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청 시기 소설의 틈새시장 2

로버트 헤겔(Robert Hegel)

소설과 경제 발전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경제 변화가 소설 인쇄 품질의 일반적인 쇠퇴와 관련되어 있는 듯 하다. 12세기부터 19세기 초에 이르는 동안 ‘강남 지역’은 점차 상업적으로 발전하여 번영하게 되었다. 도시문화가 뚜렷해짐에 따라 그 지역에서는 여가 예술이 번성했고, 이것이 점점 더 강남의 도시들로 옮겨 들어오는 문인들과 부유한 지주들, 그리고 고용 기회를 찾아 갈수록 많이 모여드는 기능공들의 마음을 끌었다는 것은 놀랄 만한 것이 아니다. 명대에 쑤저우는 이런 문화적 경제적 발전의 중심지였으며, 대운하에 연결된 주요 항구가 되었다. 그곳에서 상인들의 삶은 생생하고 다양했다. 세련된 판본의 도서를 인쇄하는 많은 주요 출판인들이 쑤저우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명대 말엽의 몇 십 년 동안 지속된 경기침체로 인해 그들을 이어주던 수로, 즉 대운하를 유지하는 일이 침체되었다. 19세기 말엽에야 경제가 회복되면서 식품과 다른 상품들의 지역 간의 교역이 되살아났으며, 이에 따라 강남지역 도시들의 재정도 회복되었다. 청 왕조의 시작부터 1785년까지, 신대륙으로부터 은의 공급이 늘어났다. 농촌에서 토지 임대료를 낼 때조차도 은이 쓰일 만큼 은은 광범위한 교역의 매개물이 되었다. 확실히 은의 유통은 주요 문화 중심지에서 상업 발전에 기여했다. 이 금속 화폐의 가격 변동은 점점 더 많은 농민들로 하여금 시장경제 속으로 들어가도록 강요했으며, 이것은 도시의 성장을 가속화하고 어쩌면 그곳의 독자층을 늘려주었던 듯하다.

그러나 초기의 이러한 번영은 얼마가지 않았다. 18세기 후기의 경제 위기는 점점 더 도시로 몰려드는 대지주에게 토지와 수리(水利)에 대한 권리가 집중됨으로써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일련의 자연재해들도 수상운송체계가 쇠퇴하는 이유가 되었다. 대외 교역 개입에 따른 은화의 가치변동 역시 도시와 도시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역직기(力織機)를 사용한 영국의 섬유생산량이 대대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그리고 그 가격도 중국에서 수입된 직물에 비해 절반밖에 되지 않음에 따라, 1826년에서 1835년까지 상하이에서 난징(南京)의 목면(木棉) 수출이 극적으로 쇠퇴한 것도 부분적인 경제위기의 원인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1834년에 중국 무역에 대한 영국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의 독점이 끝나고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면직물을 수입할 수 있게 됨에 따라, 한 때 번성했던 강남의 산업은 더욱 약화되었다. 뒤이어 일어난 영국과의 아편전쟁과 19세기 중반에 일어난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봉기는 상하이를 주요 항구로 건설하는 동안에도 강남지역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러므로 청대의 마지막 몇 십 년 동안 외국에서 들어온 석판인쇄술이 급격하게 늘어나는 인구를 위한 값싼 인쇄가 가능하게 해 줌에 따라, 그곳에서 백화소설의 간행이 성황을 이루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런 경제적인 요소들이 장편소설 및 단편소설집의 인쇄 품질 저하의 중심적이고 중요한 요인이 되었던 것일까? 이 질문은 현재의 연구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그 대신 지금 내 관심은 소설 출판으로 전문화된 몇몇 인쇄소의 인쇄물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명대 후기와 청대의 소설 판매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도서의 검토

소설 작품의 소매가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가 대부분 결여된 상태인지라, 우리는 그저 상대적으로 비싼 판본과 비교적 값싼 판본으로 구분할 수밖에 없다. 이를 통해 나는 인쇄된 글자의 크기·세부적인 면에서의 정밀도·정확도·양식, 삽화의 수·위치·양식적 복잡성·판각의 선명도, 그리고 종이의 크기·색상·마무리 등과 같은 품질을 검토했다(인쇄물의 일반적인 명료함(clarity)도 중요하다. 닳아빠진 목판 틀로 찍어낸 인쇄물들은 안목 있는 도서 구매자들의 시선을 끌지 못했거나 혹은 매우 낮은 가격에 팔렸을 것이다). 종이의 품질이 인쇄의 품질과 비례한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작은 판형의 목판본들은 대부분 인쇄할 때 주의를 덜 기울였다. 문학으로서 소설의 예술적 수준과 인쇄된 텍스트로서 그것의 가격 사이에 단지 일반적인 수준의 연관성만 있다고 본다면 그것은 좀 의심할 만하다. 16세기에는 재미없는 역사소설들 가운데 어떤 것에는 세련된 삽화가 들어 있기도 한 반면, 앞으로 보게 되듯이 청대의 훌륭한 소설들 가운데 어떤 것은 조잡한 솜씨로 인쇄되기도 했다. 인쇄물의 품질 평가에서 주관성을 제한하기 위해 나는 나의 정보를 책의 물리적인 측면들과 페이지 당 글자 수로 한정한다. 이것들은 어떤 판본의 품질을 평가하는 데 있어 그 자체로 조야한 도구일 뿐이다. 그래도 그것들이 비록 명청 시기 중국의 도서 시장에서 독서 행위나 독자층 또는 틈새(niche)까지는 아닐지라도, 확인 가능한 구매 활동 정도는 시사해 줄 것이다.

