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통史通》<잡술雜述>
류즈지劉知幾[1]
【原文】
在昔三墳五典,《春秋》《檮杌》[2],卽上代帝王之書,中古諸侯誌記,行諸歷代,以爲格言,其餘外傳,則神農嘗藥,厥有《本草》[3];夏禹敷土,實著《山經》[4];《世本》辨姓,著自周室[5];《家語》載言,傳諸孔氏[6];是知偏記小說,自成一家,而能與正史參行,其所由來尙矣[7]。
爰及近古,斯道漸煩,史民流別,殊途幷騖[8],榷而爲論,其流有十言:一曰偏記,二曰小錄,三曰逸史,四曰𤨏言,五曰郡書,六曰家史,七曰別傳,八曰雜記,九曰地理書,十曰都邑簿。
夫皇王受命,有始有卒,作者著述,詳略難均,有權記當時,不終一代,若陸賈《楚漢春秋》樂資《山陽載記》王韶《晋安陸記》姚最《梁昭後略》[9],此之謂偏記者也。
普天率土[10],人物弘多,求其行事,罕能周悉,則有獨擧所知,編爲短部,若戴逵《竹林名士》、王璨《漢末英雄》、蕭世誠《懷舊志》、盧子行《知己傳》[11],此之謂小錄者也。
國史之任,記史記言,視聽不該[12],必有遺逸,于是好奇之士,補其所亡,若和嶠《汲冢紀年》、葛洪《西京雜記》、顧協《璅語》、謝綽《拾遺》[13],此之謂逸事者也。
街談巷議,時有可觀[14],小說巵言,猶賢于已[15],故好事君子,無所棄諸,若劉義慶《世說》、裵榮期《語林》、孔思尙《語錄》、陽玠松《談藪》[16],此之爲瑣言者也。
汝潁奇士[17],江漢英靈[18],人物所生,載光郡國,故鄕人學者,編而記之,若圈稱《陳留耆舊》、周斐《汝南先賢》、陳壽《益部耆舊》、虞預《會稽典錄》[19],此之謂郡書也。
高門華冑[20],弈世載德[21],才子承家,思顯父母,由是紀其先烈,胎厥後來,若揚雄《家牒》、殷敬《世傳》、孫氏《譜記》、陸宗《系歷》[22],此之謂家史者也。
賢士貞女,類聚區別,殊百行殊途,而同歸于善,則有取其所好,各爲之錄,若劉向《列女》、梁鴻《逸民》、趙采《忠臣》、徐廣《孝子》[23],此之謂別傳者也,
陰陽爲炭[24],造化爲工[25],流形賦象,于何不育,求其怪物,有廣異聞,若祖台《志怪》、干寶《搜神》、劉義慶《幽明》、劉敬叔《異苑》[26],此之謂雜記者也。
九州土宇,萬國山川,物産殊宜,風化異俗,如各志其本國,足以明此一方,若盛弘之《荊州記》、常璩《華陽國志》、辛氏《三秦》、羅含《湘中》[27],此之謂地理書者也。
帝王桑梓[28],列聖遺塵[29],經始之制,不恒厥所,苟能書其軌,則可以龜鏡將來[30],若潘岳《關中》、陸機《洛陽》、《三輔黃圖》、《建康宮殿》[31],此之謂都邑簿者也。
大抵偏紀ㆍ小錄之書,皆記卽日當時之事,求諸國史,最爲實錄,然皆言多鄙朴,事罕圓備,終不能成其不刊[32],永播來葉[33],徒爲後生作者,削稿[34]之資焉。
逸事者,皆前史所有,後人所記,求諸異說,爲益實多,及妄者爲之,則苟載傳聞,而無銓擇[35],由是實僞不別,是非相亂,如郭子橫之《洞冥》、王子年之《拾遺》[36],金構虛辭,用驚愚俗,此其爲弊之甚者也。
𤨏言者,多載當時辨對,流俗嘲謔,俾夫樞機[37]者借爲舌端,談話者將爲口實,及蔽者爲之,則有詆訐相戱[38],施諸祖宗,褻狎鄙言,出自牀笫,莫不升之記錄,用爲雅言,固以無益風規,有傷名敎者矣。
郡書者,矜其鄕賢,美其邦族,施于本國,頗得流行,置于他方,罕聞愛異,其有如常璩之詳審,劉昞[39]之該博,而能傳諸不朽,見美來裔[40]者,蓋無幾焉。
家史者,事惟三族[41],言止一門,正可行于室家,難以播于邦國,且箕裘不墮[42],則其錄猶存,苟薪構已亡[43],則斯文亦喪者矣。
別傳者,不出胸臆,非由機杼[44],徒以博采前史,聚而成書,其有足以新言加之別說者,蓋不過十一已而,如寡聞末學之流,則深所嘉尙,至于探幽索隱之士,則無所取材。
雜記者,若論神仙之道,則服食煉氣[45],可以益壽延年,語魑魅之道,則福善禍淫,可以懲惡勸善,斯則可矣,及謬者爲之,則苟談怪異,務述妖邪,求諸弘益,其義無取。
地理書者,若朱贛[46]所采,浹[47]于九州,闞驎[48]所書,殫[49]于四國,斯則言皆雅正,事無偏黨者矣,其有異于此者,則人自以爲樂土,家自以爲名都,競美所居,談過其實,又城池舊迹,山水得名,皆傳諸委巷[50],用爲故實,鄙哉!
都邑簿者,如宮闕陵廟[51],街廛郭邑[52],辨其規模,明其制度,斯則可矣,及愚者爲之,則煩而且濫,博而無限,論榱欗[53]則尺寸皆書,記草木則根株必數,務求詳審,持此爲能,遂使學者觀之,瞀亂[54]而難紀也。
于是考玆十品,征彼百家,則史之雜名,其流盡于此矣。至于其間得失紛煣,善惡相兼,旣難爲覶縷[55],故粗陳梗槪,且同自鄶[56],無足譏焉。
又案,子之將史,本爲二說,然如《呂氏》、《淮南》、《玄》、《晏》、《抱朴》[57],凡此諸子,多以敍事爲宗,擧而論之,抑亦史之雜也,但以名目有異,不復編于此科。
蓋語曰:衆星之明,不如一月之光。歷觀自古,作者著述多矣,雖復門千戶萬,波委雲集,而言皆𤨏碎。事必叢殘[58],固難以接光塵于五傳[59],幷輝烈于三史[60],古人以比玉屑滿篋[61],良有旨哉。
然則芻蕘[62]之言,明王必擇,葑菲[63]之體,詩人不棄,故學者有博聞舊事,多識其物,若不窺別錄[64],不討異書,專治周公之章句[65],直守遷固之紀傳[66],亦何能自致于此乎?
