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대 수도와 베이징 소사3

청대 베이징 성 내부는 별 변화가 없었다. 청의 황제는 궁 안에서 오래 거주하기보다 서쪽 교외의 풍경 좋은 곳에 큰 정원을 지었다. 우선 강희 제 때에 축조된 것으로 사방이 40리에 달하는 ‘위안밍위안(圆明园)’이 있다.

또 ‘창춘위안(长春园)’이 있는데, 가운데에는 산이 있으며 위치는 옌징 대학(지금의 베이징 대학)의 맞은편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위안밍위안을 지을 때 프랑스 인에게 설계와 축조를 맡겼다고 한다. 가운데에는 큰 호수가 있고, 둥․시양러우를 지었는데, 시양러우는 건축재로 돌을 썼으며, 그 위에 서양의 도안화를 새겨놓았다.

셰치취(谐奇趣)

건륭 제 때에는 후에 이허위안(颐和园)이라 불린 ‘칭이위안(淸漪园)’과 위취안산(玉泉山)의 ‘칭밍위안(淸明园)’, 그리고 ‘징이위안(静宜园)’을 지었다. 그 뒤로 황제는 성내의 황궁에 들지 않았다. 그것은 황궁이 너무 커서 겨울에는 실내가 너무 추웠기 때문인데, 매년 동지가 지나면 입궁하지 않고 서궁의 양신뎬(养心殿)에 머물렀다. 황제가 대부분의 시간을 서쪽 교외의 위화위안(御花园)에서 지냈으므로, 하이뎬(海甸)에 군기처(军机处)를 두었다. 하이뎬은 대신(大臣)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황가의 큰 정원에서 가깝기 때문에 조정의 일 처리를 이곳에서 했던 것이다.

청대의 귀족들은 개인이 많은 집과 정원을 소유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도르곤은 청 군대가 입관(入关)한 뒤 최초로 섭정을 한 왕(摄政王)으로서 차오양먼(朝阳门) 안에 ‘쥬예푸(九爷府)’를 지었다. 이 저택에는 현재도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둬둬(多铎: 태조의 열다섯 번째 아들)는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는 청나라 병사를 이끌고 강남 일대에 이르러 대학살을 자행했다. 양저우(扬州)에서 십여 일간 대학살을 한 뒤, 쟝인현(江阴县)에 이르러는 사람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쑤저우(苏州)에 가서도 학살을 감행하려 했으나 백성들이 관공(关公)의 상을 들고 나오자 비로소 군대를 거두었다. 그가 거주했던 베이징의 왕푸(王府)는 바로 지금의 셰허의원(协和医院) 자리로서 그곳의 ‘스푸위안(师府园)’은 그의 정원이었다. 왕푸징은 그의 왕푸(王府) 일대를 가리킨다.

왕푸징의 옛 우물터

청대의 한인(汉人)들은 성 밖에 거주했으며, 4품 이상의 한인 관원만이 성내에 거주할 수 있었다.

청대의 왕은 세 등급으로 나뉜다. 첫째 친왕(亲王), 둘째 군왕(郡王), 셋째 패륵(贝勒)이다. 싼베이쯔화위안(三贝子花园: 현재는 동물원)은 바로 귀족의 대 정원이었다. 또 칭화위안(淸华园:현재의 칭화대학), 랑룬위안(朗润园: 뒤에 옌징 대학이 되었다가 현재는 베이징 대학)들도 모두 귀족의 대 화원이었다.

19세기에는 앞뒤로 1860년에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1900년에는 팔국 연합군이 중국에 침략하여 베이징에 들어와서는 사람들을 대거로 학살하고 물건을 탈취해 갔다. 서쪽 교외의 5대 화원은 모두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탔다. 이들 외국 강도들은 또 황가에 소장된 진귀한 물건들을 탈취해 갔으며, 베이징 성의 쳰먼(前门)에서 충원먼(崇文门)에 이르는 3리의 번화가를 모두 불태우고, 이곳에 자신들의 대사관과 병원을 지었다. 그리고 둥단(东单)의 광장을 자신들의 오락을 위한 승마장으로 바꿨다.

위안밍위안 안에 있는 다수이파(大水法) 유적

문물의 손실은 더욱 가슴 아프다. 한림원(翰林院)과 그 내부의 문물을 모두 잃은 것이다. 명대에 고전 서적을 집대성한 󰡔영락대전󰡕은 필사본으로 인쇄를 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이때의 전란으로 소실되었다. 제정 러시아에서 가져간 것도 많았는데 뒤에 소련이 다시 60본(本)을 돌려주었다.

