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고대소설 서발문中國古代小說序跋文 –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

반구班固1)

[原文】

《伊尹說》二十七篇2)(其語淺薄,似依托也。)

《鬻子說》十九篇3)(後世所加)

《周考》七十六篇4)(考周事也。)

《靑史子》五十七篇5)(古史官記事也。)

《師曠》六篇6)(見《春秋》7),其言淺薄,本與此同,似因托之。)

《務成子》十一篇8)(稱”堯問”,非古語。)

《宋子》十八篇9)(孫卿道10):”《宋子》,其言黃老意11)。”)

《天乙》三篇12)(天乙謂湯,其言非殷時,皆依托也。)

《黃帝說》四十篇13)(迂誕依托。)

《封禪方說》十八篇14)(武帝時15)。)

《待詔臣饒心術》二十五篇16)(武帝時。)

《待詔臣安成未央術》一篇17)

《臣壽周紀》七篇18)(項國圉人19),宣帝時20)。)

《虞初周說》九百四十三篇21)(河南人,武帝時以方士侍郞22),號黃車使者23)。)

《百家》百三十九卷24)

右小說十五家,千三百八十篇。

小說家者流,蓋出于稗官25),街談巷語,道聽途說者之所造也。孔子曰26):”雖小道,必有可觀者焉,致遠恐泥。是以君子弗爲也。” 然亦弗滅也。閭里小知者之所及27),亦使綴而不忘28)。如或一言可采,此亦芻蕘狂夫之議也29)。

【우리말 옮김】

《이윤설伊尹說》 27편. (그 말이 천박하여 의탁한 듯하다.)

《육자설鬻子說》 19편. (후세에 가필한 것이다.)

《주고周考》 76편. (주나라의 일을 고찰한 것이다.)

《청사자靑史子》 57편 (옛날 사관史官이 사실을 기록한 것記事이다.)

《사광師曠》 6편 (《춘추春秋》에 보인다. [《춘추》에 실린] 그 말이 천박한 것으로 보아 본래 이것과 같은 것으로, 따라서 [《춘추》에 실린 내용은] 이것을 가탁한 것일 것이다.)

《무성자務成子》 11편 (요가 물었다고 한 것은 고어古語와 어긋난다.)

《송자宋子》 18편 (쑨칭孫卿에 의하면, “《송자》는 그 주장하는 바가 황제와 노자의 사상宋子, 其言黃老意”이라고 하였다.)

《천을天乙》 3편 (천을은 탕湯을 말하는데, 그가 은나라 때를 말한 것은 모두가 가탁한 것이다.)

《황제설黃帝說》 40편 (진부하고 황당한 것으로 보아 가탁한 것이다.)

《봉선방설封禪方說》 18편 (무제武帝 때이다.)

《대조신요심술待詔臣饒心術》 25편 (무제 때이다. 옌스구顔師古에 의하면, “류샹의 《별록(別錄)》에서는 ‘요는 제齊나라 사람으로 그 성은 알 수 없고, 무제 때 대조였다. 책을 지어 이름을 《심술》이라 했다.’劉向《別錄》云: 饒齊人也, 不知其姓, 武帝時待詔, 作書, 名曰《心術》”라고 하였다.)

《대조신안성미앙술待詔臣安成未央術》 1편 (잉사오應邵는 “도가이다. 양생의 일을 잘했고, 미앙의 술을 행하였다.道家也, 好養生事, 爲未央之術.”라고 하였다.)

《신수주기臣壽周紀》 7편 (항국項國의 위圉 지방 사람으로 선제宣帝 때이다.)

《우초주설虞初周說》 943편 [허난河南 지방 사람이다. 무제 때 방사시랑方士侍郞으로, 황거사자黃車使者라고 불렀다. 잉사오는 “그의 설은 《주서周書》를 바탕으로 하였다”라고 했고, 옌스구에 의하면, “《사기》에서는 ‘위추는 뤄양 사람이다.虞初, 洛陽人’라고 하였으니, 곧 장헝張衡의 《서경부西京賦》에서 ‘소설 구백은 본래 위추에게서 나왔다小說九百, 本自虞初’라고 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백가百家》 139권

이상 소설 15가 1380편.

