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근대적 신문․잡지가 소개된 것은 서양인 선교사와 상인에 의해서입니다. 최초의 근대적 중문 잡지라고 할 수 있는 『찰세속매월통기전察世俗每月統記傳』(1815년 창간)을 비롯해서 아편전쟁 이전의 초기 중문 간행물은 모두 동남아 지역이나 광주廣州 지역에서 발행되었습니다. 당시 외국인이 접근 가능했던 곳은 이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1857년에 『육합총담六合叢談』이 발간되면서부터 중국 신문 발간의 중심지는 점차 중국 남부로부터 상해上海로 이동합니다. 이 즈음은 무역을 비롯하여 서양과의 교류에 있어 상해가 광주 지역에 비해 전체적인 우위를 차지하게 된 때이기도 하지요. 이후 1860~70년대에 『상해신보上海新報』, 『중외잡지中外雜志』, 『상해교회신보上海敎會新報』, 『신보申報』, 『만국공보萬國公報』, 『격치휘보格致滙編』 등이 창간되면서 상해는 중국 신문 발행의 중심지가 됩니다. 하지만 영국령 홍콩은 그 특수한 입지로 인해 중국 내 정세에 대한 비교적 자유로운 발언이 가능했으며 외국 소식의 신속한 파악이 용이했기 때문에 『순환일보循環日報』(1874년 창간)와 같은 중요한 중문 간행물이 여전히 이곳에서 발행되고 있었습니다.
1890년대에 들어와서는 정치 논평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신문과 잡지가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현상을 이끈 간행물은 『시무보時務報』였습니다. 양계초梁啓超가 책임 편집을 맡은 이 잡지는 당시로서는 가장 급진적인 주장을 펴는 매체였지요. 『농학보農學報』, 『공상학보工商學報』 등 전문적인 분야의 정보와 평론을 다루는 신문도 출현했습니다. 이들 새로운 매체들은 대부분 새로운 지식의 보급과 중국인의 각성 그리고 이를 통한 국세의 중흥을 목표로 내걸었지요.
신문의 발행 주체는 초기에는 외국인에 국한되었지만 점차 ‘신파’ 중국인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신문의 편집과 제작에 참여한 이들은 대개 과거科擧를 통해 뜻을 펴지 못하고 상해․홍콩 등지에서 대안적 삶을 찾고 있던 중․하층 문인들이었습니다. 이들 공간은 신․구의 조건이 교차하는 곳으로서, 이곳에서 활동하던 중국인 편집자․필자들은 새로운 문물과 제도에 이끌리면서도 전통적인 공간과 역할로부터 유리되었다는 곤혹감, 서양 문명에 대한 열등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지요. 근대적 매체를 추동한 강한 계몽 지향에는 이와 같은 요소들이 착종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신문․출판업은 그 특수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독서 대중을 고객으로 하는 하나의 새로운 ‘사업’이었기 때문에, 어떤 숭고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독자의 기호와 욕구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의 신문․출판업의 오락지향적․상업주의적 성격은 소일을 위한 가벼운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문예소보文藝小報’에서 잘 나타납니다. 『지남보指南報』, 『유희보游戱報』 등은 갖가지 흥미로운 이야기꺼리를 수록하는 잡지들이었는데요, 이러한 매체들은 표면으로는 독자에 대한 ‘계도’를 내세우고 있었지만 실상 ‘황색 신문’에 가까웠답니다. 심지어 홍등가의 이야기를 전문적으로 다룬 『소보笑報』와 같은 간행물도 있었지요. 1884년, 『신보申報』의 발행인 어네스트 메이저(Ernest Major; 중국명 미사美査)가 운영하던 석판인쇄 전문 출판사 점석재석인서국點石齋石印書局에서 발행한 『점석재화보點石齋畵報』와 같은 새로운 매체는 시사성과 계도성 및 오락성을 겸비한 매체의 선구적 존재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에서 신문은 새로운 매체인 동시에 새로운 문화 현상이었습니다. 신문에 글을 쓴다는 행위 역시 전에 없던 것이었지요. 그리고 신문에 실린 글의 성격 역시 이전의 전통적 매체를 통해 발표된 글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새로운 글쓰기의 특징은 특히 신문에 실린 논설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지요. 중국에 최초로 서구 근대적 저널리즘을 도입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며 신문논설문의 기초를 닦은 사람이기도 한 왕도王韜(1828~1897)라는 인물의 글쓰기를 통해 그 양상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왕도는 명明 나라와 청淸 나라 때의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 가운데 한 곳이었던 소주蘇州의 쇠락한 문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왕도는 20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여느 중국 문인과 다름없이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의 길을 꿈꾸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죽은 뒤 생계를 위해 상해上海로 진출하여 외국인 선교사들과 함께 일을 하게 되었고, 이후 홍콩으로 건너가 살면서 근대 유럽을 직접 여행하기도 합니다. 그는 아마도 전통적인 글공부를 한 사람으로서 유럽을 다녀온 최초의 몇 사람에 속할 것입니다. 왕도는 세계사의 흐름과 서양이 부강한 이유에 대해 나름대로의 안목을 갖게 되었으며 1874년에 홍콩에서 『순환일보循環日報』를 창간하여 중국이 세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길을 가야하는 지에 대해 열정적으로 글을 썼습니다.
