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의 진전
송대 도로의 발전은 두드러진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도시에서는 포장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강남의 도시에서 현저하게 나타났다. 돌이나 벽돌 또는 기와로 포장했던 것이다. 이것과 관련한 몇 개의 기록이 남아 있다.
카이펑(開封) 도로의 정비 상태는 꼭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바람이 불면 모래와 먼지가 일고, 비가 내리면 진창이 되는 것이 실제 모습이었던 듯하다. 이에 비해 강남의 도시에서는 포장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항저우(杭州), 쑤저우(蘇州), 졘캉부(建康府) 등 대도시에서의 포장에 대한 기록만 남아 있는 게 아니었다. 이를테면 쓰촨(四川)의 도시에서도 포장이 진행되어 청두(成都)나 메이저우(眉州)도 포장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메이저우는 석판으로 포장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루유(陸游)나 판청다(范成大)가 목격한 것으로, 아주 청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돌 다다미(石疊)가 깔린 거리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포장은 어떻게 행해졌을까? 청두에 관해서는 《송대촉문집존(宋代蜀文輯存)》에 판모(范謨)의 가로 포장 기록이 있다. 비용을 정부가 부담하고 공사를 완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요된 비용도 1천만 영(嬴)이었다고 한다. 완성된 뒤 가로의 시작과 끝 지점에 석주를 세웠는데, 이것이 14개의 가(街)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보아 대공사였을 것이다. 그리고 강남 일대는 어떨지 모르지만, [강남에 비해 재력이 열세였던] 중원에서 그런 예는 없었다면서 그 성공을 축하했다.
공사 상황은 다른 도시에도 기록이 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쑤저우의 지리챠오(吉利橋)에서 반랴오샹(版寮巷) 일대까지에서 행해졌던 포장이다. 여기서는 현지 사람들의 협력이 있어 공사가 완성된 듯한데, 돈과 바닥에 까는 벽돌(磚)과 그냥 벽돌(塼)까지 갹출해 협력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완성을 축하하고 마치 일본의 신사에 있는 기부한 사람들을 기록한 게시판 같이 생긴 비를 세웠기 때문이다.
이것을 검토하면,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서민의 이름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중국인의 이름은 대체로 사대부의 이름이고,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당당한 이름이 붙여져 있다. 하지만 여기에 나오는 이름은 다르다. 남자라면 왕쓰바랑(王四八郞), 마쓰랑(馬四郞), 장치랑(張七郞)이라는 이름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이런 이름들은] 다름 아닌 일본에서 말하는 다로(太郞), 지로(次郞), 사부로(三郞)와 같은 부류이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갹출금을 낸 사람들 가운데 여성의 존재가 확인된다는 것이다. 근대 이전의 중국은 여성의 지위가 특히 낮았던 사회였다. 하지만 어엿한 일가의 대표로서 돈을 내고 비문에 이름을 올린 것이었다.
물론 그 수는 적었지만,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에 무게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름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주쓰냥(朱四娘), 후이바메이(胡一八妹)와 같은 부류였다.
일반 시정 사람들이었던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던 것일까? 사회의 상층을 이루었던 사대부나 관료와 달리 전기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것은 어느 것 하나도 알 수 없지만, 그런 류의 사료를 꼼꼼히 읽어 나간다면, 보잘 것 없이 적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이제 시사하는 상황이다.
이름이 우아하지 않은 것은 당연히 계급이 탁월한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달리 말하자면, 문자의 문화가 확립되었던 중국에서 의미를 그 정도로 담아내지 않는 이름을 가진 이라면 그만큼 지성인에서 얼마간 떨어져 있는 출신이라는 추정이 가능한 것이다.
여성이라는 사실도 그 일단을 보여준다. 여성의 재혼이 어려웠다고 생각하기 쉬운 중국이었지만, 안외재혼(案外再婚)은 많았다. 그 의미는 근대 이전이 곧 여성이 철저하게 억압받았던 시대였다는 사실에 대해서 약간의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성이 많은 권리를 구가했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어도 그런 방식에 약간의 사고 수정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사대부 가운데는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웠다는 말이 가끔 나왔다. 그 가운데는 일가를 관리했던 여성도 있었던 듯하다.
가로 포장의 갹출금 명부에 여성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서민 가운데도 일가를 관장했던 여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귀중한 기록일 것이다.
그밖에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이름 위에 지저우(吉州), 라오저우(饒州), 쉬안저우(宣州) 등과 같이 다른 지방의 이름을 앞에 내세운 이도 있다. 그들은 다양한 곳으로부터 쑤저우에 와서 살고 있던 이들이었을까? 기껏해야 잔치 기부금의 일람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꼼꼼하게 살펴보면 서민들의 생활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들이 낸 돈이다. 가장 많이 낸 이는 전 20관이고, 가장 적게 낸 이가 전 1관이다. 앞서 소개한 왕안스(王安石)의 급료로 알 수 있듯이, 이것은 거금이었다. 지방의 현 지사였던 왕안스의 급료가 전 30관으로 이것으로 가족 10명을 부양했던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그들의 자금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다.
