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통

주샹朱湘(1904∼1933년)
시인으로 시집 『여름夏天』、『초망집草莽集』、『석문집石門集』 등이 있다.

일찍이 쯔후이子惠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사詞(문체의 일종으로 ‘전사填词’, ‘장단구長短句’ 등의 다른 명칭이 있다. 근체시와 유사하지만, 형식적으로 자유롭다. 사는 본래 음악적인 요소가 중시되기 때문에 정해진 악곡에 맞춰 가사를 채워 넣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정해진 악곡이 ‘사패詞牌이다.)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고도의 아름다움이 있지만, 그 사패詞牌 역시도 지극히 정교하다. 「도강운渡江雲」、「모어아摸魚兒」、「진주렴眞珠簾」、「안아미眼兒媚」、「호사근好事近」 등과 같은 사패는 그 하나하나가 한 수의 훌륭한 사이다. 나는 평소 사집詞集을 뒤적일 때마다 정작 그 내용은 읽지 않고 사패만 천천히 음미한다. 그럴 때마다 얻는 즐거움은 절구를 읽거나 감람을 씹는 맛에 못지않다. 베이징의 후통 이름 가운데에도 사패와 같은 것들이 있는데, 그 별 거 아닌 두 세 글자에는 그 나름의 색채와 암시가 충만해 있다. 이를테면 룽터우징龍頭井이나 치허러우騎河樓 등과 같은 이름은 그 아름다움이 「야행선夜行船」이나 「련수금戀綉衾」 등과 같은 사패에 전혀 꿀리지 않는다.

후통胡同은 후통衚衕이라는 글자를 줄여 쓴 것이다. 문자학자의 말에 의하면 상하이의 룽弄과 마찬가지로 항巷 자에서 근원한 것이라 한다. 원나라 사람 리하오구李好古가 지은 『장생자매張生煮梅』라는 곡에는 ‘양시각두전탑아호동羊市角頭磚塔兒衚衕’이라는 대목에서 이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것이 가장 이른 용례인 듯하다. 각각의 후통 가운데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팔대후통八大胡同이 아닐까 하는데, 이것은 당대 창안長安의 베이리北里와 청말 상하이의 쓰마루四馬路가 유명한 거나 마찬가지다.

베이징 후통이 주의를 끄는 점은 명칭이 중복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커우다이후통口袋胡同、쑤저우후통蘇州胡同、티쯔후통梯子胡同、마신묘馬神廟、궁셴후통弓弦胡同은 도처에 있는데, 왕마쯔王麻子, 러쟈라오푸樂家老舖 같은 것들이 많은 거나 마찬가지로 베이징에 처음 온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하지만 커우타이후통口袋胡同이 막다른 골목이라는 걸 알게 되면 ‘먼후루과얼悶葫蘆瓜兒’이나 ‘멍푸루관蒙福祿館’도 매 한 가지다. 쑤저우후통의 경우는 그들의 관적이 항저우杭州든 우시無錫든 상관없이 남쪽 지방 출신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골목에서 취한 이름이다. 궁셴후통은 그 모양이 궁베이후통弓背胡同(궁배弓背는 활등이고, 궁현弓弦은 활시위이다.) 과 상대적인 데서 취한 이름이다. 나중에야 우리는 이런 이름들이 얼마나 그 나름의 색깔이 있고, 또 미국의 5번가, 14번가 하는 식의 단조로운 이름이나 [서구의 중국 침략 이후 생긴] 다섯 개의 개항장에서 이름을 딴 상하이의 난징루南京路, 류쟝루九江路 등과 같이 중국을 모욕하는 이름보다 얼마나 훌륭한 것인가를 알게 된다. 그 당시는 전국에서 가장 안정감 있고 빠르게 달리는 인력거꾼이 “나리, 두 푼만 더 줍쇼” 라고 했던 말 역시 일찍이 사라져버렸다. 더욱이 쑤저우후통이란 이름은 이것이 암시하는 바가 아주 크다. 당시에는 교통이 불편했던 때라 남쪽 사람이 베이징에 오는 경우는 과거시험 보러 오는 이를 제외하면 아주 드물었고, 베이징에서 벼슬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베이징에서 거주하는 경우도 적었다. 남쪽 지방의 방언 역시 베이징의 백화와 큰 차이가 있었기에,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죽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베이징뿐이고, 귀에 들리는 것은 베이징 사람들의 말뿐이었으니, 그들이 모여 사는 후통을 쑤저우후통이라 이름붙인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쑤저우의 토박이말은 남쪽 지방 방언 가운데서도 가장 특색이 있고, 여자는 전국에서 가장 여리여리하고 아리땁다.) 티쯔후통梯子胡同 여기서 ‘티쯔梯子’라는 것을 사다리를 의미한다. 곧 티쯔후통梯子胡同은 ‘사다리후통’이라는 뜻이다. 이 많은 것은 당시 많은 집들이 언덕에 의지해 지어졌기 때문인데, 길거리에서 보면 마치 사다리 같았다. 베이징에 마신묘馬神廟가 많은 것도 깊이 생각해 볼 만하다. 왜 용왕묘龍王廟는 많지 않은데 유독 마신묘만 많은 것일까? 어째서 베이징에 이토록 많은 마신묘가 난징南京에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걸까? 남쪽 사람들은 배를 타고 북쪽 사람들은 말을 탄다. 우리는 베이징의 원나라 수도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바로 그 쇠 말굽으로 중부 유럽까지 짓쳐들어갔던 타타르족이야말로 이 마신묘를 지었던 이들이 아니었던가! [전국시대] 연燕나라의 소왕昭王은 현재賢才들을 위해 황금대黃金臺를 지었으니, 이것이 바로 베이징 최초의 마신묘인 것이다.