且夫子有云[67]:多聞,擇其善者而從之,知之次也苟如是,則書有非聖,言多不經,學者博聞,蓋在擇之已而。
【우리말 옮김】
옛날 ‘삼분三墳’, ‘오전五典’, 《춘추》나《도올》은 상고 시대의 제왕들의 역사서였고, 중고시대의 제후들의 기록이었는데, 누대에 걸쳐 유행하여 모범적인 격언格言이 되었다. 그 밖의 외전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신농씨가 약초를 맛보고 지은 《본초本草》, 하우夏禹가 천하를 순행하고 지은 《산해경山海經》이 있고, 《세본世本》에서는 주나라 왕실 이래의 성씨를 계통에 따라 정리하였으며, 《공자가어孔子家語》에서는 공씨 집안의 가계를 전해주었다. 이렇듯 정사 이외의 편기나 소설이 그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어 정사와 더불어 참고 자료가 되었으니, 그 유래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최근에 이르러는 이러한 풍조가 점점 번성하면서 역사가들이 갈라져 나가 정사와는 다른 길을 추구하였으니, 잠시 이것을 논하자면, 그 유파는 열 가지가 된다. 첫째 ‘편기偏記, 둘째 ‘소록小錄, 셋째 ‘일사逸史’, 넷째 ‘쇄언𤨏言’, 다섯째 ‘군서郡書’이며, 여섯째 ‘가사家史’, 일곱째 ‘별전別傳’, 여덟째 ‘잡기雜記’, 아홉째 ‘지리서地理書’, 열째 ‘도읍부都邑簿’ 등이다.
무릇 제왕이 천명天命을 받는 것에도 처음과 끝이 있고, 역사가가 저술하는 데에도 자세함과 간략함을 균형 있게 하기는 힘든 법이니, [작가가 살던] 그 당대는 저울질하듯 융통성 있게 기록했을 뿐, 그 한 시대를 모두 기록하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루쟈陸賈의 《초한춘추楚漢春秋》、웨쯔樂資의 《산양재기山陽載記》、왕자오王韶의 《진안육기晋安陸記》、야오쭈이姚最의 《량소후략梁昭後略》 등이 그러한데, 이것들을 일러 ‘편기偏記’라 한다.
온 천하에는 매우 많은 인물들이 있어, 그 행적을 모두 구해 두루 다 갖추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까닭에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을 짧은 편폭으로 엮어낸 것이 있었으니, 이를테면 다이쿠이戴逵의 《죽림명사竹林名士》、왕찬王璨의 《한말영웅漢末英雄》、샤오스청蕭世誠의 《회구지懷舊志》、루쯔싱盧子行의 《지기전知己傳》 등과 같은 것으로, 이것을 일러 ‘소록小錄’이라 한다.
역사서의 임무는 사건과 사람들이 한 말을 기록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고 들은 것을 두루 다 갖추어 기록할 수 없으니 더러 남겨지고 빠지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이에 호사가적 취향을 가진 문사들이 그 빠진 것이 보충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허쟈오和嶠의 《급총기년汲冢紀年》、거훙葛洪의 《서경잡기西京雜記》、구셰顧協의 《쇄어璅語》、셰춰謝綽의 《습유拾遺》 등과 같은 것으로, 이것을 일러 ‘일사逸史’라 한다.
길거리에서 떠도는 이야기에도 때로 볼만한 것이 있다. 하찮은 말과 횡설수설 지껄인 말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때가 있으므로, 호사가들은 그것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이를테면, 류이칭劉義慶의 《세설世說》、페이룽치裵榮期의 《어림語林》、쿵쓰상孔思尙의 《어록語錄》、양졔쑹陽玠松의 《담수談藪》 등과 같은 것으로, 이것을 일러 ‘쇄언𤨏言’이라 한다.
루수이汝水와 잉수이潁水 유역에는 뛰어난 문사가 있으며, 창쟝長江과 한수이漢水 유역에는 영민한 인재가 있다. [훌륭한] 인물의 출생은 사적에 기록되어 그 지방을 빛나게 하니, 이에 향리의 학자들이 그것을 엮어 기록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취안청圈稱의 《진류기구陳留耆舊》、저우페이周斐의 《여남선현汝南先賢》、천서우陳壽의 《익부기구益部耆舊》、위위虞預의 《회계전록會稽典錄》 등과 같은 것으로, 이것을 일러 ‘군서郡書’라 한다.
권문세족은 여러 세대에 걸쳐 덕을 쌓으니, 재능 있는 자손이 집안을 잇고 부모를 빛내기도 한다. 이로 말미암아 그 선조들의 업적을 기록하여 그 후손에게 물려주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양슝揚雄의 《가첩家牒》、인징殷敬의 《세전世傳》、쑨 씨孫氏의 《보기譜記》、루쭝陸宗의 《계력系歷》 등과 같은 것으로, 이것을 일러 ‘가사家史’라 한다.
현명한 문사와 정숙한 여인을 유형별로 모아 구분해 모았으되, 비록 그들의 행실은 다르지만 선행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궁극적으로 같은 것이니, 그들의 좋은 점만을 취하여 각기 기록하였다. 이를테면 류샹劉向의 《열녀列女》、량훙梁鴻의 《일민逸民》、자오차이趙采의 《충신忠臣》、쉬광徐廣의 《효자孝子》 등과 같은 것으로, 이것을 일러 ‘별전別傳’이라 한다.
음양을 근본으로 삼고, [자연의] 조화를 도구로 하여, 형태에 따라 형상을 부여하면, 어느 것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인가. 그런 식으로 기이한 사물을 탐구하고 이상한 이야기를 널리 모았으니, 이를테면, 쭈타이즈祖台之의 《지괴志怪》、간바오干寶의 《수신기搜神記》、류이칭劉義慶의 《유명록幽明錄》、류징수劉敬叔의 《이원異苑》 등과 같은 것으로, 이것을 일러 ‘잡기雜記’라 한다.
중국의 전 국토와 만국의 산천은 그 산물도 서로 다르고 풍속 또한 다르다. 만약 각각의 지역마다 지방지를 만든다면, 그 지역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성훙즈盛弘之의 《형주기荊州記》、창쥐常璩의 《화양국지華陽國志》、신 씨辛氏의 《삼진三秦》、뤄한羅含의 《상중湘中》 등과 같은 것으로, 이것을 일러 ‘지리서地理書’라 한다.
제왕의 발상지와 역대 성현들의 유적은 그 경영을 시작하는 제도에 그 장소가 어디라고 늘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 궤적이나 모범적인 사례를 기록해 둔다면 장래의 귀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판웨潘岳의 《관중關中》、루지陸機의 《낙양洛陽》、작자가 알려지지 않은 《삼보황도三輔黃圖》나 《건강궁전建康宮殿》등과 같은 것으로, 이것을 일러 ‘도읍부都邑簿’라 한다.
