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서적사 4

신시아 J. 브로카우 Synthia J. Brokaw

자료와 방법론

나는 위에서 중국의 서적사가 서구의 그것과 대비하여 인쇄기술과 인쇄경제학의 측면에서, 또 사회적, 정치적, 교육적 맥락에서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에 대해서 몇 가지 사례들(과 연구자라면 마땅히 던져야 할 질문들)을 제시했다. 다른 점이 한 가지 더 있는데, 바로 자료들의 유형과 접근성의 차이다. 이 문제는 중국의 책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작업에 상당히 실제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국 서적의 역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서구의 서적사 연구자들이 굉장히 부러울 것이다. 생각나는 대로 서구의 서적사 연구자 몇 명을 꼽아보자면, 로버트 단턴, D. F. 매킨지, 로베르 에스티발, 프랑소아 푸레, 레온 뵈에트, 미리엄 크리스만 등을 들 수 있겠는데, 이들에게는 특정한 서적 산업에 대해 가멸차고 상세한 연구를 진행할 때 끌어다 쓸 수 있는 자료가 굉장히 풍부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도서 목록이나 가격 목록, 서적상과 출판업자들 사이의 통신문들, 도서 산업과 연관한 회계장부들, 도서 전시회의 서목과 도서관 납품 목록, 그리고 서적 출판물 자체를 모아놓은 여러 장서기구 등 다양한 자료를 이용할 수 있었다. 불행히도 명청 시기 중국에 대해서 연구할 때는, 최근 시기의 경우 예외가 있긴 하지만, 그런 자료들 대부분을 폭넓게 손에 넣을 수 없다. 목판 출판업계에서 나온 온전한 형태의 사업 기록들은 많은 경우 남아있지 않다. 내가 알기로는 사실 전무하다. 이는 지난 몇 세기 동안의 폭력적인 대혼란 때문이기도 하고, 어쩌면 상업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중국 도서의 사회사에 대해 분명하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상당히 많다. 더 많은 사업적 정보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생산비용이나 인쇄수량, 가격, 판매 전략과 이윤 등 요컨대 도서 생산과 판매의 경제학에 대한 상세하고도 포괄적인 그림을 제시하는 것은 확실히 불가능하다.

출판과 서적사에 대한 전통적인 자료의 절대 부족은 중국의 학자들에게 큰 도전거리를 안겨준다. 중국의 서적사를 밝혀낼 때 간접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새로운 자료를 찾아내거나 혹은 옛날 자료를 창조적으로 새롭게 읽어내라는 임무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이 책에 실린 논문에서 맥더모트(McDermott)는 도서문화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모으려고 할 때, 서목이나 필기, 공문, 전기 등과 같이 매우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자료들을 철저하고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작업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도서 시장에 대해 임의로 기록한 일화, 텍스트의 희소성에 대한 문인들의 불평, 글공부와 조기 교육에 대한 자술(自述), 정사 기록에서 나온 여러 증거들을 엮어내면서, 맥더모토는 도서관의 장서나 도서의 소유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없음에도 어떤 식으로 명청 시기 전체를 통틀어 인쇄된 책을 손에 넣고 이용했는가 하는 데 대해 의미 있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 가능한지를 보여주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매클라렌(McLaren)의 논문은 밀도있는 읽기의 장점을 보여준다. 이 논문은 특히 읽기(와 쓰기)를 기술하기 위해 사용된 어휘들이나 독자와 독서 행위에 대한 당시의 묘사(글과 그림)를 상상력을 발휘해 해석하고 있다. 어떤 특정한 집단의 독자들에게 텍스트를 “팔기” 위해 고안된 텍스트 자체나 특히 서문에서 사용된 수사적 표현에 대한 분석을 끌어내면서, 매클라렌은 명말에 새로운 독서 계층과 새로운 독서 행위가 발전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점에서 중국의 학자들은 서구의 학자들이 책을 연구할 때 그랬던 것과 동일한 보상을 받았는데, 그것은 책 자체였다. 서구의 책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책들은 그것이 제시하는 텍스트인 내용뿐 아니라 학자들이 도서의 출판과 기원, 목적, 그리고 그 책들이 지향한 독자층과 같은 환경에 대해 배우기 위해 출판 정보와 물리적인 특징들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에 풍부한 자료가 된다. 서구의 서적사를 연구할 때와 마찬가지로, 최소한 ‘판본학’의 방법론과 용어에 어느 정도 숙달하는 것은 중국의 서적사 연구자들에게도 필수적이다.

