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국의 삼국시대를 곧잘 10년씩 끊어서 본다. 그러면 시대의 흐름이 더 잘 보인다.
이렇게 보았을 때 210년대의 10년은 유비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적벽전(208)이 일어나기 전 유비는 유표 밑에서 신야에 주둔하며 군사 5천 밖에 없었지만 적벽전 이후 형주 사군을 얻고, 황충과 위연과 마량과 마속을 얻고, 211년 익주(사천성)로 들어가 214년 성도를 점령한다. 유비야말로 적벽전의 최대 수혜자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한중으로 들어온 조조를 몰아내고 한중까지 점령하여 진령 이남의 사천을 온전하게 지배하며 한중왕을 선포한다. 그 결과 221년 황제에 오르니 이 10년은 정말 유비의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런 반면 같은 시기의 손권이 형주를 얻었을 뿐 조조와 다름없이 지배 강역이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유비의 입촉 초기에 방통의 역할이 컸지만, 익주 점령의 주요한 책략은 법정에서 나왔다. 정군산에서 전략도 휘황하지만, 무엇보다도 한중에 대한 정확한 판단에서 유비의 승산을 설계했다는 점이 탁월하다. 이 점은 조조가 215년 한중을 점령하였을 때 사마의가 내친 김에 익주까지 진격하자는 의견과 맞서는 지점이다. 오늘날에도 조조가 사마의의 말을 들었더라면 유비는 박살났을 것이다고 아쉬워하는 사람이 있는데 과연 그럴까. 법정의 말을 들어보자.
“조조가 단번에 장로를 치고 한중을 평정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회를 이용하여 파촉 지방으로 더 내려오지는 않았지요. 오히려 하후연과 장합을 한중에 남겨두고 자신은 돌아갔습니다. 이는 그가 촉을 칠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직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니, 분명 내부에 우환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법정은 조조가 한중에 주둔한 후 남진하지 않은 것을 보고 조조 군사력의 규모를 정확히 파악해낸 것이다. 사마의의 말이 한중 점령에 도취된 상태에서 나온 것이라면 법정은 저울처럼 냉정하게 전세를 형량하였다. 또한 그 이전에 유비에게 있어서 한중이란 땅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지적하였다. 조조에게 있어서는 보급선이 길고 먼 ‘계륵”에 불과하지만 유비에게 있어서는 살코기였다. 이러한 법정의 판단에서 유비는 자신을 얻고 한중을 공격하게 되었다.
때문에 210년대의 10년은 유비의 시대이면서 동시에 법정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유비를 적극적으로 도운 이유는 유장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고 내쳤기 때문이었다. 장송과 함께 유비가 익주에 들어오도록 권하고 계책을 내었다. 214년 유비가 익주를 점령한 후 촉군태수에 임명되었고, 219년 유비가 한중왕이 된 후 상서령(총리)이 되었다. 그는 220년 사망하였다. 유비가 유일하게 시호를 내린 자였고, 역사가 진수는 그를 정욱과 곽가에 비유하였다. “위나라 신하에 비유하면 방통은 순욱과 순유에 해당하고, 법정은 정욱과 곽가의 짝이 되지 않겠는가?”(擬之魏臣, 統其荀彧之仲叔, 正其程郭之儔儷邪?) 여기에서 법정은 제갈량, 방통과 함께 유비의 3대 참모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