1600년대 이전 푸졘(福建) 출판인들이 세운 표준

명대 중엽에는 푸졘의 졘양(建陽) 지역에 사설 인쇄업이 정착됨으로써 이곳이 도서 교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 인쇄업자들은 모든 유형의 도서들에 대해 내용과 인쇄재료, 형식의 표준을 정했다. 푸졘 판본 또는 민판(閩版)의 유서(類書)들과 경서(經書)의 주석본(註釋本)들, 그리고 심지어 백화소설들은 도서 시장을 장악했다. 민판의 물리적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인쇄면을 몇 개의 영역으로 나누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발견된 장편 백화소설 가운데 시기가 가장 이른 원대(元代)의 평화(平話)에서처럼, 인쇄면의 위쪽에 삽화를 얹고 그 아래 본문을 싣는 것(上圖下文)이었다.

그러나 명대 내내 푸졘 판본들은 종종 솜씨가 조잡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의문스러운 사업 활동의 산물인 많은 민판 도서들의 낮은 품질은 이미 원대(1279-1368년)의 인쇄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림 15>는 1321-1323년 사이에 간행된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삽화그림은 풍부한 잘 알려진 전상평화(全相平話) 가운데 하나로서, 나비 날개 모양으로 접어 제본(蝴蝶裝)한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의 두 면이다. 여기서는 통상적으로 약자(略字)가 쓰이고 있고, 판형은 아주 작았다(8.0×13.8㎝). 그렇지만 판각의 품질이 높았기 때문에, 잘 제작된 삽화와 자행(字行-20자 20행)은 읽기 쉽게 되어 있었다. 이것은 비싼 판본이었을까? 동시대의 역사서 판본에 비하면 다른 건 몰라도 그 적절한 길이 때문에라도 그것은 틀림없이 비용이 덜 들었을 것이다. 그렇긴 해도 삽화는 신중하고 능숙하게 조각되었다. 이 삽화들에 들었을 별도의 생산 비용을 고려하면, 이 책은 비교적 고가(高價)였고, 그러므로 틀림없이 상대적으로 부유한 독서 구매자들을 겨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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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5> 《삼국지평화》. 원대 푸졘 판본의 상하이(上海) 한펀러우(涵芬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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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6> 《삼분사략》, 1354년. 텐리 중앙도서관(일본 텐리 대학교)의 복사본

<그림 16>은 《삼분사략》이라는 표제(表題)가 붙은 《삼국지평화》의 값싼 푸졘 번각본이다. 이것은 확실히 우리를 헷갈리게 하는 의문의 텍스트이다. 《삼국지평화》의 몇몇 오자(誤字)들이 《삼분사략》에서는 제대로 되어있다는 사실로 인해, 후자가 원래의 판본이며, 표준적인 ‘평화’는 본문을 희생한 대가로 삽화를 보완한 후대의 판본이라고 여겨져 왔다. 《삼분사략》을 재간행할 때 사용한 기술과 함께 여기에 적힌 갑오(甲午)라는 연대는(그것은 1294년으로 받아들여져 왔으나, 1354년이 마땅하다) 이런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평화’의 어떤 사본은 비슷한 크기의 목판 틀을 판각하기 위한 모델로 이용되었던 것이 명백하다. 이것은 두 판본의 삽화와 본문을 모두 비교해보면 쉽게 판별될 것이다. 원래 곡선으로 되어 있거나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선들이 《삼분사략》에서는 마치 덜 숙련된 각공(刻工)이 조각한 것처럼 단순화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삼분사략》 텍스트는 보기가 더 어렵고 읽기도 훨씬 불편하며, 삽화들은 상대적으로 조잡하고 보기 흉하다(이전의 삽화에서 평지에 난 식물들이 여기서는 어울리지 않게 작은 산들로 변해 있는 것에 주목할 것). 이 두 판본 사이의 차이들은 우리의 가정에 도움이 된다. 기술적으로 두 번째 판본이 첫 번째 판본과 실질적으로 똑같지 않았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삼분사략》의 출판인은 덜 숙련된 기능공을 고용함으로써, 그리고 아마도 비교적 훌륭했던 원본을 조악하게 베낄 정도로 그들의 작업을 독촉함으로써 비용을 줄이는 길을 택한 것이 확실하다. 첫 번째 판본이 겨냥했던 구매자들과는 무관하게 다시 간행된 번각본은 더 싼 책이었다. 《삼분사략》의 출판인은 그런 종류의 역사소설을 위해 돈을 덜 쓰고 싶어 하는 구매자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같은 맥락에서 명대 졘양의 몇몇 출판인들은 나중에는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본문을 잘라 줄이기까지 했다. 같은 목적에서 또 다른 이들은 페이지 위에 더 작은 크기의 더 많은 글자들을 억지로 집어넣기도 했다.