이 책에 실 실린 몇몇 논문들은 인쇄본을 연구함으로써 이끌어낼 수 있는 정보의 범위를 설명하고 있다. 「싼산졔(三山街): 명대 난징의 상업적 출판인(Of Three Mountains Street: The Commercial Publishers of Ming Nanjing)」에서, 루실 쟈(Lucille Chia)는 서목과 현존하는 출판물에 기록되어 있는 출판 자료들을 수집하고 세심하게 분석함으로써 중요한 도시 출판 산업의 윤곽을 재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와 유사하게 「청대의 비한어(非漢語) 출판Qing Publishing in Non-Han Languages」에서 이블린 러스키(Evelyn S. Rawski)와 쉬샤오만(徐小蠻)은 출판 정보를 꼼꼼하게 읽어내어 특별한 유형의 텍스트의 특징을 기술했다. 러스키는 중요하지만 이제까지 무시되었던 장르의 텍스트들을 개관하였고, 쉬샤오만은 족보의 출판이 어떻게 직업적인 편집자와 출판업자들을 계발하고 활자 기술의 사용을 증대시켰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다른 저자들은 (물론 그 내용뿐 아니라) 텍스트의 물리적인 특징들을 면밀하게 조사함으로써 독자층과 독서 행위에 대한 의문을 풀어나갔다. 헤겔은 다양한 소설과 희곡 작품의 품질과 비용을 분석함으로써 명말의 출판업자들이 서로 다른 계층의 소비자들을 표적으로 삼았다고 주장했는데, 이들 가운데 몇몇은 볼품없는 싸구려 출판물들을 대량으로 만들어냈고, 또 어떤 이들은 기꺼이 비용을 지불할 용의가 있고 또 지불할 수 있는 이들을 위해 고급스러운 판본을 만들어내려고 했다. 다른 두 명의 연구자들은 사뭇 다른 틈새 분야에 초점을 맞췄다. 캐서린 칼리츠(Katherine Carlitz)는 「공연으로서의 인쇄: 명대 후기의 문인 극작가 겸 출판인(Printing as Performance: Literati Playwright-publishers of the Late Ming)」에서 명말과 청대의 희곡 작가와 희곡 애호가들이 펴낸 아름답게 만들어진 곡사(曲詞) 선집을 검토하면서, 판각 스타일의 선택, 그리고 삽화의 내용과 수준, 출판물의 품질이 ‘정(情)’(감정, 순수한 느낌)을 아는 세련된 이들이 자신들끼리 공유한 일체감을 강화하는 데 어떤 식으로 우호적으로 이바지했는가 하는 점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신시아 브로카우(Cynthia J. Brokaw)의 「19세기의 베스트셀러 읽기: 쓰바오(四堡)의 상업 출판(Reading the Best-Sellers of the Nineteenth Century: Commercial Publishers from Sibao)」은 출판 규모의 또 다른 극단을 보여준다. 이 글은 빈궁한 청대의 출판 지역을 직접 현장조사하면서 수집한 상당히 조악한 출판물들을 대상으로 하여, 여러 가지 평점 스타일을 비교하고 레이아웃, 광고, 텍스트 조합에서 나타나는 이본들을 검토하고 있다. 이를 통해 시장의 최하층에 있던 출판업자들이 상당히 이질적인 수요와 독서 행태 및 자원을 갖고 있는 독서 계층에 맞추기 위해 텍스트를 만들어냈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 글을 실은 두 명의 예술사학자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주제를 사뭇 다른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즉 텍스트를 디자인할 때의 물리적인 선택이 어떻게 텍스트의 의미와 의의에 영향을 주는가? 버커스-채슨(Burkus-Chasson)은 특정한 텍스트에 주목하면서 저자와 편자가 내린 물리적인 선택, 즉 삽화 배치, 본문과 삽화 사이의 관계, 그리고 심지어 선택한 장정의 유형 등이 독서 경험을 결정지을 수도 있고, 또 미적으로 미묘하게 텍스트의 “메시지”를 드러내 보여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머레이(Murray)는 명청 시기 유명인을 그린 삽화를 분석하면서, 인쇄 매체를 연구할 때 비교를 이용한 접근법이 얼마나 유익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즉 목판에 삽화를 그리는 것과 돌에 새겨 그리는 것을 비교함으로써 명청 시기 시각 문화에서 목판 인쇄가 차지하고 있는 의의를 조명하고, 나아가 지향하는 독자와 교훈적인 메시지의 측면에서 다른 매체 대신에 목판을 선택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제시했다. 요컨대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단순히 중국의 출판과 도서 문화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정보 뿐 아니라, 자료의 성격과 한계를 감안한 상태에서 중국의 서적 연구에 풍부하게 적용될 수 있는 방법론에 대한 힌트를 제공해주고 있다.

명청시기 출판의 새로운 역사를 향하여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역사적 시기(16세기 중반에서 19세기까지, 명말부터 청대)는 중국의 출판 도서 문화에서 독특하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출판된 텍스트의 양과 형식면에서, 그리고 지리적·사회적 보급의 영역 모두에서 인쇄문화가 확장된 중요한 시기였던 것이다. 이 책과 같이 중국 서적 연구의 시작 단계에서는 명말과 청대를 수미일관하게 통합된 단위로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나중에는 이 4세기 동안의 시간을 더 작은 단위로 나누어 더욱 상세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분야에 대한 이후의 연구가 중국 서적사의 초창기, 즉 8세기에서 14세기까지 이르는 훨씬 더 긴 기간에 대해서도 더욱 풍부한 정보를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송·원(宋元) 시기와 명·청(明淸) 시기의 인쇄문화 사이에 존재하는 다소 이론의 여지가 있는 관계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알려줄 수 있기 바란다.

확실히 중국의 출판업은 인쇄술이 발명된(혹은 인쇄가 존재했다는 증거가 확실한) 8세기 이후로부터 사백 년이 지난 송대에 최초로 시작되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당나라 말기의 인쇄업(사실 우리가 이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은 대부분 종교적이거나 상업적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그 당시의 참고자료와 남아있는 텍스트를 통해 당시 인쇄업은 대부분 종교적 경전이나 기도문, 혹은 달력과 책력과 같은 대중적으로 유용한 텍스트가 주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가장 뚜렷하게는 오대(五代) 시기에, 그리고 다시 한번 송대에 이르러서야 조정은 인쇄가 가져다주는 절호의 기회를 인식하게 되었다. 인쇄를 이용해 경전이나 또는 기타 정치적, 이념적으로 중요한 텍스트의 공인된 표준판을 쉽게 재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송대에는 과거시험의 중요성이 더 커졌기 때문에 공부를 위해 “정통”적인 경전 텍스트의 필요성이 증가하였다.