소설가의 무리는 대개 패관稗官에서 나왔으며, 길거리와 골목의 이야기나 길에서 듣고 말한 것으로 지었다. 쿵쯔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30) “비록 작은 기예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볼 만한 것이 있을 것이나, 너무 깊이 빠져들어 헤어나지 못할까 두려우니”, 그래서 군자는 그것에 종사하지 않는 것이다 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없애지도 않았는데, [그 까닭은] 마을에서 어줍잖은 지식을 가진 이가 한 말이라도 가능한 수집 보존하여 잊히지 않도록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어쩌다 한 마디라도 취할 만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꼴 베는 사람이나 나무꾼 또는 정신 나간 이의 의견일 따름이다.31)

【해설】

<예문지>에서는 춘추전국 이래 이른바 ‘소설가’가 있었는데, 유가儒家, 도가道家와 같은 제가諸家와 병칭될 정도였다고 주장했다. 반구班固는 15편의 소설의 편명을 열거하고 여기에 주를 달았는데, 이로써 당시 사람들의 소설에 대한 이해가 비교적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여기에서 “옛날 사관史官이 사실을 기록한 것記事이다古史官記事”이라 함은 역사적 사실의 기록을 말하는 것이고, “진부하고 황당한 것으로 보아 가탁한 것迂誕依托”이라고 한 것은 신괴神怪한 작품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철리哲理를 천명하는 의론도 포함되고, 풍속일문風俗逸聞의 기록도 들어가는 등, 내용이 잡다하고 범위가 광범위한데, 이러한 ‘소설’ 개념은 청말淸末까지도 영향을 주었다.

다른 한편으로 <예문지>의 의의는 소설의 근원을 민간에서 찾았다는 데 있다. 반구에 의하면, 마을의 하급관리 몇 명이 소설을 편찬하고 수집하여 보존했다고 한다. 이러한 견해는 소설의 사회 작용 및 작가의 인식과 밀접히 연관된 것이다. 여기에서 반구는 쿵쯔와 그 제자들의 관점을 완전히 계승해 소설이라는 것이 비록 평범한 사람의 하찮은 도리小道이지만 보고 취할 만한 것이 있다고 여겼다. 반구는 영향력 있는 사학가史學家였기에, 소설에 대한 그의 이러한 평가는 후대 사람들이 소설을 역사학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도록 이끌었다. <예문지>는 서적들에 대한 목록이었는데, 후대의 목록학자들이 소설에 대한 ‘제요提要’를 쓸 때도 그 모범이 되었다.

이렇듯 반구가 역사학이나 목록학의 측면에서 소설을 논하였기에 후대 사람들의 소설에 대한 논의 역시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전통적으로 소설을 천시했던 중국에서 사람들이 그나마 소설의 창작과 연구를 중시했던 것은 역사학과 목록학적 측면에서 소설이 갖고 있는 가치를 어느 정도 인정했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소설에 대한 반구의 논의는 긍정적인 의의를 갖는다.

[주석]

1) 반구班固(. 32~92년)의 자字는 멍졘孟堅이고, 동한東漢 푸펑 안링扶風安陵(지금의 산시 성陝西省 셴양咸陽) 사람이다. 처음에 난대령사蘭臺令史에 부임하였다가 랑郞이 되어 전교비서典校秘書로 20여 년을 지내면서 한서漢書를 완성하였다. 《한서》는 중국 최초의 기전체 단대사紀傳體斷代史이다. <예문지藝文志>는 그 중 한편으로 각종 학술 유파의 원류를 전문적으로 논한 것으로, 당시 남아있던 서적을 기록하였다. 반구의 <예문지 서藝文志序>에 따르며, <예문지>는 류신劉歆의 《칠략七略》에 의거하여 “[그 나머지 쓸 데 없는 것을] 삭제하고 요지만을 가려내어刪其要”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 관점은 실제로는 류샹劉向 부자뿐만 아니라 반구 시대의 한나라 사람들의 일반적 견해까지도 반영하고 있다. 여기에 선별한 것은 바로 그 가운데의 “소설가小說家” 서목書目 및 그 뒤의 평어評語이다.