재료를 낸 사람도 있다. 바닥에 까는 벽돌(磚)이나 그냥 벽돌(塼)을 낸 이들 가운데 특히 많이 낸 이가 1만 편으로 주쓰냥(朱四娘)이라는 이였다. 그의 앞뒤에는 전 20관을 냈다는 이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아마도 같은 가치가 있는 것일 것이다. 단순한 등가 계산을 한다면, 바닥에 까는 벽돌(磚) 또는 벽돌(塼)은 1매가 2전이 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다른 곳에서는 전 5관과 1천 매가 맞먹었기에 여기서는 1매 5전이 된다. 따라서 단순히 1매에 얼마라는 계산은 가능하지 않지만, 그의 자금력만큼은 헤아려볼 수 있다.
다음으로 주목할 만한 것은 그들 거의 전부가 직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바꾸어 말하면 관리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직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최하급 서리로 과거시험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잡무를 처리하는 아전들이었다. 곧 갹출금을 낸 이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정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흥미로운 대목이다. 그 정도밖에 없는 비문이기에 추측하기 어렵지만, 직위가 없는 것, 상당한 금액의 갹출금을 내고 있는 것, 살고 있는 곳이 상업지에 가까운 듯한 것, 다른 곳에서 이주한 이가 있다는 것, 이런 것들이 추측의 미세한 사료가 된다.
여기에서 굳이 판단을 내린다면, 상인 또는 쑤저우 근교의 농촌에 거점을 두면서 도시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이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농촌에서 일하면서 때로는 작은 장사에 정성을 쏟아 마침내 돈을 모아 도시에 점포를 낸 이의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이주한 마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대담한 것일까?
이러한 주민의 협력을 바탕으로, 쑤저우 성내의 가로 포장은 완성되었다. 다만 이런 케이스는 드문 경우였을 것이다. 공공성이 강한 사업은 정부가 행하는 것이 올바른 방식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공사는 그 지역의 관리가 지휘하는 케이스가 많았다. 쑤저우의 경우에도 그 가운데에는 하급의 관리의 직위에 있는 사람도 들어 있어, 그들이 주창한 것에 따라 공사가 수행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작금의 일본에서도 보여지는 것이다. 작은 수리 공사나 토목 공사에 해당 지역의 유력자나 해당 지역에서 선출된 국회의원의 이름이 연루되어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
가로의 포장은 성내만이 아니었다.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것도 있었다. 일찍이 진의 시황제는 자신이 다니는 길을 포장했다고 한다. 송대에는 인척이 된 집안이 서로 왕래하기 편하게 도시 사이를 포장했다고 하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런 것들이 예외적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마르코 폴로가 보고 감탄했던 중국의 도시의 뛰어난 설비가 그 무렵부터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도시의 포장이 강남의 도시에서만 진행되었던 까닭은 부유한 생산물의 혜택을 입은 강남의 도시의 부강이 그 첫 번째 이유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경제 활동의 활발함도 이유로 들지 않으면 안 된다.
도로가 포장되었던 것은 결국 제대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가로는 여러 가지로 사용되었는데 때로는 형장으로도 사용되었다. 가혹한 형의 집행에 의해 출세했던 인물이 몇 개의 가로가 모여 있는 장소에 사형집행장을 표시하는 기둥이 세워지는 것을 보고 길을 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통행의 목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많이 사용한 길이었던 만큼 쉽게 몸살을 앓았다. 통행량이 많았던 데다 무거운 물자가 통행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도로가 포장되었던 것은 사람의 왕래가 많았으며, 도시에 활력이 넘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또 이것은 그 도시에 포장된 도로를 관리 유지할 만한 힘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가로가 집중된 곳, 이것이 도시였다. 이렇듯 가로는 도시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그렇다기보다는 가로는 온갖 의미를 채우고 있는 도시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도시의 문제는 곧 가로의 문제였던 것이다.
다리의 건설
다리도 똑같다. 성내에 많은 하천이 있으면 당연히 다리가 필요하다. 복작대고 사람의 교통이 격심했던 만큼 다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방지(地方志)에 지사였던 아무개가 다리를 만들었다는 등의 기술이 늘어갔던 것이다. 다리를 만드는 것은 그 구역의 발전을 인정하는 것뿐 아니라 발전을 유인하는 것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중요성을 인지하고 기록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리의 이름으로도 이것을 알 수 있다. 창건 연호를 다리에 붙인 것, 아무개 집안의 다리와 같이 그 일대의 유력자 또는 다리 건설에 공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 또는 일족의 이름이 붙어 있는 것 등등. 다리는 현세의 사람을 건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지역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다리가 생겨난 상황도 도시의 경관에 큰 의미를 갖는다. 마르코 폴로는 이러한 다리에 흥미를 가졌다. 그가 기록한 베이징 교외의 루거우챠오(蘆溝橋)는 유명하다. 그 자신이 쑤저우의 다리가 몇 개인가 헤아리기도 했지만, 더욱더 흥미를 끌었던 것이 베이징 교외의 루거우챠오였다. 그의 기록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서 유명해진 그 다리가 그 뒤 일본의 중국 침략에 의해서 어떤 운명을 겪었는지는 지금 새삼스럽게 말할 것까지도 없겠다.