현존하는 송원대의 판본이 비교적 적어서 당시 출판 붐의 영향을 제대로 측정하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늦어도 12세기에는 상업적 출판업자들이 서적 거래를 장악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졘양과 항저우의 출판업자들은 경전(관방의 판본을 개작하는 경우가 많았음), 초급 독본, 유서, 의학서적, 문학 선집과 필기(筆記) 등 모든 영역의 텍스트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많은 지식인들은 인쇄술로 인해 가능해진 책에 대한 새로운 접근성에 놀랐다. 예를 들면 주시(朱熹)는 인쇄본 도서를 더 폭넓게 얻을 수 있게 되면서 교육적인 면, 특히 읽고 암송하는 연습이 감소하는 현상을 감지하고는 매우 한탄스럽게 여겼다. 동시에, 수전 체르니악(Susan Cherniack)이 말한 것처럼, 새로운 인쇄문화는 문인들이 텍스트를 읽고 이에 반응하는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 다양한 편집 전략을 통해 더욱 적극적으로 텍스트를 통제하고 조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교육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에게 미친 출판 붐의 영향을 추정하는 것은 이보다 훨씬 더 어렵다.

상업적인 출판은 몽골족의 정복에도 살아남아, 원대(元代)에도 꾸준히 성장하였다. 사실, 졘양의 사업은 확실히 그 당시 가장 왕성하게 책을 찍어냈던 상업출판으로서 그 생산품을 꾸준히 늘려나갔다. 새로운 통치자들로부터 어떠한 눈에 띄는 간섭은 없었다. 흥미롭게도 상업적 출판에 대한 실질적 검열은 명대 초기에 이루어졌다. 원대의 몰락과 함께 사회적 무질서가 뒤따랐고, 또 명 태조(재위 기간은 1368-1398년)는 권력 통합을 위해 대규모의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시행했는데, 그 때문에 출판과 도서시장이 붕괴되었다. 아마도 그 당시 가장 큰 서적시장이었을 강남(江南)은 명초의 정책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강남에서 도서수요가 감소하자, 그전에 출판 붐이 일었던 출판 중심지 졘양에서도 서적생산이 침체되었다. 종이의 부족으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마지막으로, 명초의 지적인 환경도 도서 생산을 장려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명초에는 독서를 통한 폭넓은 지식의 습득보다는 도덕적인 자기 수양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러 요인들의 결과로, 14세기 말부터 16세기 초에 이르는 명대 전반기 동안 출판업은 상당히 쇠락하게 된다.

가정(1522-1567년) 연간에 이르러서야 새로운 출판 붐의 표지라고 할 만한 것이 나타났는데, 이 출판 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쟁이 있다. 송원(宋元) 시대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를 송원 시기의 재현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즉 송원 시기에 흥성했던 도서거래가 명초의 짧은 침체 이후 다시 살아났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맥더모트(McDermott)는 이 책에서 이와는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다. 즉, 명말의 출판 붐은 인쇄가 진정으로 중국을 “정복”한 최초의 경우라는 것이다. 이노우에 스스무의 저작에 의거해서, 맥더모트는 사실 16세기에 이르러서야 인쇄본이 그 때까지 도서문화를 지배했던 필사본, 즉 손으로 베껴 쓴 텍스트를 대체할 만큼 폭넓게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확실한 통계 증거의 부족으로 인해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마도 토론의 여지가 많이 남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출판문화가 16세기 초에 시작되었다고 확신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전 두 세기에 비해 출판된 서적의 수량과 유형이라는 측면 모두에서 의미 있는 증가량을 보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이전 세기(15세기) 말부터 시작된 경제의 상업화 경향이 확산되면서 하층 계급들에게는 상류층으로 향할 수 있는 이동의 기회가 제공되었고, 문인 관료뿐 아니라 상인·부유한 장인·소작농을 위한 정보와 아이디어 그리고 텍스트의 유포가 장려되었다.

규모의 성장과 독서층의 다양화는 관방의 인쇄, 문인 또는 개인적인 출판, 학당이나 사원 같은 기관의 출판, 그리고 상업적인 출판 등 출판에 관련된 모든 부문들을 자극했다. 하지만 출판된 텍스트의 수량과 유형의 다양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상업적인 출판 업체였다. 상업적 출판업자들은 《삼자경(三字經)》·《백가성(百家姓)》·《천자문(千字文)》의 총칭인 《삼백천(三百千)》과 같은 주요 교본뿐 아니라, 이제는 또한 의학과 본초에 관련된 소책자, 일용유서, 여행서, 예절 교양서, 대중적인 오락서(특히 명말의 위대한 백화소설과 단편들), 점복서, 달력 등 광범위한 텍스트를 대량으로 찍어냈다. 이 시기에 난징(南京), 쑤저우(蘇州), 항저우(杭州), 졘양(建陽) 등 네 곳의 주요한 상업적 인쇄출판의 거점에서 생산한 텍스트들을 살펴보면, 그 수량이 사부(四部) 분류체계의 전 영역에 걸쳐 비약적으로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출판물의 특징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경전, 유학적 저작, 의서 등이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하기는 했지만, 이야기 선집·역사소설·희곡·점복서·점술책·그림책 등 비학술적 저작들도 새로운 중요성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책에 흥미를 느끼고 저렴한 판본을 구입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고객층의 요구가 증가하자, 이에 대응하여 출판업자들은 자신들의 생산물을 사회적으로 더욱 폭넓고 다양한 독자층에게 맞추게 되었다.

매클라렌(Mclaren)은 편집자, 저자, 출판업자들이 이렇게 확장된 시장에 재빠르게 적응해나갔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떠한 텍스트를 상업적으로 출판하겠다고 결정한 이상……편집자와 출판업자는 문인 계층을 넘어선 다소 폭넓은 독자 대중들을 겨냥하여 판매 전략을 고안해야 했다.” 이제 어떤 책의 서문에서는 그 책이 “사민(四民)” 즉 사농공상(士農工商) 모두에게 얼마나 유용한지를 강조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어떠한 텍스트가 특정한 독자층을 위해 특정한 방식으로 편집되었다는 것도 확실하다. 이러한 사실은 출판업자들이 특정한 텍스트를 위한 틈새시장 개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다시 말해, “무지한 남자[愚夫]” 뿐만 아니라 “무지한 여자[愚婦]”도 포함하는 모든 독자층에 알맞은 책이라 선전할 수 있는 텍스트만 출판하는 데에 그친 것이 아니다