청대의 백성들은 어디로 놀러 갈 수 있었는가? 하나는 스차하이(什刹海)였고, 다른 한 곳은 타오란팅(陶然亭)이었다. 그밖에 청 황제와 귀족들이 노닐던 베이하이(北海)․중난하이(中南海)․중산 공원(中山公园)․현재의 동물원․이허위안․샹산 등은 일반 백성들에게는 쳐다볼 수도 없는 곳이었다. 시산(西山)으로 가면 바다추(八大处)로 갈 수 있었다.

백성들은 갈 곳이 없었으므로 모기도 많고 물에서는 악취가 나고 죽은 사람을 매장하던 스차하이(什刹海)로 갈 수밖에 없었다. 또 타오란팅(陶然亭)으로 갈 수도 있었다. 이곳에는 원래 정자는 없고 요나라 사람이 남긴 사당이 있었으나, 후에 신쟝(新疆)의 어사(御史)가 정자를 세웠다. 타오란팅은 회관(会馆)에서 가까웠으므로 회관에 사는 선비들은 종종 먹을 것을 갖고 놀러 오기도 했으나 이곳 역시 죽은 사람을 매장하던 곳이었다. 베이징 사람들은 마땅히 갈 곳이 없었으므로 당시 희극을 보러 가는 기풍이 성행했다.

북양 군벌(北洋军阀)과 베이징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청조가 망하고 북양 군벌의 세상이 되어서도 계속 베이징을 수도로 삼았다. 청조 말기에는 팔기(八旗)와 그 자제들이 부패하기 시작했다. 청의 군제(军制)이자 민제(民制)이기도 했던 ‘기(旗)’는 국민 개병제로서 남자는 모두 군사가 되어 8개의 기로 나뉘었다.

팔기의 깃발. 왼쪽이 정백기이고 오른쪽이 테를 두른 양백기다.

최초의 팔기의 자제들은 매우 흉악했다. 그들은 원래 창바이산(长白山) 아래에 거주하다가 뒤에 랴오닝(遼寧)을 공격해 왔다. 그러므로 청의 첫 번째 황제와 두 번째 황제는 모두 랴오닝의 선양(沈阳)에 묻혔다. 청은 우싼구이를 이용해 비로소 관내(关内)로 들어올 수 있었지만, 만일 우싼구이가 위안위안의 일로 청 군사에게 입관을 청하지 않았다면 청이 관내로 들어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 당시 리쯔청의 병력은 굉장히 강하긴 했지만, 기병(骑兵)이 없었으므로 청의 팔기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리쯔청은 베이징에서 산시(山西)로 도망쳤다. 청의 군대는 계속 남하하여 황허 유역에 이르렀고, 창쟝(长江) 유역을 점령했으며, 신쟝과 티벳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건륭 제 이후 청 팔기군의 힘은 점점 쇠락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기인(旗人)은 그들의 오랜 법규에 따라 장사도 할 수 없었고, 농업에 종사할 수도 없었으며, 단지 벼슬을 하거나 군사가 되어 매월의 봉급에 의지하여 생활해야 했다.

초기에 청의 군사는 적잖은 문제를 일으켰다. 멋대로 재물을 빼앗는가 하면, 부녀자를 훔쳐내서는 여인의 머리에 검은 수건을 씌워 팔았다. 나중에 기인은 벼슬을 하되, 능력도 없고 지식도 없었다. 또 마음대로 베이징을 떠날 수 없었고, 단지 명령에 따라서만 베이징을 나갈 수 있었는데, 그 숫자는 당연히 매우 적었다. 기인들은 점차 벼슬도 하지 못하고 군인도 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팔기의 자제들은 부패할 수밖에 없었다.

태평천국(太平天国)이 일어났을 때에는 샹군(湘军)․화이군(淮军)의 지방군이 있었다. 이때 청 왕조는 이들 지방군에 의존하여 태평천국과 염군(捻军)을 진압할 수밖에 없었다. 쭤쭝탕(左宗棠)은 샹군(湘军)을 이끌고 신쟝의 바이옌후(白彦虎)의 난을 진압했고, 천춘쉬안(岑春萱)의 부친도 윈난의 회인(回人)을 공격하는 데 화이군(淮军)을 통솔했으며, 먀오페이린(苗沛霖)의 염군을 진압한 것도 쩡궈판(曾国藩)이 영도한 샹군(湘军)이었다.

그때 군권(军权)은 이미 쩡궈판의 손에 들어가고 팔기군은 샹군․화이군으로 변했다. 게다가 몇몇 사람은 쩡궈판에게 황제가 될 것을 권하기도 했다. 유가(儒家)인 쩡궈판은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그렇게는 하지 못했다.

