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대 수도와 베이징 소사2

역대로 중국은 북위(北纬) 35도 위치에 있던 시안․카이펑․뤄양에 수도를 정했었다. 시안․카이펑․뤄양에 수도를 정했을 때는 중국이 남북통일이 되었을 때였다. 바로 이들 지역은 전국의 중앙에 위치했지만 난징은 그렇지 않았다. 난징은 북위 32도이고 베이징은 북위 40도다.

명 성조(成祖) 주두이는 처음으로 한(汉) 왕조의 수도를 베이징에 정한 사람이다. 그 이전의 후연(后燕)․요․금․원은 모두 소수 민족의 우두머리가 황제가 된 경우다.

명 성조가 베이징에 수도를 정한 데는 군사적인 이유도 있었다. 그 이전의 황제들이 난징에 수도를 정한 것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이른바 경제적 원인이란, 쟝쑤(江苏)․저쟝(浙江) 지역은 강우량이 풍부하여 타이후(太湖) 일대를 따라 산물이 풍부했기 때문인데, 당시에는 ‘소․항이 무르익으면 천하가 족하다(苏杭熟, 天下足)’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군사적으로 볼 때, 명 성조 당시의 적은 몽골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베이징 성을 축조했고 베이징 성 북부에 장성(长城)을 쌓았다. 그러므로 그는 수도를 국방상 최전선에 세우는 데 착안했던 것이다. 진(秦)대에 세워진 장성은 명의 장성보다 북쪽에 있고 진의 장성과 성곽은 모두 진흙으로 축조한 것인 반면, 명 성조 때의 장성은 큰 벽돌과 돌로 만든 것이었으므로 훨씬 견고했다. 주두이가 죽은 후 그의 묘도 난징의 밍링(明陵)에 장사지내지 않고, 국방의 전선인 베이징에 세워졌다. 이렇게 하여 그의 자손들이 제사 지내러 올 때마다 장성과 몽골 인들을 볼 수 있게 했던 것이다.

명 초, 주위안장의 대장수인 쉬다(徐达)는 군사를 이끌고 원의 수도인 ‘다두’를 공격하고 그 ‘다두’를 ‘베이핑(北平)’으로 바꾸었다. 그 후 명 성조가 이곳으로 천도한 후에야 비로소 정식으로 ‘베이징’이라 고쳤다.

명 성조는 긴 시간과 많은 재력을 들여 폐허가 된 원의 수도에 다시 도성을 건조했다. 이 새로운 성은 원의 성과 비슷했다.

황제의 보좌(宝座)는 전체 성의 중앙에 위치해야 했으므로 대내황궁(大内皇宫)을 성의 정 중앙에 세웠다.

쳰먼(前门)이라고도 부르는 정양먼(正阳门)

명대 성문의 이름은 대부분 원대의 이름을 따라 썼다. 남쪽 성벽의 리정먼(麗正门)은 정양먼(正阳门)으로 바꾸고, 원밍먼(文明门)은 충원먼(崇文门: 이 성문을 원대에는 하다먼(哈达门)이라고 불렀는데, 하이다이먼(海垈门)이라 불러야 한다. 이것은 몽골 장수의 이름이다)으로, 순청먼(顺承门)은 쉬안우먼(宣武门: 순하고도 곧다는 의미로 순즈먼(顺直门)이라고도 불렀다)으로 바꾸었다.

남쪽으로 향하는 성문은 모두 세 개였다. 동쪽의 치화먼(齐化门)은 차오양먼(朝阳门)으로 고쳤다. 충런먼(崇仁门)은 둥즈먼(东直门)으로 고쳤다. 서쪽 성벽의 카이쩌먼(开则门: 서방을 평정한다는 의미로 핑즈먼(平秩门)이라고도 불렀다)은 푸청먼(阜成门)으로, 허이먼(和义门)은 시즈먼(西直门)으로 고쳤다. 북쪽의 성곽은 더성먼(德胜门)․안딩먼(安定门)이라 했다. 이상 모두 아홉 개의 성문이 있었다.