베이징 후통의 이름은 우물에서 이름을 취한 것이 많다. 앞서 말한 룽터우징龍頭井말고도 톈수이징甛水井、쿠수이징苦水井、얼옌징二眼井、싼옌징三眼井、쓰옌징四眼井、징얼후통井兒胡同、난징후통南井胡同、베이징후통北井胡同、가오징후통高井胡同、왕푸징王府井 등등이 있는데, 이것은 북방에 수분이 희소하기 때문이다. 밥을 짓고, 차를 끓이고, 세탁을 하고 목욕을 하는 등 물의 용도는 아주 많았기에 당시 사람들은 아주 서툴고 느린 방법으로 우물 하나를 판 뒤에 그 기쁨을 말로 형언할 수 없어 우물로 거리 이름을 지어 자신들의 성공을 기념했던 것이다.

후통의 이름은 베이징 사람들의 생활과 상상을 암시해 주는데, 취덩후통取燈胡同、뉴뉴팡妞妞房 등과 같은 유의 후통도 있다. 베이징 토박이 말을 모르는 사람은 어디서 뜻을 취했는지 모르는 것도 있다. 아울러 경성의 연혁과 구분을 나타내는 것들도 있다. 이를테면, 주스猪市、뤄마스騾馬市、뤼스驢市、리스후통禮士胡同、차이스菜市、강와스缸瓦市 등과 같은 거리 이름들의 경우, 주스猪市가 옛날 의미를 여전히 갖고 있는 것 이외에는 그 나머지 것들은 이미 상황이 바뀌어 나중에 이런 이름들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저 허울뿐인 이름만으로 당시 이런 곳들의 상황을 헤아려볼 수 있을 따름이다. 후부졔戶部街、타이푸쓰졔太僕寺街、빙마쓰兵馬司、돤쓰緞司、롼위웨이鑾輿衛、즈지웨이織機衛、시좐창細磚廠、졘창箭廠과 같은 이름들은 누가 보더라도 찬란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일종의 초현실적인 흥미를 느끼게 된다.

황금색 기와에 붉은 색 담장을 두른 황성皇城은 지금은 이미 모두 훼손되었다. 미래의 사람들이 황청건皇城根과 같은 거리 이름으로 내성의 안쪽, 쯔진청紫禁城의 바깥쪽 사이의 황성의 위치를 헤아릴 수 있을까? 단청이 빛나는 두 곳의 패루牌樓는? 그 자태가 내 유년의 상상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저 장대한 패루 말이다. 이것들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낙타 등 같고 거북 껍데기 같은 네 패루는 손에 지팡이를 짚고도 몸을 지탱하지 못 하다 조만간 일찍 세상을 뜬 형제를 따라 땅속으로 사라지려니!

파괴적인 모래바람이 고도古都 전체를 말아 올린다. 심지어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고 형체가 없는 거리 이름과 같은 것들도 모두 그런 꼴이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암시하는 바가 풍부한 피차이후통劈柴胡同은 비차이후통辟才胡同으로 개명이 되었고, 전설이 배경인 란몐후통爛面胡同은 란만후통爛縵胡同으로 바뀌었고, 지방 색채가 농후한 셰쯔먀오蝎子廟는 셰쯔먀오協資廟로 개칭되었다. 그야말로 신기함에서 평범함으로, 우미한 것에서 졸렬한 것으로 개악이 되었다. 거우웨이바후통狗尾巴胡同은 가오이보후통高義伯胡同으로 바뀌었고, 구이먼관鬼門關은 구이런관貴人關으로, 거우란후통勾闌胡同은 거우롄후통鉤簾胡同으로 다쟈오후통大脚胡同은 다쟈로후통達敎胡同으로 개명되었다. 이런 것들이 모두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개명을 요구한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통달한 가르침達敎’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롼다청阮大鋮이 난징에서 살았던 쿠당샹袴襠巷이나 런던의 Rotten Row (중국어로 ‘쿠당袴襠’은 ‘바짓가랭이’를 뜻하고, 런던의 Rotten Row는 하이드파크Hyde Park의 승마 도로를 가리키는데,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썩은 거리”이다.) 는 귀족들이 사는 거리로 그들이 거리 이름의 개명을 요구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달관할 수 있는 것은 옛사람들이나 서양 사람들밖에 없는 것일까? 내면이 풍요로운 사람은 외면을 좀 인색하게 표현해도 무방하다. 쓰마샹루司馬相如는 일대를 풍미한 문인이지만, 그의 아명은 ‘견자犬子’ 곧 ‘개자식’이었다. 『자불어子不語』라는 책에도 당시 거우狗 씨 형제가 과거에 급제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좡쯔莊子는 스스로 거북이 되고 싶다고 했다. 이허위안頤和園의 츠시 태후慈禧太后가 거주했던 러서우탕樂壽堂 앞에서 거북돌이 있다. 옛사람의 달관은 깊이 새겨볼 만하다.

『중서집中書集』, 1934년 10월 상하이 생활서점生活書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