청조 말기, 샹군․화이군도 힘이 약해졌다. 그래서 위안스카이(袁世凯)는 서양의 신무기를 이용해 신군을 훈련시켰다. 위안스카이는 간웅(奸雄)으로 교묘한 계책을 세워 많은 기회를 이용해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했고, 청 왕조의 산둥 순무(巡抚), 즈리(直隸) 총독, 북양대신(北洋大臣: 외국인과의 통상을 관리)이 되었다. 즈리 총독이라는 관직은 높고 세력도 큰 것이었다.

위안스카이의 수하에는 그에게 지략을 제공했던는 돤치루이(段祺瑞)․펑궈장(冯国璋)․왕스전(王士珍) 세 사람이 있었다. 이들은 나름의 주견과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왕스전을 용(龍), 돤치루이를 호랑이라 했고 펑궈장은 가장 탐욕스런 개(狗)라 했다.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나자 청 조정에서는 위안스카이를 보내 진압케 했고, 위안스카이는 펑궈장이 병사를 이끌고 우한으로 가서 싸우게 했다. 그는 한커우(汉口)는 공격했으나 다시 우창(武昌)으로 공격해 들어가는 것은 멈추었다. 위안스카이는 이런 방법으로 청 말 황제에게 압력을 넣어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요구했다.

이어서 남북화의(南北和议)가 있었다. 남방은 신해혁명 측으로 우팅팡(伍廷芳)이 대표로 담판에 나섰고, 북방인 청조의 위안스카이는 탕사오이(唐绍仪)를 대표로 보냈다. 담판 중 남방 측에서 강력하게 쑨원(孙文)을 임시 대 총통으로 하자는 주장을 내놓자 담판이 결렬되었고 위안스카이는 계속 싸웠다. 쑨원은 자신에게 강력한 군대가 없었기에, 청 황제 퇴위를 조건으로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 직을 양보할 뜻을 내비쳤다. 이렇게 하여 위안스카이는 만족스럽게 남북화의를 실현했다.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이 되면서, 역시 베이징을 수도로 한 북양군벌의 통치 시기가 시작되었다. 국호를 중화민국(中华民国)이라 했고, 이때가 바로 민국 원년(元年)이 되는 것이다. 청조는 멸망했으나, 베이징은 손상도 입지 않았고 큰 파괴도 없었다.

중산공원(中山公园)은 민국 3년에, 베이하이 공원은 민국 13년에 개방되었다.

청조가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온 뒤, 북양군벌들이 국보를 훔쳐내서 황궁 안의 진귀한 보물들이 적잖이 소실되어 버렸다. 그 예로 위안스카이의 내각총리 슝시링(熊希龄)은 처음에는 러허(热河)의 도통(都统) 노릇을 했다. 그는 청 왕조가 멸망한 후 청 황제의 행궁(行宫)이며 피서산장인 청더(承德)에 들어가 많은 보물을 몰래 훔쳐내어 가장 진귀한 것들은 남기고, 좀 떨어지는 황가의 문물은 위안스카이에게, 또 가장 수준이 낮은 것들은 구궁(故宫)에 보냈다. 그 후에 그는 베이징의 샹산에 와서 샹산 쯔유위안(香山慈幼院)을 운영하려고 여러 곳에 기부했다. 사람들은 그를 ‘샹산왕(香山王)’이라 불렀다.

리스청(李石曾)은 프랑스에서 돌아온 후 팔국연합군 경자(庚子) 배상과 청 정부가 프랑스와 벨기에에 배상해야 할 돈을 관리했다.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베이징의 많은 학교를 거두어 ‘베이핑대학’의 원(院)으로 바꾸었다.

구궁박물원도 리스청이 관리했다. 이페이지(易培基) 원장은 원장이라는 직책을 이용하여 가짜 문물을 사들여 구궁박물원의 진귀한 문물과 바꾼 후 고가로 외국인에게 팔아 넘겼다.

위안스카이가 훔치려 한 것은 문물과 재물에서 그치지 않고 나라까지 욕심을 내었다.

국민당 초기에는 위안스카이와의 투쟁이 아주 격렬했다. 당시에 국민당은 스스로 강대하다고 여겼다. 영수였던 쑹쟈오런은 아직 젊었으나 연설을 썩 잘했다. 그는 국민당이 국회의 다수를 차지해야만 위안스카이를 누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위안스카이는 이름만 있는 대총통 노릇을 하게 하고 쑹쟈오런 자신은 실권 있는 내각총리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위안스카이는 쑹쟈오런을 암살했다. 쑹쟈오런이 상하이에서 기차를 타고 북으로 올라갈 때, 그는 위안스카이가 보낸 사람에게 3발의 총탄을 맞고 죽었던 것이다.

