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의 인상 5

  나는 당시 매일 3시간가량 그의 서재에서 책상 하나를 두고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서 공부를 지도받았는데, 틀니를 하고 있던 그는 때로 발성이 불편해 입가의 거품을 내게 내뿜어댔고, 또 때로는 사타구니 부근을 긁어대다가, 혼자 뱃속에서 키득키득 웃어가며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나에게 비춰진 일상생활을 통해 본 그는 그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때로는 잡담이 섹스 문제까지 나아가는 바람에 적나라한 인간으로서 그의 면모를 보기도 해서, 아무래도 나로서는 일상생활을 통해 보는 루쉰이라는 사람은 의지할 수 있는 아저씨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대체로 일주일에 두 번은 그의 가족과 함께 집안의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었다. 식전에는 항상 소량의 술을 먹었는데, 그는 술을 먹으면 서글퍼진다고 해서 별로 마시지 않았다. 또 많이 마시면 난폭해진다고도 말했다. 젊었을 때 술을 마시고 식칼을 휘둘렀다고도 했다. 아무튼 그런 루쉰은 나에게 시정의 보통 사람으로밖에 비춰지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또 비범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은 권력에 굴하지 않고, 권력의 압박이 있어도 결연히 싸우며 타협하지 않는 정신―거듭 그것과 싸우고 또 싸워나가는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 때문이다. 내가 출입하고 있을 때였는데, 아마도 정부 측이 그를 이용하려 했던 것일 텐데, 체포령이 내려져 은신하고 있는 그의 거처로 은밀히 당시 행정원장의 심부름꾼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행정원장이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하지만 그때 그는 면회를 거절했다. 행정원장으로부터의 면회 신청을 시정의 일개 문인으로서 게다가 체포령이 내려진 신분이면서 거절한다는 것은(행정원장은 일본에서는 총리대신에 해당하며, 그 행정원장과 연락해서 같이 일을 도모하면 그의 신변의 구속은 당장 풀렸을 텐데) 권력에도 굴하지 않는 그의 강인함을 떠올리게 해, 왠지 모르게 인간으로서의 위대함을 느끼게 된다.

  그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평생 권력과 맞섰고, 권력과 타협하지 않는 강인함을 가졌으며, 그래서 항상 압박 받는 자의 입장에 서서 전투적인 행동(겉보기에는 문필 활동이었지만)을 견지했다는 것이다. 그 즈음 그는 어떤 빌딩의 3층에 살고 있었는데, 체포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거리 쪽으로 난 하나뿐인 창 쪽으로 나가지 않았다. 상하이의 여름은 무더워서, 나는 휴식 시간이 되면 창 쪽으로 의자를 갖고 나가 시원한 바람을 쐬었고, 또 거리를 왕래하는 정경을 내려다보면서 피로를 풀었는데, 그는 항상 창으로부터 세 자 정도 떨어진 안쪽에 걸터앉아 거리 아래쪽으로부터 올려다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이 알아채는 것을 경계하며 창가에는 결코 다가가지 않았다. 뭐가 됐든 자유롭지 않은 생활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가만히 그것을 감내하고 권력을 등에 업은 정치를 익명으로 풍자하고 공격하는 문장을 계속 써나갔다. 창가에도 다가가지 않는 그 완고할 정도의 끈기는 대단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나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일본에서는 잘 모르는 듯하고, 그런 사람이 살고 있는 중국의 사정에 관해서도 일본에서는 잘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루쉰이 걸었던 족적을 더듬고, 근대 중국의 성장을 소개하기 위해 『가이조改造』 잡지에 「루쉰 전魯迅傳」이라는 글을 썼다. 하지만 이것이 일본의 잡지에 나왔을 때는 익명의 평자가 ‘이웃집 보리밥은 맛있다’라는 식으로 정리해 주었다.

  그 즈음은 아직 루쉰이라고 하면 일반에서는 잘 알지 못했고, 나의 그 「루쉰 전」이 나온 잡지 광고를 보고 젊은 시절 중국에 갔던 적이 있는 나의 백부는 ‘노魯가 성이고 신전迅傳이 이름’이라고 사촌동생에게 설명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