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는 205년 1월 기주(鄴, 지금의 邯鄲시 臨漳현)를 점령한다.
200년 관도전 이후 원소의 본거지를 점령하는데 4년이 걸린 셈이다. 그 사이 원소는 병으로 죽고, 하북에서 세력을 장악하고 있던 원소의 세 아들과 사위 등은 서로 연합하거나 배척하며 조조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삼국지 위지 무제기>에는 조조의 특이한 모습 하나가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204년 년말에 원소의 장남 원담이 남피(南皮, 자금의 滄州시 남피현)로 도주하자 그를 추격할 때 일어났다.
겨울이라 강이 얼어 조조는 백성들을 징발하여 얼음을 깨고 배를 밀게 하였다. 백성들이 그 고초를 견디지 못하고 달아났다. 조조는 영을 내려 죽이라고 하였다. 달아난 백성 중에는 먹고 살기어려워서 그랬는지 죽음이 두려워서 그랬는지 자수하러 온 사람들이 있었다. 이때 조조가 말했다. “너희를 살려주자니 나의 영이 서지 않고, 너희를 죽이자니 목을 베어야 하니 내가 차마 하기 어렵구나. 내 병사들에게 잡히지 않도록 멀리 달아나 숨으라.” 이에 백성들이 울면서 떠났다. 그러나 곧 모두 붙잡혔다.
이 대목은 예전부터 조조의 어떤 특징을 말하는지 명확하지 않아 오랫동안 나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오늘날 같으면 자수한 자는 죽이지 않고 벌을 주어 다른 도주자들의 자수를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조는 남아있는 민초들이 더 이상 달아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달아난 자들은 죽이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러한 명령에는 백성들에 대한 증오심도 들어있다.
그런데 자수하러 온 자를 차마 죽이지 못하겠다고 한 것은, 백성들이 고초를 견디지 못하고 달아난 것이 어쩔 수 없다는 점을 안 것이고, 자신이 그러한 무고한 자들을 죽이는 게 지나침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부하들에게는 죽이라고 해놓고는 막상 자신에게 자수하러 오니 자신의 인덕을 내세우기 위해 살려준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한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을 뿐 도주한 자들은 모두 병사들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 결국 자신이 직접 죽이지 않았을 뿐 모두 죽인 셈이 되었고, 마치 그러한 살육에 자신은 끼지 않은 것처럼 위장할 수 있었다. 모종강은 이 대목을 “조조가 살려주었는데, 병사에게 붙잡혔다면 그것은 병사가 죽인 것이지 조조가 죽인 게 아니니, 간웅(奸雄)의 극치이다”고 하여 이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