명조는 또 천도하기 이전에 내성(内城)의 사방 밖에 외성을 축조하려 했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실현하지 못하고 단지 남성의 외곽에 외라성(外罗城)만 축조했다. 이로 인해 베이징성은 凸자 모양이 되었다.

베이징 지도. 凸자 모양의 위쪽 정사각형이 원래 성곽이고 아래쪽 직사각형이 명대에 축조된 것이다.

명대의 황제들은 쳰칭궁(乾淸宫)에 거주했고, 황후는 쿤닝궁(坤寧宫)에 거주했다. 또 황제와 황후가 교태하는 곳, 즉 황제가 결혼하는 쟈오타이뎬(交泰殿)이라는 궁전이 있었다.

황궁에는 동․서의 두 궁이 있었다. 모든 황제에게는 여섯 명의 비(妃)가 있었다. 황후 하나에 비를 여섯에서 열둘까지 둘 수 있었다. 후대에는 비의 숫자가 더욱 많아졌다. 동궁에는 태자가 거주했고, 서궁에는 황후가 거주했다.

삼대전(三大殿)은 황제와 대신들이 국사를 처리하던 곳이다. 당시의 삼대전이란 펑톈뎬(奉天殿)․화가이뎬(华盖殿)․진선뎬(谨身殿)이다(명 후기에는 황지뎬(皇极殿)․중지뎬(中极殿)․졘지뎬(建极殿)으로 개명했고 청대에는 타이허뎬(太和殿)․중허뎬(中和殿)․바오허뎬(保和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구궁(故宫) 타이허뎬(太和殿)

명대에는 재상이 없었는데, 그것은 어떤 재상이 반역을 저지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는 태학사(大学士)만을 두었다. 태학사는 각내(阁内)의 일을 처리했으므로 ‘각로(阁老)’라 했는데, ‘내각(内阁)’이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무를 처리하던 곳은 육부(六部)였다. 이 육부는 쯔진청(紫禁城) 우먼(午门) 밖 쳰먼(前门) 안에 설치했는데, 동삼부(东三部)와 서삼부(西三部)가 그것이다. 동쪽의 삼부는 이부(吏部: 관리를 관장)․호부(户部: 내무를 관할)․예부(禮部)다. 이 삼부의 위치는 지금의 공안부(公安部) 자리다. 또 서삼부는 병부(兵部; 지금은 인민대회당)․형부(刑部: 법률을 관장)․공부(工部)다. 그밖에도 치안을 관장하던 구문제독(九门提督)이 있었다. 당시에는 내성에만 아홉 개의 성문이 있었고 외성은 후에 더해졌으므로 구문제독이라 불렀다.

구궁(故宫) 우먼(午门)

황제는 종교와 분리될 수 없었다. 황제는 교주(敎主)였고, 백성들은 종교를 믿었으므로 더욱 황제를 믿었다. 그러므로 황제는 제단을 설치해야 했다. 예를 들면 톈탄(天坛)이 있는데 여기서 천(天)은 황제의 부친이란 뜻이고 디탄(地坛)의 지(地)는 황제의 모친, 르탄(日坛)의 일(日)은 황제의 형, 웨탄(月坛)의 월(月)은 황제의 누님이란 의미다. 또 식량을 구하던 셴눙탄(先农坛)이 있었고, 의복을 구하던 찬탄(蚕坛)이라는 제단이 있었다. 그밖에 바람의 묘(庙), 번개의 묘, 비의 묘가 있었다.

톈탄(天坛)의 치녠뎬(祁年殿)

내성은 황제가 먹고, 자고, 일을 처리하던 곳일 뿐 아니라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다. 내성에 세워진 제단도 있었으나 톈탄과 셴눙탄은 남쪽 교외에 있었다. 황제가 셴눙탄에서 제사를 지낼 때에는 친히 밭을 갈아야 했다.

명 황제의 능묘는 난징의 황릉 외에도 베이징에 13개의 능이 있다. 현재는 12개 능의 묘실(墓室)이 남아 있는데 그 소재는 알 수가 없다. 만일 명 성조 주두이의 묘인 장릉(长陵)의 묘실을 발굴해 낼 수 있다면 매우 대단한 일일 것이다. 현재 개굴해 낸 것으로는 정릉(定陵)이 있다. 장릉 안에는 링언뎬(裬恩殿)이 있는데, 그 가운데 기둥은 두 사람이 에워쌀 만큼 거대하며 그 목재는 쓰촨(四川)과 윈난(云南)에서 가져온 것이다.