루거우챠오는 원대의 다리였지만, 송대에도 아름다운 다리는 많았다. 아름다운 데다 뛰어난 구조를 가졌던 다리는 그 도시의 꽃이었다. 쑤저우에도 많은 다리가 있는데, 대부분이 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다리의 재료는 대부분 송대에 석조로 바뀌었다. 아름다움뿐 아니라 견고성도 중시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리가 갖고 있는 중요성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특히 아름답다고 호가 난 것이 카이펑(開封)의 메인 스트리트인 위졔(御街)에 있던 톈한저우챠오(天漢州橋)였다. 푸른 돌로 만들어진 조각이 아름다웠던 다리였다고 한다. 또 카이펑 교외로 7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는 훙챠오(虹橋)는 그 이름대로 무지개다리였는데, 이것은 그림으로도 남아 있다. 운하에 걸쳐 있는 다리는 대체로 아치형이었는데, 훙챠오의 이름은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카이펑 교외의 훙챠오는 특히 유명하다. 다만 카이펑의 훙챠오는 목조였다.
이렇듯 송대의 도시는 당당한 경관을 자랑했다. 높은 성벽, 둘러싸고 있는 운하, 포장한 곳이 있을 정도로 잘 관리된 도로, 관청이나 주루 등과 같은 큰 건물들, 서민의 집은 반드시 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것들이 이어진 거리 등, 이것이 송대의 도시 경관이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현대의 도시와도 큰 차이가 없는 경관이 전개되었다고 생각하는 게 좋지 않을까? 강남의 여러 도시에 관해서 보자면, 오늘날의 쑤저우와 항저우, 닝보(寧波)에도 비슷한 경관이 있었다. 검은 지붕, 흰 벽, 운하에 그림자를 떨구는 녹색의 버드나무. 오늘날 [예전에 비해] 적어졌지만, 성내에 남아 있는 운하에는 여전히 배가 다니고 있다. 그런 풍경은 절반 정도는 강남의 도시에 공통되는 풍경이었을 것이다. 강남을 지배했던 풍부한 물이 그 풍경의 근원이 되었던 것이다.
상수도의 정비
길 위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도시 경관으로 상수도와 하수도가 있다.
도시에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지는 만성적인 물 공급 불안정으로 골머리를 앓는 도시 거주민이 아니더라도, 관심을 가지는 것일 것이다. 장쩌돤(張擇端)이 그린 《청명상하도》에는 우물이 그려져 있어 카이펑 거리의 사람들의 물 보급으로 우물이 이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물이 안 좋았던 카이펑에서 우물이 필수적이긴 했어도 이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양저우(揚州)를 여행할 때, 나는 거리 여기저기서 돌로 만든 작은 우물을 보았다. 집 옆에도 있고, 광장에도 있었다. 여기가 물을 퍼 올리는 장소였던 것이다. 우물 입구에는 오랫동안 두레박이 오르내려지면서 생겼다고 생각되는 깊은 상처가 종으로 아로새겨져 있어 지나간 세월을 느끼게 했다. 우물 주변에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많은 여인들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던 것일까?
남송의 항저우(杭州)에는 특히 많은 인구가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로 인한 문제가 심각했다. 항저우 인근에 있는 시후(西湖)의 물을 끌어들여 우물을 만들었고, 이것을 상수도로 삼았던 듯하다. 우물이라고 했지만, 우리가 생각하듯이 지면에 구멍을 파고, 물을 퍼 올리는 것은 아니었고, 지하에 상수도 관을 빙 두르고 이것으로 물을 흘려보냈다. 항저우의 우물은 지하에 흐르는 물을 퍼올리기 위해 뚫어놓은 구멍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관리가 힘들었던 듯하다. 때로는 유력자가 수지(水池)를 독점하고, 여기에서 오물을 버리거나 말을 씻겼기 때문에 식수가 오염되어 역병이 발생한 사건도 일어났다. 송대 무렵까지의 항저우에서는 지형 관계로 인해 염분이 지하수에 섞여 있었기 때문에, 이런 사정은 특히 심각했다. 마찬가지로 지형의 변화에 의해 원대 이래로는 지하수의 수질에 변화가 일어나 시후에서 물을 끌어왔다고 하는 문제는 점차 해결되었던 듯하다.
우물은 도시가 발달함에 따라 차츰 증가했던 듯하지만, 흥미를 끄는 것은 그런 공사에 승려가 동원되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일본에서도 여행을 하던 승려의 손에 의해 굴착 또는 개량되었다고 하는 수원지가 많이 있다. 그런 류의 것이었겠지만, 당시 사회에서 승려가 기술의 계승자가 되고, 보급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보는 것은 진정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