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고대소설 서발문中國古代小說序跋文 《수신기》서 <搜神記序>

《수신기》서<搜神記序>

간바오干寶[1]

【原文】

  雖考先志于載籍,收遺逸于當時[2],蓋非一耳一目之所親聞睹也,亦安敢謂無實者哉!衛朔失國,二《傳》互其所聞[3];呂望事周,子長存其兩說[4],若此比類,往往有焉。從此觀之,聞見之難一,由來尙矣。夫書赴告之定辭[5],据國史之方策[6],猶尙若玆,況仰述千載之前,記殊俗之表,綴片言于殘缺,訪行事于故老,將使事不二迹,言無異途,然後爲信者,固亦前史之所病。然而國家不廢注記之官[7],學士不絶誦覽之業,豈不以其所失者小,所存者大乎!

今之所集,設有承于前載者,則非余之罪也。若使采訪近世之事,苟有虛錯,愿與先賢前儒分其譏謗。及其著述,亦足以明神道之不誣也[8]。群言百家不可勝覽,耳目所受不可勝載,今粗取足以演八略之旨[9],成其微說而已。幸將來好事之士錄其根體,有以遊心寓目而無尤焉[10]

【우리말 옮김】

  비록 시대가 앞선 기록은 전대의 서적에서 고찰하고, 누락되고 빠진 것은 당대의 자료에서 거두었다고는 하나, 대개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들은 바가 아니니 어찌 감히 사실과 어긋나는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위 혜공이 나라를 잃은 것은 두 《전》에 모두 기록되어 있고, 뤼왕이 주나라를 섬긴 사실에 대해서는 쓰마쳰이 두 가지 설을 모두 남겨 두었다. 이처럼 같은 일을 비교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이것으로 볼 때, 보고 들은 바가 한결같기 어려운 것은 그 유래가 오랜 것이다.

  무릇 부고의 정해진 문사를 기록하는 일이나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목판과 죽간에 근거하는 것은 이처럼 여전히 중시되고 있다. 하물며 천 년 전의 일을 받들어 서술하고, 상이한 풍속의 모습을 기록하는 일은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부터 단편적인 말이나마 모으고, 사적에 대해서 옛날 노인들을 찾아가 물어야 한다. 그리하여 사적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전하지 않고, 말이 달라지지 않아야만 믿을 만한 것이 될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이전 시대 역사의 병폐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사관을 없애지 않았고, 학자들은 스승에게 배운 것을 입으로 암송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으니, 어찌 그로 인해 손실된 것은 적고 보존된 것은 많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모은 것은 설사 예전의 전적에서 이어받은 바가 있더라도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다. 만약 가까운 시기의 사적을 찾아가 구하더라도 허구적인 내용과 잘못이 있을 수 있으니, 원컨대 이전 시대의 현인과 유자들과 그 허물을 나누고자 한다. 그 저술로 말하자면, 이것 역시 귀신의 도리가 거짓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에 충분한 것이다. 여러 제가들의 수많은 말들을 다 볼 수도 없고, 눈귀로 보고 들은 바 역시 다 실을 수 없으니, 이제 되는 대로 취한 바로 소설의 뜻을 부연하고 그 하찮은 말을 이루어내기에 충분할 따름이다. 행여 장래에 호사가가 그 주요 부분을 기록하고 세밀하게 들여다보더라도 그것을 의아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해설】

  《진서晉書》<간바오 전干寶傳>에서는 간바오의 《수신기》와 이 작품의 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같고 다른 것을 널리 채록하여, 마침내 허구적인 것과 사실이 뒤섞였다.博采異同, 遂混虛實.” 이것은 이 서문의 핵심적인 내용을 제대로 개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간바오는 지괴의 작자이면서 저명한 역사학자이기도 했다. “같고 다른 것을 널리 채록한다”는 점에서 지괴의 작자와 역사학자로서의 면모가 상호 모순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간바오는 거훙葛洪과 마찬가지로 “여러 제가들의 수많은 말들群言百家”을 둘러보는 것이 낫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사적에 대해서 옛날 노인들을 찾아가 물어보는 것訪行事于故老”과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들은 바一耳一目之所親聞睹”를 매우 중시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의 《수신기》에 남아 있는 민간전설 몇 가지는 당시 일반적인 지괴의 가치를 뛰어넘는다.