그때의 국회의원 의석은 국민당이 다수를 차지했다.

민국 2년, 각 성의 많은 독군(督军), 예를 들면 쟝시(江西) 독군 리러쥔(李热钧), 안후이(安徽) 독군 보원웨이(柏文蔚), 쟝쑤(江苏) 독군 천더취안(陈德全) 그리고 후난 등의 독군들이 위안스카이를 토벌하려 했다. 위안스카이는 돤치루이․장쉰(张勛)․펑궈장 등 신무기로 무장한 북양군벌을 파견하여 그들을 진압했다. 결국 리러쥔 등의 ‘2차 혁명’은 실패했다.

위안스카이는 사람을 보내 깡패와 부랑아들을 모아 소위 청원단(请愿团)이라는 것을 조직하고 국회가 선거를 하도록 강제했다. 아침 8시 반부터 깊은 밤까지 계속된 선거 끝에 위안스카이는 비로소 대총통에 선출되었다. 이어서 그는 또 국회 국민당 의원의 의원증을 모두 회수했다. 국민당은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어쩔 수가 없었다. 위안스카이는 더 나아가 황제가 되려는 야심이 있었다. 민국 4년에 그는 주안회(筹安会)를 조직하여 양두(杨度)에게 책임을 맡기고 군주입헌(君主立宪)을 제창했으며 미국의 고문 굿나우를 초청하여 󰡔군주구국론(君主救国论)󰡕이라는 글을 쓰게 했다.

위안스카이는 신해혁명의 주요 인물인 리위안훙(黎元洪)을 ‘무의친왕(武义亲王)’에 봉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공(公)’ ‘후(侯)’ ‘백(伯)’ ‘자(子)’로 봉하여 끌어들였다. 그는 이렇게 하면 반항자가 없어지고 모두 자신의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이 사람들을 각 성으로 보내 독군으로 삼았다. 그리고 각 성의 해당 지역의 용렬한 신사(绅士)들을 책동하여 위안스카이에게 황제가 될 것을 요구하는 ‘권진표(劝进表)’를 올리게 했다. 민국 5년 1월 1일, 위안스카이는 베이징 구궁 타이허뎬(太和殿)에서 신하들의 축하를 받으며 용포(龍袍)를 입고 황상(皇上)이 되었다.

이때 차이어(蔡锷)과 량치차오(梁啓超)는 계책을 마련했다. 차이어는 윈난으로 가서 위안스카이의 토벌을 추동했다. 윈난 독군 탕지야오(唐继尧)는 윈난 사람으로 위안스카이 세력권의 사람이 아니었다. 후난 사람인 차이어는 청조 말 윈난에서 신군을 훈련시킨 적이 있다. 차이어와 탕지야오는 매우 절친한 사이로, 함께 ‘호국군(护国军)’을 조직하고 북으로 위안스카이를 토벌하려고 윈난에서 쓰촨(四川)․구이저우(贵州)를 공격했다. 그러나 윈난은 궁핍한 성이었으므로 계속 북으로 향할 역량이 없었다. 이때 각 성의 독군들도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된 것을 옳지 않다고 여겨 차이어에 호응하며 위안스카이를 토벌하려 했다. 위안의 심복들은 대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위안에게 물러날 것을 촉구했다. 위안스카이는 불같이 노했고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죽었다.

위안스카이는 일생 동안 온갖 수단을 다한 간사하고 음험한 인간으로, 많은 간계를 부려 유신을 창도한 광서(光緖) 제를 죽였다.

애당초 캉유웨이(康有为)가 신정(新政)을 실행하고 유신을 하기 위해 ‘강학회(犟学会)’를 창립하자 위안스카이는 찬성의 뜻을 표시하고 강학회에 가입했다. 뒤에 광서 제가 무술변법(戊戌变法)을 일으키자 이를 탐탁해 하지 않았던 츠시(慈禧)가 군대를 검열할 때 광서 제를 폐하려 했다. 광서 제는 이 소식을 듣고 탄쓰퉁(谭嗣同)과 상의했다. 탄쓰퉁은 이때 광서 제와 츠시가 서로 불화하여 위안스카이의 신군(新军)만이 광서 제를 구제할 수 있었으므로 위안스카이를 찾아 방법을 상의했다. 탄쓰퉁은 위안스카이에게, 만일 위안스카이가 기꺼이 대세를 구하고 광서 제를 구제하여 신정(新政)을 실행하지 않으려면 자신을 죽여 달라고 청했다. 이때 위안스카이는 정색을 하며 엄중하게 말했다.