2) 《이윤설伊尹說》의 원서는 이미 없어졌다. 반구는 <예문지>도가류道家類에 따로 《이윤伊尹》 51편을 저록하였으나, 이것 역시 이미 없어졌다. 《옥함산방집일서玉函山房輯佚書》에 《이윤서伊尹書》 1권이 집록되어 있고, 《전상고삼대진한삼국육조문全上古三代秦漢三國六朝文》에도 이인伊尹의 유문遺文 17칙則이 수집되어 있다. 수집된 두 가지가 도대체 어느 파에 속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지금은 고찰할 길이 없다. 이인은 상商나라 초기의 대신이다. 전하기로는 원래 노예 출신이었는데 뒤에 국정國政으로 임명되어 탕왕湯王을 도와 졔桀를 멸망시켰다 한다. 탕왕이 죽은 뒤, 탕왕의 손자 타이쟈太甲의 즉위를 도왔다. 타이쟈가 정사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인에 의해 쫓겨났는데, 몇 년 뒤 타이쟈가 뉘우치자 복위시켰다. 워딩沃丁 때에 죽었다. 일설에는 타이쟈에 의해 죽었다고도 한다. 워딩은 타이쟈의 아들이다.

3) 《육자설鬻子說》의 원서는 이미 없어졌다. 반구는 예문지 도가류道家類에 따로 《육자》 22편을 저록했는데, 이미 없어졌다. 《전상고삼대진한삼국육조문全上古三代秦漢三國六朝文》에는 1권이 집록되어 있는데, 제자백가 가운데 어떤 계통인지 알 수 없다. 위쯔는 이름이 슝熊이고 초楚나라의 선조이다. 전해 오기로는 그는 나이 90에 도를 깨달아 주사周師가 되니 주나라 문왕文王 이하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한다.

4) 《주고周考》은 이미 없어졌다.

5) 《청사자靑史子》의 원서는 이미 없어졌다. 루쉰魯迅의 《고소설구침古小說鉤沈》에는 3칙則이 집록되어 있는데, 모두 예禮에 대해서 언급한 것이다. 칭스쯔는 고대의 사관史官이다. 칭스는 복성인데, 이름과 호는 자세하지 않다.

6) 《사광師曠》은 이미 없어졌다. 스쾅의 자字는 쯔예子野이고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악사樂師이다.

7) 《춘추春秋》는 전해오기를 쿵쯔孔子가 노魯나라 사관이 편찬한 《춘추》에 의거하여 수정 정리하여 만든 편년사編年史라고 한다. 생각건대, 《춘추》에는 스쾅師曠의 말은 없고, 다만 《좌전左傳》 가운데 스쾅의 말이 기록되어 있을 뿐인데, 양공襄公 14년, 18년, 26년과 30년에 나누어 보인다.

8) 《무성자務成子》는 이미 없어졌다. 우청쯔의 이름은 푸跗이며 일설에는 자오昭라고도 한다. 우청은 복성이다. 전설 속의 야오堯와 순舜의 스승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는 “우청쯔는 야오의 스승이다.務成子, 堯師也”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문장 속에서 “야오가 물었다.堯問”라고 칭한 것이다. 야오는 전설상의 원시사회 후기 부락연맹의 영수로 이름은 팡쉰放勛이고, 초기에 타오陶에 거주하였고 뒤에 탕唐으로 천도하였으므로 타오탕 씨陶唐氏라고 칭하는데, 역사에서는 탕야오唐堯라고도 칭한다.

