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의 인문학 28-가까운 오지1:객가과 토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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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젠성 난징현에 있는 톈뤄컹촌 마을의 객가 토루. 네 개의 원형 토루와 하나의 사각형 토루가 모여 있어 사채일탕(四菜一湯)이라 불린다.

중국의 민족과 족군 분류에서 객가(客家)라는 갈래가 눈에 뜨인다. 객가인들은 장시성 푸젠성 광둥성이 교차하는 지역에 많이 산다. 이 지역을 따로 구분하여 객가 조상의 땅(客家祖地)이라고도 부른다. 객가조지 이외에 홍콩 마카오는 물론 쓰촨성과 타이완에도 많다. 동남아와 서양으로 이주한 화교도 많았다.

중국에서 객가는 민족으로는 한족에 속한다. 한족을 다시 아홉 개 민계(民系)로 나누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객가이다. 다른 민계는 전부 지명인데 비해, 이들은 객이라는 타자화된 뜻글자를 사용하는 것도 예사롭지는 않다. 조상은 중원에서 온 한족 혈통이지만, 객이라는 명칭처럼 또 하나의 변방민으로 살아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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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가의 조상들은 기아와 전란을 피해 고향을 등지고 떠나온 유민들이었다. 중국 역사에서 운위되는 대규모 유민이 바로 그들이다. 대량의 유민은 한 왕조가 망하고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하는 극도의 혼란기에 발생하곤 했다. 새 왕조가 등장하면 전란이 잦아들고, 정치를 개혁하고 농업을 장려하여 전반적인 생산력이 회복되고 인구도 증가한다. 그러나 안정기나 전성기를 넘기면서 황제는 무능에 빠지고, 관리들은 거대한 기득권을 다지면서 심각한 부패에 취한다. 그 결과는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하는 것이다. 여기에 가뭄 홍수 한해와 같은 자연재해나 변방에서 강성해진 세력이 중원으로 밀고 들어오는 인위적 요소가 보태지면 권력층은 사분오열하고 사선으로 밀리는 농민들은 민란을 일으키면서 극도의 혼란에 빠진다. 이런 시기에 대규모 유랑민이 발생한다. 이런 총체적 혼란은 엄청난 희생을 치루면서 최후의 승자가 새로운 왕조를 세워야 비로소 진정되는 법이다. 중국 역사에서는 여섯 차례의 대규모 유민이 발생했었다. 진시황이 전국 칠웅의 여섯 나라를 전쟁으로 멸망시키는 과정, 한나라 말기에서 위진남북조에 이르는 북방민족이 대거 남하하여 중원을 차지하던 시대, 당나라 말기 황소의 난과 오대십국, 거란과 여진에 눌리다가 몽골에 멸망한 송대, 명말청초의 혼란기, 그리고 청조 후기의 태평천국의 난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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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유민의 역사 때문에 객가의 역사는 진시황 시대부터라고는 하지만 실제 하나의 족군으로 형성된 것은 남송 시대인 것으로 보는 게 다수의 견해인 것 같다.

그런데 객가인들은 스스로를 객가라고 불렀을지는 의문스럽다. 청대 초기에 이 지역에서 토착민들과 신규 이주민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났을 때 토적(土籍)과 객적(客籍)으로 구분하는 말이 있었으니 객이란 말이 사용되긴 했었던 것 같다. 20세기 초반 중국에서 민족분류와 객가문화가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하면서 뤄샹린(羅香林 1906~1978)이란 학자가 객가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 말을 당사자들이 스스럼없이 받아들여 일반화됐다고 하는데, 일부에서는 객가라는 말을 거부하고 스스로 애인(涯人)이라 부르기도 했었다. 또 다른 해석으로 손님들을 호의로 기꺼이 맞는다는 뜻으로 표현한 말이라고도 하지만 이것은 좋은 뜻으로 해석한 게 아닐까.