왕도의 신문논설문은 여러 면에서 이후 근대 중국의 신문논설문의 효시가 되는데요, 그의 논설문이 ‘온유돈후溫柔敦厚’함 즉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점잖고 진중함’을 거부한 울분과 격정의 언설이라는 것은 어째서이며, 그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우선 그의 글을 좀 읽어보고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변법자강變法自强」이란 글의 일부입니다(원문 문체를 살펴보시도록 함께 둡니다):
우리 중국은 물산이 풍부하고 땅이 넓으며 재화가 넉넉하고 재주와 지혜를 가진 이들이 많아 온 세계에 이보다 큰 나라는 없다. 나라가 세워졌을 때의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그 뿌리와 줄기가 깊고 튼튼했다. 그렇지만 시대가 바뀌고 추세가 달라져 지금이 옛날과 같지 않으니, 실정에 맞도록 적절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 변화시켜 통하게 하는 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길은 어떤 것인가. 옛 것을 그대로 따라서는 안 되며, 일을 적당히 해서도 안 되며, 태만히 허송세월 해서도 안 되며, 사안을 가벼이 다루어서도 안 되고, 사태를 꾸며서도 안 되며, 과장해서도 안 되고, 덮어두어서도 안 된다. 사건이 없다고 편안히 있어서도 안 되며, 안락함에 빠져도 안 된다. 오래된 습속에 얽매여서도 안 되고, 그저 겉껍데기만을 가져다 쓰는 것도 안 된다. 시작해 놓고 제대로 마무리짓지 못하는 것도 안 되고, 처음에는 성실하였다가 끝에 가서 게을러지는 것도 안 된다.
我中國之物博, 幅員之廣, 財賦之裕, 才智之衆, 薄海內外, 皆莫與京. 溯乎立國規模, 根深蔕固. 但時異勢殊, 今昔不同, 則因地制宜, 固不可不思變通之道焉. 其道奈何, 曰毋因循也, 毋苟且也, 毋玩愒也, 毋輕忽也, 毋粉飾也, 毋誇張也, 毋蒙蔽也, 毋安於無事也, 毋溺於晏安也, 毋狃於積習也, 毋徒襲其皮毛也, 毋有初而鮮終也, 毋始勤而終怠也.(「變法自强」 하편, 『弢園文錄外編』 권1)
다음은 「아시아의 절반은 유럽인에게 귀속되어 있다(亞洲半屬歐人)」라는 글의 일부입니다(원문의 문체를 살펴보시도록 함께 둡니다):
지구상에 정치精緻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보존되어 있고 문화의 정수가 쌓여 있는 곳으로는 중국 만한 곳이 없다. 그렇지만 이른바 서구 나라들이 가진 뛰어난 기술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음을 보게 된다. 서양인들은 나날이 그 기술을 내보이며 위세를 과시하는데, 중국의 사람들은 익히 보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한 듯이 하고 있다. 땅이 매장하고 있는 재부財富의 경우 숨겨져 있어 전혀 드러나지 않는데, 이는 서양인들이 곁에서 탐내며 침을 흘리는 바다. 현재 지구의 대세를 볼 것 같으면, 동남(중국)이 서북(유럽)에 미치지 못함을 알 수 있는데, 서북의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동남에 이르렀지만, 동남의 사람들은 하나도 서북에 가보지 못했다. 온 지구를 한번 살펴보면 모두 유럽인들이다. 지구상의 아름답고 비옥한 땅은 몇 군데에 불과한데 중국이 그 중 으뜸으로,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흠모한다. 다만 애석한 것은 중국이 근래에 스스로의 강역疆域에만 안주하여 옛 것만을 답습하고 적당히 살려고 하며, 쓸데없이 치장하고 과장하며, 사안을 덮어 가려두고 허물어진 유적만을 부여잡고 있고, 완고하고 교만하여 유럽의 형세에 대해서는 멍청히 아는 것이 또한 없다는 점이다. 이러하니 아시아의 형편이 심히 위태롭지 아니한가!
