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큰 도회지, 연경을 유람遊覽하다

조선의 동지사(冬至使)가 북경에 도착하면, 관소에 머무르는 기간은 약 40~50여 일입니다. 사행의 1차 목적인 ‘국가 외교업무 수행’외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견문, 즉 당시 세계관의 중심이었던 연경(북경)의 발전된 문화와 풍속을 경험하는 것은 ‘일생일대의 기회’를 실천하는 일이었습니다. 연경의 유람 공간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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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유람처(燕京城市圖各國圖, 제2도(부분), 국립중앙도서관)

견문의 최종 목적지 연경

사행단의 유람은 문헌과 전설, 관념 속의 명소와 명승을 직접 찾아가 보는 현장답사는 물론, 민간의 연희, 잡기, 풍속을 직접 경험하고 체험하는 생활 풍정 답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습니다.

조선 사신들의 주요 유람처는 황궁과 국자감, 태액지, 오룡정, 이화원 서산, 원명원, 사찰, 도관, 사당, 회관 등 주요 명승과 명소였습니다. 또한 중국의 문인들이 머무는 공간 역시 주요한 유람처로 생각했습니다. 중국의 문사들과 필담(筆談)이나 시회(詩會)에 직접 참여하여 교류하거나 문인들과의 연계를 모색하고 소개를 주고받는 등의 행위 또한 교유와 유람의 성격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엄격한 사절단 통제, 문금門禁

사신은 외교사절이라는 특수한 신분 때문에 명·청 조정의 엄격한 통제 아래 주로 관소에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문금(門禁) 제도는 외국의 사신들이 연경 시내를 마음대로 활보할 수 없도록 관리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국의 풍정과 정보가 외국인들에게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이유 때문입니다. 대체로 명대에는 사행의 관소 출입을 기간을 정해두고 제한적으로 용인하였습니다. 청 초기에도 특별한 경우 외엔 허용되지 않았다가 정세가 안정되고부터는 점차 느슨해졌습니다.

사행단의 삼사(三使)는 거동에 제한이 있어 직접적인 유람이 쉽지 않다 보니 역관이나 수행원들의 유람 소감을 전해 들으며 북경의 이모저모를 인식하기도 했습니다. 비교적 자유로웠던 자제군관(子弟軍官)들은 역관들과 함께 방물을 납부하는 행렬에 포함되어 자금성을 구경하거나 사행단의 식수(물)를 조달하기 위해 바깥출입을 하는 기회에 동행하기도 하는 등 까다로운 문금 절차를 피해 유람했습니다.

유람의 시작은 황제가 사는 곳 구경하기

연경유람에서 가장 기대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황제가 사는 곳을 구경하는 일’일 겁니다. 바로 자금성을 구경하는 일입니다.

1617년에 명에 사행한 이상길(李尙吉)은 『조천일기』에서 ‘환갑 넘어 명나라 황궁을 보고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났다’고 했습니다.

조회에 참여한 이른 새벽의 분주한 이모저모와 자금성 주변의 장대하고 화려한 중화의 문물에 짐짓 놀라는데, ‘과연 듣던 대로였다’는 의견을 피력합니다. 궁궐을 직접 보았으니 ‘우물 안 개구리’의 식견은 벗어났다며 자위하기도 합니다.

이상길의 자금성 구경은 공식 사절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조회에 참여할 수 없는 사행의 일원은 어떤 방식으로 황궁을 구경했을까요? 담헌 홍대용은 방물을 납부하기 위해 짐바리를 실은 마차의 인부들 행렬에 끼어 자금성을 유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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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과 북해공원의 백탑

숭정제 순국처에서 눈물 흘리다 발각된 사신들, 관소에 억류되기도.

