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샹老向(1901∼1968년)
본명이 왕샹천王向辰으로 산문과 수필집 『서무일기庶務日記』, 『황토니黃土泥』 등이 있다.
나는 베이징을 좋아해서 베이징에서 30년을 살았다. 하지만 베이징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베이징은 천 년 쯤 된 늙은 나무와 같아 백여 만 시민들은 나무좀벌레에 비할 수 있다. 나무가 설사 구멍이 나서 빈껍데기가 되더라도 작은 벌레들이 맛보는 것은 기회가 그에게 부여한 가지 위의 작은 것들이다. 근간根幹의 형태나 맥락의 연관, 심어진 세월, 영양분의 유래 등은 작은 벌레가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래서 내가 베이징에 오래 살았다고 해도, 베이징에 대한 인식 역시 그다지 믿을 만하지 않은 단편적인 이해에 지나지 않는다.
베이징은 바다와 같이 위대해서 공간과 시간의 구분이 없는 듯하다. 여기에는 고금古今이 한데 어우러져 있고, 신구新舊가 공존하며 극단적으로 충돌하고 모순을 이루는 현상이 있음에도 그 안에서는 태연하게 받아들여지고 부조화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이를테면 교통수단이 그러하다. 똑같은 성문 안에서 최신식 자동차나 전차와 간편한 자전거가 드나드는가 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륜마차나 무거운 것을 실은 조악한 노새 수레나 혹은 밀기도 하고 혹은 끌기도 하는 인력거 역시 동시에 드나들고 있다. 가장 기괴한 것은 이런 신구의 차량들 속에 알록달록한 가마와 나귀에 실은 짐, 심지어 서너 대 가량의 실린 냄새 풀풀 풍기는 똥차가 섞여 있다. 그래서 차부들이 큰소리로 “실례합니다! 비켜주세요! 조심해요!” 라고 소리치는 가운데 나팔 소리, 발목 방울 소리, 길을 다투며 서로 욕하는 소리와 경찰이 단봉으로 좌우를 지휘하는 것 등등이 같은 시간 같은 곳에 존재하고 있다. 절묘한 것은 욕하는 이는 욕하는 것에만, 소리 지르는 이는 소리 지르는 일에만 몰두할 뿐 결국 바람이 자고 파도가 고요해지듯 서로 갈 길을 가면서 누구도 다른 누구를 탓하지 않고, 누구도 다른 누구를 없애려고 하지 않는다.
차량을 언급하다 보니 문득 인력거꾼이 떠오른다. 사회의 표면에서 활동하는 이들 가운데 인력거꾼이 첫 손가락 꼽힌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일단 베이징에 오면 우선적으로 접촉하는 게 인력거꾼이다. 그들은 출신성분이 다양해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고, 그들의 생활의 곤고함 역시 형용할 수 없다. 하지만 그가 땀을 얼마나 흘리고 얼마나 힘을 쓰든지 간에 그는 절대로 불손한 태도로 그대에게 동전 한 닢을 강요할 수 없고, 그대가 내켜서 그에게 한두 닢을 주면 그는 단전으로부터 울려나오는 목소리로 그대에게 진심어린 고마움을 표할 것이다. 사람들이 가장 난감해 하는 것은 때로 그들이 인력거꾼으로 전락하게 된 자신의 내력을 읊어대거나 여덟 식구를 부양해야 한다고 떠들어대는 것과 차비가 다 떨어지는 이야기를 할 때는 오히려 찻집에 앉아 차를 마시는 한적과 유머의 말투를 구사하는 것이다. 것이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단련이 됐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베이징에서 먹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주 예술적이다. 부잣집은 논외로 치기로 하자. 보통 사람들의 경우 베이징에서 반년 정도 지내다 다른 곳으로 가게 되더라도 불편함을 느낀다. 기름과 소금을 파는 가게, 돼지고기 점포, 쌀과 석탄을 파는 가게가 한데 모여 있으면서 적절하게 분포해 있는 것이 관청에서 통제해 개설한 것 같이 어느 곳에 살더라도 ‘생필품’(원문이 ‘開門七件事’이다. 뜻은 ‘문을 열고나서면 일곱 가지 일’ 정도가 될 터인데, 여기서 ‘일곱 가지 일’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일곱 가지 필수 품목인 땔감柴、쌀米、기름油、소금盐、장酱、식초醋、차茶를 가리킨다.)을 살 수 있어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밥 한 끼 먹는데 천금을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주인은 당연히 인간계의 신선이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막벌이꾼 한 명이라면 동전 열 닢이나 스무 닢이면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다. 두 닢의 양념으로는 기름과 소금, 장, 식초가 있고, 여기에 샹차이香菜도 곁들일 수 있다. 하지만 똑같은 워워터우窩窩頭(원문은 ‘玉米麵窩窩頭’로 옥수수가루와 찹쌀가루를 섞어 반죽한 뒤 둥글게 빚어 쪄낸 것. 베이징 사람들이 즐겨 먹는 간식거리) 이라도 다완茶碗 크기의 것이 동전 두 닢인데 작은 술잔 만 한 것이 은전 1각이나 하는 것도 있다. 사물은 사람에 따라 귀해진다고 일괄적으로 논하기 어려운 데가 있는 것이다. 각 지역마다의 특수한 요리와 각각의 계절마다 절기에 맞춰 나오는 물품들에 길거리에서 파는 주전부리가 사람들의 눈을 어지럽혀 분간해내기가 쉽기 않다. 먹거리 간판과 손님의 이목을 끄는 물건(여기서 간판과 물품이라 한 것은 원문이 ‘幌子’와 ‘喚頭’이다. 전자는 가게마다 내거는 일종의 간판 대용으로, 국수집에서는 색종이를 국수처럼 오려 내걸고, 환전상은 나무로 엽전 모양을 만들어 내걸고, 여관에서는 싸리비를 매달아 놓는 등등을 말한다. 후자는 행상들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자신들이 파는 상품을 상징하는 물품으로 소리를 내는 것을 가리킨다.)들만 해도 한 사람이 평생 연구할 만한 거리가 된다.