무릇 편기偏紀와 소록小錄 같은 책들은 모두 그때 당시의 일들을 기록한 것으로, 국사國史에서 재제를 취하였기에 가장 실록에 가깝다. 그러나 모두 속되고 거친 말이 많고, 그 사실 역시 완전한 것이 드물어, 결국 불변한 것이 될 수는 없기에 후세에 길이 전해질 수 없으니, 다만 후대의 작자들이 원고를 가다듬는 자료가 될 뿐이다.
일사逸事라는 것은 모두 전대의 역사서에서 빠진 것들을 후대 사람이 기록한 것으로, 거기서 이설을 찾게 되면 보탬이 되는 것이 실로 많으나, 망령된 자들이 그것을 짓게 되면 단지 전해들은 것만 기록하고 저울질하여 가려 뽑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진위가 구별되지 못하고 시비가 서로 엇갈리는데, 궈쯔헝郭子橫의 《동명기洞冥記》나 왕쯔녠王子年의 《습유기拾遺記》와 같은 것은 완전히 허구적인 말로 엮어놓아 어리석은 속인들을 놀라게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큰 폐단이었다.
쇄언𤨏言에는 대부분 당시의 변론과 세속의 해학적인 이야기 등이 많이 실려 있어, 대저 재담꾼들이 화두로 삼고, 담론가들이 이야기 구실로 활용하였다. 하지만 사리에 어두운 자들이 그것을 짓게 되면, 서로 비방하고 헐뜯다 그 조상에게까지 누를 끼치게 되고, 베갯머리에서 나눈 외설스럽고 상스러운 말까지도 기록하지 않은 것이 없으되, 그것들을 고상한 말로까지 활용하니 진실로 교화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명교를 손상시킬 뿐이었다.
군서郡書는 고을의 훌륭한 인물에 대해 긍지를 갖고 그 지역의 종족들을 찬미하는 것으로, 그 지역에서는 자못 유행하겠지만, 다른 지방에서는 방치되어 아무래도 소중하게 여기는 경우가 드물 것이다. 이 가운데 창쥐常璩의 상세함이나 류빙劉昞의 해박함과 같이 영구히 전해져 후손들에게 찬미를 받는 경우는 얼마 되지 않는다.
가사家史는 그 사적이 단지 삼대에만 국한되고, 그 말도 한 가문에만 그치니 그 집안에서는 전수될 수 있으나 나라 전체에 유포되기는 어렵다. 또 그 가업이 이어진다면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을 것이나, 만약에 계승되지 않는다면 그 문장 역시 없어질 것이다.
별전別傳은 작자 개인의 감회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작자의 정교한 구상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다만 전대前代의 역사에서 널리 제재를 구해 모아서 책을 지은 것이니, 그 가운데 새로운 내용이라 할 만하고 특별한 이야기를 덧붙인 것은 대개 열에 하나에 불과하다. 견문이 적고 배움이 얕은 무리들이라면 깊이 숭상하는 바가 될 수 있으되, 깊은 산 속에서 은거하는 문사로 말하자면 소재 거리로 삼을 만한 게 없다.
잡기雜記 중 신선의 도를 논한 것은 도가의 양생법으로 수명을 늘일 수 있을 것이고, 귀신세계를 이야기한 것은 선한 일에는 복을 내리고 나쁜 일에는 재앙을 내려 권선징악을 할 수 있다. 이 정도면 그런 대로 괜찮으나,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이가 이것을 짓는다면, 괴이한 것만을 이야기하고 요사스런 일을 기록하는 데에만 힘써, 널리 이롭게 하는 측면에서는 별로 취할 만한 것이 없다.
지리서地理書의 경우 주간朱贛이 채록한 바는 구주九州를 두루 미쳤고, 칸인闞駰이 기록한 것은 사방의 나라를 아울렀다. 이것들은 모두 문장이 단아하며 내용 역시 치우침이 없다. 그러나 이런 류의 책들 가운데 이것들과 다른 책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살기 좋은 땅이라 하고 자신의 집안이 있는 곳을 명성 있는 도읍지라 하면서 자기가 거주하는 곳을 경쟁하듯 칭송한 것은 그 사실을 과장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 유적지의 성이나 연못의 옛 자취와 이름난 산수에 붙여진 이름은 모두 항간에 전해지는 것일 따름인데, 그것을 옛 사실이라고 여겼으니, 비루할 따름이다!
도읍부都邑簿는 궁궐과 능묘, 길거리나 도읍의 규모를 변별하고 제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 정도라면 그런 대로 괜찮다. 하지만 어리석은 자들이 이것을 쓰게 되면 번잡하고 장황한 데다 한없이 넓어져 [궁궐의] 서까래와 대들보를 논할 때는 목재의 치수까지 모두 기록하였고, [정원의] 초목을 기록할 때는 무슨 나무가 몇 그루 있다는 것까지 모두 세어 꼼꼼하게 헤아리는 것만을 능사로 여긴다. 결국 배우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눈이 어지러워 기억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이에 이러한 열 가지 부류들을 고찰하고 여러 백가百家들을 살펴보면, 잡다한 명칭이 붙은 역사서의 여러 갈래들이 대부분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그것들 사이에 득실이 섞여 있고 장단점이 서로 겹쳐 있으니 자세히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 개요를 거칠게나마 서술한 것이니, “<회풍> 이후로는 비평할 가치도 없다”고 한 것과 같다.
또 생각건대 자부子部의 책과 사부史部의 책은 본래 별개로 보아야 한다. 하지만 《여씨춘추呂氏春秋》, 《회남자淮南子》, 《태현경太玄經》, 《안씨춘추晏氏春秋》, 《포박자抱朴子》와 같은 자부의 책들은 대부분 사실을 서술한 것을 위주로 하고 있으니, 그것을 거론하자면 역시 잡사의 부류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다만 그 명목이 기존의 사부의 책들과는 달라 이 조목에 엮어 찬술하지는 않았다.
대저 세속의 속담에 “뭇별들의 밝음은 달 하나의 밝음만 못하다衆星之明, 不如一月之光”고 하였다. 고대부터 두루 살피건대 작자들이 저술한 글은 참으로 많다. 비록 그 문호門戶가 천만이나 되고, 파도나 구름처럼 많다 해도 그 말들은 모두 번쇄하고 그 내용은 필경 자질구레하였다. 그러므로 《춘추》 5가가 끼친 업적과 《사기》, 《한서》, 《후한서》의 빛나는 성과를 계승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우니, 옛사람들이 이를 “상자에 가득 찬 옥가루”로 비유한 것은 진실로 의미가 있는 말이라 하겠다.
그런즉 꼴 베는 사람이나 나무꾼과 같은 평민들의 이야기도 현명한 왕들은 반드시 채택하였고, 《시경》의 <봉비葑菲>와 같은 [변풍變風의] 체재 역시 시인들이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학자들은 옛 일들을 널리 듣고 그 사물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한다. 만약 《별록別錄》과 같은 책을 엿보지 않고, 다른 책들을 검토하지 않은 채, 단지 주공周公과 쿵쯔孔子의 문장만 공부하고, 쓰마쳰司馬遷과 반구班固의 기전紀傳만을 고수한다면 어찌 이러한 경지에 이르겠는가?