“내가 룽루(荣禄: 慈禧의 측근)를 죽이는 것은 개 한 마리를 죽이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 일은 모두 내게 맡겨 주시오. 내가 모두 책임을 지겠소. 그러면 황상께서는 마음을 놓으실 수 있을 것이오.”

그 다음 날 위안스카이는 톈진(天津)으로 가서 츠시의 주구인 룽루에게 이 비밀을 털어놓고 광서 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이야기했다. 룽루는 즉시 베이징으로 떠나 츠시에게 보고했다. 츠시는 즉시 광서 제를 구금시킨 뒤 자신이 수렴청정을 했다. 유신 주창자들 중 몇몇은 비분강개했으며,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는 외국으로 도망쳤다.

민국 4년 봄, 일본은 21개조 불평등 조약을 내걸고 중국을 멸망시키려 했다. 일본 공사는 위안스카이를 찾아가, 위안스카이가 ‘높은 지위에 오를 수(高升)’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일본은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암시했던 것이다. 위안스카이는 일본이 중국을 병탄하려는 21개조에 모두 응락했다. 단지 전국이 일치하여 단호한 자세로 반대했기에, 마지막 서명을 할 수 없었을 따름이었다.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의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살았다. 그는 석실(石室)을 짓고, 그 안에 세 사람의 이름이 들어 있는 돈궤를 넣어두었다. 그는 종신 총통을 하려 했고, 자신이 죽은 후에 이 돈궤를 열어 누가 자신의 뒤를 이어 총통을 계승할 것인가를 알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이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그의 장자(长子)인 위안커딩(袁克定)이었다. 위안커딩은 항상 아버지를 부추겨 부친은 황제가 되고 자신은 태자(太子)가 되고자 했다.

위안스카이가 죽은 후 돈이 매우 많은 위안커딩은 이허위안 밖의 정원인 ‘청쩌위안(承泽园: 현재 베이징 대학의 기숙사)’에 살았다. 북양군벌 중 누가 정권을 장악하든 간에 위안커딩에게 많은 돈을 주어야 했다. 그는 항일 전쟁이 일어난 뒤에야 빈궁해졌지만, 해방 후에도 매월 그에게 30원씩 주어졌다. 해방 몇 년 후 그는 죽었다.

위안스카이는 모든 수단을 다하여 리위안훙을 이용했다. 리위안훙은 본래 청조의 관리로서 우한에서 여단장에 상당하는 협통(协统)의 지위에 있었다. 신해혁명 때 그의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기 위해 그를 끌어내 중심 인물로 내세웠다. 위안스카이는 간교한 방법으로 리위안훙을 회유하여 그를 베이징으로 데리고 갔다. 리위안훙은 신해 혁명의 발상지인 우한 시를 떠나 베이징에 가자 중난하이의 잉타이(瀛臺)에 있게 되었다. 그곳은 츠시가 광서 제를 구금했었던 곳으로 리위안훙은 당연히 좋아하지 않았다.

위안스카이가 베이징에서 일을 처리하던 곳은 톄스쯔후퉁(铁狮子胡同)이었다. 그 다음 해에는 중난하이의 바오웨러우(宝月楼)에서 일을 보았다.

위안스카이가 죽은 후 쉬스창(徐世昌)은 그를 그의 원적지(塬籍地)인 허난의 장더(彰德: 安阳)에 묻었다. 그는 그를 위해 큰 무덤을 만들었는데 황제릉과 같이 기세가 대단했다. 해방 후 이 묘지에는 두 개의 비가 세워졌다. 하나는 묘의 문 앞에 있는 것으로 ‘국가를 훔친 도적 위안스카이(窃国大盗袁世凯)’라고 적혀 있고, 다른 비는 묘 앞에 세워졌는데 그 내용 역시 ‘국가를 훔친 도적 위안스카이’다.

그가 죽은 뒤에는 돤치루이가 북양군을 통솔했다. 돤치루이는 병권을 장악하고 무력 통일을 주장하며 북양군이 점거하지 않은 지역을 공격했다. 돤치루이는 일본 사람이 뒤를 봐주어 그에게 총과 대포 살 돈을 대주었다. 그 당시는 해마다 전쟁이었다.

