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고성(桃渚古城)이란 역사 유적지가 중국 저장성 타이저우시 북부 해안에 남아 있다. 명대에 도강[桃] 하구의 13개 모래섬[渚]를 내다보는 곳에 세우면서 붙인 명칭이다. 성벽은 1.3킬로미터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해안 방어를 위한 요충지였다. 역사도 있지만 바다와 강과 작은 봉우리가 어우러져 있고 산호가 굳은 암석들이 기이한 경치를 연출하고 있는 좋은 여행지이다. 해상선자국(海上仙子國)이라 할 만하다.
고성의 성벽에 꽂힌 척(戚)이란 깃발이 이곳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척은 척계광(戚繼光 1528~1588)이란 명나라 장수가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조직한 척가군의 군기이다. 중국에서는 척계광을 항왜명장 민족영웅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이순신(1545~1598)과 활동 시기도 비슷하다. 척계광은 도적떼로서의 왜구를 토벌했고 이순신은 침략군으로서의 왜군을 격파했다. 둘 다 정치적인 이유로 고초를 겪은 것도 북방 방어에도 나섰던 것도 비슷하다. 이순신은 무과 급제 이후 함경도에 부임했었고, 척계광은 명대 만리장성을 구축한 장본인이다.
우리에게 왜구란, 일본제국주의와 함께 예민한 역사 감성을 건드리는 말이다. 우리에게 최초의 왜구는 고려 시대인 1223~1265년이었다. 고려 말기인 1350~1370년 왜구의 피해가 극심했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인 해적들을 왜구라고 정명한 것은 고려였다. 애초 왜구는 일본인[왜]이 노략질[寇]을 하다는 문장이었으나 고려에서 관용어로 굳어졌다. 중국에서도 그대로 사용하면서 지금은 역사용어로 굳어져 있다.
척계광 시대 곧 16세기 중반의 왜구는 13세기, 14~15세기의 왜구와는 같으면서도 질적으로 양적으로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이전의 왜구가 생존을 위한 약탈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16세기 왜구는 대규모 선박과 인원이 동원된 일종의 무장선단이었다. 약탈과 납치뿐 아니라 대규모 밀무역을 병행했던 것이다. 조건이 맞으면 밀무역이요, 맞지 않으면 약탈로 표변했던 것이다.
16세기 왜구의 가장 큰 차이는 인적 구성이었다. 일본인이 아니라 명나라 사람들이 다수였다. 명나라 기록에 70%가 명나라 사람이고 30%가 일본이란 숫자도 나타난다. 왜구의 리더그룹도 일본인과 명나라 사람이 섞여 있었다. 16세기의 왜구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 왕직(汪直)은 명나라 푸젠성 출신이었다. 명나라 연안의 일부 주민들은 왜구가 상륙하면 아예 발 벗고 나서 길 안내는 물론 관군공격과 약탈에 앞장서기도 했다. 일본인 해구를 진왜(眞倭), 명나라 사람들은 가왜(假倭)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포르투갈 선박들도 총과 대포를 앞세우고 밀무역을 노리고 돌아다녔으니 16세기 왜구로 간주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특정한 역할을 맡아 왜구 집단에 참여한 포르투갈인도 있었고, 소수의 조선인 피랍자나 노예도 있었으나 이는 왜구의 정체성에 영향을 줄 것은 아니었다.
왜구는 단지 생존을 위해 해적질에 나섰거나, 침략의 DNA가 있어 노략질에 나선 것일까. 역사는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9~10세기에는 신라인 해적이 심각해 신라-일본의 공식 사신까지 끊길 정도였다. 16세기에는 명나라 사람이 왜구의 다수를 차지했다는 것도 그렇다. 19세기 남중국해의 해적은 베트남 사람들이었다.
16세기 동아시아의 바다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를 더 넓게 보아야 한다. 척계광의 대왜구와 이순신의 당시 세계최대 전쟁인 왜란이 발생한 16세기, 동아시아의 바다는 서로 다른 요소들이 대대적으로 혼거하고 융합하고 경합하는 대항해, 대교역, 대변혁의 시대였다. 명나라가 대륙을 평정하고 국내적으로는 사회가 안정되면서 농지 개간이 늘고 농업생산도 늘어났다. 면화와 마 등의 생산이 늘면서 수공업과 상업도 함께 발달했다. 비농업 인구가 늘고 상업 네트워크가 성장할수록 바다로 나가려는 자생적 압력도 높아져 갔다. 이런 와중에 명나라의 해안이나 크고 작은 섬들은 황제의 입장에서는 치안 취약지대였다. 반대로 황제로부터 멀어지거나 멀어지고 싶은 자들에게는 적당한 은신처가 됐다. 조세나 노역의 부담을 피해 들어간 도망자와 유민, 이민족의 통치 아래 실의에 빠진 문인들, 계절에 따라 어선을 타느라고 생계가 끊어지기 쉬운 수부, 사민(沙民)과 같이 허름한 배에 살 수밖에 없는 궁핍한 연안 하층민들이 켜켜이 쌓여갔다. 그런 한편으로 명나라 상인들은 공공연히 밀무역꾼들을 연안의 섬으로 불러들였다. 당시에 이미 필리핀 미닐라에 화교 공동체가 형성될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남중국해에는 동남아나 인도, 아랍의 배들이 무역의 실리를 좇아 오래 전부터 드나들었다. 선박이 대형화하고 대량소비품들의 교역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남중국해의 무역은 16세기에 동중국해로 일반화되어 갔다. 포르투갈의 상선들은 총과 대포를 앞세워 항구를 확보하거나 섬을 이용해 밀무역을 하려고 했다. 에스파냐도 포르투갈의 뒤를 따라 바다로 나섰다.