9) 《송자宋子》의 원서는 이미 없어졌다. 《옥함산방집일서玉函山房輯佚書》에 1권이 집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주로 “공격을 금하고 전쟁을 그친다.禁攻寢兵”라든가, “정욕을 적게 가진다.情欲寡淺”는 내용을 선양하고 있다. 쑹쯔는 전국시대 송宋나라 사람으로 철학가이다. 《장자莊子》《천하天下>편에서는 이름을 졘鈃이라 했고, 《맹자孟子》<고자告子>편에서는 이름을 컹牼이라 했으며, 《한비자韓非子》<현학顯學>편에서는 이름을 쑹룽쯔宋榮子라 했다.

10) 쑨칭孫卿(약 기원 전 313~238년)은 즉 쉰쾅荀況으로 전국시대 후기 조趙나라 사람이다. 좨주祭酒, 란링 령蘭陵令을 지낸 적이 있다. 그 작품은 이미 없어졌고 《순자荀子》라는 책은 후대 사람이 편찬한 것이다. 여기에 인용된 대목은 현존본 《순자》에는 보이지 않는다.

11) 황로黃老는 즉 황제黃帝와 라오쯔老子로 도가道家에서는 그들의 시조로 추앙한다. 황로의 뜻이란 도가의 사상을 가리킨다.

12) 《천을天乙》은 이미 없어졌다. 톈이天乙는 청탕成湯으로 상商나라의 개국 군주이다. 《순자荀子》<성상成相>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4대에 톈이가 있었는데, 그가 청탕이다.十有四世, 乃有天乙是成湯.”

13) 《황제설黃帝說》은 이미 없어졌다. 황제는 성姓이 지姬이고, 헌원씨軒轅氏, 유웅씨有熊氏라고 하며, 전설상의 중국 중원中原 각 부족의 공동 선조라고 한다.

14) 《봉선방설封禪方說》은 이미 없어졌다.

15) 무제武帝는 한 무제 류처劉徹로 기원 전 140~87년에 재위하였다.

16) 《대조신요심술待詔臣饒心術》은 이미 없어졌다. 대조待詔는 관명으로 서한西漢 때에 문학시종文學侍從이 되었다가 황제의 고문이 되었다.

17) 《대조신안성미앙술待詔臣安成未央術》은 이미 없어졌다. 미앙술未央術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방중술의 일종으로 양생보기養生保氣를 강구하여 금욕장수를 구하는 것이라 한다.

18) 《신수주기臣壽周紀》는 이미 없어졌다.

19) 항국項國은 서한西漢의 제후국으로 관할구역이 지금의 허난河南 샹청項城에 있다. 어인圉人은 말을 기르고 방목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20) 선제宣帝는 한漢나라 선제 류쉰劉詢으로 기원 전 73~49년에 재위하였다.

21) 《우초주설虞初周說》은 이미 없어졌다. 위추虞初는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허난 군河南郡 뤄양洛陽 사람으로, 《한서漢書》<교사지郊祀志>의 기록에 따르면, 위추는 일찍이 딩푸런丁夫人 등과 같이 제사지낼 때 흉노匈奴, 대완大宛을 저주하였다고 한다.

22) 방사시랑方士侍郞은 방사 신분으로서 시랑을 담당한 자인 것 같다. 시랑은 서한 때 낭관郎官의 일종으로 제왕의 시종侍從이다.

23) 황거사자黃車使者는 《문선文選》<서경부西京賦> 리산 주李善注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무제武帝 때 방사 시랑으로 말을 타고 황의를 입어 황거사자라 불렀다.武帝時, 以方士侍郞乘馬, 穿黃衣, 號黃車使者.”

24) 《백가百家》는 류샹劉向이 편찬한 것으로 이미 없어졌다. 《예문류취藝文類聚》와 《태평어람太平御覽》에 각각 1칙則이 집록되어 있다.