십삼릉 외에 명 황제의 능묘로는 베이징의 서쪽 교외 워포쓰(卧佛寺) 부근의 훙산(洪山) 입구에 있는 경제릉(景帝陵)이 있다. 경제릉만이 이렇게 외따로 떨어져 있게 된 것은 형제간의 불화 때문이다. 명 영종(英宗, 정통 제)이 몽골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포로가 되자 이때 조정의 태학사 위쳰(于谦)은 영종의 동생인 경제(경태 제)를 옹립하고 계속 몽골과 전쟁을 벌였다(토목의 변). 그 뒤 몽골이 수세에 몰려 영종을 풀어주자 조정에 돌아온 영종은 일개 왕으로서 왕궁에 머물게 되었다. 몇 년 후 그는 태감(太监)을 통해 하룻밤 사이에 경제를 전복시키고 자신이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동생인 경제는 허리를 베어 죽였다. 경제는 죽은 뒤 서쪽 교외에 묻혔다.

명대의 황실에서는 적지 않은 정원을 세웠으나 싼하이(三海)의 시위안(西苑)만이 남아 있다. 이곳은 황궁의 서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시위안이라 불렸던 것이다. 그 뒤 명 무종(武宗) 정덕(正德) 황제는 유희를 좋아해 동물원인 ‘바오팡(豹房)’을 세웠다. 그것은 지금의 바오팡후퉁(报房胡同)에 위치하고 있는데 ‘바오팡(报房)’은 본래 ‘바오팡(豹房)’에서 나온 말이다.

명대의 태감(太监)은 권력이 커서 황제를 대신하여 정령(政令)을 실행할 수 있었다. 가정(嘉靖) 제는 황제가 된 후 30여 년 간 조정에 들지 않고 정사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시위안에 거주하면서 수도(修道)에만 정진하고 대전(大殿)을 건조하여 장생불사를 빌었다. 이때 하이루이(海瑞)라는 대관(大官)이 상소를 올려 황제를 비판했다. 황제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으므로 태감이 멋대로 날뛰었다. 청대의 강희(康熙) 제는, 명의 멸망은 10만의 태감과 9천의 궁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 환관인 웨이중셴(魏忠贤)은 왕푸징(王府井) 북쪽의 둥창후퉁(东厂胡同)에 특무기관(特务机关)을 설치했다. 그는 본래 도박으로 돈을 잃고 처자식을 버린 뒤 입궁하여 명 희종(熹宗) 태감이 된 무뢰한(无赖汉)이었다. 희종이 공부는 하지 않고 정사에도 관심이 없자 웨이중셴은 황제를 꾀어 ‘광대와 기녀, 사냥’을 즐기게 했다. 게다가 희종의 유모와 결탁하여 황제의 특별한 신뢰를 얻은 그는 급기야 황제를 대신하여 ‘주비(朱批)’를 함으로써 조정을 조종했다. 당시 사람들은 웨이중셴을 ‘9,900세의 대감’이라고 칭했다. 그는 육부(六部)․내각(内阁) 그리고 각 지방의 총독(总督)․순무(巡抚)에 이르기까지 붕당을 만들고 ‘엄당(阉党)’이라 칭했다. ‘엄(阉)’은 내시, 곧 태감이라는 의미다. 둥창후퉁은 바로 웨이중셴 사당의 비밀 기관이었다.

왕푸징(王府井) 북쪽에는 또 명 희종의 유모 커(客)씨의 저택인 ‘나이쯔푸(奶子府)’가 있는데 원명(塬名)은 ‘나이쯔푸(迺玆府)’였다. 희종(熹宗)은 이 유모와 웨이중셴을 총애했으나, 유모는 웨이중셴과 결탁하여 온갖 나쁜 짓을 다 했다.