이렇게 책에 대한 요구가 더욱 폭넓어지면서 서적의 형태와 인쇄 방식도 그 영향을 받았다. 세밀한 목판 삽화와 칼라 인쇄[套版]는 명말에 발전한 것으로 유명한데, 이 두 가지 기술은 강남(江南) 지역의 부유한 문인과 상인들에게 사랑 받은 소설 선집과 도록을 꾸며주었다. 출판시장의 가장 아래쪽에서는, 상도하문(上圖下文) 형식의 다소 조악한 삽화가 들어간 소설 · 싸구려 의서 · 가정실용서 등이 그리 부유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구두점 사용이 증가하고 삽화[圖]가 다양해진다는 점을 통해서 출판업자들이 자신들의 책을 보급하기 위하여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즉 서적에 더욱 쉽게 접근하게 함으로써 결국 독해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명대의 서적은 “기술자의 서체”라는 뜻을 갖는 장체자[匠體字, 송체자(宋體字)로 부르기도 함]를 주로 사용하여 송대의 뛰어난 판본보다 아름답지 않긴 하지만, 그와 같은 표준화된 인쇄 서체의 발전으로 인해 텍스트를 더 쉽게 판각할 수 있었으며, 균일화된 서체를 일관되게 사용함으로써 텍스트를 더 쉽게 읽을 수 있게 해주었다.

명말 도서 산업의 확장은 최상위 교양 계층의 흥미를 겨냥한 특화된 시장의 개발을 촉진하기도 했다. 칼리츠(Carlitz)는 문인과 상인이 혼합된 강남지역의 엘리트집단에서 작가와 애호가의 공동체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부유한 상인이자 개인적인 출판인이었던 왕팅나(王廷訥, 1567-1612년)와 같은 인물도 거기에 속해 있는데, 그러한 공동체에서는 희곡이나 희곡선집의 창작, 편집, 출판에 매우 열성적이었다. 헤겔(Hegel)은 강남의 출판업자들이 생산한 세밀한 삽도본이 당시 가장 독창적인 문인취향의 생산품임을 논증한다. 아름다운 그림과 함께 정교하게 제작된 몇몇 삽도본을 살펴보면 그것들이 활동적이고 까다로우며 부유한 문인독자층을 겨냥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역사가들은 또한 출판 붐이 명말의 주요한 지적 운동을 촉진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가장 기본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텍스트에 대한 접근성이 좀 더 확대됨에 따라 새로운 사상의 유통이 용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사상으로는 특히 양명학(陽明學)을 들 수 있는데, 왕양밍(王陽明, 1429-1472년)과 그의 추종자들은 유교의 “정통”으로 여겨지던 정주이학(程朱理學)에 가장 강경하게 도전했던 이들이었다. 인쇄의 확대는 좌절한 과거 응시생들을 돕기 위해 고안된 덩치가 큰 문학 작품의 급증을 촉진하면서 과거시험의 문화를 변화시켰다. 카이윙 초우(Kai-wing Chow) 역시 이러한 문학이 명말과 청대에 지식인들의 삶을 변화시켰다고 주장한다. 즉 경전의 새로운 해석을 더 넓게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짐에 따라, 오랫동안 확립된 기존 독서에 도전하는 학자들을 고무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정통으로 떠받들여진 정주(程朱) 이학의 합법성에 대한 논의를 더욱 자극하게 되었다. 또 다른 차원에서 보자면, 출판적 관심이 다양해진 것은 대부분 인쇄출판을 유교적 가치와 사상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유용한 수단으로 인식하였던 성리학자들에 의해 옹호되었던 사서(四書)의 백화 해석, 일용 유서, 윤리서 등등과 같은 대중적인 교육서의 출판을 감안한 것이기도 했다.

송대에 나타났던 첫 번째 출판 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명말 인쇄 문화의 확산에 의해 만들어진 학술적 토론의 기회가 늘어나고 잠재적 독자층이 확대된 것을 모든 사람들이 반긴 것은 아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사회적 계층에서 서적에 대한 접근성이 눈에 띄게 증가하면서 엘리트 계층에 속한 어떤 사람들은 우려나 심지어 반대를 표명하기도 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엘리트 지위를 유지하는 원천 가운데 하나였던 서적 접근성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를 지켜내려고 애를 썼다. 저우량궁(周亮工, 1612-1672년)의 다음과 같은 한탄은 문인들 사이에 퍼져 있던 이런 관점을 보여준다. “도대체 글을 깨친 자녀들이 없는 집안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돌아보자면, 이 어찌 두렵지 아니한가?(人家兒女, 豈無識者者, 略一回想, 豈不可懼; 원문은 옮긴이)” 맥더모트가 주장하듯이, 싸구려 글쟁이들과 상업적 출판업자들은 더 많은 독자를 끌어들이려고 노력했었는지는 몰라도, 사실 많은 문인들은 명말과 청대에 인쇄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을 전혀 반기지 않았다. 이들 문인들이 보였던 반응은 종종 그들이 자신들의 선집에 접근하는 것을 제한하고, 그들의 힘이 미치는 한 그런 텍스트가 유통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17세기에 이르면 이러한 방어적인 조치들은 적어도 명청 시기의 문화적인 핵심부였던 강남(江南) 지역에서는 실패한 시도로 판명되었다. 푸졘 북부의 졘양과 함께 강남 지역은 상업 출판에서는 전국을 주도했고, 또한 대부분 졘양의 출판물이 강남으로 공급되었기 때문에 강남 지방의 서적 시장이 그 풍부함과 규모 면에서 선두에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단순히 장슈민이 계산한 서방(書坊, 서점, 더 정확히는 인쇄를 겸한 서점)의 숫자만을 살펴본다면, 93곳의 서방이 있었던 난징이 서적 생산 면에서 선두를 차지한다.(이 책에서 루실 쟈는 명말 난징의 주요한 출판 거리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난징의 뒤를 근접하게 따르고 있는 곳은 84곳의 서방이 있었던 졘양이며, 쑤저우는 37곳[만약 쑤저우(蘇州) 현 창수(常熟)에 있던 마오진(毛晉)의 지구거(及古閣)를 포함시키면 38곳], 항저우는 24곳, 후이저우는 10곳으로 그 뒤를 이었다. 17세기 초에 중국의 거의 모든 지역에 상업적인 인쇄소가 설립되었지만, 졘양이나 강남과 경쟁을 벌일 수 있는 규모는 아니었다. 베이징은 바로 제국의 수도였지만 명대에는 단지 13곳의 상업적 서방을 내세울 수 있을 뿐이었다.

