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호장룡의 책읽기 6 『새로쓰는 17세기 조선 유학사』

독창성 집착의 역설

심재훈 (단국대 사학과 교수)

연구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 누구나 자신의 연구 분야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의미 부여가 시대적 상황이나 연구자 개개인의 관점에 따라서 상당히 유동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타율성 짙은 근대라는 굴곡진 역사를 지닌 한국학의 경우, 그 독창성 혹은 특수성 발굴에 대한 집착이 논자에 따라서 그 학문 자체에 큰 부담을 지우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역설적인 상황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나는 조선시대 학인들의 주요 연구를 한국학만이 아닌 중국학의 관점에서도 재조명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문제는 송대와 명청대 중국의 방대한 학문에 대한 체계적 인식 없이 이런 식의 접근이 참 어렵다는 점이다. 역부족을 절감하고 있던 차에 만난 강지은의 [새로 쓰는 17세기 유학사](푸른역사, 2021)가 그래서 더 반갑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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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17세기 조선 유학사》 | 저자 강지은| 푸른역사 | 2021.4.9

그런데 이 책의 서두부터 일관되게 뇌리를 스친 감상은 기시감이다. 식민지 트라우마가 추동한 20세기 후반의 지나친 한국사 혹은 한국학 전반의 서술이 제자리를 찾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이미 업계에서는 거북하면서도 식상한 화두인지도 모르겠다. 강지은의 책은 조선시대 유학사 혹은 사상사 방면의 유사한 문제 제기이다.

이 책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조선시대에 주자학에 반한 학문은 존재하지 않았다”이다. 기존 한국 학계의 조선 주자학에 대한 비판적(독창적) 요소 집착과 상정, 이를 통한 내재적 근대성 찾기에 대한 반론이자 그 원인 탐구인 셈이다. 일본의 식민지 학자들이 세운 연구 틀이 20세기 후반 한국사 연구의 방향을 제시했듯이, 유학사 연구 역시 그 불가피한 반작용으로 지나침이 있었다는 얘기다.

2013년 완성한 저자의 도쿄대학 박사학위논문을 토대로 한 듯한 이 책은 이미 일본어(2017)와 중국어(2020)로도 출간되었다. 일본과 중국에서 상당한 호평을 받았으리라 짐작되는데, 국내의 출간이 좀 더 빨랐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 아쉬움을 반영하듯 이 책이 국내에 출간되기 전부터 비판이 제기되었던 것 같다.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결국 조선의 유학이 “비독창적”으로 읽힐 수밖에 없는 우려와 함께, “주자학 vs. 반주자학”이라는 구도가 국내 학계에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주종이었던 모양이다. 저자는 이 책의 “한국어판 후기”에서 이러한 비판에 대해 나름대로 답변하고 있다.

나는 비전공자의 입장에서 이 책에서 세 가지 중요한 시사를 받았다. 그 첫 번째가 이토 진사이나 오규 소라이 같은 도쿠가와 유학자들과 조선의 주자학들에 대한 비교이다. 나름대로의 논거로 주자학의 논지를 그럴듯하게 반박하는 일본 학자들의 주장이 멋있어 보이고, 사실 동아시아 개설사 수업에서 그 부분을 강조하기도 한다. 거기에 상대적으로 조선 주자학자들의 디테일한 사변적 논의는 소모적으로 보일 여지마저 느껴진다. 저자는 이러한 차이가 이미 금과옥조처럼 주자학을 내면화해버릴 수밖에 없었던 조선과 한 발자국 떨어져서 그 학문의 일용성을 따져볼 수 있었던 도쿠가와 일본의 상이한 사회정치적 여건에서 발생했다고 본다. 양국 유학자들의 세계가 확연히 달랐기에 이를 우열의 관점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78-82쪽).

두 번째는 조선 주자학자들의 입장에 대한 저자 나름대로의 해명이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주자학이 제시한 도통의 계승자로서 책임 의식이 강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새로운 견해가 주자학적 사상체계를 더욱 완비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증명해야 했다. 조선 유학자는 사실 이러한 포부를 안고 정치적인 위험성을 무릅쓰고서라도 주희가 미완성으로 남겨둔 일을 완성함으로써, 도통의 적류嫡流임을 확고히 하고 그 책임을 완수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138-139쪽)

그러므로 그들의 주자학 연구는 독자적 창견보다 정밀함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세 번째 논점이다. 저자는 예컨대, 송시열의 유지를 받든 한원진(1682-1751)의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考]를 다음과 같이 주목한다: “주희의 다양한 문언을 ‘정론’에 비추어 보아 그 이전 설은 ‘오류’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각각의 서간문이나 저작이 언제 지어졌는지 논증하였다. 시기를 논증하기 위해 [주자연보] 등을 참조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저작의 내용을 분석하여 미숙한 설과 그렇지 않은 설을 구별하는 방법도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이는 주자학 추종이라고도 비판이라고도 딱잘라 말할 수 없다. 그야말로 주자학 연구라고 해야 할 것이다.“(173쪽)

저자는 한국어판 후기에서 국내 학계에서 여전히 주자학과 다른 해석에서 독창성과 비판성을 찾으려는 시도가 은연중에 이루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우리도) ‘다 아는 사실’이라는 생각이 사실은 명확한 인식을 방해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315쪽)라고 갈음한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연구자라면 감히 내놓기 어려운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주장으로 보인다. 사실 역사학계에서는 조선 후기 실학을 둘러싼 과학사학계의 논쟁이나 정약용 학문의 지나친 찬양에 대한 성찰 등 이미 이런 반성이 제기되고 있는 듯하다.

요즘 조선시대 학술사를 살펴보면서 많은 연구가 한국 한문학 연구자들 손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조선시대 학술사의 다양한 면모가 드러나고 있고, 최근 들어서는 한국 한문학을 동아시아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는 것 같다. 다만 중국학을 공부하는 나 같은 사람 입장에서는 여전히 조선 학문의 독창성 부각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해 보이는 한국 일변도의 연구가 학술적 측면에서 본말이 전도되는 상황을 초래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

한문학의 핵심은 그 원전을 둘러싼 문헌학적 연구일 수밖에 없다. 한국 한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연구가 우리 것을 우선적으로 세우는 성과를 냈겠지만, 그럴수록 한문학의 주류나 본지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학문의 생명인 수월성도 뒷전으로 숨어버리고 있지 않은지…. 정약용 같은 조선 후기 경학자들이 당시의 열악한 상황에서 추구하고 도달했던 그 본지를 향한 열정과 수준이 오늘날 지켜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한국에서 한문학의 토대를 닦은 뒤,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대만대학 교수로 있는 강지은이 내심 주장하고 싶은 논지에 이런 우려도 내포되어 있지 않을까 견강부회해본다.

크게 어렵지 않은 책이다. 대중서로도 무난해 보이니,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