장쉰(张勛) 역시 위안스카이 북양군벌의 주요 인물로서 원래 돤치루이보다 나이가 들었으므로, 지위가 돤치루이보다 높았다. 돤치루이가 장쉰을 내몰려고 하자 장쉰은 군주를 복위하고 청나라 사람이 황제가 되어 청조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돤치루이는 짐짓 복벽(復辟)에 동의하는 태도를 보였다. 장쉰은 쉬저우(徐州)에서 각 성의 독군을 소집하여 정식으로 복벽을 주장했는데, 모두 서명했으며, 돤치루이 역시 대표를 보내 서명했다.

그 후 장쉰은 베이징으로 와서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후 부총통의 자리에 있던 리위안훙에게 물러날 것을 종용했다. 장쉰은 자신의 변자병(辫子兵)을 이끌고 베이징으로 들어가서 리위안훙을 물리치고, 하룻밤 사이에 푸이(溥仪)를 구궁(故宫)의 쳰칭궁(乾淸宫)에서 다시 황제로 등극시켰다. 다시 대청국(大淸国)이 세워졌고 민국은 일장춘몽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돤치루이는 오히려 마창(马厂)에서 복벽의 반대를 엄숙하게 선언했고, 량치차오는 돤치루이의 집에서 장쉰을 통렬하게 비난하는 글을 썼다. 12일이 지난 후 장쉰의 복벽은 실패를 고하고 말았다.

본래 량치차오는 캉유웨이와 매우 친밀하여 함께 보황당(保皇党)에 있었으나 장쉰이 군주 복위를 꾀할 때 그들은 분열되었다. 캉유웨이는 장쉰의 복벽을 따랐고 량치차오는 일본에서 돌아오자마자 진보를 표명하며 ‘진보당’에 가입하여 장쉰의 복벽을 반대했던 것이다.

량치차오는 처음에는 위안스카이가 청대를 잇는 것을 옹호했지만, 뒤에는 차이어와 함께 윈난에서 ‘호국군’을 조직하여 황상이 된 위안스카이에게 반대했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돤치루이를 옹호했다. 민국 초년에는 량치차오 수배령이 내려진 적도 있었는데, 그 후 1926년을 전후로 칭화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돤치루이는 펑궈장을 대총통으로 세웠다. 펑궈장은 탐욕스런 사람이었다. 돤치루이 자신은 국무총리로 있으면서 실권을 장악했다. 총통부와 국무원의 불화, 이른바 부, 원(府院)의 다툼이 생겼다. 그 결과 펑궈장이 물러나고 돤치루이는 다시 쉬스창을 대총통으로 세웠다. 쉬스창은 문인이었으므로 부․원의 모순을 어느 정도는 완화시킬 수가 있었다.

즈(直)․환(皖)의 분쟁이 폭발했다. 즈는 즈계(直系)로 즈리파(直隸派)였고 환은 안후이성 파로, 이 두 파는 모두 북양군벌이었다. 즈계의 중심 인물 차오쿤(曹锟)은 대장 우페이푸(吴佩孚)를 내세워 싸움을 벌였다. 차오쿤의 자매는 모두 위안스카이의 처였으므로, 그는 자연히 위안스카이 수하의 인물이었다. 환계는 돤치루이를 우두머리로 하고 있었는데 쌍방의 대전 결과 우페이푸가 승리했으므로 돤치루이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우페이푸 자신은 산둥(山东) 사람이었으나 차오쿤의 ‘즈계(즈리는 허베이성이다)’에 속했다. 그는 차오쿤을 청하여 대총통으로 추대했다. 차오쿤은 국회에서 뇌물 선거를 하여, 차오쿤에게 표를 던진 국회의원은 몰래 8000은원을 받았다. 그러나 사오루이펑(邵瑞彭)이란 의원이 표 하나를 증거로 이 사실을 고등법원에 알렸고, 그럼으로써 전 사회가 이 추악한 연극을 알게 되었다.

즈․환 전쟁 후, 북양군벌은 다시 우페이푸의 손으로 들어갔지만 장쭤린(张作霖)이 펑군(奉军)을 이끌고 동북에서 입관하여 즈․펑 전쟁이 발생했다.

민국 13년에 장쭤린은 150만 은원으로 펑위샹(冯玉祥)을 매수했다. 펑위샹은 원래 즈계 차오쿤의 사람이었는데, 베이징으로 돌아온 뒤 차오쿤을 중난하이 화이런탕(怀仁堂) 뒤쪽의 누각에 가두었다. 그 후 황푸(黄郛)를 총리로 내세웠으나 실권은 장쭤린, 펑위샹이 쥐었다.