또 공자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많이 듣고 그 가운데 좋은 것을 받아들이며多聞, 擇其善者而從之”, “그렇게 아는 것은 ‘나면서부터 아는 것’에 버금가는 것이다.知之次也” 진실로 이와 같은즉, 책 속에 성현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 있고 언사에는 경전과 어긋나는 것이 많이 있더라도, 배우는 이들이 견문을 넓힐 때는 그것을 잘 선택하기만 하면 그뿐이다.
【해설】
중국에서는 소설의 기원을 역사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사전설史傳說’이다. 하지만 정작 고대의 역사가들의 소설에 대한 인식은 긍정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필기筆記의 사료적인 가치는 중시했으나, 그저 정식 역사서에서 빠지거나 누락된 부분을 메꾸어 주는 보완물 정도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들은 역사학적인 안목으로 소설을 평가하여 “그 문사가 아순하지 않거나其言不雅馴”(쓰마쳰司馬遷), “기이하고 괴상한 말奇言怪語”이라거나, “모두 사실이 아니다皆非其實”(반구班固)고 생각했다. 이러한 인식을 대표하는 것이 청대의 장쉐청章學誠이다. 그는 “《삼국연의》의 7할은 사실기이나, 3할은 허구로, 이 때문에 읽는 사람들이 때때로 미혹되어 혼란에 빠지게 된다《三國演義》則七分實事, 三分虛構, 以觀者往往爲所惑亂”(《병진차기丙辰剳記》)고 주장했다.
류즈기劉知幾의 《사통史通》은 이러한 역사학자의 시각을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사통》<채찬采撰>편에서 “길에서 듣고 말한 것이 성인의 도리에 어긋나고, 길거리와 골목의 이야기가 진실을 훼손하는 것을 미워한다惡道聽途說之違理, 街談港議之損實”는 관점에서 출발해 《어림語林》 등과 같은 소설과 기타 이른바 “꼴 베는 사람이나 나무꾼과 같은 일반 백성들의 비루한 말芻蕘鄙說”에 대해 호된 질책을 가하면서 “그 내용은 성현의 말씀이 아니고其事非聖”, “그 언사는 정신을 혼란하게 한다其言亂神”고 하였다. 또 비록 역사서로 채택된 것이라 하더라도 “소인배에게서나 사랑을 받을取悅于小人”뿐, “군자들로부터는 비웃음을 산다見嗤于君子”고 주장했다.
류즈지는 《사통》<잡술>편에서 당시의 소설에 대해 전문적이고도 상세하게 논술했다. 먼저 그는 소설이 그 나름대로 지니고 있는 가치에 주목했다. “정사 이외의 편기나 소설이 그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어 정사와 더불어 참고 자료가 되었으니, 그 유래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偏記小說, 自成一家, 而能與正史參行, 其所由來尙矣” 그는 또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시만 해도 아직 번창하기 전이었던 전기傳奇를 10가家로 분류한 뒤 각각의 부류에 내재한 기본적인 특징과 대표적인 작품, 그리고 그 득실에 대해 분석하고 비평했다. 그의 비평 기준은 다음의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그 첫째는 “실록實錄”을 강조하고 “허사虛辭”를 배척하는 것이고, 둘째는 “고상한 말雅言”을 중시하고 “천박하고 질박함鄙朴”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류즈지는 이러한 소설들이 비록 “그 말들은 모두 번쇄하고 그 내용은 필경 자질구레하여言必𤨏碎, 事必叢殘” “《춘추》 5가가 끼친 업적과 《사기》, 《한서》, 《후한서》의 빛나는 성과를 계승하였다고 보기 어려우나” 오히려 “상자에 가득 찬 옥가루玉屑滿篋”와도 같아서 당연히 중시할 만한 측면이 있다고 보았다. 결국 류즈지의 이러한 관점은 확실히 유가적인 관점에서 성인의 가르침에 근본을 두고 역사학의 각도에서 소설을 바라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주석]
[1] 류즈지劉知幾(661-721년)는 당대唐代의 역사가로, 자는 쯔쉬안子玄이다. 펑청彭城(지금의 쟝쑤 성江蘇省 쉬저우徐州) 사람이다. 저작랑著作郞과 좌사左史 등의 관직을 지냈으며, 일찍이 관에서 사서를 편찬하는 일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평생 사서 편찬과 사학 연구에 힘을 다했다. 《사통史通》 49편은 당 중종中宗 경룡景龍 4년(71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중국 최초의 체계적인 사학 논저이다. 이 책은 내외 편으로 나누어지는데, 내편은 대부분이 역사서의 체례와 저작 방법에 대하여 논한 것이고, 외편은 대부분 사관의 설치와 사적史籍의 득실을 논한 것이다.
[2] 삼분오전三墳五典은 고서명古書名으로 전해 온다. 《좌전左傳》<소공昭公> 12년에 “삼분、오전、팔색、구구를 읽을 수 있다是能讀三墳五典八索九邱”고 하는 구절이 있는데, 주에서 “모두 고서명이다皆古書名”라고 하였다. 그런데 후대 사람들이 삼분을 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의 삼서三書로, 오전을 소호小昊、전욱顓頊、고신高辛、요堯、순舜의 책으로 견강부회한 것이다. 《춘추》는 노魯나라의 사서명이며, 《도올》은 초楚나라의 사서명史書名이다. 《춘추》와 《도올》은 여기에서는 고대의 사서를 광범하게 지칭한다.
[3] “신농이 약초를 맛보다神農嘗藥” : 고대의 전설에 따르면, 신농씨가 백약을 맛본 후, 《본초경本草經》을 지었다고 전한다.
[4] 부敷 : ‘늘어놓다’의 의미다. 여기에서는 하우夏禹가 구주九州를 순행巡行한 전설을 가리킨다.
《산경山經》은 《산해경山海經》으로 상세한 것은 <주《산해경》서注山海經序> 주1)을 참고할 것.
이상 두 구절의 뜻은 하우가 구주를 순행할 때, 보이伯益 등이 《산해경》을 지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 《열자列子》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대우는 다니면서 보았고, 보이는 아는 것으로 이름 지었으며, 이졘은 들은 것을 기록했다.大禹行而見之, 伯益知而名之, 夷堅聞而志之.”
[5] 《세본》 :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5편이다. 고대의 사관이 황제 이래부터 춘추시대에 이르기까지 제후대부의 시호諡號와 작호爵號를 기록한 것이다.十五篇. 古史官記黃帝以來訖春秋時諸侯大夫系諡名號.”
[6] 《가어》는 《공자가어孔子家語》이다. 《한서》<예문지>에 27권으로 저록되어 있으나 후에 없어졌다. 지금의 《가어》는 삼국三國시기 위魏나라 왕쑤王肅의 위작僞作이다.
