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를 중원과 변방으로 나눈다면, 황태자는 중원의 궁궐에서 출생하지만, 창업군주는 변방에 출생하여 중원을 점령함으로써 제위에 오른다. 자금성을 보더라도 그렇다. 초원의 아들 쿠빌라이가 변방에서 태풍을 일으켜 베이징에 깃발을 꼽아 원나라의 대도(大都)를 세웠다. 동북의 거친 삼림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은 명나라라는 사슬을 끊고, 허투아라 동경성 선양을 거쳐 산해관을 통과해 자금성을 차지해 대청제국을 이루었다. 변방에서 솟아오른 토네이도가 자금성을 삼켰으니, 자금성은 중원의 중점이지만 변방의 정점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현재의 중국도 강골로 성장한 것은 변방이었다. 중국 공산당이 창당된 것은 대도시인 상하이였다. 그러나 1927년 4월 장제스가 4.12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원과 진보인사를 무차별로 살해하면서 대도시에서 완전히 축출하다시피 했다. 마오쩌둥은 장시성의 징강산(井岡山)이란 변방으로 도피했고 이곳에서 토지혁명과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세력을 키워갔다. 그리하여 1931년 11월 장시성 남부 루이진(瑞金)에서 마오쩌둥을 수반으로 하는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선포했다.
공산당이 부활하자 1930년 12월 장제스의 토벌이 다시 시작됐다. 4차까지 잘 막아냈으나 장제스가 총력을 기울인 5차 토벌전에서 질식상태까지 몰렸다. 그들은 혁명의 수도 루이진을 포기하고 탈주하기로 했다. 1934년 10월 시작하여 변방에서 오지로, 오지에서 변방으로 죽음의 행군을 계속했다. 마오쩌둥과 홍군이 12,500킬로의 행군, 그들 말로 ‘장정(長征)’이 끝난 곳은 섬서성 북부의 우치(吳起)라는, 또 다른 변방의 황토고원이었다. 척박한 변방에서 다시 살아난 마오쩌둥의 공산당과 홍군은 새로운 혁명수도 옌안(延安)을 발판으로 결국에는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변방에서 힘을 키워 집중포격한 끝에 중원을 통째로 점령한 것 아닌가.
변방 이야기가 윈난에서 쓰촨으로 건너가는 시점에서 중국 현대사를 꺼냈다. 이 글을 연재해 오는 발상의 하나가 바로 변방과 중원이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최고의 권력은 중원이라는 공간을 차지하지만, 새 시대를 열고 새 왕조를 세우는 폭발적인 에너지는 변방에서 생장해왔다는 게 내 생각이다.
다시 쓰촨 지역에서의 장정으로 돌아가 보자. 마오쩌둥의 홍군이 윈난에서 창강을 건너 쓰촨에 첫 발을 내딛었다. 지역군벌과 이족(彛族)과 마주쳤다. 군벌들은 친분이 있는 류보청(劉伯承)을 보내 협상하여 전투 없이 통과했다. 이족 지역도 영악한 외교적 제스처가 성공했다. 류보청은 각 민족을 존중한다는 명분으로 노예제 추장과 형제의 결의를 맺고는 길안내까지 받아 통과했던 것이다.
그 다음엔 다두하(大渡河)에서 가장 극적이라고 손꼽는 루딩교(瀘定橋) 전투가 있었다. 다두하는 강폭이 100미터 전후로 넓지만 물살이 워낙 거세기 때문에 교각을 세울 수가 없었다. 루딩교는 열 세 가닥의 쇠사슬을 양쪽에 연결하고 상판으로 나무판을 깐 다리다. 국민당 군대는 상판의 판자를 걷어내고 동쪽 끝에 기관총 진지를 설치하여 지키고 있었다. 이른 새벽 루딩교에 도착한 홍군은 자원자 22인으로 돌격대를 조직하고는 주저없이 공격에 나섰다. 나무판으로 총알을 막으면서 쇠사슬에 발판을 하나씩 깔아갔다. 돌격대가 기관총 진지에 다가가서는 국민당 수비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여 진지를 탈취했다.
루딩교는 지금도 도보전용 다리로 남아 있다. 내가 다리를 걸어봤다. 사람이 저 건너편까지 쇠사슬을 타고 기어가 전투를 벌여서 승리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과연 그들을 이렇게 무모하고 용감한 전사로 만든 것은 무엇이고, 대단히 유리한 위치에서 기관총 진지를 탈취당한 국민당 수비대는 얼마나 무능한 군대였을까.
루딩교에서 북상한 마오쩌둥의 중앙홍군은 1935년 6월 자진산이라는 설산을 힘겹게 넘은 다음 드디어 장궈타오(張國燾)의 제4방면군과 합류했다. 양측의 선발대는 서로를 확인하고는 얼싸안고 춤을 추었다. 곧이어 본대가 도착하고 제4방면군이 중앙홍군을 위해 마련한 연회가 벌어졌다. 이로써 고난의 장정은 끝난 것 같았다. 그러나 장제스의 추격이나 설산과 협곡보다 더 위험한 내분이 발생했다.
