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원李家源 역 『노신소설선: 아Q정전』

1946년에 김광주와 이용규가 『魯迅短篇小說集(루쉰단편소설집)』(1,2집)을 낸 후 1950년대에는 루쉰 작품 번역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한국전쟁의 여파가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친 결과가 아닐까 한다. 그러다가 1963년 이가원이 루쉰 소설 대표작 10편을 번역하여 『魯迅小說選(노신소설선): 阿Q正傳(아큐정전)』(정연사)이란 제목으로 출간했다. 끊어질 뻔 한 루쉰 문학 번역사의 명맥을 이은 매우 중요한 책이다. 이후에도 이가원은 루쉰의 글을 계속 번역하여 1975년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불후의 업적을 남겼다. 그의 1975년 업적은 따로 소개할 자리를 만들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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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원(李家源) 역 『노신소설선: 아Q정전』, 정연사, 1963

이가원 번역 『노신소설선: 아Q정전』은 자칫 공백이 생길 뻔한 루쉰 문학 번역사를 이었다는 중요성 뿐만 아니라 번역 원칙에서도 주목할 만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앞에서 화국량의 번역을 소개할 때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즉 화국량이 중국 출신 화교로서 1971년에 중국 남방 발음으로 중국의 인명과 지명을 표기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가원은 1963년에 이미 남방 발음이 아니라 베이징 표준음으로 중국의 인명과 지명을 표기하고 있다. 아직도 번역할 때 이 부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를 두고 설왕설래가 있지만 지금은 대개 중국어 원음 표기를 원칙으로 삼고 있다. 아마 1963년 무렵에도 이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던 듯하다. 재미있는 점은 이가원이 1963년에 이 책을 출간할 때는 중국어 원음 표기 원칙을 지켰지만 1970년대 이후에는 다시 한국 한자음 표기로 되돌아갔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해묵은 논란을 이가원의 번역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이 책의 제본과 장정 방식이다. 책 크기가 128×187 정도이므로 4.6판(B6판)에 속한다. 이는 포켓판 또는 다이제스트판이라고도 불리는데 소품 계열의 시집이나 수필집 등을 낼 때 흔히 사용한다. 책이 비교적 작기 때문에 휴대하기 편리한 장점이 있다. 당시 출판사나 번역자가 독자를 배려한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을 구입한 후 택배 포장을 뜯고 나서 놀란 점은 책의 장정이 너무나 아름답고 격조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래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4.6판의 아담한 표지는 하드커버이고 그 밖을 표지와 똑 같은 그림과 글씨로 커버를 만들어 씌웠다. 물론 처음에 본 것은 커버였지만 커버를 벗기고 드러난 표지 속살에는 처음 출간할 때의 은은한 색채와 질감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초록색 바탕에 칼날 같은 대나무 잎과 빨간색 테두리로 감싼 ‘阿Q正傳’ 예서 글씨는 그 자체로 완벽한 예술 작품이었다. 나는 누가 장정을 했는지 너무나 궁금하여 책을 뒤적이다가 목차 뒤에 ‘만화 펑쯔카이(漫畫 豐子愷), 장정 서세옥(裝幀 徐世鈺)’이란 표기를 발견했다. 어쩐지… 서세옥은 호를 산정(山丁)으로 쓰는 유명 화가다. 동양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해내며 혁신적이고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했다. 1929년 생인데 지금도 아마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안다. 루쉰이 자신의 책을 출간할 때도 제본, 제목 글씨, 표지 그림, 삽화 등 어느 하나 소홀히 하지 않은 것처럼 이 책도 출판과 연관된 모든 업무에 정성을 다했다. 나의 장서 중에서 나는 이 책을 최고의 명품으로 꼽는다.