[7] 편기偏記 : 비교적 짧은 편폭으로 최근의 일을 기술한 것으로 전사全史와 대비되는 말이다.
상尙은 ‘까마득하다’는 뜻이다.
[8] 무騖 : 사방으로 치달리는 것을 일컫는다. 여기에서는 병행幷行의 의미다.
[9] 루쟈陸賈는 한대漢代 초기 초 지방 사람으로 고조高祖를 따라 천하를 평정했다. 말재주가 있어 남월南越에 사신으로 가서 자오퉈趙佗(당시 남월왕)를 불러 초안招安하였기에 태중대부太中大夫의 관직을 받았다. 저술에는 《신어新語》 12편이 있다. 《초한춘추楚漢春秋》 9권은 루쟈가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웨쯔樂資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산양재기山陽載記》는 《수서隋書》<경적지經籍志>에 웨쯔가 편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0권이다.
산양山陽은 달리 산양공山陽公이라고도 한다. 산양공은 한나라 헌제獻帝가 위魏에 선양禪讓하면서 봉해졌다.
왕자오王昭는 왕자오즈王昭之가 맞으며, 《진안육기晋安陸記》는 《진안제기晋安帝記》가 올바르다. 《송사宋史》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왕자오즈王昭之는 자字가 슈타이休泰로 개인적으로 《진안제양추晋安帝陽秋》를 편찬했다. 저작좌랑著作佐郞을 제수 받았고, 그 뒷일을 계속해 의희 9년까지 이르렀는데, 서사敍事에 뛰어났다.王昭之字休泰, 私撰《晋安帝陽秋》, 除著作佐郞, 使續后事, 訖義熙九年, 善敍事.”
《진안제기》는 《진안제양추》이다.
야오쭈이姚最는 자가 스후이士會로 경사經史에 박통하였으며, 특히 저술을 좋아하였다. 수 문제隋文帝 때에 처음에는 태자문대부太子門大夫로 차이察 지방에서 봉지封地를 세습했다. 후에 촉왕蜀王 슈秀의 사마司馬가 되었다. 슈가 은밀하게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기에 야오쭈이에게 주살 당했다.
《양소후략梁昭後略》은 《수서》<경적지>에 10권으로 저록되어 있다. (《수지隋志》에는 “소昭”자가 없으나, 《신당서新唐書》、《구당서舊唐書》에는 “소”자가 있다.)
[10] 솔토率土 : 《시경》<소아><북산北山>의 “땅 끝의 물가率土之濱”이다. 솔率은 ‘좇다循’의 뜻이다. 솔토는 “솔토지빈”의 약어로 온 세상을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11] 다이쿠이戴逵는 진晋의 초국譙國 지방 사람이다. 자는 안다오安道로 거문고를 잘 타고, 서화書畵에 뛰어났다.
《죽림명사竹林名士》는 《수서》<경적지>에 “《죽림칠현론竹林七賢論》 2권은 진晋의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인 다이쿠이가 지은 것이다.《竹林七賢論》二卷, 晋太子中庶子戴逵撰.”라고 기록되어 있다.
왕찬王粲은 삼국시대三國時代 위魏의 가오핑高平 사람으로 자는 중쉬안仲宣이다. 처음에는 징저우荊州에서 류뱌오劉表를 따랐으나, 후에 위나라를 섬겨 관직이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건안칠자 중의 한 명이다.
《한말영웅漢末英雄》은 《수서》<경적지>에 “왕찬이 지었으나 훼손되었다.王粲撰, 殘缺.”라고 기록되어 있다.
샤오스청蕭世誠은 양梁나라 원제元帝인 샤오이蕭繹로 스청世誠은 그의 자이다. 초기에는 상동왕湘東王에 봉해졌는데, 그의 저작이 세상에 널리 유행했다. 552년부터 554년까지 재위在位하였다.
《회구지懷舊志》는 《수서》<경적지>에 기록되어 있는데 양의 원제가 편찬한 것으로 9권이다.
루쯔싱盧子行은 루쓰다오盧思道로 쯔싱子行의 그의 자이다. 제齊나라를 섬기어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되어 중서성中書省에서 소임을맡아 보았다. 주周나라 무제武帝가 제나라를 평정한 후 의동삼사儀同三司를 제수 받았으며, 수나라 초기에는 다시 산기상시가 되었다.
《지기전知己傳》은 《수서》<경적지>에 1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12] 해該 : ‘해賅’와 통한다. ‘겸비하다’, ‘완전히 갖추다’의 의미다.
[13] 허쟈오和嶠는 진나라 시핑西平 사람으로 자는 창위長輿이다. 부친의 작위인 상규백上葵伯을 세습하였으며 관직은 중서령中書令에 이르렀다. 당시 황제가 허쟈오 등에 명하여 예서隸書로 《기년紀年》을 쓰게 했다.
《서경잡기西京雜記》는 《당서唐書》<경적지經籍志>에서는 동진東晋의 거훙葛洪의 작품이라 했다. 거훙은 이 책의 발문에서 한대漢代의 류신劉歆이 지었다고 했으니, 이것은 모두 위조된 것이다. 여기서 ‘서경’은 서한西漢의 수도인 창안長安을 가리킨다. 책 속에는 서한의 풍문과 사건이 기록되어 있으며, 궁실、제도、풍속과 관습、옷과 장식품 등까지 언급했는데, 매우 괴이한 색채를 띠고 있다.
구셰顧協는 자가 정리正禮이다. 양나라 때 관직이 통직산기시랑通直散騎侍郞에 이르렀으며 홍려경鴻臚卿을 맡아 보았다. 죽은 후 시호는 원溫이다. 저서에 《이성원異姓苑》、《쇄언瑣言》 등이 있다.
《쇄언》은 《수서》<경적지>에 1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셰춰謝綽는 양나라 때 관직이 소부경少府卿에 이르렀다. 《습유拾遺》는 《수서》<경적지>에 10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14] “길거리에서 떠도는 이야기街談巷議”의 두 구절은 《한서》<예문지>를 참조할 것.
[15] 치언巵言 : 《장자莊子》<우언寓言>에는 “횡설수설 지껄인 말이 나날이 나온다卮言日出”는 구절이 있다. 루더밍陸德明은 《경전석문經傳釋文》에서 왕수즈王叔之의 말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둥근 그릇이 가득차면 기울게 된다. 비우면 기울었던 것이 다시 올라가게 된다. 사물에 따라 변하니 하나를 움켜쥐고 옛 것을 지켜서는 안 된다. 이것을 언어에 적용하면, 다른 사람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되니 자기 자신은 일정한 주인이 없는 것이다.卮器滿卽傾, 空則仰, 隨物而變, 非執一守故者也. 施之于言, 而隨人從變, 己無常主者也.”