한숨 돌린 마오쩌둥은 당 정치국 회의를 열어 쑹판을 공격하고 간쑤성을 거쳐 섬서성 북부로 진격노선을 결정했다. 그러나 권력에 시선이 꽂힌 장궈타오는 쑹판 공격에 나서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이러는 동안 장제스는 새로운 포위망을 치고 들어왔다. 홍군은 작전을 변경했고 이로 인해 마오의 중앙홍군은 최악의 습지대를 통과해야 했다. 습지를 통과하는 동안 많은 홍군들이 빠져 죽거나 굶어죽거나 병으로 죽었다. 어처구니없는 희생이었다. 장궈타오는 습지를 건넌 중앙홍군에게 다시 지휘권 문제를 제기했다. 마오쩌둥은 장궈타오를 홍군 총정치위원으로 임명하여 군사지휘권을 부여하고, 양 군대의 융합을 위해 지휘관 일부를 맞바꾸면서 내분을 봉합하려고 했다.
그러나 장궈타오의 욕심은 그 이상이었다. 공산당 창당시 조직 담당 대의원이었던 그는 말석에 있었던 마오쩌둥이 당 중앙이 되어있다는 현실을 거부한 것이었다. 그는 섬서성으로 북상하기로 한 당의 결정을 묵살했다. 군사지휘권을 발동하여 이미 습지대를 통과한 홍군에게 다시 남하하라고 명령했다. 게다가 마오쩌둥이 북상하면 공격하라는 비밀지령까지 하달했다.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쳐온 것이다.
장궈타오의 지령을 알아챈 마오쩌둥은 중앙홍군에게 다음날 이른 새벽 조용히 출발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장궈타오 측 사령관이었던 쉬창하오는, 북상하면 공격하라는 장궈타오의 명령에 주저하고 있었다. 부하들의 채근에도 입을 열지 않다가 중앙홍군이 상당한 거리를 가고 난 다음에야 “홍군이 홍군에게 총질하는 도리는 없다!”는 한 마디를 뱉었다. 마오쩌둥이 자기 인생에 가장 암흑 같았다고 회고한 것이 바로 이날, 1935년 9월 10일이었다.
장정의 목적은 장제스의 대규모 토벌전에 대항하기 위해 지역별 홍군들을 합류하여 대항하자는 것이었는데, 중앙홍군과 제4방면군은 합류했다가 다시 갈라서게 됐다. 중앙홍군은 7~8천의 병력으로 졸아든 채 북상하고, 장궈타오의 8만 군대는 쓰촨으로 남하했다. 위기를 비껴 나온 마오쩌둥은 곧 간쑤성으로 들어갔다.
위기 다음에 기회인가, 마오쩌둥은 적은 병력에도 불구하고 현지의 국민당 군대를 하나씩 격파하면서 무기와 탄약, 식량과 의복 등을 확보해 나갔다. 마오쩌둥의 중앙홍군은 1935년 10월 최종 목적지인 섬서성 북부에 도착하고, 류즈단과 시중쉰이 이끄는 섬서.간쑤 소비에트 정부의 환영을 받았다. 1년 가까이 변방에서 사선을 넘나들다가 드디어 목적지에 착지한 것이다. 루이진에서 옌안으로 혁명의 수도를 옮긴 마오쩌둥은 2차 국공합작을 끌어당겨 대일승전의 지분을 잘 챙겼고, 장제스가 도발한 2차 국공내전에서 최후의 역전승을 거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대로이다.
쓰촨의 고지대 초원과 설산, 험준한 계곡과 강을 건너던 답삿길을 돌이켜 보면서 두 가지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어느 산골에 세워진 장정 기념비에는 “이 치열한 전투에 2명의 당 영도자, 3명의 국가주석, 1명의 국무원 총리, 5명의 국방장관, 7명의 원수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1955년 중국 인민해방군은 별 2개 이상의 장군 245명에게 최초의 계급장 수여식을 거행했다. 이 가운데 222명이 장정에서 살아온 홍군 출신이었다는 기록도 아주 인상적이었다. 신중국의 머리와 몸체는 변방의 장정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중국 바깥에서는 마오쩌둥과의 수많은 갈등을 아무리 부각시켜도, 중국의 권력은 ‘마오쩌둥과 장정’이라는 범주 바깥으로 튕겨나간 적은 없었다. 묘하게도 오늘날 중국의 최고 권력자는 장정의 종착지에서 마오쩌둥을 맞이해준 시중쉰, 바로 그의 아들 시진핑이다.
그렇게 중원은 후계자를 낳았다. 새 시대는 변경에서부터 열린다고 한다면, 새 시대를 열어갈 미지(未知)의 에너지는 지금 변방 어디선가는 축적되고 있을까? 혹시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종이지도는 덮어두기를, 전통적인 변방은 이미 21세기적인 또 다른 변방으로 진화했을 지도 모르니.
중국여행객 윤태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