만력 연간 무렵에 졘양의 위샹더우(余象斗: 대략 1560-1637년 이후)가 출판한 책들은 일반적인 독자들을 위한 책 판형의 표준이 되었다. 인물 및 다른 형상의 두터운 윤곽선과 같은 독특한 양식적 요소를 가진 그의 인쇄본의 좁은 가로 형태의 삽화들(上圖下文)은 도서 삽화에서 ‘졘양파’의 특징이 되었다. 이 표준화된 양식은 아마 판매고를 높이기 위해 의도되었을 것이다. 졘양의 다른 출판인들에 의해 출판된 책의 제목을 그가 그대로 가져다 쓴 것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삼분사략》보다는 덜했지만, 명대 중엽과 말엽에 푸졘에서 인쇄된 소설들은 매력이 없었다. 푸시화(傅惜華)의 《중국고전문학판화선집(中國古典文學版畵選集)》은 이런 책들에서 뽑은 흥미로운 페이지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모두 상도하문(上圖下文)의 형식이다. 거기에는 싼화이탕(三槐堂, 쟝쯔성(江子升)이 경영)에서 간행한 삽화(揷圖) 시선집(詩選集)인 《당시고취(唐詩鼓吹)》와 1594년에 위샹더우의 솽펑탕(雙峰堂)에서 주석을 대량으로 붙여서 간행한 영웅전기인 《수호지전평림(水滸志傳評林)》, 그리고 슝다무(雄大木: 활동 기간은 1550-1560; <그림 17> 참조)가 간행한 만력 연간의 종교 소설 《천비출신전(天妃出身傳)》이 포함되어 있다. 이 인쇄물들은 모두 같은 판형을 사용했는데, 상대적으로 읽기 쉽지만, 마지막 것은 푸졘에서 출판된 다른 소설들의 크기와 더 비슷하다(10행 16자). 어쩌면 물리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모두 구매력에 한계가 있는 동일한 계층의 도서 구매자들을 위해 출판되었을 수도 있다.