서쪽으로는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했다. 동쪽으로는 1571년 마닐라시를 건설했고 곧이어 멕시코의 아카풀코에서 마닐라까지 태평양 항로를 열었다. 태평양 항로를 통해 미주에서 생산된 은이 동아시아로 실려왔다. 명나라 상인들이 가져온 견사와 면포, 도자기 등은 유럽뿐 아니라 태평양을 바로 건너갔다.
일본인은 해적질이 돈벌이가 되는 경험이 이미 축적되어 있었다. 일본의 남북조 시대와 전국시대란 생사가 엇갈리는 전장이 곧 생계의 터전이었다. 1526년 이와미은산(石見銀山)이 발견되고 조선의 회취법이라는 은괴 정제방법이 전해지자 은의 생산이 급증했다. 일본의 저렴한 은을 명나라로 가져가면 큰돈이 되었다. 명나라의 다른 주변국과는 달리 일본은 십년에 한번만 조공을 허용하는 ‘왕따’ 수준이었다.
조공-공무역이란 국제질서에 참여할 수도 없고, 생계의 본능과 모험사업의 욕심들이 이합집산을 이룬 것이 바로 16세기 왜구였던 것이다. 바다에서 새로운 글로벌 생태계가 만들어지고 있는데 대륙의 법과 제도는 옹색해진 것이다. 몸집은 커지는데 옷은 졸아드니 재봉선이 터지면서 삐져나온 것이 왜구랄까.
왜구가 없어지는 과정을 보아도 그렇다. 척계광의 토벌로만 왜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명나라가 1540년 저우산도의 국내외 밀무역꾼들을 강력하게 소탕하자 왜구의 출몰이 더 심해졌다. 명나라는 결국 1567년, 1570년 해금(海禁)을 일부 완화했다. 관에 세금을 선납하고 허가장을 받아 도항하는 것을 허용했다. 제한적이나마 일부 항구에서의 무역도 허용했다. 저우산도에서 쫓겨난 포르투갈 상인들은 마카오에 거주할 수 있게 됐다. 일본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1588년에는 자국인들의 해구 금지령을 내리면서 비로소 왜구는 사라졌다.
동아시아의 바다가 역사의 주류로 끓어오르던 16세기의 바다, 그 바다를 다녀간 조선인은 얼마나 될까. 도저고성이 새삼 흥미롭다. 척계광이 도저고성에서 왜구를 토벌하기 70여 년 전인 1488년 이곳에 발을 디딘 조선인이 있었다. 바로 표해록의 저자 최부이다. 최부 일행이 구사일생으로 관아에 인계되어 신분을 확인받고 귀환 여정을 시작한 곳이 바로 이 도저고성이다. 성종은 힘들게 귀국한 최부에게 보고 듣고 겪은 것을 상세히 보고하라고 하명했다. 국왕조차 정상적인 국가 시스템으로는 대륙의 중앙이나 동아시아의 바다가 어떤 사정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황해 횡단항로를 건너 코리아타운을 이루었던 신라시대보다도 국정시야가 좁아져 있었다. 사단항로를 오가던 고려해상과 귀화한 송상, 벽란도와 강화도, 삼별초와 왜구토벌과 같은 바다의 역량은 이미 갯벌에 가라앉아버린 것 아닌가.
최부는 성종에게 보고서를 썼으니 그게 유명한 표해록이다. 성종은 세세하게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의 역사를 보면 성종 역시 독후에는 묵언에 다를 바 없었다. 조공체제에 편입된 나라였으니 그랬다고 해야 하나. 어이없는 일은 최부가 보고서를 썼다고 탄핵을 당했다. 부친 삼년상이 끝나기 전에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을 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숨이 막힌다. 15, 16세기 조선은 무엇을 했냐고 되물을 의욕조차 떨어진다. 지금 도저고성 한켠에는 최부의 표착을 상기시켜주는 <중한민간우호비>가 세워져 있다는 것에 작은 위안을 삼을 뿐.
중국여행객 윤태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