베이징 샹산 비윈쓰(碧云寺)의 금강보좌탑

명대의 태감은 큰 권력을 지닌 데다 돈도 많았으므로, 그들이 돈을 내 지은 사당이 매우 많았다. 사당이 세워지면 태감은 황제에게 제자(题字)를 청했는데, 그런 식으로 칙령으로 지은 것이라 칭하게 되면, 황제가 그들로 하여금 건조하게 한 것이 되어, 태감과 사당 모두 광채를 발하게 되는 것이다. 샹산(香山)의 비윈쓰(碧云寺)는 바로 웨이중셴이 지은 것이다. 희종이 죽은 후 숭정(崇祯) 황제가 즉위해 웨이중셴을 처단했다. 또한 시산(西山)의 바다추(八大处)는 여덟 개의 큰 절인데, 모두 태감들이 지은 것이다. 태감은 왜 사찰 짓기를 좋아했는가? 태감에게는 소생이 없었기 때문에 노후에 그곳에서 거주하기 위한 것이었다. 명대에 베이징에는 백성들이 거주하던 지역이 있었다. 대부분의 선비와 공부하는 사람들은 쉬안우먼(宣武门) 밖에 거주했는데, 그곳에는 과거에 참가하려고 각지에서 모여든 선비들이 거주하던 회관(会舘)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상인(商人)들은 충원먼(崇文门) 밖에 거주했다. 이른바 ‘화시(花市)’ ‘화시대가(花市大街)’는 면화 시장(棉花市)이고 부근에는 자기를 팔던 자기구(磁器口)가 있었는데, 말 그대로 자기를 팔던 곳이었다. 이들 지명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둥청(东城)이나 시청(西城)에 거주하던 백성들은 왕래할 때 황성을 돌아서 다니든가 또는 쳰먼(前门) 주변이나 허우먼(后门)을 지나 다녀야 했다. 동에서 서쪽으로 뻗친 길은 매우 멀고 교통도 불편했기 때문에 동서를 왕래하는 백성들은 보통 봇짐을 들고 다녀야 했다. 둥창안가(东长安街), 서 창안가, 톈안먼(天安门) 광장 일대는 통행이 금지되던 곳이었고 베이하이 공원 앞쪽의 대교(大桥)도 지나다닐 수 없었다.

류비쥐(六必居)

명대의 상점으로 ‘류비쥐(六必居)’가 남아 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현판은 옌쑹(严嵩)이 쓴 것이라고 한다. 또한 ‘사궈쥐(砂锅居)’도 있었는데 당시에는 상점을 거(居)라고 부른 듯하다.

명대의 유물로는 천문의(天文仪)가 있는데, 이것은 8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공격했을 때 독일인이 가지고 갔다가 돌려보내 왔다. 또 법화경(法华经)이 새겨져 있는 대종(大锺)이 있는 다중쓰(大锺寺)가 있다. 이 외에 우타쓰(五塔寺)․쉬안더루(宣德炉)와 징타이란(景泰蓝)은 모두 명대의 것이다. 징타이란은 명 경제 때 남겨진 것으로 경태는 경제(景帝)의 연호다.

징타이란(景泰蓝)

1966년 1월 28일, 구졔강 선생은 베이징의 연혁 가운데 청과 북양군벌(北洋军阀) 시기의 베이징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계속해서 베이징의 연혁을 이야기하고 청조 때의 베이징을 이야기했다.

명조는 청군에 의해 멸망했고 명의 숭정 제는 메이산(煤山)에서 목을 매 죽었다. 메이산은 지금의 징산공원(景山公园)으로 부근에 석탄이 많기 때문에 메이산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한 이유는 일단 베이징을 방어하다가 적에게 포위되어도 석탄을 땔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징산 공원에 있는 숭정제가 목을 맸다고 하는 곳

리쯔청(李自成)은 베이징에 들어온 뒤, 궁 안의 우잉뎬(武英殿)에서 대순황제(大顺皇帝)라 칭했다.

명대에 산하이관(山海关)을 방어하면서 청의 군대와 싸우던 대장(大将) 우싼구이(吴三桂)는 자신의 아름다운 첩 천위안위안(陈圆圆)을 위해 명조를 배반하고 청의 군사를 ‘빌려’ 베이징을 공격했다. 그러자 청은 명을 무너뜨리고 역시 베이징에 수도를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