베이징의 거리는 반듯반듯하고, 정원은 널찍하다. 집집마다 나무와 꽃이 있고, 날마다 해를 볼 수 있다. 세계 어느 도시가 이에 비길 것인가? 유럽식의 다층 건물이라도 눈이 번쩍 뜨이지 않고, 옛날 식 대문이라도 누추해 보이지 않는다. 매끄러운 마루와 투명한 유리에서 사는 게 종이 바른 창과 벽돌 바닥보다 좋아 보이지 않는다. 베이징은 어떤 것도 융화시킬 수 있고, 어떤 것도 조화시킬 수 있는 듯하다. 그래서 황궁이 우뚝 솟아 있는 바로 옆에 외국의 조계가 존재할 수 있고, 시골보다 못한 작은 후통도 존재할 수 있다. 담장 하나 사이 두고 도시와 시골을 나누고 고금을 나타내며 그것들을 합쳐도 충분히 자연스러울 수 있다.
인물 역시도 그러하다. 허벅지를 드러낸 아가씨와 전족을 한 여인이 나란히 서서 걸어가고 있다. 각자 그 나름대로 누구도 다른 누구를 뭐라 하지 않는다. 성인 같은 학자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시골뜨기가 한 자리에서 차를 마시면서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전등과 등잔불이 하나의 방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각자가 제 각각의 불빛을 내뿜고 있다. 가장 경이로운 것은 법령상 금지하는 일인데, 이런 일은 반드시 공공연하게 존재하고 있다. 무릇 법령이 금지하는 사람도 반드시 공개적으로 활동한다. 그래서 경찰들이 베이징의 괜찮은 점을 최대한 말할 수 있고, 여러 가지 도둑의 무리도 베이징에는 모자란 거 하나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대가 달리 등급을 나누고자 한다면 어려울 것이다.
일을 하노라면 오락이 없을 수 없다. 베이징의 오락장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인력거꾼이 인력거 발판에 앉아 베이징 풍의 노래 두어 마디를 부름으로써 만족할 수 있다. 스차하이를 구경하고, 톈탄까지 걸어가는 것도 돈이 들지 않는다. 주인은 집안에서 수천이나 수만의 돈을 잃거나 따고, 하인들은 창밖에서 몰래몰래 골패 짝을 던지는 것도 각자의 본분을 잃지 않는 오락이다. 오락의 도라는 것도 가지가지라 누구도 또 다른 누구에게 강권할 수 없다. 아무튼 희한한 것은 어찌 되었든 누구라도 자기가 원하는 오락을 할 수 있다는 것이고, 결국 누구도 베이징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런 사소한 문제들은 집어치우고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이야기해보자. 출가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굳이 명산을 찾아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성 안에 고찰古刹이 있고, 고승高僧이 있다. 학문을 하고자 한다면 더 쉽다. 각급의 학교와 각종의 학자와 명사들이 그에 걸맞은 사우師友를 가질 수 있다. 골동품을 연구하고자 한다면, 골동품 점들이 연이어 있어 시간을 죽일 수 있다. 곳곳에 있는 벽돌 한 개, 돌멩이 한 개, 풀포기와 나무 한 그루에도 풍부한 역사가 담겨 있을 수 있어 보면 볼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온다. 도심에 사는 게 지겨워 성문을 나서면 바로 시골마을로 전원이 있다. 시산西山에 오를 수도 있고, 위취안玉泉에서 물을 마실 수도 있다. 평민이 되기 싫으면 고궁에 가서 반나절 동안 면류관 없는 황제 노릇을 해도 괜찮다. 이런 일들에 흥미가 없다면,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미묘한 언어를 몇 차례 더 듣고 인간의 정취를 좀 더 함양할 수도 있다. 인류의 가장 진지한 우스갯소리라면 내가 아는 한 베이징이 가장 농후하기 때문이다.
무릇 베이징에서 살아본 적이 있다면, 대부분 베이징이 ‘좋다’로 말한다. ‘어떻게 좋으냐’, 혹은 ‘어떤 점이 좋으냐’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베이징을 칭찬하는 것은 쉽지 않다. 베이징은 너무나 위대하기 때문에.
1936년 5월 12일
상하이의 객사에서
1936년 12월 우주풍사宇宙風社 출판『북평일고北平一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