서적의 생산 수량에 대한 장슈민의 대략적인 추정은 이러한 서방 수의 일반적인 순위와 대체로 들어맞는다. 많은 책을 찍어내었던 졘양의 인쇄업자의 고향인 푸졘 성에서는 1000종이 넘는 서적을 대량생산하였으며, 468종을 생산한 난즈리(南直隸, 난징, 쑤저우, 후이저우)가 그 뒤를 잇고 있으며, 저쟝(浙江, 칼라 인쇄로 유명한 항저우와 후저우)과 쟝시(江西)에서 각각 400종 이상을 인쇄했다. 그 다음으로는 생산량이 현격하게 감소한다. 베이즈리(北直隸), 후광(湖廣), 허난(河南), 산시(陝西)와 산시(山西)는 각각 “100종”을 간신히 넘을 정도에 불과하고, 쓰촨(四川)과 산둥(山東)이 단지 70종 정도, 광둥(廣東)과 윈난(雲南)은 50종 정도, 그리고 광시(廣西)와 구이저우(貴州)가 겨우 “10종 남짓”의 책을 출판했다. 간단히 말해서 명말의 출판 붐은 크게 보면 출판사들이 집중된 두 지역, 즉 푸졘 북부의 졘양과 난징·쑤저우·항저우·후저우·후이저우 등 강남의 출판중심지에 의해 충당되었던 것이다.

명말의 출판 붐을 일시적으로 중단시켰던 1644년 만주의 중국 정복 이후에는 상업 출판의 지리적 분포와 지향에 변화가 있었다. 만주의 정복으로 생겼던 혼란으로 인해 출판업에도 불황이 닥쳤는데, 이 때문에 명대 출판 중심지 가운데 몇몇의 경우 다시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못했다. 졘양은 청나라 초기에 세상에서 잊혀졌다. 인쇄 규모로 따지면 최고급 수준이었던 후이저우는 명말에 값비싼 “예술” 삽도본으로 유명했는데, 졘양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특별한 중요성을 띠고 있던 인쇄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난징과 항저우는 적어도 일시적인 침체를 겪었다. 그 두 곳이 지역적 중심지로 충분히 회복된 다음에도, 명대에 졘양과 함께 누렸던 전국적인 명성은 되찾지 못 했다. 이를테면, 장슈민의 추산에 따르면, 난징의 중요한 서방(書坊)의 수는 93곳에서 청초에 8곳으로 줄어들었으며, 항저우는 25곳에서 5곳으로 줄어들었다. 단지 쑤저우(蘇州)만이 기존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심지어 그 수가 늘기까지 했는데, 적어도 총 55곳으로 명대의 37곳보다 상당한 증가세를 보였다. 이와 같은 숫자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되겠지만, 그래도 왕조가 바뀐 이후 예전의 강남의 출판 중심지에서의 상업 출판을 특징짓던 하향세를 거칠게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하지만 이전의 출판중심지의 쇠퇴를 상업적 출판 산업의 쇠퇴 또는 전반적인 인쇄의 쇠퇴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사실 17세기 말에 이르면 두 가지 측면에서 목판 인쇄의 철저한 보급이 시작되었다. 곧 첫째, 지리적인 측면에서 중국의 모든 지역에 인쇄출판이 보급되었고 둘째, 지리적으로 범위가 더 확장된 것만큼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그 때까지만 해도 생산의 중심지에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도서 시장에서 대체로 배제되었던 사람들에게까지도 서적이 보급되었다.

청대 출판 산업의 지리적인 패턴에서 눈에 띄는 점은 중국 전체적으로 상업적 출판 사업이 더욱 균등하게 보급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업적 출판은 옛날의 중심지에서 외부로 그 외연을 확대하였다. 명말의 출판 중심지 몇몇이 중국 전체를 이끌어가는 출판업의 선도자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면서, 다른 곳들이 두드러지게 부상하였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마도 베이징이 새로운 출판의 중심지로 부각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장슈민은 청대의 베이징에 112곳에 이르는 서방을 나열하고 있는데, 명대의 13곳에 비하면 거의 아홉 배에 이른다. 물론 류리창(琉璃廠)이 중국 서적시장의 활력을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곳으로 자리잡은 것도 이 기간 동안이었다.

그러나 베이징의 현저한 부상이 상업적인 서적 거래의 집중화를 낳았을 것이라는 예단은 금물이다. 원래부터 관방 인쇄의 주요한 거점이었던 각 성의 성도(省都)는 물론 이제는 여러 지방 도시들 역시 상업적 출판의 거점으로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쓰촨의 청두는 명말 장셴중(張獻忠)의 난과 만주침략의 파괴에서 회복된 이후 강희제 말기와 건륭제 초기에 이르면 커다란 상업적 서방이 적어도 10여 곳이나 생겼다. 충칭의 경우 서방의 숫자는 결코 청두와 경쟁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알려진 역시 상업 출판의 거점이었다. 광저우는 또 다른 예가 될 것인데, 청대 중기부터 눈에 띄는 상업 출판의 거점지가 되었고, 청대 말기가 되면 광둥 경세파 저작의 출판으로 번영하였다. 1850년대부터 20세기 첫 번째 10년 간 광저우가 상업적 출판의 성황을 누리는 동안 이 도시에는 최소한 23곳의 서방이 있었다.