그리고 이 책의 삽화도 주목해야 한다. 아쉽게도 「아Q정전」 대목에만 들어 있는 삽화의 작가는 펑쯔카이(豐子愷)다. 펑쯔카이는 루쉰과 마찬가지로 중국 저장성(浙江省) 출신인데 흔히 중국 만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중국 현대의 저명한 화가 겸 수필가다. 그는 매우 따뜻한 시선과 색채로 중국 하층민의 삶을 진솔하게 그렸다. 그는 홍일대사(弘一大師) 이숙동(李叔同)이 출가하기 전 제자다. 홍일대사는 특히 중국 근현대 연극계를 쇄신한 사람으로 불교계에서도 도력 높은 스님으로 인정받고 있다. 펑쯔카이와 루쉰의 관계는 또 다른 지면에 소개해야 할 정도로 재미있고 감동적인 스토리가 얽혀 있다.

나는 대학 3학년 때 전공 수업에서 「아Q정전」 원문을 완독했다. 루쉰 필치의 매력을 원문으로 맛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나중에 번역문을 읽어보면서 역시 원문을 읽는 맛만 못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사실 원문의 맛을 그대로 살린 외국문학 번역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모든 외국어에 능통할 수는 없으므로 결국 불가능한 번역을 통해 가능한 문학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불가능의 가능’이 바로 외국문학 번역이 아닐까 한다.

대학 3학년 전공 수업 「아Q정전」 교재가 하정옥(河正玉)이 주석을 단 판본이었는데, 번역문은 없지만 아주 꼼꼼한 주석이 붙어 있어서 「아Q정전」 이해에 큰 도움을 받았다. 나는 지금까지도 세계를 통틀어 이보다 더 세밀하고 정확한 「아Q정전」 주석을 보지 못했다. 이 하정옥(河正玉) 주석본 『아Q정전』에서 나는 펑쯔카이의 그림을 처음 보았다. 나중에 이가원 역 『노신소설선: 아Q정전』에도 똑 같은 그림을 보고 펑쯔카이의 존재를 더욱 분명하게 인식했고, 이를 계기로 펑쯔카이에 관한 자료를 다양하게 섭렵했다.

번역자 이가원은 한국 고대문학, 한국 고대소설, 한문학 등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일대종사(一代宗師)로 인정된다. 그야말로 한 세대를 아우르는 독보적인 존재라는 뜻이다. 특히 연암 박지원에 관한 연구는 이가원에 의해 본격화되고 심화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꽤 많은 집안의 근현대 묘갈문이 이가원의 손에서 나왔다. 우리 고향 마을 항일 순국 열사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 선생의 손자(金礪來) 묘갈문도 이가원이 지었다.

이가원의 호는 연민(淵民)이다. 그의 생년이 1917년이니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 인터넷 자료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23세까지 고향인 안동 예안(퇴계 종택이 있는 상계 마을)에서 한학만 공부했다. 이후 상경하여 당대의 천재로 일컬어지던 정인보, 최남선, 홍명희와 교유하며 청년 문장가로 명성을 날렸다. 일제 강점기에 명륜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이후 성균관대학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0년대에 성균관대 교수로 재직하던 중 당시 총장 김창숙 선생과 함께 이승만 독재에 반대하다가 해직되었고, 1960년대부터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 초빙되어 정년 퇴임할 때까지 재직했다. 퇴임 후에는 단국대 동양문화연구소와 퇴계연구소 설립에 참여했다. 2000년 세상을 떠난 후 단국대에서는 ‘연민기념관’을 설립하여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그는 퇴계 후손으로 어릴 때부터 한학에 전념하여 한문에 무불통지였고, 일제 강점기에 자랐으므로 일어도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문에 능통하였으니 마음만 먹었다면 현대 중국어도 쉽게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일설에는 1950년대 성균관대학교 중문과 학과장을 맡은 적도 있다고 한다. 그는 중국문학에 대해서도 꾸준히 관심을 기울이며 관련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그가 쓴 『중국문학사조사』는 우리나라 중국문학사의 초기 저작에 해당한다. 그의 계속된 루쉰 작품 번역에 관해서는 또 다른 글로 보충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