地球中精美之所存, 英華之所蘊, 則莫若中國, 而問所爲西國之長技者, 則一切無有焉. 西人雖日出其技以相誇耀, 而中國之人熟視若無睹焉. 至于地寶之富, 一皆蘊藏未出, 此西人所從旁覬覦而垂涎者也. 今就地球大勢觀之, 而知東南之不及西北也, 西北之人久至東南, 而東南之人不能一至西北. 試觀盈地球中, 皆歐洲人也. 地球中靈秀沃腴之壤不過數處, 而以中國爲巨擘, 地球之人, 無不欣羨焉. 獨惜中國邇來安于自域也, 因循苟且, 粉飾誇張, 蒙蔽拘墟, 剛愎傲狠, 于歐洲之形勢茫乎且未之知也. 然則亞洲之局, 不甚可危哉!(「亞洲半屬歐人」, 『弢園文錄外編』 권5)
흔히 근대 신문논설문이 이전의 논변적論辯的 산문과 다른 점으로 내용의 새로움과 문체의 평이함을 듭니다. 너무나도 당연하면서도 중요한 지적이지요. 그런데 저는 좀 다른 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위에 인용한 대목들을, 특히 그 원문을 소리내어 몇 번 읽어보면 반복적 구법에 의해 점층적으로 정서가 고양되고 있다는 점이 분명히 느껴집니다. 이런 정도에서 무슨 울분과 격정을 발견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격정적이라는 것 역시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청대淸代의 대부분을 지배해 온 동성파桐城派의 글쓰기 규범, 즉 그들의 의법義法은 이와 같은 정서적 고양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일례로 동성파를 계승한 상향파湘鄕派의 주요 산문가였으며 당시의 세력가 증국번曾國藩의 참모를 지내기도 했던 왕개운王闓運이라는 사람은 왕도와 거의 동시대를 살며 시국에 관한 논설을 적지 않게 썼지만 그의 논설에는 신문논설문에 담긴 격정이 결코 발견되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왕도의 논설문의 중요한 특징은 바로 그것에 담긴 울불과 격정, 그 선동적 문체입니다. 왕도의 논설문을 읽어보면 거의 예외 없이 <문제의 제기> → <제기된 문제에 대한 설명과 자신의 견해의 표명> → <감정에 호소하는 선동적 마무리>의 구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해명될 수 있겠지만 저는 신문논설문 쓰기가 놓여 있던 여러 정황들을 살펴봄으로써 이야기를 끌고 나가려 합니다.
우선 신문논설문을 쓰게끔 만든 세계에 대한 인식에서 이러한 울분과 격정은 불가피하게 비롯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울분과 격정은 글쓰는 주체가 알게된 새로운 세계, 즉 유럽 문명의 발견과 그것의 우수함에 대한 인식에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일종의 선각자로서의 격정이라고 하겠습니다만, 왜 선각자의 세계 인식이 울분과 격정을 대동하게 되는 것이었을까요? 어떤 글쓰기가 갖는 ‘세계 인식’의 층위가 반드시 울분과 격정을 대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층위는 냉철한 논리에 의지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지요. 그렇다면 왜 울분과 격정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이러한 선각자로서의 인식은 불가피하게 중국의 낙후에 대한 발견을 동반하는 것이었으며 크나큰 자괴감의 원천이기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왕도는 상해에서 서양인들과 함께 일하기 시작하면서 서구의 문명이 가진 장점을 하나씩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의 눈에 서양인들은 요상한 말을 지껄이는 야만인이었을 뿐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그가 홍콩에서 살던 기간에 유럽을 직접 여행하게 되면서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만, 야만인의 문명을 인정하고 나아가 그것을 배워야 한다고 설파하는 처지에 스스로를 두다 보니 글쓰기가 어찌 울분과 격정으로 흐르지 않았겠습니까? ‘유일한’ ‘세계’였던 ‘중화’가 단지 더 큰 ‘세계’의 일부라는 것을, 게다가 그 큰 세계의 ‘낙후된’ 일부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으니 어찌 울분과 격정으로 흐르지 않았겠습니까?
또 한편으로는 선각자로서의 고독한 입지에서 오는 울분과 격정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계몽’의 글쓰기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불가피하게 처하게 되는 입장이 아닐까요. 특히 왕도는 새로운 공간 속에서 새로운 지식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면서도 전통적 공간에서의 문인 역할을 끊임없이 갈망했던 인물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발언이 반향 없는 외침일지도 모른다는, 아니 사실 그렇다는 자각은 그의 신문논설문 쓰기를 격정으로 가득 차게 만들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왕도가 유럽 여행 기간 동안의 견문을 기록한 기행문이라든가 프랑스와 프러시아 간의 전쟁에 대해 쓴 책을 보면 신문논설문과 마찬가지로 ‘세계 인식’의 층위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여하한 울분이나 격정도 찾기 힘든데요, 이것은 이러한 글쓰기에는 ‘계몽지향’의 층위보다는 ‘기록지향’의 층위가 더 강했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끝으로는 ‘신문’이라는 근대적인 매체에 실리는 글이 가질 수밖에 없는 일반적 속성으로서의 측면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신문에 글을 쓴다는 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종류의 글쓰기입니다. 상대적으로 고정된 파악 가능한 독자를 가지고 있던 전통적 글쓰기와는 달리 신문논설문은 소통의 코드가 불확실한 익명의 독자들을 상대로 호소하는 글이지요. 게다가 ‘신문’이란 당장 읽혀지고 바로 ‘신문지’가 되어 버릴 운명을 가지고 있는 특수한 매체입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자신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문체상의 격정은 의도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신문이라는 매체가 갖는 궁극적으로 상업주의적인 속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팔리는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이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사안이나 주장을 과장하여 전달하는 것은 저널리즘의 주요한 특징이라고 하겠습니다.