주요 지방도시에 상업적 출판이 보급됨에 따라 더 작은 중간 수준의 출판단지가 새롭게 생겨났다. 여기서 가장 좋은 두 가지 예로 “청대 사대집진(四大集鎭)”에 들어가는 광둥(廣東)의 포산(佛山)과 쟝시(江西)의 쉬완(滸彎)을 들 수 있다. 19세기 말에 포산(佛山)에는 12곳의 상업적인 인쇄소가 있었으며(그 중 두 곳은 광둥 본점의 지점이었을 수 있다), 청대의 끝 무렵에는 백화소설과 대중 의학서적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곳이 20곳을 넘었다. 쉬완(滸彎)은 푸저우(撫州)로부터 40리(里) 정도 떨어진 푸 강(撫江)의 상류에 위치한 마을로 쌀과 종이, 죽공예품, 약초로 유명한 지역 시장이었다. 이 마을은 쳰수푸졔(前書鋪街)와 허우수푸졔(後書鋪街)가 나란하게 양옆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여기에 47곳의 인쇄소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으며. 다른 13곳의 가게는 마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19세기의 어떤 학자의 추산에 따르면, 이 인쇄소들은 당시 어떤 다른 출판단지보다 많은 목판 인쇄물을 출판했다[광둥(廣東)의 마강(馬崗)은 예외일 수도 있다]. 쉬완(滸彎)의 출판업자들은 출판 부수가 방대했을 뿐만 아니라, 경전과 문학선집의 정교한 판본부터 달력이나 값싼 의학서적과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형과 품질의 인쇄물을 출판했으며 난창(南昌), 쥬쟝(九江), 우후(蕪湖), 안칭(安慶), 난징(南京)과 창사(長沙)와 같은 양자강 하류지역까지 출판물을 유통시켰다. 이렇듯 중국의 남쪽 지방에서는 아마도 종이를 구하기 쉬웠기 때문인지 출판 산업의 외연 확대가 눈에 띄었는데, 중국의 북부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예를 발견할 수 있다. 산둥 지방의 지난(濟南)과 랴오청(聊城)은 광둥의 쉬완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수로 옆에 자리 잡고 있어 그 덕을 톡톡히 보았다. 이 도시들은 대운하에 연결되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청대(淸代)에 걸쳐 인쇄와 출판의 단지로서 중요성이 계속 증가하였다.

영향력 있는 인쇄업체들의 소재지가 청나라 지방행정 체계의 중간 단위보다 더 아래 지역, 때로는 주요 수송 경로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있기도 했다. 쓰바오(四堡) 지역은 행정 단위가 비교적 낮은 서부 푸졘의 산 속에 고립되어 있었지만, 그 전성기였던 18세기 말엽과 19세기 초 동안에는 적어도 50여 곳의 인쇄소가 있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이곳의 몇몇 서방에서 생산된 출판물에 대한 브로카우(Brokaw)의 논문을 볼 것)

이렇게 출판 산업의 분포가 이동하고 중간급이나 그 이하의 지역단위로 확산되는 현상이 왜 관심을 끄는 것일까? 물론 여기에서 우리가 청대의 현상으로 파악하는 여러 특성이 어느 정도는 명말의 출판 붐의 자연스러운 전개를 나타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즉 만주족의 정복과 권력의 통합 기간 동안 난징과 쑤저우 같은 거대한 출판 거점이 잠시 쇠락한 상황에서 인구가 증가하면서 이와 같은 발전이 가속되었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부분의 비교적 작은 규모의 출판 산업들이 막 땅띔을 했던 18세기에 중국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이 점은 확실히 출판의 확대를 자극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청나라 전성기 때의 대규모 이주로 말미암아 출판산업이 궁벽한 지역에까지 진출했던 것이다. 이주는 단지 서적에 대한 수요뿐 아니라, 그러한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각공의 공급도 창출했다. 청대에 출판사의 숫자가 놀랄 만큼 증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이주민이라는 든든한 기반이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를테면 쟝시의 이주민들은 대체로 청두의 상업 출판의 부흥을 책임지고 있었고, 웨츠(岳池)의 각공들은 광시와 윈난의 경계지역에 자신들의 공방을 설립했다. 우리는 아직 이주의 패턴이나, 이주를 통해 형성된 연결고리가 어느 정도까지 상업적 출판업체들을 지역적 더 나아가 전국적 네트워크로 통합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중국 출판의 확산을 더욱 온전히 이해하려면 향후의 연구를 통해 이 문제를 꼭 해결해야 한다.