“아무 것도 안하는 것보다 낫다猶賢于已” : 이 말은 본래 《논어論語》<양화陽貨>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나온 것이다. “쿵쯔가 말했다. ‘종일 밥만 먹고 아무 일도 안해서는 딱한 일이지. 장기나 바둑 같은 일도 있지 않느냐? 그런 거라도 하는 것이 아무 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나으니라.’子曰, 飽食終日, 無所用心, 難矣哉! 不有博奕者乎? 爲之, 猶賢乎已.”
[16] 류이칭劉義慶의 《세설世說》은 《세설신어世說新語》 주1)을 참고할 것.
페이룽치裴榮期의 《어림語林》은 《세설신어世說新語》 주2)를 참고할 것.
쿵쓰상孔思尙에 대해서는 자세한 것을 알지 못한다.
《어록語錄》은 정챠오鄭樵의 《통지通志》<예문략藝文略>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송대의 《제어록齊語錄》은 10권으로 쿵쓰상이 편찬했다.宋《齊語錄》十卷, 孔思尙撰.”
양졔쑹陽玠松, 혹은 양쑹졔陽松玠에 대해서는 자세한 것을 알지 못한다.
《담수談藪》는 《송사宋史》<예문지藝文志>에 소설류로 “양쑹졔의 《팔대담수》 2권.陽松玠《八代談藪》二卷.”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직재서록해제直齋書錄解題》에서는 “북제의 비서성 정자 베이핑 양졔쑹이 편찬하였다. 남북 팔조의 일을 모아 수의 개황 연간 중에 서술하였다.北齊秘書省正字北平陽玠松撰, 事綜南北八朝, 隋開皇中所述.”라는 기록이 있다.
[17] 여영汝潁 : 루수이汝水와 잉수이潁水 유역을 가리킨다.
[18] 강한江漢 : 창쟝長江과 한수이漢水 유역을 말한다.
[19] 취안청圈稱은 동한東漢 사람으로 초나라 위슝鬻熊의 후손인데, 관직은 의랑義郞이었다.
《진류기구陳留耆舊》는 《수서》<경적지>에 《진류기구전陳留耆舊傳》 2권이 한나라 의랑 취안청이 편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저우페이周斐에 대해서는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 《여남선현전汝南先賢傳》에 대해서 《수서》<경적지>에 “위 저주페이의 《여남선현전》은 5권이다.魏周斐《汝南先賢傳》,五卷.”라는 기록이 있다. 《구당지》에서는 “페이斐”가 “페이裴”로 되어 있다.
천서우陳壽(233~297년)는 자가 청쭈承祚로 안한安漢(지금의 쓰촨 성四川省 난충南充) 출신이다. 촉한蜀漢때 관각령사觀閣令史를 지냈으며, 진晋에 입조入朝한 후에는 저작랑著作郞과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를 역임했다. 저서로 《삼국지三國志》、《고국지古國志》、《익부기구전益部耆舊傳》이 있다. 《익부기구전》은 《수서》<경적지>에 “천서우가 편찬함. 14권.陳壽撰, 十四卷.”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위虞預는 자가 수닝叔寧으로 동진東晋 때에 평강현후平康縣侯의 작위를 받았으며 관직은 산기상시散騎常侍에서 끝났다. 저서로 《진서晋書》,《제우전諸虞傳》,《회계전록會稽典錄》 등이 있다. 《회계전록》은 《수서》<경적지>에 “위위가 편찬함. 24권.虞預撰, 二十四卷.”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20] 고문화주高門華冑 : ‘권문세족權門世族’을 가리킨다.
[21] 혁세奕世 : 한 세대가 또 한 세대를 잇는 것이다.
[22] 양웅揚雄(기원 전 58~18년)은 자가 쯔윈子雲으로 촉군蜀郡의 청두成都 사람이다. 성제成帝 때 급사황문랑給事黃門郞을 하였으며, 왕망王莽 때에는 천록각天祿閣에서 교서校書하다가 벼슬이 대부大夫에 이르렀다. 어려서는 사부辭賦에 전념하였으나 일변하여 철학을 연구하였으며, 문자학에도 공헌을 하였다. 저서로 《장양부長揚賦》,《감천부甘川賦》,《법언法言》,《태현太玄》,《방언方言》 등이 있다.
《가첩家牒》은 성씨에 관한 책으로 《한서漢書》에서 옌스구고顔師古는 “양슝이 족보를 스스로 서술하여……雄之自敍譜牒……”라는 주를 달았다.
인징殷敬에 대해서는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 《세전世傳》은 《신당서》<예문지>에 “인 씨 가문에 3권이 전해지는데 인징이 편찬했다.殷氏家傳三卷, 殷敬撰.”라고 기록되어 있다.
쑨 씨孫氏의 《보기譜記》는 《신당서》<예문지>에 15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편찬자의 이름이 없다.
루쭝陸宗의 《계력系歷》은 《신당서》<예문지>에 “오군吳郡의 루 씨 계보이며, 루징셴陸景獻이 편찬하였다.吳郡陸氏宗系譜, 陸敬獻撰.”라고 기록되어 있다.
[23] 류샹劉向 : <《신선전》자서神仙傳自序>의 주5)를 볼 것. 《열녀列女》、《열녀전列女傳》은 유향이 지은 것으로 7권이다. 전체의 내용은 모의母儀、현명賢明、인지仁智、정신貞愼、절의節義、변통辨通、폐얼嬖孽 등 일곱 가지로 나뉜다.
양훙梁鴻은 자가 보롼伯鸞으로 동한 때에 유명한 은일거사隱逸居士이다. 《일민逸民》은 《후한서後漢書》<양훙 전梁鴻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양훙이 전대의 고명한 사람들을 흠모하여 사호四皓 이래의 24명을 위하여 송頌을 지었다.鴻仰慕前世高士, 爲四皓以下二十四人作頌.” 양훙의 《일민》은 이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자아차이趙采의 《충신忠臣》에 대해서는 좀더 고증해야 한다.
쉬광徐廣의 자는 예민野民으로 동진 때 관직이 비서감秘書監에 이르렀다. 송조宋朝(劉宋)가 들어선 후에는 관직을 갖지 않았다. 저서로 《거복의주車服儀注》、《진기晋紀》 등이 있다.
《효자孝子》는 신구당지에 3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24] 음양陰陽 : 《주산해경서》 주 7)을 볼 것.
탄炭 : 여기에서는 탄을 음양으로 비유하여 세상 만물이 생성 변화하는 근본으로 여겼다.
[25] 조화造化 : ‘자연自然’을 가리킨다.
[26] 쭈타이祖台는 쭈타이즈祖台之가 맞으며, 대구에 맞추느라 생략한 것이다. 쭈타이즈는 자가 위안천元辰으로 진나라 때 관직이 시중侍中과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이르렀다. 그가 편찬한 《지괴志怪》는 《수서》<경적지>에 2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없어졌다. 루쉰魯迅의 《고소설구침古小說鉤沉》에 15칙則이 실려 있는데 귀신과 신비한 일을 기록하였다.