특정한 출판사의 인쇄물들을 검토해보면 이런 독자층을 끌려는 의도를 가진 더 많은 책들이 발견된다. 졘양의 칭바이탕(淸白堂)은 양셴춘(楊先春)이 운영했다. 만력 연간 후반기에 활동한 이 출판사에서 간행한 소설들은 다음과 같다. 만력 16년(1588년)의 《경본통속연의안감전한지전(京本通俗演義按鑒全漢志傳)》 12권, 만력 32년(1604년)의 《신각전상이십사존득도나한전(新刻全像二十四尊得道羅漢傳)》 6권, 그리고 연대가 밝혀지지 않은 《달마출신전등전(達摩出身傳燈傳)》과 《정계경본전상서유기(鼎鍥京本全像西遊記)》. 이 책들은 모두 페이지 상단에 삽화를 넣어 인쇄되었으며, 인쇄 밀도는 15행 27자(《서유기》)에서 14행 22자(역사소설), 10행 17자(종교 소설)로 다양화되어 있다. 이 소설들의 제목은 만력 연간에 푸졘에서 간행된 다른 소설들에도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요소들—예를 들어서 ‘경본’과 같은—을 사용했으며, 당시에 인기 있는 주제였던 역사적, 종교적, 혹은 환상적 인물들과 관련이 있다. 더욱이 가정 31년(1552년)의 다른 역사소설인 《대송중흥통속연의(大宋中興通俗演義)》 8권에는 칭바이탕에서 간행된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작품의 내부에서는 위샹더우와 슝다무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이 작품들이 푸졘 출판인들에 의해 출간된 저렴한 통속 소설의 범주와 같은 자리에 놓이게 됐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선택한 책들을 통해 양씨 가문의 작업의 의도가 독서에서 대중적인 기호를 충족시키려는 데 있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들의 삽화를 검토해보면 질적인 면에서 대단히 큰 유사성, 곧 이들이 저급한 품질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데, 이것은 다시 감식안이 없고 상대적으로 덜 부유한 독자층의 존재를 드러내 보여준다. 이것은 같은 시기에 강남의 도시들에서 나온 언어적으로 훨씬 복잡한 ‘전기(傳奇)’(남방의 희곡)의 출간에 적용된 세련된 인쇄와는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칭바이탕에서는 또 어떤 작품들을 간행했는가? 반드시 믿을 만한 것은 아니지만, 두신푸(杜信孚)의 《명대판각종록(明代板刻綜錄)》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수록되어 있다: 만력 16년(1588년)의 《신계평림담추동고(新鍥評林甔甀洞稿)》 26권, 만력 연간에 첸위쟈오(陳與郊: 1544-1611년)가 편찬한 《기린계(麒麟罽)》 2권, 천계 4년(1624년)에 덩즈모(鄧志謨)가 편찬한 《차주쟁기(茶酒爭奇)》 2권과 같은 해에 덩즈모가 편찬한 《산수쟁기(山水爭奇)》 3권, 숭정 4년(1631년)에 둥광성(董光昇)이 편찬한 《독역사기(讀易私記)》 10권. 왜 이런 책들을 냈을까? 《담추동고》는 우궈룬(吳國倫: 1524-1593: 담추동은 그가 은퇴한 후 개인 정원 안에 바위들로 장식해서 만든 작은 동굴이다)의 문집이다. 1562년에 우궈룬은 푸졘의 졘닝부사(建寧副使)에 임명되었다. 그는 유능하게 직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이후로 이 지역에서 그의 이름이 상당히 알려졌을 것이다. 천위쟈오(陳與郊, 1544-1611년)는 살인죄로 감옥에 갇힌 아들을 석방시키려던 시도가 실패한 후 좌절에 빠져 죽은 하급 관리이다. 이것은 그의 네 가지 ‘전기’ 작품들 가운데 하나로서, 그가 예전에 필명으로 썼던 작품을 개작한 것이다. 천위쟈오는 아마 《고명가잡극(古名家雜劇)》과 다른 통속 희곡의 편찬에 관여한 듯하며,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이 이 출판사에서 다시 간행되었던 듯하다. 푸졘의 통속 도서 출판인들이 덩즈모의 작품을 간행할 수 있었던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출판인인 위(余) 씨 가문에서 설립한 학교에서 선생으로 일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의 많은 저작들이 푸졘에서, 특히 위(余) 씨 가문의 출판사에서 간행되거나 중간(重刊)되었다. 통속소설 외에 칭바이탕에서는 지역적으로 관심을 끌 만한 책들이 출간되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전체 도서시장에서 또 하나의 틈새시장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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룽위탕 본(容與堂本) 《충의수호전(忠義水滸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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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 연간 쑤저우에서 간행된 《양가부연의(楊家府演義)》.

그러나 명대 후기에 소설이 값싸고 매력 없는 판본으로만 출판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푸졘 출판인들의 인쇄본들이 무엇보다도 덜 부유한 독자들을 위한 것이었던 데에 비해, 항저우와 쑤저우의 출판인들은 매우 세련된 판본들을 출간하고 있었다. 세련되고 넓은 판형으로 다시 제작된 삽화들로 유명한 룽위탕 본(容與堂本) 《충의수호전(忠義水滸傳)》(<그림 18> 참조)은 항저우의 희곡 출판인이 간행한 것이다. 다른 강남의 소설 인쇄본들과 마찬가지로 이 대형 판본(15.5×26㎝)은 고가의 희곡 작품들(약 16×25.5㎝) 못지 않은 시각적인 미감을 준다. 몇몇 판본에서는 유명한 판각공들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는데, 후이저우(徽州) 황(黃) 씨와 류(劉) 씨 가문의 일원이다. 가장 정성스럽게 인쇄된 많은 소설들은 문인 출판인들에 의해 개인적으로 출판된 것들이다. 이 삽화본들 가운데 대다수는 주석도 달려 있다. 예를 들면, 《수양제연의(隋煬帝演義)》(1631년, 15.5×24.0㎝)와 《양가부연의(楊家府演義)》(인쇄면은 13.6×21.2㎝, <그림 19> 참조)의 초판본이 그러한데, 이것들은 모두 쑤저우에서 간행된 것들이다. 그들이 겨냥한 독자들은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안목 있는 도서 구매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바로 명대 후기에 많은 강남의 출판인들이 간행한 산수화와 화조도(花鳥圖) 도록(圖錄)을 구매했던 이들과 같은 집단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