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0년 사절단의 일원으로 참여한 박지원은 『熱河日記』를 남겼고, 1790년 사절단의 막료로 참여한 박제가·유득공 역시 연행록을 남겼습니다. 모두 북방의 장성 너머 사막지대인 열하(熱河)에 간 경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열하로 향하는 노정은 각기 달랐는데요, 모두 건륭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다녀온 ‘뜻밖의 북방여행’이었습니다. 여기서는 『열하일기』의 동선을 살펴보겠습니다.
‘조선 사신은 열하(熱河)로 오라.’
1780년 건륭 70세 만수절 사은겸진하사절(謝恩兼進賀使節)의 일원인 연암과 일행들은 8월 1일 연경에 도착하였습니다. 다소 여유롭게 유리창 일대를 둘러보며 중국의 문사들을 만나거나 서가의 책들을 탐색하며 소일하던 연암 일행은 나흘째 되던 날, 부랴부랴 짐을 싸게 됩니다. “조선 사신은 열하로 오라, 만수절 이전에 도착하라”는 황명(皇命)을 전달받았기 때문입니다.
느닷없는 ‘열하행 호출’은 사행단을 당황스럽게 합니다. 예부의 행정 미숙으로 황제가 조선 사신을 급히 찾고 있고, 일 처리를 잘못하여 황제로부터 견책(감봉)을 받은 예부 관리들이 더욱 채근하는 통에 사행단의 움직임도 급해졌습니다.
당장 누구누구가 열하로 갈 것인가?를 정해야 했습니다. 사행단의 정사인 형님 박명원이 동행하기를 원하고 있으나, 연암의 고민은 깊습니다. 연암이 중국행에 나선 까닭은 연경에서 펼칠 포부와 견문이었으되, 느닷없이 열하라니! 『熱河日記』에 드러나는 연암의 속마음은?
“정사는 나와 함께 가기를 바랐으나, 우선 몸을 안장에서 푼지 얼마 되지 않아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또다시 먼 길을 갈 수 없을 것 같고, 둘째는 만약 황제가 조선 사신들에게 열하에서 조선으로 곧장 돌아가라고 명령을 내린다면 북경유람을 할 수 없기로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주저 된다.”
고민이 깊어지는 가운데 형님인 정사 박명원의 권유가 이어집니다.
“자네가 만리 길 북경에 온 것은 유람을 위해서인데, 뭘 망설이는가? 이번 열하 여행은 앞서 누구도 가보지 못한 곳이니, 만약 귀국하는 날에 누가 열하가 어떻더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터인가? 북경이야 사람들마다 모두 와서 보는 곳이고, 이번 열하 여행은 천년에 한 번 만나는 좋은 기회이니 자네가 가지 않을 수는 없네.”
박지원, <열하일기>(김혈조譯, 2008)
고민 끝에 열하 행을 결정한 연암이 “열하까지의 걸음은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 있는 일이다.”라는 말로 열하에 도착한 벅찬 심정을 노래한 것은 며칠 후의 일이었습니다.
강행군 5일간의 기록, 「막북행정록」
『열하일기』에서는 연경(燕京)-순의(順義)-회유(懷柔)-밀운(密雲)-목가곡(穆家谷)-석갑성(石匣城)-남천문(南天門)-고북구(古北口)-난하(灤河)-열하(熱河)로 이어지는 사행단의 동선을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이라는 항목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황제의 만수절에 참여하기 위해 연암 일행은 숙소인 서관(西館) 밖 첨운패루(瞻云牌樓) 앞에서 북경 관소(館所)에 잔류하는 인원과 작별하고 자금성 북쪽 지안문(地安門)을 거쳐 동직문(東直門)을 나갑니다. 8월 5일부터 8월 9일까지 5일 밤낮을 도와 열하로 향하게 되는데요, 「막북행정록」의 막북(漠北)은 사막의 북쪽, 즉 변방(邊方)을 의미합니다. 장성 너머 사막지대의 변방을 지나면서 보고 듣고 고생했던 이야기를 기록한 글입니다.
인간사의 괴로운 일, 이별(離別)
「막북행정록」은 인간사에서 가장 괴로운 일인 ‘이별’, 즉 ‘헤어짐’에 대한 정서를 설파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만수절 이전에 열하에 도착해야 하는 관계로 행렬의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사행단 인원을 대폭 축소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떠나는 자’와 ‘남는 자’가 있게 마련이고, 이들의 전별 장면을 지켜보면서 연암은 인간의 정서 중에 가장 괴로운 것은 바로 이별이라고 했습니다. 특히 ‘생이별’의 정서를 장황하게 얘기합니다. 압록강을 건너 약 40여 일간 고락을 함께해 온 이들과 타국에서 이별해야 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임에는 분명합니다.
삼사의 수행원도 결정되었고, 연암도 연경과 열하를 놓고 고민 끝에 가기로 했으니 응당 마부인 창대와 종인 장복이도 둘 중 한 명은 남아야 했습니다. 창대가 연암과 함께 가기로 결정되자 장복이와 창대는 서로 부여잡고 눈물겨운 이별을 합니다. 창대는 밀운 지역을 지나면서 말발굽에 발등을 다쳐 행렬에 뒤처져 따라오는 등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연암은 말몰이꾼 없이 혼자 말을 타고 떠났다가 삼간방(三間房)에 이르러서야 호행 통관의 마차를 얻어 타고 온 창대와 다시 만나게 됩니다.
사행단의 하예(下隸), 국제인이었다.