지리적 범위의 확장, 양적인 성장, 출판 거점 사이의 내부적·외부적 연계의 복잡성이 더 커진 것 등은 청대 서적 거래의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18세기의 번영이나 인구증가와 짝을 이루고 있다. 아무튼 그 때문에 지리적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적 측면에서도 텍스트가 더 넓고 깊게 확산될 수 있었다. 중간급 지방행정 단위에 둥지를 튼 새로운 출판거점에서는 자신들의 생산물을 비교적 싼 가격으로 더 큰 서적시장과 더 궁벽한 서적시장에 모두 공급했다. 이제 서적 판매망이 확장되면서 심지어 아주 외딴 곳에 위치한 시골 마을이나, 혹은 사회라는 사다리의 가장 아래쪽에 위치하여 여태껏 인쇄출판 문화에서 배제되어 있던 사람들에게까지 인쇄본이 보급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인쇄 출판 문화가 이제는 중국 전역으로 확장되어 언뜻 보기에 어느 정도 동질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지역적인 다양성이 크게 늘었다는 사실이다. 러스키(Rawski)가 자신의 글에서 명백히 밝힌 바와 같이 비한어(非漢語) 서적들이 베이징에서 조정과 상업적인 서방(書坊) 양쪽에서 출판되었으며, 방언으로 쓴 책이나 또는 지방의 학술적·문화적 관심을 표현한 저작들도(예를 들어 19세기에 청두 인쇄업자들의 전문분야가 된 쓰촨 경세파의 저술) 계속해서 출판되었다. 하지만 널리 유통되었던 필수 서적 군(群)이 대체적으로 이런 특수분야의 서적들을 압도하였다. 즉 브로카우(Brokaw)의 글에서 암시하고 있듯이, 베스트셀러가 되기에 확실히 안전한 책들이 여전히 어느 곳에서나 출판업자들의 도서목록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공유된 책문화의 확대가 문해력 또는 수용의 측면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학자들은 식자층의 비율을 추정하기 위해서 시골동네의 희귀한 기록, 초등교육의 성격을 묘사한 글, 교재의 이용 여부, 비엘리트 계층의 읽기능력에 대한 일화적 증거 등 광범위한 자료를 이용해야만 했다. 이러한 추정치는 대체로 식자층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 러스키(Rawski)는 “단지 몇 백 글자 정도만” 아는 사람까지 포함시킬 만큼 식자층을 폭넓게 정의하여, 19세기 중․후반에 이르면 남성인구의 30%~45%, 여성인구의 2%~10%가 글을 깨쳤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이데마(Idema)는 이 추정치가 너무 높다고 반박하면서, 대략 남성인구의 20%~25% 정도, 설사 식자층에 대한 러스키의 폭넓은 정의를 적용하더라도 최대 30% 정도만이 기능적으로 글을 깨쳤다고 주장했다. 19세기의 여러 모순된 기록들이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고 또 확고한 통계 증거가 부재하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출판의 확대와 핵심 도서의 형성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를 판단하기는 더욱 어렵다. 브로카우(Brakaw)는 쓰바오(四堡)에 관한 논문에서 매크라렌(McLaren)과 헤겔(Hegel)의 요점을 되풀이하면서, 완제품으로서의 책의 품질 상의 차이와 구두점, 여러 가지 유형의 주석(주석이 부재한 경우도 있음), 독음(讀音) 정보, 삽도 등의 사용에서 나타나는 형태 상의 차이가 틀림없이 독서방식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즉 그의 주장에 따르면, 동일한 제목을 달고 있는 책이라도 상이한 독자가 상이한 판본을 읽는다면 그 방식은 달라질 수밖에 없으며, 또한 이것이 베스트셀러 가운데서도 핵심을 이루는 것들이 갖는 통합적인 기능을 약화시켰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는 텍스트 내부의 이런 차이점들과 서문, 범례, 그리고 여타의 텍스트에 덧붙여진 글들에서 명시적으로 규정된 독자층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그 책이 어떤 독자를 상정하고 있는지를 어느 정도까지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독자들이 실제 반응에서 어떠한 차이를 보였는지를 밝히기 위해서는 새로운 자료의 발굴이나 더 많은 조사와 연구를 기다려야 한다.

독자 대중의 확장 추세를 정확하게 수량화하거나 분석하는 것이 아무리 어렵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명말에 시작하여 청대에 힘을 얻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를테면, 여성들이 점차적으로 글쓰기와 출판, 그리고 추측컨대 독서의 세계로 끌려들어 왔다. 도로시 코(Dorothy Ko)는 《규방의 선생님들(Teachers of the Inner Chambers)》에서 17세기에 여성들이 쓴 글, 대체로 시(詩)를 출판하는 풍조가 갑작스럽게 유행했다고 주장했다. 이 책에서 매클라렌(McLaren)은 명말에 이미 몇몇 편집자들과 출판업자들이 여성 독서층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수전 만(Susan Mann)과 엘런 위드머(Ellen Widmer)는 출판된 여성의 시(詩)의 수량이 증가한 것과 더불어 청대 전반에 걸쳐서 여성 독자층이 지속적으로 늘었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완옌 윈주(完顔惲珠, 1771-1833년)가 1831년에 출판한 《국조규수정시집(國朝閨秀正始集)》은 어쩌면 이러한 경향의 정점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이 총집은 여성들이 쓴 시(詩)를 전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중국 내 모든 계층과 민족 출신의 규수들의 시를 골고루 선록하고 있다. 이를테면, 좋은 집안에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윈주 자신의 시와 더불어 하미(哈密)의 낚시하는 여인들이 작가로 되어 있는 운문도 싣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윈주(惲珠)의 총집은 표면적으로는 사적인 동기에서 출발한 것으로 나타나긴 하지만 출판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전략을 관통하는 어떤 목적을 공유한 것으로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전략에는 가장 악명 높은 것으로서 난폭한 검열이나 심지어 국가의 위험요소로 낙인찍힌 작가나 출판업자에 대한 처형까지 들어있다. 이러한 사례에서 정부가 글쓰기와 출판을 통제하거나 혹은 통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비 한족 통치자들에 대한 비판으로 여겨질 수 있는 목소리를 삭제함으로써 통합을 강제하려는 시도에 해당한다. 이러한 방식이 미친 효과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확실히 잘못일 것이다. 학자들을 겁박하고 특정한 저작의 생산을 막고 파괴하는 방법을 통해 학자와 문인들이 취할 수 있는 정보와 지적 선택권의 범위를 제한하게 되었는데, 오카모토 사에가 주장하였듯이 이 때문에 19세기 개혁을 위한 여러 움직임도 심각하게 방해를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청조(淸朝)의 전략은 이를테면 시가 총집과 철학 선집의 편찬이나 문헌정리 작업을 지원하는 등 더욱 긍정적인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비록 이러한 지원정책의 주된 목적이란 청조의 정치적·문화적 주도권을 공고화하는 것이었지만, 문헌연구의 새로운 방법론에 자극을 주었으며 학계를 주도하는 학자들에게 든든한 지지기반을 제공하기도 했다. 실제로 청 정부는 “교화정책”, 즉 민족 구성이 복잡한 제국의 정치적·문화적 결속을 다지기 위한 정책의 한 방편으로서 출판을 공격적으로 이용했다. 이렇게 보면, 낚시하는 하미의 여성에 “의해” 씌어진 시가 만주 귀족과 결혼한 한족 여성(인 동시에 이 선집이 나올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만주 고관의 어머니)가 편집한 선집에 수록되었다는 것은 소수민족의 존재를 인지하고 동시에 그들을 한족의 “교화” 문화에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으로 파악할 수 있다. 물론 만주족이 세운 청조의 절대적 지위를 방패로 삼기는 했지만 말이다.

