이가 있고 토산품도 달라서 봉토를 바꾼다 해도 좋아질 수 없었다. 잦은 전쟁 때문에 무기와 갑옷, 깃발을 쓸 일이 많았고, 풍성한 예물을 보내야 해서 진주며 상아, 조개껍질 따위를 시급히 구해야 했으며, 떠도는 인재[遊士]를 빈객으로 모심으로써 명성을 날리려 했기 때문에 그들을 대접하는 잔치의 상차림도 사치스러웠다. 게다가 교만하고 사치스러운 군주는 후궁의 장식과 개, 말, 기러기, 사슴, 화려한 복장, 진귀한 완상품(玩賞品) 등을 매일 새로 바꾸는데, 이것들은 대부분 그 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었다. 이에 상인들이 험한 길을 지나 여러 나라를 오가며 물건들을 모아서 그들의 수요를 채워주었다. 군주와 대신도 자신을 굽혀 그들을 예우함으로써 원하는 물건을 얻고자 하니, 상인들은 천하에 거리낄 게 없었다. 그러므로 눈과 귀의 즐거움을 다하게 하는 완상품과 아침저녁으로 필요한 것을 얻으려면 상인의 이익을 장려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고, 가난한 이들도 그것을 통해 조금 혜택을 입었다. 상인은 나날이 존귀해지고 영화를 누렸지만 이윤을 싹쓸이하면서 다른 이들의 의식(衣食)을 착취하여, 겉으로는 주는 척하고 은밀히 갈취했다. 천하의 이익은 천자가 지닌 큰 권한인데 상인에게 칼자루를 쥐어주었으니 천하가 어찌 가난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들은 노동하지 않고도 치부하여 쓸 때도 아까워하지 않으며 다투어 사치를 누리고, 하늘이 내린 물건들을 모조리 가져다가 썩어서 버리게 한다. 그들을 곤욕스럽게 하지 않으면 어리석은 백성은 그런 행태를 영화롭다고 생각하고 서로 본받으려 하여 결국 집안에 곡식 한 말도 없으면서 비단옷을 걸치고 진수성찬을 먹다가 굶어 죽어서 길거리에 나뒹구는 신세가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백성을 먹여 살리는 것은 농업이고, 백성을 죽이는 것은 상업이다. 무도한 세상에서는 서로 죽음으로 이끌어도 구제해 주지 않고, 위아래가 서로 갈취하려 드니 결국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을 징계하지 않으면 나라는 당연히 제대로 설 수 없다. 고조의 조령(詔令)과 반고의 말은 참으로 그 본질을 아는 계책이 아닌가!
군주가 상인을 중시하면 나라의 근본이 쇠퇴하고, 사대부가 상인을 중시하면 염치를 상실하게 된다. 허형(許衡)은 스스로 유학자라고 여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대부가 탐욕이 없기를 바란다면 장사를 해 보는 것이 가장 좋다. 士大夫欲無貪也, 無如賈也.
양유정(楊維楨)과 고영(顧瑛) 등은 결국 지나치게 과시하다가 삼오(三吳)의 풍속을 망쳐 버렸다. 임호(臨濠, 지금의 안후이성[安徽省] 펑양[鳳陽]에 속함)와 사주(泗州, 지금의 쟝쑤성[江蘇省] 쓰홍[泗洪] 근처)로 옮겨가서 흥왕(興王)의 벌을 받은 후 천하가 비로소 안정되었다. 풍속을 바꾸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