25) 패관稗官은 하급관리이다. 《한서漢書》 옌스구 주顔師古注에서는 루춘如淳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장九章》: ‘자잘한 곡식의 낱알을 패稗라고 한다.’ 길에서 떠도는 말街談巷說은 매우 자질구레한 말들이다. 임금이 마을의 풍속을 알고자 하였기에 패관을 세워 그로 하여금 말하게 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마주 대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패稗라고 한다.細米爲稗. 街談巷說, 其細碎之言也. 王者欲知里巷風俗, 故立稗官, 使稱說之. 今世亦謂偶語爲稗.” 이로 인해서 후디에 소설 혹은 소설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26) “쿵쯔가 말씀하시기를孔子曰”의 구절은 《논어論語》<자장子張>편에 보인다. 본래 책 속에서의 이 구절은 쿵쯔孔子의 제자 쯔샤子夏가 한 말이다.

27) 여리閭里는 마을이다. 소지자小知者는 약간의 지식을 가진 자이다.

28) 철綴은 말을 엮어 문장을 이루는 것이다.

29) 추요芻蕘에서 추는 풀을 벤다는 것이고 요는 나무를 한다는 것이다. 추요는 풀을 베고 나무를 하는 사람이다. 《시경詩經》<대아大雅><판板>에 “옛사람의 말에 미천한 자에게 물었다 라는 말이 있다.先民有言, 詢于芻堯.”라고 하였다. 여기에서의 추요광부芻蕘狂夫는 초야의 백성을 널리 지칭한다.

30) 《논어論語》<자장子張>편에 실려 있다. 오늘날 전하는 《논어論語》에는 쿵쯔의 제자인 ‘쯔샤子夏’의 말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한서》<예문지>와 현재의 《논어》가 차이를 보이는 것은 한대에는 《노논어魯論語》, 《고논어古論語》ͺ 《제논어齊論語》 세 종류의 《논어》가 있었기 때문인데, 여기에 인용된 것은 《제논어》ͺ 《고논어》에 실려 있는 것에 의한 것인 듯하다. 이상은 청의 저우서우창周壽昌의 《한서주교보漢書注校補》(천궈칭陳國慶 편編, 《한서예문지주석휘편漢書藝文志注釋彙編》, 베이징北京;중화서국中華書局, 1983.)의 설을 따른 것이다.

31) 이 대목의 번역은 특히 주의를 요한다. 전통적으로 이 대목은 다음의 두 가지로 번역되어 왔다. 그 하나는 “취할 만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의견일 따름이다”라고 번역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취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 역시 꼴 베는 사람이나 나무꾼 또는 미친 이의 의견이기 때문이다”로 번역하는 것이다. 양자의 차이는 소설의 가치를 부정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긍정하느냐 하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등연은 《시경詩經》<대아大雅><판板>의 “……옛사람 말씀에 나무꾼에게 일을 물으라 하였네……先民 詢于芻蕘”라고 한 대목과, 《사기史記》<회음후전淮陰侯傳>에서의 “광무군이 말했다. 미치광이의 말이라 할지라도 현명한 사람은 가려서 듣는다廣武君曰: 狂夫之言, 賢人擇焉)”라는 대목으로 볼 때, “……의견이기 때문이다”라고 번역해야 옳다고 주장했다.(이등연, <중국소설의 개념과 기원> 《중국소설사의 이해》, 서울; 학고방, 1994. 5쪽 참조.)

문성재는 “항간에서 조금 안다고 행세하는 자가 언급한 바를 기록으로 남겨 잊지 않도록 한 것뿐이니 어쩌다 한마디 취할 만한 말이 있다 하더라도 별 수 없는 꼴 베는 치 얼빠진 놈들의 객담일 뿐이다”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입장은 전체적인 맥락을 따져 볼 때, 반구가 긍정적인 측면에서 소설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의견일 따름이다”라고 옮겼다.

이니 어쩌다 한마디 취할 만한 말이 있다 하더라도 별 수 없는 꼴 베는 치 얼빠진 놈들의 객담일 뿐이다”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입장은 전체적인 맥락을 따져 볼 때, 반구가 긍정적인 측면에서 소설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의견일 따름이다”라고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