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희虞姬에 관하여2

사면초가(四面楚歌)로 궁지에 몰린 초패왕 항우는 군막 속에서 우희와 마지막 술잔을 나눈다. 서로 이별의 노래를 부른 후 우희는 항우에게 보검을 빌려달라고 한다. “폐하의 보검을 빌려주십시오. 신첩이 남자로 변장하여 폐하의 뒤를 바짝 따르겠나이다.” 우희는 보검을 받아들고 그 칼로 자결하여 항우에게 마지막 사랑을 바친다. 이 장면이 ‘패왕별희’의 정점이다.

영화 「패왕별희」에서는 우희로 분장한 뎨이(蝶衣: 장국영)가 마지막 장면에서 역시 패왕으로 분장한 샤오러우(小樓: 장풍의)의 칼을 빌려 무대 위에서 자결한다. 현실과 연극을 구별하지 못한 뎨이의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그러고 보면 영화 「패왕별희」에는 역사, 연극, 현실을 둘러싼 세 가지 죽음이 얽혀 있다. 첫째, 초한 쟁패 시기 우희의 죽음이다. 둘째, 우희로 분장한 경극 배우 뎨이의 죽음이다. 셋째, 현실 속 장국영의 죽음이다. 이 세 가지 죽음의 얽힘은 매우 다양한 의미망과 연관되어 있다. 이 짧은 글에서 다루지 못한다.

하지만 중국 정사 『사기』 「항우본기」에는 우희가 자결했다는 기록이 없다. 우희의 자결은 중국 민간에 전해오는 전설인데 이것이 각종 공연으로 예술화하면서 명나라 때 이르러 소설 텍스트로 정착된다. 그러나 각 텍스트마다 우희의 자결 장면이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지금 확인할 수 있는 우희 자결에 관한 첫 번째 텍스트는 『전한지(全漢志)』 중 ‘서한(西漢)’ 부분이다. 여기에는 우희가 항우의 보검을 빌려 자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보검으로 자결한다.

두 번째 텍스트는 『양한개국중흥지전(兩漢開國中興志傳)』이다. 이 텍스트에서는 우희가 항우의 뒤를 따르며 적진을 헤쳐 나가기 위해 보검을 빌려달라고 하지 않고, 그냥 “폐하의 보검을 제게 주십시오”라고만 한다. 전체 문맥으로 보면 이별의 정표 또는 선물로 보검을 달라는 뉘앙스로 읽힌다. 그 보검으로 우희는 자결한다.

세 번째 텍스트가 바로 ‘초한쟁패 이야기’의 대세를 점령한 『서한연의』(원본 초한지)다. 이 텍스트에서는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우희가 항우의 뒤를 따라 한나라 군사의 포위망을 탈출하기 위해 보검을 빌려 달라고 한 후 그 보검으로 자결한다. 이 판본은 우리나라로도 전해져서 17세기에 이미 언해본이 나왔으며, 해방 이후 대부분의 『초한지』도 이 『서한연의』를 윤색하거나 번안하여 “통일천하” 또는 “초한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따라서 우희의 자결 장면도 모두 『서한연의』(원본 초한지) 버전을 따랐다. 우희의 자결 장면만 보면 우리나라 『초한지』의 대부분이 『서한연의』(원본 초한지)의 아류 또는 번안임을 알 수 있다.

해방 이후 나온 우리나라 『초한지』 중에서 『서한연의』를 따르지 않은 판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문열의 『초한지』다. 이문열은 자신의 『초한지』 ‘우희 자결’ 장면에서 우희가 항우의 보검이 아니라 자신의 보검으로 자결한다고 묘사했다. 이문열은 『사기』와 『자치통감』에 근거하여 『초한지』를 완전히 새로 썼다고 했으므로 나름대로 내용의 독자성을 확보하기 위해 고심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전한지전』의 우희 자결 장면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심 끝에 묘사한 그 대목이 우연히 『전한지전』의 장면과 일치했으니 결국 역대 초한 쟁패 텍스트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소개한 것처럼 ‘우희 자결’ 장면은 정사인 『사기』에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자치통감』에서는 아예 초패왕 항우와 우희의 군막 속 이별 장면 모두를 삭제했다. 이치에 닿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이문열은 정사에 근거해서 『초한지』를 새로 썼다고 했으나 ‘우희 자결’ 장면을 넣었으므로 기존 『초한지』 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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