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의원蘇七塊
소 의원은 본명이 소금산蘇金傘이었다. 민국(民國. 1911년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이듬해 성립된 중화민국을 뜻한다) 초년, 소백루小白樓 일대에 의원을 열어 의술을 행했는데 접골과 추나는 천진天津에서 으뜸이었다. 서양인들조차 경마를 하다가 팔다리가 부러지면 그를 찾아올 정도였다.
그는 키가 훤칠하고 긴 두루마기를 입었으며 두 손은 야위었지만 힘이 있었다. 나이는 쉰 살 정도 돼 보였으며 입술이 불그스레하고 치아는 하얬다. 그리고 커다란 눈에서는 형형한 빛이 흘렀고 턱에 난 염소수염은 반들반들 윤이 났다. 단전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가까이서 들으나 멀리서 들으나 똑같이 우렁차서 당시 경극을 배웠다면 금소산(金少山[1890~1948], 청나라 말부터 민국 초까지 북경 지역에서 활동한 경극 배우로 《패왕별희》의 항우 역할로 유명했다)과 비겨도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환자를 치료할 때 소 의원은 손은 깔끔하고 날렵했다. 근육이 상했거나 뼈를 다친 환자들이 찾아오면 손가락으로 살짝 만져보기만 해도 피부 안쪽에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 알아냈다. 그의 두 손이 경주하는 한 쌍의 백조마냥 환자의 몸을 위아래로 번개처럼 훑으면 우드득, 우드득, 소리가 나면서 환자가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부러진 뼈가 이어졌다. 그러고서 고약을 바른 뒤 석고판으로 고정하면 환자는 집에 돌아가 알아서 치유되었다. 만약 환자가 다시 찾아온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그의 은혜에 감사해 큰절을 하고 액자를 선물하기 위해서였다.
능력 있는 사람은 괴팍한 면이 있기 마련이다. 소 의원에게는 괴팍한 ‘원칙’이 있었는데, 그것은 무릇 자신을 찾아오는 환자는 부자든 가난뱅이든, 친척이든 이웃이든 무조건 먼저 은전 7원을 진찰대 위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안 그러면 절대 진료를 해주지 않았다. 이게 무슨 원칙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소 의원이 돈밖에 모르고 의술도 7원어치밖에 안 되다고 욕하면서 그에게 ‘소 칠원’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다들 그를 앞에서는 소 의원이라 부르고 뒤에서는 소 칠원이라고 부르는 바람에 아무도 그의 본명이 소금산이라는 것을 몰랐다.
소 의원은 마작을 좋아했다. 어느 한가한 날, 마작 친구 둘이 놀러 왔는데 판을 벌이려면 한 명이 부족했다. 그들은 거리 북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치과의사 화 의원을 불렀다. 그들이 한창 흥이 올라 마작을 즐기고 있을 때, 갑자기 인력거꾼 장씨가 뛰어 들어왔다. 문에 기댄 채 오른손으로 왼쪽 팔꿈치를 받쳐 든 그는, 머리에서 땀이 비 오듯 흐르고 목 주위의 적삼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팔이 부러져 많이 아픈 모양이었다. 하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인력거꾼이 은전 7원이 어디 있겠는가? 일단 치료만 해주면 나중에 꼭 갚겠다고 장씨가 끙끙거리며 사정을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소 의원은 듣는 둥 마는 둥 계속 패를 잡고 들여다보며 뭘 내놓을까만 고민하고 있었다. 흥분하거나 염려하거나 놀라거나 놀란 척하면서 마작에만 열중했다. 보다 못한 친구가 손가락으로 문밖을 가리켰지만 소의원은 마작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소칠원’이라는 별명이 전혀 무색하지 않았다.
치과의사 화 의원은 사람이 좋기로 유명했다. 그는 소변을 보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뒷마당으로 나가 뒷문을 통해 돌아서 앞길로 간 뒤, 멀찍이서 조용히 장씨를 불러 호주머니에 있던 은전 7원을 꺼내 손에 쥐어 주었다. 그러고는 인사도 받지 않고 돌아서서 왔던 길로 다시 방에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 마작을 했다.
잠시 후 장씨가 비척거리며 들어오더니 진찰대 위에 은전 7원을 쭉 펼쳐놓았다. 이번에는 그가 초인종을 누르기도 전에 소 의원이 다가와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그의 팔을 진찰대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뼈를 몇 번 주무르고 좌우로 밀고 당기다가 다시 아래에서 받치고 위에서 내리눌렀다. 장씨가 목을 움츠리고 어깨를 늘어뜨린 상태에서 눈을 꼭 감고 이를 악문 채 다가올 아픔을 기다리는데 소 의원이 말했다.
“다 맞췄네.”