나중에는 돤치루이에게 ‘집정(执政)’을 맡아줄 것을 청했는데, 명칭을 바꾸어 대총통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대권은 여전히 장쭤린의 손에 있었으므로, 이때의 돤치루이는 힘을 쓰지 못했다. 돤치루이 수하의 쉬수정(徐树铮)은 산둥으로 가던 길에 산둥의 군벌인 한푸쥐(韩復榘)에게 붙잡혀 죽었다. 이것은 펑위샹이 한푸쥐에게 시킨 일이었다. ‘돤 집정’은 단지 1년 간만 지속되었고 후에는 톈진과 상하이의 외국 조계(租界)로 물러났다. 어떤 사람들은 쟝졔스가 돤치루이의 제자였다고 하지만 사실 쟝졔스는 돤치루이를 보호만 했을 뿐이다.

그 뒤를 이어 장쭤린은 직접 나서 육(陸)․해(海)․공(空)군의 대원수가 되어 펑위샹을 밀어냈다. 이로써 북양군벌은 종말을 보게 되었다. 이것은 민국 15년의 일이다.

민국 17년에는 남방의 국민 혁명군이 북벌을 단행했다. 장쭤린은 관내(关内)에서 물러나 동북의 선양(沈阳)으로 가던 중 일본 군인에게 폭사 당했다. 장쭤린이 후루다오(葫芦岛)를 외국과의 통상 항구로 열어줌으로써 다롄(大连)에 있는 일본인들의 장사를 빼앗았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점차 그를 싫어하게 되었던 것이다.

펑위샹은 원래 북양 군인이었지만 새로운 사상을 가지고 국민 혁명군의 북벌에 참여했다. 상황은 이제 쟝졔스(蒋介石)․옌시산(阎锡山)․펑위샹이 대립하는 국면으로 발전했다. 민국 17년에 한바탕 싸움이 일어났고 옌시산, 펑위샹은 쟝졔스에게 패했다. 싸울 당시 비가 내렸는데 옌시산의 군대에는 아편을 피우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성냥이 필요했다. 그러나 비가 오므로 성냥으로 아편을 피울 수 없었고 따라서 병력은 무력하게 전쟁에 임하게 되었다.

펑위샹은 서북 지역의 쑤이위안성(绥远省), 산시(陕西), 간쑤(甘肃) 등지로 갔다. 당시 그는 매우 곤궁하여, 펑위샹의 현장(县长)이 된 사람은 매월 20원밖에 받지 못했다. 쟝졔스는 돈으로 펑위샹의 사람을 매수했다. 한푸쥐는 이렇게 하여 쟝졔스 밑으로 들어가 산둥성의 주석이 되었다. 펑위샹은 고립되어 산둥으로 갔는데 다시 산시성의 옌시산에게 잡혀 그의 집에 구류되었다. 그는 반년 후에야 석방되어 산둥의 타이산(泰山)으로 갔지만 말기에는 또 난징으로 갔다.

쟝졔스는 큰 처남 쑹쯔원(宋子文)을 시켜 장쉐량(张学良)을 회유했다. 쑹은 장쉐량과 함께 놀면서 마작을 하되 항상 지기만 했다. 쟝졔스는 이런 방법으로 장쉐량을 매수했고 결과적으로 장쉐량도 쟝졔스 편이 되었다. 일본인들은 중국의 통일을 두려워하여 ‘9․18’사변을 일으켰고 동북 3성(省)에서 전쟁을 했다.

베이징성은 민국 원년(1911)에서 15년(1926)에 이르기까지 북양 군벌의 손에 있었다. 군벌들은 외국 제국주의자의 차관에 의지했다. 누군가 주인이 되면 그 누군가가 돈을 주었던 것이다. 돤치루이는 독일과 일본에게 돈을 받았으나, 그의 심복인 쉬수정(徐树铮)이 일본 유학생이었기 때문에 주로 일본에게 받았다. 북양군벌이 집정하여 혼전(混战)하던 시기에 베이징성에서는 살인이 거듭 일어났다. 매일 사람을 처단한다는 공고가 모든 성에 나붙었다.

그 후 북양 군벌이 흥기했다가 몰락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외국 대사관과 외국 병원(독일 병원, 일본의 동인(同仁)의원, 프랑스 병원)으로 도망가 몸을 숨겼다. 그들의 두상과 함께 수배령이 둥쟈오민항(东交民巷) 입구에 붙었지만 수배된 사람들은 둥쟈오민항에서 유유자적하면서 매우 안전하게 있었다.