왕도는 자신의 신문논설문이 놓여 있는 좌표, 자신의 글쓰기의 특징 등에 대해 상당히 자각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문논설문을 중심으로 편찬한 책인 『도원문록외편弢園文錄外編』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중국과 외국이 통상한 이래로 세상의 일이 복잡하게 변화함이 극에 달하여,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고 듣지 못하던 것을 듣게 되었다. …… 그 동안에 지혜와 힘을 다투었는데, 진실과 거짓이 서로 감응하여 이로움과 해로움이 생겨났고, 서로간의 만남이 거듭되어 얻는 것과 잃는 것이 생겨났으며, 강함과 약함이 대비되어 능욕과 업신여김이 생겨났고, 성실함과 속임수가 만나 회한과 아쉬움이 생겨났다. 사십여 년 동안 추진해온 일들은 내 생각에는 그 올바른 길을 얻지 못했던 듯하다. 초야에 묻혀 지내는 하잘 것 없는 백성으로서 홀로 거하며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그러한 상황에 대해 몹시도 우려하게 되어, 때마다 보고 생각한 바를 일간신문에 펴내었는데, 일이 일어난 뒤에는 주장했던 바가 번번이 입증됨을 매번 다행으로 여기면서, 늘 깊이 한숨쉬며 거듭 반복하여 말하였다. 말하는 자는 정성스러웠건만 듣는 이들은 업신여기었음은 어찌할 도리 없었다. …… 그래서 그 동안 모아두었던 원고를 가져다가 약간 손질을 가하여 인쇄업자에게 넘겼다. 말이 제대로 된 글(文)을 이루지 못하면 행하여져도 멀리가지는 못한다 했으니 반드시 식견 있는 사대부들이 비웃는 바 될 것임을 스스로 부끄러이 여긴다. 다만 공자孔子께서도 “언사란 전달되면 될 뿐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음을 생각해보면, 문장에서 귀한 바는 일을 적고 정서를 써냄에 스스로 마음속에 품은 바를 펴내는 데 있으며, 사람 사람마다 글의 뜻이 가리키는 바를 알아보아 그것이 한결같이 내 마음이 토해내고자 했던 바와 같다면 이것이 바로 훌륭한 문장이지, 잘 다듬어졌는가 거친가 하는 점은 오히려 지엽임을 알겠노라. 내가 글을 씀에 이러한 취지를 갖고 있는데, 왕왕 붓을 대면 마음대로 멈출 수 없었다. 고문사古文辭의 법도에 대해서는 망연하여 아는 바 없으니, 불민함에 대해 사죄하는 바다. ‘외편外編’이라 이름한 것은 그 속에 서양과 관련된 일(洋務)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많아 문집文集속에는 넣지 않고자 하기 때문이다.(『弢園文錄外編』, 「自序」)
왕도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글쓰기가 옛 글 즉 ‘고문古文’의 법도에서 벗어나 있음을 자각하면서 그것의 의의를 긍정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종류의 글이 정통적인 ‘문집文集’에 넣을 만한 글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글쓰기가 시의적절한 것이라고 자부하면서도 ‘식견 있는 사대부’들이 조롱할 것을 꺼려하고 있지요. 이러한 점들이야말로 그의 글의 울분과 격정 밑에 숨어 있는 회의와 불안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왕도의 신문논설문이 결과적으로 전통적 글쓰기의 주요한 표준인 ‘온유돈후溫柔敦厚’를 의식적으로 거부 또는 무의식적으로 이탈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며, 이러한 글쓰기는 이후 중국 신문논설문의 주요한 특징으로 자리잡습니다. ‘온유돈후’함을 벗어났다는 것 자체로 이러한 글쓰기는 중화적中華的 세계 질서의 동요를 암시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글쓰기가 보여주는 격정 그리고 그 배면의 깊은 위기의식과 뿌리 잃음에 대한 두려움이 이후 비슷한 부류의 글쓰기에 여러 변형태로 잠재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신문논설문 쓰기에 내재하는 울분․격정․비애는 중국적 근대성의 주요한 특징에 다름 아니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