객가, 한족 8개 민계 중 한 갈래
왕조 교체기에 생긴 대규모 유민
중국에 7400만, 해외 3000만 거주
객가인의 집체주택 ‘토루’ 볼 만
못도 못 박을 정도 튼튼한 방어성

객가인들이 손님을 반가이 맞아주었다고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살던 곳을 떠나 스스로 객이 되기를 마다하지도 않았다. 남중국해의 교역로를 따라 타이완이나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미얀마 등으로, 또 다시 미주와 유럽으로 퍼져갔다. 바로 화교들이다. 객가인은 중국에 7400만, 외국에 3천만 정도로 거주한다고 알려져 있다. 객가인들은 객가 출신의 유명인사 덕분에 더 유명해지기도 했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태국의 잉락과 탁신 전직 총리 남매, 타이완의 리덩후이 등이 객가인 출신이다. 중화민국의 쑨원, 신중국의 덩샤오핑도 그렇다.

객가인들의 토루(土樓)도 우리의 시선을 잡아당긴다. 토루는 그들의 전통 살림집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건축양식이다. 사진에 보이는 마을은 톈뤄컹촌(田螺坑村, 푸젠성 장저우시 난징현 소재)이다. 네 개의 원형 토루와 하나의 사각형 토루가 한데 모여 있다. 마을 뒷산에서 내려다보면 식탁에 늘어놓은 요리접시처럼 보여 사채일탕(四菜一湯)이라고도 부른다. 한 채 한 채가 수십 수백 가구가 모여 사는 터라 우리의 어감으로는 성채라고 해야 적당할 것 같다. 최근 한국인들이 주목하는 여행지로 미디어에서 본 사람도 많고,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해외여행이 올스톱 되다시피 했지만, 그곳을 직접 여행해본 사람도 적지는 않다.

토루로 걸어 들어가면 중원과 변방의 요소가 뒤섞인 그들만의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음미할 수 있다. 객가인들은 집단으로 이주하고 정착한 내력으로 인해 대가족 또는 집체성 요소가 강했다. 객가인들이 남천해서는 산중의 작은 분지에 농지를 개간하고 자리를 잡았다. 이것은 먼저 정착해 있던 현지인에게는 굴러 들어온 바위였을 것이다. 좁은 땅에 많은 사람이 살기 어려우니 다툼이 이어졌다. 밀려난 이들은 도적떼가 되기도 했다. 이런 환경에서 토루라는 건축양식이 생성한 것이다.

토루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대가족 집체주택이란 것이다. 훗날 늘어날 가족을 염두에 두고 당장의 필요보다 큰 집을 짓기도 한다. 개개의 방들은 표준화 통일화되어 있다. 한 칸의 1층에서 꼭대기까지를 한 가구가 사용하는 게 보통이다. 4층이라면 1층은 주방, 2층은 식량저장고, 3층은 침실, 4층은 침실 겸 창고로 사용한다. 소농사회의 종법제도 가운데 마당에는 조당(祖堂)을 지어 공동의 조상을 모신다. 그러나 가가호호의 경제활동과 일상생활은 독립되어 있다.

두 번째 특징은 군사적 방어성이다. 안으로는 넓게 열리고 쉽게 뭉치는 구조이지만, 밖으로는 상당히 폐쇄적인 구조이다. 외벽은 점성이 있는 홍토(紅土)에 석회, 자갈을 섞은 다음 절구공이 비슷한 공구로 일일이 두들기고 다져서 쌓아 올린 것이다. 중요한 부위에는 찹쌀밥이나 흑설탕을 넣어 점성을 더욱 높인다. 이런 재료를 사용하면 못을 박기 어려울 정도로 단단해진다. 하단은 두께가 150cm 정도로서 웬만한 공격으로는 파손되지 않는다. 꼭대기 층에는 토루 전체를 한 바퀴 돌 수 있는 외부의 적을 감사할 수 있는 복도를 만들고 복도 곳곳에 작은 창이나 사격 구멍을 만들었다.

대문은 뒷문 없이 정문 하나만 만든다. 10~20cm 두께의 목판으로 만들고, 바깥 면에는 철판을 입히기도 한다. 안쪽에는 빗장 이외에, 굵은 기둥 두 개를 직각으로 받쳐 외부의 강한 충격에도 열리지 않게 한다. 대문 위의 3, 4층에는 밖으로 돌출된 공간을 만들어 대문을 공격하는 적들에게 끓는 물을 쏟아 부을 수도 있게 했다. 마당의 우물도 필수적이다. 봉쇄를 당해도 장기간 버틸 수 있는 식수원이다.