간바오干寶의 《수신기搜神記》에 대해서는 <《수신기》서> 주 1)을 볼 것.
류이칭劉義慶에 대해서는 《세설신어》 주 1)을 볼 것.
《유명록幽明錄》은 《수서》<경적지>에 20권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은 없어졌다. 루쉰의 《고소설구침》에 266칙이 실려 있는데 주로 귀신과 신령스러운 것을 기술했으며, 불법佛法과 교리를 선양하고 있다. 유징수劉敬叔는 펑청彭城(지금의 쟝쑤 성江蘇省 쉬저우 시徐州市가 관할 구역임) 사람이다. 진말晋末에 남평국南平國에서 낭중령郎中令을 하였으며 송대에서는 급사황문랑給事黃門郞을 하였다.
《이원異苑》은 《수서》<경적지>에 10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진대의 신령스럽고, 신비한 것과 불교의 이야기를 많이 기술하였다.
[27] 성훙즈盛弘之는 남조南朝 사람이다. 송 나라 때 임천왕臨川王의 시랑侍郞을 하였다.
《형주기荊州記》는 《수서》<경적지>에 “송대 임천왕의 시랑인 성훙즈가 편찬한 것이다.宋臨川王侍郞盛弘之撰.”라고 기록되어 있다.
창쥐常璩의 자는 다오쟝道將으로 촉군蜀郡 쟝위안江原 사람이다. 동진 때 관직이 산기상시였다. 뤼다팡呂大防의 《화양국지인華陽國志引》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진의 창쥐가 《화양국지》를 지었다. 한 초기부터 진초에 이르기까지 400년에 이르는 시기의 남녀들 가운데 책에 실을 만 한 자가 400명이었다.晋常璩, 作《華陽國志》, 自先漢至晋初, 踰四百歲, 士女可書者四百人.”
신 씨辛氏의 《삼진三秦》은 현재는 없어져 고찰할 수 없다.
뤄한羅含은 자가 쥔장君章으로 진의 레이양耒陽 사람이다. 누차 관직이 정위廷尉와 장사상長沙相에 이르렀다. 《상중湘中》에 대해서는 《문헌경적고文獻經籍考》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상중산수기》는 3권으로 진의 레이양 사람 뤄한이 편찬한 것으로 판양 사람 루정이 주를 달았다.《湘中山水記》三卷, 晋耒陽羅含君章撰, 范陽盧拯注其書.” 후대 사람이 추가한 것이 있다.
[28] 상재桑梓 : 고향을 가리킨다.
[29] 유진遺塵 : 유적이다.
[30] 구경龜鏡 : 거북점과 거울로 귀감이 되는 것을 비유한다.
[31] 판웨潘岳(247~300년)는 자字가 안런安仁으로 진의 중머우中牟(현재는 허난 성河南省에 속함) 사람이다. 누차 저작랑을 하다 바뀌어 산기시랑을 하였다. 후에 다른 사람의 모함을 받아 모반하였다고 하여 멸족되었다.
《관중關中》은 《관중기關中記》로 《수당지》에는 1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루지陸機(261~303년)는 자가 스헝士衡으로 우 군吳郡 화딩華定(지금의 하이쑹쟝海松江) 사람이다. 성도왕成都王 쓰마잉司馬潁을 섬기다가 전쟁 중에 죽었다.
《낙양洛陽》은 《낙양기洛陽記》로 《수당지》에는 1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보황도三輔黃圖》는 편찬한 이의 이름이 없다. 차오궁우晁公武의 《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에 의하면, 양진梁陳시대 사람이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에 기록된 도성都城과 궁궐宮闕은 한대의 창안長安을 주로 기술한 것이다.
《건강궁전建康宮殿》에 대해서는 고찰할 수 없다. 졘캉은 지금의 난징南京으로 동진 때에는 졘캉이라 불렀다.
[32] 불간不刊 : ‘고칠 수 없다’는 뜻이다.
[33] 영파래엽永播來葉 : ‘후세에 영원히 전해진다’는 뜻이다.
[34] 삭고削稿 : 원래는 ‘’초고를 없앤다‘는 의미인데, 여기서는 그 의미가 확장되어 ’희귀한 견문罕聞‘을 기록한 저작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35] 전택銓擇 : ‘저울질하여 가려 뽑는다’는 의미이다.
[36] 궈쯔싱의 동명郭子橫之《洞冥》 : <《한무동명기》자서漢武洞冥記自序> 주1)을 볼 것.
왕쯔녠의 습유王子年之《拾遺》 : 《습유기拾遺記》 주1)을 볼 것.
[37] 추기樞機 : 《주역》<계사상系辭上》 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언행은 군자의 지도리와 기틀이니, 그 지도리와 기틀이 외부로 표출되어 영욕의 근본을 이룬다.言行, 君子之樞機, 樞機之發, 榮悔之主也.” 이후 ‘추기’라는 말은 언어의 대명사로 쓰였다.
[38] 저알상희詆訐相戱 : ‘서로 농담하면서 마구 비방하고 공격한다’는 뜻이다.
[39] 류빙劉昞의 자는 옌밍延明인데, 주로 그의 자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북사北史》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류옌밍은 둔황 사람으로 무소왕을 보좌하여 유림좨주를 지냈으며 《삼국략기》 84권과 《돈황실록》 20권을 지었다. 劉延明, 敦煌人, 凉武昭王征爲儒林祭酒, 著《三史略記》八十四卷, 《敦煌實錄》二十卷”
해박該博 : ‘넓고 깊다’는 뜻이다. “該”는 “賅” 자와 의미가 통한다.
[40] 내예來裔 : 후대 사람을 가리킨다.
[41] 삼족三族 : 《의례》2권<사혼례士昏禮>의 “다만 삼대에 걸친 저희 집안 친척들 중에서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 발생할 수도 있기에 아무개가 저를 보내어 빠른 시일 안에 장가드는 길일을 확정하기를 바라옵나이다惟是三族之不虞,使某也请吉日”에 부가된 정쉬안鄭玄의 주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삼족은 부의 곤제, 자신의 곤제, 자식의 곤제를 이른다三族,谓父昆弟、己昆弟、子昆弟。” 곧 고대에는 다른 뜻도 있었으나 여기서는 아버지, 아들, 손자 3대를 가리킨다.