  하지만 “허구虛”와 “진실實”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소설가와 역사가 사이에 모순이 생기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지괴의 내용이 본래 허구적인 것이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일반적인 소설에서는 예술적 허구를 허용하고 있는 데 반해, 역사학자들은 “진실을 잃어서는失實”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허구’와 ‘진실’은 중국의 소설이론에서 장기간 논란을 일으켰던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간바오는 이 문제에 대해서 ‘진실’과 ‘믿음’을 강조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음양의 술수를 믿고 좋아했기에信好陰陽術數”, 그러한 귀신과 요괴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實有其事으로 믿었던 것이다. 곧 그가 《수신기》를 편찬한 목적은 바로 “귀신의 도리가 거짓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기明神道之不誣” 위한 것에 있었다. 그가 허구를 배척하지 않은 것은 이것을 피하기 어렵다고 여겼기 때문인데, 그런 까닭에 소설이라는 것도 없앨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가 이해했던 허구에 대한 이해는 후대 사람들의 그것과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초보적으로나마 소설 창작과 이론 방면에서 “허구와 사실을 뒤섞으려는遂混虛實” 시도를 한 것은 우리의 주목을 요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주석]

[1]  간바오干寶의 자字는 링성令升으로 신차이新蔡(지금의 허난 성河南省 신차이新蔡) 사람이다. 동진東晉의 원제元帝 때 저작랑著作郞을 도와 국사를 편수하였다. 뒤에 태수와 산기상시散騎常侍 등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진기晉紀》를 지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훌륭한 사서良史”라고 칭하였다. 《진서晉書》<간바오 전干寶傳>에 의하면, 그는 일찍이 “고금의 신지와 영험하고 괴이한 일, 인물의 변화를 찬집하여 《수신기》라 이름 하였는데, 모두 이십 권이다.撰集古今神祗靈異人物變化, 名爲《搜神記》, 凡二十卷.”라고 하였다. 오늘날 전해오는 것으로는 20권 본과 8권 본이 있는데, 문자가 완전히 같지는 않으며, 모두가 후대 사람이 편집하여 만든 것이다. 수신기의 우리말 번역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임동석 역, 《수신기》(1∼3권), 동서문화사, 2011.
전병구 역, 《수신기》, 자유문고, 1997.

[2]  유일遺逸 : 산실된 고적古籍을 가리킨다.

[3]  웨이숴衛朔은 춘추 시대 위衛나라의 임금 위 혜공衛惠公이다. 그는 정당하지 않은 수단을 통해 왕위를 얻었기 때문에, 우공자 즈右公子職와 좌공자 셰左公子泄의 원한을 샀다. 그들은 함께 공자公子 쳰녠黔年을 옹립했다. 이에 위 혜공衛惠公은 제齊나라로 달아났다. 이 사건은 《좌전左傳》<환공 16년桓公十六年>조에 보인다. 그러나 웨이숴가 나라를 잃어버린 사건에 관해서는 《공양전公羊傳》과 《곡량전穀梁傳》 두 책의 기록이 모두 《좌전》과 다르다. 자세한 것은 《공양전》과 《곡량전》의 “환공 16년”의 기록을 참고할 것.

[4]  뤼왕呂望은 뤼상呂尙으로 호號가 타이궁왕太公望이다. 일찍이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도와 상商을 멸하고 주周나라를 세웠다. 쯔장子長은 쓰마쳰司馬遷의 자이다. 그는 《사기史記》<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가운데 ‘뤼왕이 주나라를 섬긴 일呂望事周’에 관한 전설을 몇 가지 기록하였다.

[5]  부고赴告 : “부고訃告”라고도 하는데, 죽음을 알린다는 뜻이다. 부고가 문자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정사定辭”라고 칭한 것이다.

[6]  방책方策 : 방方은 나무판자를 가리키고 책策은 죽간竹簡을 가리킨다. 고대에는 종이가 없어서 각국의 역사를 나무판자나 죽간에 기록했다.

[7]  주기지관注記之官은 중요한 역사 사실과 임금의 언행을 기록하는 책임을 맡은 관리이다.

[8]  신도神道는 귀신의 도리이다. 《주역周易》<관觀>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성인이 귀신의 도리로써 가르침을 말하니, 천하가 복종한다.聖人以神道說敎, 而天下服矣.”

[9]  팔략八略 : 한대의 류신劉歆이 일찍이 중국 최초의 목록서인 《칠략七略》을 편찬했는데, 여기에는<집략輯略>,<륙예략六藝略>,<제자략諸子略>,<시부략詩賦略>,<병서략兵書略>,<술수략術數略>,<방기략方技略> 등이 포함된다. 간바오는 《수신기》 등과 같은 지괴 역시 하나의 “략略”으로 간주하고 “팔략八略”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후대의 량치차오梁啓初가 《역인정치소설서譯印政治小說序》 중에서 말한 “칠략을 증가시켜 여덟로 만들었다增七略而爲八”고 한 것과 같은 뜻이기도 하다.

[10] 우尤는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