토루는 처음에는 정방형이 많았고 훗날 사회가 안정화하면서 개방성이 강조된 장방형으로, 나중에는 건축기술이 발전하면서 원형 토루로 변해갔다. 원형 토루는 지진에 강한 구조였고, 방형 토루에 비해 실용 공간을 최대로 확보한다는 면에서도, 방의 공평한 배정에도 유리했다.

대륙은 황제에게는 자부심을 과시할 수 있는 거대한 통치영역이고, 출세하려는 이들에게는 기회의 광장이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는 민초들에게는 몸을 숨기기도 힘든 고초의 현장일 수도 있다. 한 곳에서 발생한 전란이나 재난이 그것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먼 곳까지 심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황제가 가까우면 세금과 노역이 더 커지고, 그곳에서 멀어지면 도적떼들이 관군보다 먼저 들이닥치곤 했다. 객가인들의 일상도 이러했을 것이다. 이런 상시적인 난국에서도 소박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지혜를 음미한 토루가 있었다. 푸젠성 중부 싼밍시(三明市) 동남쪽 40km 거리에 있는 안정보(安貞堡)라고 하는 개인 소유의 토루였다.

안정보는 건축면적만 1만㎡나 되고, 방이 350개나 된다. 9m 높이의 외벽이 좌우 45m, 전후 70m를 감싸고 있다. 택호는 아예 보(堡)라는 군사용어를 사용한다. 전면의 좌우 모서리에는 양쪽에는 포루(砲樓)가 호위장군처럼 당당하게 돌출돼 있다. 게다가 지붕이 뒤로 가면서 한칸한칸 높아지는데 처마의 끝선은 날렵하고 뾰족하게 뽑아 올렸다. 거대한 거북이가 등짝에 날카로운 가시를 꽂고 입을 굳게 다문 채 적들을 응시하는 모양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약점 잡아 공격할 곳이 없어 보인다.

안정보는 이 지역의 유지였던 지점서(池占瑞)와 그의 아들이 1885년 완공한 것으로 지관성(池貫城)이라 불리기도 한다. 안정보는 평시에는 지씨 일가의 살림집이지만, 도적떼가 나타나면 촌락의 모든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공동의 피난처로 지은 것이다. 지씨 부자는 성채와 같은 토루를 짓기 위해 자금성까지도 찾아보았다고 한다. 실제로 도적떼들이 쳐들어온 게 수차례였고, 그 가운데에는 보름 가까이 포위한 채 격렬하게 공격한 적도 있었으나 이를 모두 막아냈다고 하니 그 방어력은 눈으로 보이는 것 이상이었던 것이다.

건축의 내력과 함께 대문 좌우에 걸린 대련이 내 눈에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安于未雨綢繆固(안위미우주무고)
貞觀沐風謐静多(정관목풍밀정다)

비가 오지 않을 때 미리 단단히 준비했기에 편안하고, 수고로이 노력하였기에 평안하여 바른 도리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현장의 설명문에는 지씨 부자를 향신이라고만 했으니 크게 출세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도적떼가 쳐들어오면 마을 사람들을 전부 자기 집으로 피난하게 했으니 참으로 큰 덕이 아닐 수 없다.

공동체에 고난이 닥치면 누군가는 한 끼 식사를 내주고, 누군가는 하룻밤 숙박을 베풀고, 누군가는 한 계절의 생존을 도와주고, 누군가는 고난의 근본원인을 막아내는 일을 떠맡게 되는 게 사람다운 것이 아닐까. 덜 힘든 사람이 더 힘든 사람을 위해 자신의 재산과 능력을 기꺼이 베푼 것은, 아마도 인간사회가 조금씩이나마 발전해가는 원동력일 것이다. 향신이라 칭호밖에는 없었지만 그의 베풂은 동시대를 살던 이웃을 넘어 멋진 건축유물을 통해 낯선 외국인에게까지 전해졌으니 결코 ‘향신의 덕’만은 아닌 듯싶다.

중국여행객 윤태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