그러고서 고약을 바르고 석고판으로 고정한 뒤, 혈액순환을 돕고 통증을 완화시키는 가루약을 몇 봉지를 주었다. 장씨가 약을 살 돈은 없다고 말하자 소 의원은 “이건 내가 그냥 주는 걸세.”라고 말하고는 다시 마작판으로 돌아갔다.
오늘 마작은 각기 승패를 주고받으면서 계속 판이 이어지다가 불을 켤 시간이 되고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서야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문을 나설 때 소 의원이 할 얘기가 있다면서 야윈 손으로 화 의원을 붙잡았다. 다른 두 친구가 나간 뒤, 소 의원은 탁자 위의 돈더미에서 은전 7원을 집어 화 의원의 손에 쥐어 주었다. 화 의원이 당황해하자 소 의원이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소이다. 나를 심보 고약한 사람이라 생각하지 말아주시오. 나는 내가 세운 원칙을 깨뜨릴 수 없는 것뿐이니까!”
화의원은 그 말을 듣고 집에 돌아가 사흘 밤낮을 생각했지만 소 의원의 그 말에 담긴 깊은 뜻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소 의원의 이번 일과 그의 원칙 그리고 그의 사람됨됨이에 대해서는 마음속 깊이 탄복했다.
苏七块
苏大夫本名苏金伞,民国初年在小白楼一带,开所行医,正骨拿环,天津卫挂头牌。连洋人赛马 ,折胳膊断腿,也来求他。
他人高袍长,手瘦有劲,五十开外,红唇皓齿,眸子赛灯,下巴颏儿一绺山羊须,浸了油赛的乌黑锃亮。张口说话,声音打胸腔出来,带着丹田气,远近一样响,要是当年入班学戏,保准是金少山的冤家对头。他手下动作更是“干净麻利快”,逢到有人伤筋断骨找他来,他呢?手指一触,隔皮截肉,里头怎么回事,立时心明眼亮。忽然双手赛一对白鸟,上下翻飞,疾如闪电,只听“咔嚓咔嚓”,不等病人觉疼,断骨头就接上了。贴块膏药,上了夹板,病人回去自好。倘若再来,一准是鞠大躬谢大恩送大匾来了。
人有了能耐,脾气准格色。苏大夫有个格色的规矩,凡来瞧病,无论贫富亲疏,必得先拿七块银元码在台子上,他才肯瞧病,否则决不搭理。这叫嘛规矩?他就这规矩!人家骂他认钱不认人,能耐就值七块,因故得个挨贬的绰号叫做:苏七块。当面称他苏大夫,背后叫他苏七块,谁也不知他的大名苏金伞了。
苏大夫好打牌,一日闲着,两位牌友来玩,三缺一,便把街北不远的牙医华大夫请来,凑上一桌。玩得正来神儿,忽然三轮车伕张四闯进来,往门上一靠,右手托着左胳膊肘,脑袋瓜淌汗,脖子周围的小褂湿了一圈,显然摔坏胳膊,疼得够劲。可三轮车伕都是赚一天吃一天,哪拿得出七块银元?他说先欠着苏大夫,过后准还,说话时还哼哟哼哟叫疼。谁料苏大夫听赛没听,照样摸牌看牌算牌打牌,或喜或忧或惊或装作不惊,脑子全在牌桌上。一位牌友看不过去,使手指指门外,苏大夫眼睛仍不离牌。“苏七块”这绰号就表现得斩钉截铁了。
牙医华大夫出名的心善,他推说去撒尿,离开牌桌走到后院,钻出后门,绕到前街,远远把靠在门边的张四悄悄招呼过来,打怀里摸出七块银元给了他。不等张四感激,转身打原道返回,进屋坐回牌桌,若无其事地接着打牌。
过一会儿,张四歪歪扭扭走进屋,把七块银元“哗”地往台子上一码,这下比按铃还快,苏大夫已然站在张四面前,挽起袖子,把张四的胳膊放在台子上,捏几下骨头,跟手左拉右推,下顶上压。张四抽肩缩颈闭眼龇牙,预备重重挨几下,苏大夫却说:“接上了。”当下便涂上药膏,夹上夹板,还给张四几包皮活血止疼口服的药面子。张四说他再没钱付药款,苏大夫只说了句:“这药我送了。”便回到牌桌旁。
今儿的牌各有输赢,更是没完没了,直到点灯时分,肚子空得直叫,大家才散。临出门时,苏大夫伸出瘦手,拦住华大夫,留他有事。待那二位牌友走后,他打自己座位前那堆银元里取出七块,往华大夫手心一放。在华大夫惊愕中说道:
“有句话,还得跟您说。您别以为我这人心地不善,只是我立的这规矩不能改!”
华大夫把这话带回去,琢磨了三天三夜,到底也没琢磨透苏大夫这话里的深意。但他打心眼儿里钦佩苏大夫这事这理这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