인구 구성에서 한족이 압도적으로 다수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정부로서는 여러 민족 사이의 결속력을 확보하려고 애쓰면서 다른 문화적 전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무척이나 중대한 일이었다. “비한어 세계”의 텍스트를 출판하는 것에 대한 러스키의 논문에 따르면, 청 정부가 만주어·몽골어·티베트어·그 밖의 비한어로 된 텍스트의 출판을 독려하는 데에 힘쓴 것은 한족이 대부분인 사회에서 한족 이외의 민족에게 공간을 만들어주는 수단이었다. 이러한 활동은 어느 정도는 건륭 황제가 사고전서의 편찬과 같은 한족 학술의 방대한 선집을 지원한 것에 대한 단순한 반대급부였다. 곧 어느 쪽이 되었든 청조의 지배 하에 있는 다양한 민족들이 그들의 차이를 인식하고, 존중하고, 재현하는 방식으로 그들 사이의 통합을 구현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19세기는 중국의 서적사에서 매우 색다른 국면이 전개된 시기였다. 목판 인쇄가 19세기 전체를 관통하여 문인 출판과 상업 출판을 지배하고 있긴 했지만, 두 가지 새로운 발전이 도서 문화의 조류 변화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 첫 번째는 기술적인 것으로, 19세기 말 서구에서 석판인쇄술과 활판인쇄술이 도입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기술의 도입을 통해 텍스트를 더욱 쉽고 싼 방법으로 신속하게 생산하고 배포할 수 있게 되었다.(그리고 상하이가 중국 도서거래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하였다). 두 번째는, 어쩌면 좀 더 심각한 의미가 있는 것이라 할 수도 있는데, 외국의 제국주의와 접촉하면서 문화적·학술적 변화가 촉발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로 인해 교육의 성격, 지식에 대한 이해, 문자 언어 자체가 지닌 사회적 중요성 등이 변모하였다. 이러한 거대한 변화와 이것이 “옛날” 목판인쇄 문화 사이에서 일으킨 상호작용에 대한 연구는 향후 또 다른 책이 나오길 기대한다.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은 명청 시기 중국 서적 연구에 초점을 맞춘 주제들을 강조하기 위한 것들이다. 이 글에서는 이 분야에서 중요하고 또 앞으로 중요성을 띠게 될 몇 가지 주제를 비교 연구를 통해서, 또는 중국적 특수성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맥더모트(McDermott)의 「중국에서의 인쇄본의 우세(The Ascendance of the Imprint in China)」라는 글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도론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것은 이 책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명청시기 출판과 도서 문화에 대한 연구를 좀 더 넓은 역사적 맥락, 즉 송대 이래의 중국서적사라는 맥락에서 살피고 있기 때문이다.

명말에 인쇄본이 흥기함에 따라 도서시장이 크게 확대되고 청대에 걸쳐 출판업체가 급증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 책의 제2부인 “상업적 출판과 서적시장의 확장”에서는 도서 문화와 상업 출판 모두에서 일어난 이러한 성장을 다루고 있다. 곧 제3장인 루실 쟈의 논문은 명말에 가장 흥성했던 남경 시내의 출판 중심지들을 묘사했고, 제4장인 매클라렌의 논문에서는 같은 시기의 출판업자들이 기존의 엘리트 계층 위주의 시장에서 무시당했던 독자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면서 확대된 독자층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노력을 경주했던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제5장인 브로카우의 글에서는 청대에 이르러 주요 출판업체가 궁벽한 지역까지 확산되는 현상을 다루고 있다.

제3부 “특화된 독자들을 위한 출판”에서는 명청 시기 출판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발전상에 대해 탐구하고 있는데, 그것은 매클라렌과 브로카우가 모두 지적하듯이, 출판의 확대로부터 배태되고, 독자층의 확대로 인해 자연스럽게 파생된 것으로, 곧 서로 다른 성격의 시장이 흥성하고 틈새 독자층이 생겨난 것이다. 제3부의 논문들은 대략 시간순서에 따라 서로 다른 “틈새” 영역에 특화된 출판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바로 명말 엘리트 계층을 위한 소설(제6장 헤겔의 논문)과 희곡(제7장 칼리츠의 글), 만주 제국에 포함된 새로운 비 한족 집단을 위한 텍스트(제8장 러스키의 논문), 청대와 민국 시기 집안 구성원의 기록을 족보의 형태로 남기는 데 관심이 있었던 가문들(제9장 쉬샤오만의 논문) 등이다.

마지막으로 제4부에서는 물리적이고 시각적인 대상으로서의 책에 초점을 맞추었다. 제10장 버커스 체이슨의 논문은 텍스트와 삽화의 배치, 서체의 선택, 나아가 페이지를 묶는 방식 등 책의 형태가 텍스트의 의미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았다. 제11장 머레이의 글에서는 다른 매체와의 대비를 통해 목판본에 들어있는 삽화가 어떤 식으로 미묘한 의미의 차이를 전달하고, 어쩌면 다소 다른 독자들의 마음에 호소하는지를 다루고 있다.

당연하게도 이 책에서는 여러 가지 중요한 주제와 논점을 모두 다룰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의 목적은 중국 서적 연구의 경계를 포괄적으로 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주제에 관해서 기존의 연구결과를 소개하고 향후 연구에서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