당시 사행길에 나선 마두 등 하예(下隸: 부리는 아랫사람)들은 사행단의 길잡이와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사행단의 공식 일정은 통역을 맡은 역관(譯官)들의 안내에 따라 사행의 일정이 진행되겠지만, 사행 경험이 풍부한 하예들의 활약을 빼 놓고는 얘기가 안되는 것 또한 사행이었습니다. 하예들중에는 20~30년 동안 참여했거나, 30회 이상 참여한 이도 있었으니, 평생을 중국을 오가는 길 위에 살아왔습니다. 이들은 당연히 의사소통 능력(한어·만주어·몽골어)을 구비한 중국어 선생이자 여행가이드(안내자)의 역할을 했을것이고, 궁금증에 목마른 ‘말 위의 상전’들에게는 훌륭한 말벗이자 더없는 정보 제공자였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연행과정에서 사행단과 중국 측의 크고 작은 문제 발생 시 적극적인 해결사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필자는 연행노정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하예들의 활약상이 눈에 선하게 그려질 때가 많습니다. 그들의 활극이 펼쳐진 공간에 서면 더욱 그렇습니다.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 연행을 통해 조선 사회에 북학이 논의되고, 서학에 눈 뜰 때 지식인의 글(연행록)로 전파되던 이국 체험과 세계인식이 많은 영향을 끼쳤겠지만, 어쩌면 견마잡이, 마두와 같은 하예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을 외국체험, 연행무용담이 훨씬 더 조선 사회를 변화의 길로 유도하는(아래로부터) 효과적인 기제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열하의 연회장이나 원명원의 연회장에서 허름한 옷차림의 하예들이 몽고 왕과 격의없이 악수를 한다거나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바라보며 ‘어이없음’과 ‘기가 찬 표정을 하는 사대부들의 얼굴’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연행 길에서만큼은 하예들이 사대주의에 집착했던 고루한 양반들보다 더 앞선 ‘국제인’이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한밤중에 강을 아홉 번 건넌 현장
열하로 향하는 길은 강행군이었고,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밀운(密雲)을 지날 때 비를 피해 심야에 밀운성(密雲城)으로 들어와 밥도 제대로 지어 먹지 못하며 고생했던 사정이나 강물이 범람해서 쉬이 건너지 못했던 일, 수면부족으로 졸면서 행군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한밤중에 강물을 아홉 번이나 건너야 했던 고생담은 연암의 명문장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에 생생합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두려운 강물 소리와 같은 외물에 흔들리지 않고 평정심을 찾으면 충분히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내용의 이글은 이후에 언급될 「야출고북구기」와 더불어 연암의 명문장으로 꼽힙니다.
「일야구도하기」의 현장은 밀운에서 고북구(古北口)에 이르는 노정 사이의 물길을 말하는데, 연암 일행이 하룻밤에 아홉 번이나 건너야 했던 하천은 밀운수고(密雲水庫) 안에 수몰되어 지금은 그 길의 원형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밀운수고에서 조하(潮河)를 거슬러 약 30여 분을 차로 달리면 고북구입니다.
변방의 요새, 고북구를 밤에 지나다
고북구는 고어도(古御道)를 통해서 들어가야 합니다. 고어도는 청 황제의 북순(北巡:북방순행) 경로로 황제가 열하로 피서를 가거나 북쪽 변방의 초원으로 ‘목란추선’(木欄圍場의 가을 사냥)을 가기 위해 지나던 길입니다. 작은 변방의 마을이지만, 북경 북쪽을 지키는 군사요충지로 병가의 필쟁지였습니다.
연암 일행이 밤낮을 도와 열하로 향하던 길에 고북구를 지나가게 되는데, 고북구 마을에 대한 인상과 소회를 묘사한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조선 말기 학자 창강 김택영은 5천 년 역사 이래 최고의 문장이라 평했을 정도입니다.
연암은 심야에 고북구 마을을 안을 지나며 술을 사서 조금 마시고는 이내 만리장성 밖으로 나갑니다. 장성 아래를 지나다가 문득 말안장에서 단도를 꺼내어 장성 벽의 이끼를 걷어 낸 후 술로 먹을 갈아 흔적을 남깁니다. “건륭 45년 경자년 8월 7일 밤 삼경, 조선의 박지원 이곳을 지나 가다”라고 쓴 후, “나는 서생의 몸으로 백발이 되어서야 장성을 한번 나가보는구나!”라고 소회를 남깁니다. 오늘날 그 장성의 위치를 찾을 길이 없거니와 한낮에 통과해야 하는 여행자로선 연암의 모습을 상상으로만 그려야 하니 아쉽기만 합니다.
열하로 가는 옛길, 지금도 그곳에 있어
고북구에서 동북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연암 일행이 걸었던 여정의 지명들이 여전히 남아있고, 엣 길의 원형은 국도(101)입니다. 편도 8시간 걸리던 북경과 열하는 고속도로가 생겨 3시간이면 도착하는 거리가 되었습니다.
조선 사행단은 천신만고 끝에 8월 9일 오전 무렵, 열하에 도착했습니다. 압록강을 건넌지 45일 만이었습니다. 연암은 열하의 초입에서 쌍탑(双塔)과 경추봉(磬捶峰)의 기이한 풍광을 보았고, 연도에 늘어선 조공행렬들의 번잡스러운 광경을 목도하면서 사행단의 관소인 문묘(文廟)로 향하였습니다.
다음호에선 열하에서의 행적과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으로서 연재를 정리할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