[42] 기구불타箕裘不墮 : 선조의 사업이 이후까지 계승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이 말은 원래 《예기禮記》<학기學記>에 보인다. “솜씨 좋은 대장장이의 아들은 반드시 [그 아비가 쇠를 녹여 깨진 그릇을 떼우는 것을 보고 이것을 응용해 짐승의 가죽을 모아] 갖옷 만드는 것을 잘 배우고, 솜씨 좋은 궁장弓匠의 아들은 반드시 [그 아비가 짐승의 뿔을 휘어 활 만드는 것을 보고 이것을 응용해 버들가지를 휘어서 곡식을 까불을 때 쓰는] 키 만드는 것을 잘 배운다.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工之子, 必學爲箕”
[43] 신구이망薪構已亡 : “신구薪構”는 여기서 ‘위아래로 계승된다’는 것을 비유하는 의미이다. 이 말의 출전인 《장자莊子》<양생주養生主>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장작은 불에 붙이면 그것이 다 타버리는 것은 확인할 수 있으되, 그 불 자체는 다른 장작이 있는 한 계속해서 타오를 것이다.指窮于爲薪, 火傳也, 不知其盡也”
[44] 기저機杼 : 본래 ‘베 짜는 기구’를 가리키나, 여기서는 작문할 때의 정교한 구상을 비유하는 의미로 쓰였다.
[45] 복식服食 : ‘단약丹藥을 복용하는 것’이다.
연기煉氣 : ‘신기神氣를 연마하는 것’이다. 모두 도가道家의 양생법養生法이다.
[46] 주간朱贛 :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승상인 장위가 잉촨의 주간에게 그 풍속을 분류하게 했다丞相張禹使屬潁川朱贛條其風俗”
[47] 협浹 : ‘철徹’ 자와 의미가 통한다.
[48] 칸인闞駰 : 《북사北史》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칸인은 둔황 사람으로 자는 쉬안인이다. 낙안왕 피가 등용하여 중랑을 지냈으며 《십주지》를 지었다.闞駰, 敦煌人, 字玄陰, 樂安王丕引爲從事中郞, 撰《十州志》” 《신당서新唐書》<예문지藝文志>에는 “《십주지》 10권《十州志》十卷”으로 기록되어 있다.
[49] 탄殫 : ‘다하다’의 의미이다.
[50] 위항委巷 : ‘골목길’이다.
[51] 궁궐宮闕 : 곧 궁전을 가리키는데, 고대의 제왕들이 거처하는 궁문 밖에는 2개의 궐이 있었다. ‘궁위宮闈’라고 쓴 것은 후비들이 거처하는 곳을 가리킨다.
[52] 가전街廛 : ‘시市街’를 가리킨다.
곽읍郭邑 : ‘도시’를 가리킨다.
[53] 최榱 : ‘서까래’의 총칭이다.
동棟 : 집의 대들보이다.
[54] 무란瞀亂 : ‘매우 혼란하여 분명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55] 라루覶縷 : ‘상세하게 조리를 갖추어 설명한다’는 뜻이다.
[56] 회鄶 : 곧 <회풍>으로 《시경詩經》의 15국풍國風 가운데 하나이다. 춘추春秋시기 지자季札가 주나라 음악周樂을 살펴보고 나서 각 국풍에 대해 평론을 가하였는데 “<회풍> 이후로는 비평할 가치도 없다自鄶以下無譏焉”라고 하여 의론을 하지도 않고 경시하는 뜻을 보였다. 이 사건은 《좌전左傳》<양공襄公> 25년에 보인다. 류즈지劉知幾는 여기서 논한 열 가지 이외에는 상세히 논할 가치가 없다는 의미로 이 말을 인용했다.
[57] 《여씨呂氏》 : 곧 《여씨춘추呂氏春秋》를 가리키며 《여람呂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국戰國 시기 말 뤼부웨이呂不韋와 그의 문하에 있던 문사文士들이 편집하여 지은 것으로 26권에 총 160편이다.
《회남淮南》 : 곧 《회남자淮南子》를 가리키는데 서한西漢 회남왕淮南王 류안劉安과 그 문객들이 편집하여 지은 것이다.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는 내편內篇 21편, 외편外篇 33편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서漢書》<회남형산제북왕전淮南衡山濟北王傳>에는 “또 중편 8권이 있다.又有中篇八卷”고 기술되어 있는데 현재는 내편 21편만 남아있다.
《현玄》 : 아마도 《태현경太玄經》을 가리키는 듯한데, 한대漢代 양슝揚雄이 지은 것으로 현재 전해지는 판본今本은 10권으로 되어 있다.
《안晏》 : 곧 《안자춘추晏子春秋》를 가리키며 작자는 미상이다. 현재 전해지는 판본은 8권으로 옌잉晏嬰의 일사逸事를 기록한 것이다.
《포박抱朴》 : 곧 《포박자抱朴子》를 가리키며 「《신선전》자서神仙傳自序」 주 1),과 2)를 참고할 것.
[58] 총잔叢殘 : 《신론新論》 주2)를 참고할 것.
[59] 광진光塵 : ‘빛나는 성과’라는 뜻이다.
오전五傳 : 《춘추》를 전술傳述한 좌씨左氏ㆍ공양公羊ㆍ곡량谷梁ㆍ추씨鄒氏ㆍ협씨夾氏 5가를 가리킨다.
[60] 삼사三史 : 당대唐代에는 《사기史記》、《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를 삼사三史라고 하였다.
[61] 옥설만협玉屑滿篋 : 《논형論衡》<서해書解> 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풀 부스러기가 수레를 가득 채울지라도 도를 이룰 수 없으며, 옥 부스러기가 광주리에 가득 있어도 보배가 될 수 없다.蕞殘滿車,不成爲道。玉屑滿篋,不成爲寶.”
[62] 추요芻蕘 : 《한서》<예문지> 주29)를 볼 것.
[63] 봉비葑菲f : 이 말의 출전인 《시경詩經》<邶風․谷風>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순무와 무우를 캐나 그 뿌리와 줄기는 뽑지 않네.采葑采菲, 無以下體” ‘葑’ㆍ‘菲’는 무우청과 무우이며 ‘下體’는 뿌리와 줄기를 가리킨다. 이 두 구절의 시는 주체 혹은 근본을 버리지 말라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64] 별록別錄 : 책 이름이다. 한대 류샹劉向이 책 한 권의 교감을 끝내고 제요提要를 썼는데 초록하여 상부에 보고하면서 “별록別錄”이라고 칭하였다. 「《신선전》자서」 주5)를 참조할 것.
[65] 주공지장구周公之章句 : 주공周公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주례周禮》와 쿵츄孔丘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와 같은 경전 저작들을 가리킨다.
[66] 천고遷固 : ‘천遷’은 《사기》의 작자 쓰마쳰司馬遷을 가리키며 ‘고固’는 《한서》의 작자 반구班固를 가리킨다.
[67] 부자夫子 : ‘공자’를 가리키며 “부자夫子” 구절은 《논어論語》<술이述而>편에 나온다. “대개 자기가 모르는 것을 허황하게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그런 잘못은 가지고 있지 않다. 많이 듣고 그 가운데 좋은 것을 받아들이며, 많이 보고 그것을 모두 마음속에 기억해둔다면, 그렇게 아는 것은 ‘나면서부터 아는 것’에 버금가는 것이다.蓋有不知而作之者, 我無是也. 多聞, 擇其善者而從之, 多見而識之, 知之次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