자금성 북쪽의 매산(煤山), 즉 경산(景山)에는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崇禎帝)의 순절처(殉節處)가 2기의 비석과 함께 남아있습니다. 순국처를 둘러본 조선 사신들은 마지막 황제의 안타까운 죽음을 상기하면서 서리지회(黍離之懷 : 명이 멸망한 일을 애석해함)의 상념에 젖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조선 관리들의 관념은 청의 입관 초기에 두드러지기도 하는데요, 청초에 사행했던 이들 중에는 숭정제 순절처인 이곳에 들러 청의 관리들의 눈을 피해 곡(哭)을 하다가 적발되는 바람에 이후 사행단의 숙소에서 장기간 통제(억류)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청이 중원을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숭명배청의 의리를 눈치(?) 없게 드러낸 조선 사신들의 행동에 청 조정이 문금으로 대응했던 것입니다.

연경유람 1번지, 국자감國子監 거리

조선의 관료·지식인이라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공간이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답사 1번지’쯤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바로 국자감 거리(國子監街)입니다. 국자감은 태학(太學)이라고도 불렀습니다. 태학은 연경을 방문한 조선 지식인들에게는 ‘연경유람 1번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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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감 벽옹

연행록마다 국자감(태학), 공묘 방문은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연암 박지원도 『열하일기』에서 국자감의 규모와 제도, 현황을 소상하게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국자감에서 조선 사행이 유심히 봤던 것이 석경(石經)과 석고(石鼓)였습니다. 연원직지를 남긴 김경선(金景善)은 석고를 직접 본 후, “이번 관람의 가장 기이한 일이었다.”고 자평했고, 1855년에 진위진향사의 서장관으로 연경을 방문한 서경순(徐慶淳) 역시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에서 “오매불망 꿈에서 본 그 석경(石經)을 연경에서 직접 보았노라.”고 감격해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문헌으로 보았거나 관념적으로 인지했던 대상들을 직접 현장에서 확인한 경험들은 매우 신기한 체험이었고, 평생 잊지 못할 큰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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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묘 대성문 석고

국자감 거리 남쪽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순천부학(順天府學)과 문승상사(文丞相祠) 역시 빠지지 않고 들렀던 공간입니다. 문승상사는 남송 말기의 명재상이자 시인으로, 원(元) 쿠빌라이의 회유에 굴하지 않고 대항하다 순국한 문천상(文天祥)을 기리는 사당입니다. 연암은 ‘문승상사당기(文丞相祠堂記)’를 통해 사당을 참배한 후 소회를 남겼는데요, “(전략)나는 사당에 두 번 절하고 나오면서 한숨을 쉬고 탄식했다.“고 했습니다. 연암은 아마도 청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한 조선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당시 문천상이 보여준 기개와 절의를 추앙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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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승상(문천상)사당

국자감, 공묘, 순천부학, 문승상사는 모두 유학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조선 사신으로 참여한 관료·지식인들이 이 공간에서 다시금 유학자로서 본질인 충절의 가치를 되새김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계기로 삼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유학자인 자신들의 근본을 성찰하게 하고 자긍심을 확인시켜주는 공간이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겠습니다만, 조선 후기로 들어서면서 이러한 유학적 자긍심이 오히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적 흐름을 인식하는데 둔감했던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원림, 사찰 유람, 환술幻術도 경험

조선 사행단이 들러본 연경유람 공간은 이화원·원명원과 같은 황실 원림은 물론이며, 사묘와 누정 등 다양한 명소들이었습니다.

유리창 거리와 후통(골목)의 시정(市井)을 거닐다 만나는 기괴하고 신기한 잡기(雜技)와 환술(幻術)도 연경유람에서 뺄 수 없는 볼거리였습니다.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의 <幻戱記>에서 20여 종의 환술을 기록하였는데, 환희는 사행단이 가장 선호한 볼거리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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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양편-환술의 일종으로 무성영화 상영하듯 상자 안의 그림을 주인이 육성으로 해설한다.

사신들은 연경의 이모저모를 유람하고 견문을 넓혔습니다. 명소 유람을 통해 관념 속에 자리 잡은 실체를 목도하고 새로운 문화를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유리창의 방대한 서적, 서학과 선진문물로 표상되는 천주당·관상대를 통해 서구 문명과 조우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연행, 연행노정은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는 길이자 세계를 인식하는 창(窓)이며, ‘동아시아 문화로드’ 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