리위안훙과 쉬스창이 대총통이었을 때 정부는 별다른 권력이 없었다. 단지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을 순열사(巡阅使)로 임명하여 9개의 성을 관할하게 할 뿐이었다. 그러나 패한 사람들은 면직되었다. 총통은 이것 외에 별다른 권력이 없었다. 광시(广西) 순열사 루룽팅(陸荣廷)이 베이징에 왔을 때, 리위안훙의 초대를 받았다. 그는 탄신페이(谭鑫培)에게 창희(唱戱)를 청했다. 탄씨는 이미 늙은 데다 마침 그때 병들어 있었으나 그에게 억지로 창희를 하도록 했다. 탄신페이는 할 수없이 ‘홍양동(洪洋洞)’과 ‘양육랑귀천(杨六郞归天)’을 불렀다. 전하는 말로는 노래는 아주 좋았지만 오래지 않아 탄씨는 죽었다 한다. 이것은 민국 16년의 일이다. 그 당시 탄신페이는 희극 하나를 노래하면 300은원을 받았다.

북양 군벌이 베이징을 점거하던 시기의 도시 교통은 매우 불편했다. 쳰먼(前门)을 들어서면 중간에는 문 하나만이 열려 있었다. 뒤에 북양 정부 위안스카이 시대에 주치링(朱啓铃)이 내무부장으로 있으면서 ‘영조학사(营造学社)’를 세웠다. 그는 량쓰청(梁思成)에게 고 건축을 연구하도록 부탁했다. 량쓰청은 성의 사방을 돌아다니며 많은 고 건축물을 그려 책으로 내었다. 그가 쳰먼에 5개의 문을 열고 나자 교통이 어느 정도 편리해졌다.

주치링은 놀기 좋아하여 본래 황궁의 화원이었던 중산 공원을 개방했다. 베이하이 공원은 리위안훙의 통치 시기였던 민국 12년에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이허위안은 푸이(溥仪)가 나간 후 공원으로 개방되었으나, 원래 청 황제에서 퇴위한 뒤 푸이가 이허위안에 거주했으므로 이곳은 푸이의 개인 소유였다. 이때 이허위안에 가려면 외교부에 가서 여권을 만들어야 했는데, 그것은 이 정원이 외국 황제의 화원이기 때문이었다. 청 황제가 퇴위할 때 이후로 외국 황제로 대우 해주어야 한다고 문서로 명확히 약정했던 것이다. 이 약정에 의거하여 위안스카이는 푸이에게 편지를 쓰면서 중화민국 대총통이 대청황제에게 안부를 묻는다라고 했다.

민국 13년에 푸이가 나간 뒤 이허위안은 공원으로 개방되었고 당시 입장료는 1전(钱)이었다. 츠시가 죽은 뒤로 이허위안은 수리를 하지 않았으므로 이미 낡아 있었다.

베이징 쳰먼 졘러우(前门箭楼)

북양 군벌 때는 신화먼(新华门)과 허핑먼(和平门)을 열고 동․서 창안가와 베이하이․중난하이 사이의 진아오위둥챠오(金鰲玉蝀桥)를 개방하여 성 안 동서남북의 교통이 매우 편리해졌으며, 남문을 열어 행인들이 난창졔(南长街), 난츠쯔(南池子)를 통행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청조의 내성인 쯔진청(紫禁城)의 통행금지 구역을 점차 개방하고 청대의 금령(禁令)을 타파했다. 위화위안(御花园)은 공원이 되었다. 몇몇 통금 도로와 거리를 시민들이 통행할 수 있게 한 것도 모두 민국 시기의 일이다.

쑨원은 수도를 난징으로 천도하고 베이징을 베이핑(北平)으로 개명할 것을 주장했다. 쑨원이 난징을 수도로 생각했던 것은 당시 봉건적인 분위기가 농후했던 베이징을 싫어했기 때문이며, 또 한 가지 공개적으로 그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훙슈취안(洪秀全)을 계승해 난징을 수도로 삼고 싶어했던 것이다. 중앙 정부가 난징으로 옮겨진 뒤 난징의 관리들은 매주 토요일마다 상하이로 가서 놀았다. 베이징은 북양 군벌의 흥기와 멸망을 거쳤고, 북양 군벌은 베이징 성을 유린했다. 그들의 계보를 다음과 같이 나열할 수 있다.

위안스카이-리위안훙(장쉰이 쫓아냄)-펑궈장-리위안훙(즈계 군벌에 의해 쫓겨남)-쉬스창-차오쿤-돤치루이-장쭤린(펑계(奉系)군벌).

베이징이 수도가 된 후 1000년에 걸친 역사에 관한 고찰을 여기서 그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