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신들의 최종목적지는 연경(燕京)이었습니다. 바로 북경(北京)입니다. 북경은 예나 지금이나 정치·경제·사회·학술·문화예술의 중심지이자 국제외교의 목적지였습니다. 연행사의 활동은 외교적 현안을 처리하고 그 답을 받아 가는 것이 1차 목적이었지만, 선진문물의 체험과 수용,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흐름을 파악하고자 했던 측면도 있었습니다. 사신의 활동 공간은 외교문서의 전달과 하례 참석 등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공간과 서양문물 접촉, 조•청 문인들의 학술교류 양상과 북경의 명소유람 동선에 따라 사적 활동 공간으로 구분됩니다. 이번 호에서는 공적 외교업무를 수행해온 옥하관을 중심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사행단의 공식 숙소, 옥하관에 들다.
북경의 ‘조선관’을 대체로 회동관(會同館) 혹은 사역회동관(四譯會同館)이라고 했지만, ‘옥하관(玉河館)’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현재 정의로 일대에 복개된 옥하중교(玉河中橋)를 중심으로 동서 방향 골목을 동교민항(東郊民港)이라고 부릅니다. 옥하관은 동교민항의 옥하중교 서쪽에 위치하는 최고인민법원(最高人民法院) 자리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삼사(三使)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행들이 옥하관에 머물렀지만, 왕자(王子)가 정사(正使)로 참여하는 경우 별관(別館)에 머무르기도 했습니다. 인평대군 이요(李㴭, 1622-1658)의 경우를 살펴보면, 청 조정은 1645년(인조23) 사은겸진하사의 정사로 참여한 인평대군을 옥하관이 아닌 별관으로 배정하여 예우했고, 부사·서장관 등은 관례대로 옥하관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명•청대의 조선 사절단 숙소로 활용되던 옥하관은 1693년 러시아인들에 의해 관소를 선점당하면서 점차 인근의 사찰 등 새로운 공간을 숙소로 이용하게 됩니다. 특히 옥하남교에 있던 남관, 즉 옥하교관은 사행단의 숙소로 많이 활용되었는데, 사행이 끝나는 1895년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공식 숙소로 이용되었습니다. 이곳은 오늘날의 북경시공안국 일대로 파악됩니다.
1780년 연행했던 연암 박지원 일행은 서관(西館)에 머물렀습니다. 서관의 위치는 자금성 서남쪽 서단(西單)에 있었습니다. 연암의 기록에 따르면, “‘첨운(瞻雲)’이라는 편액이 걸린 서단패루(西單牌樓) 서쪽 골목의 백묘(白廟) 왼쪽”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현재의 민족문화궁(民族文化宮) 뒤쪽 경기호동(京畿胡同) 일대입니다. 서단사거리의 ‘첨운패루’는 인근 공원에 새롭게 조성하여 세워져 있습니다. 240년 전 연암이 올려다보았을 ‘첨운’의 두 글자가 선명합니다. 옛 흔적이 사라진 역사의 현장에서 어쩌면 E.H.카의 말처럼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매개체는 바로 이 콘크리트 ‘첨운패루’가 아닐까 합니다.
감시와 통제의 옥하관 생활
조선 사신들의 공식 외교업무는 사행단의 숙소인 옥하관(玉河館)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청은 조선 사행의 입관(入關) 전부터 사신들이 자국 인사들과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는 등 정보의 유출을 경계하였습니다. 외국 사신들은 청 조정의 통제에 따라야 했으므로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였습니다. 특히 삼사의 경우 공식적인 행사를 위한 외출을 제외하고는 옥하관을 벗어나기 어려웠고, 청 조정의 승낙하에 외출하였습니다. 정기 사절단인 동지사의 경우 대략 음력 12월 22일 전후에 입경하면, 다음해 2월 초순까지 약 40~50일 정도 머물렀습니다.
조선 사신들의 상대는 청 ‘예부“
조선 사신이 청 조정과 직접적으로 상대했던 관서는 예부(禮部)입니다. 오늘날 외교부인 셈입니다. 사행은 외교문서의 전달 및 답신 수령을 위해 예부와 긴밀하게 협조해야 했고, 예단의 납부를 위해서 황궁 안 체인각(體仁閣)을 부지런히 오갔습니다. 황제가 주관하는 조회를 비롯한 사은(謝恩) 의례 참석을 위해서는 예부가 주관하는 홍로시 습례정에서 예법을 연습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황제의 원명원(圓明園) 행차, 천단(天壇) 참배 때는 자금성에 나가서 전송과 영접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전통시대 국제관계는 조공과 책봉을 외교의 큰 틀로 삼았던 관계로 왕위의 계승에 책봉에 대한 답을 받아내는 일은 가장 중요한 외교 사안이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숱한 사신들이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이 밖에도 관소 거주 및 출입에 관한 협조나 관소에서 열리는 무역(회동관 무역), 사신들을 위해 베푸는 하마연(下馬宴)과 상마연(上馬宴) 역시 모두 공적 활동에 속하는데, 이들을 관리하는 담당 관청이 바로 예부였습니다. 그러나 근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예부와 홍로시가 있던 공간은 천안문광장과 중국국가박물관으로 변하였습니다. 혹여 독자 여러분께서 천안문광장에 선다면, 근현대사의 아픔이 서려 있는 광장의 역사와 더불어 강대국의 위력 앞에 조선의 입장을 대변하고자 노심초사했던 조선 사신들의 행적을 상기하는 시간도 함께 가져보시기를 바랍니다.
목숨 걸고 ‘종계변무(宗系辨誣)’를 해결하라.
종계변무(宗系辨誣)는 조선 개국 초부터 선조 때까지 약 200년간 중국 명(明)나라 실록에 조선 왕조의 종계(宗系:왕조의 계통)가 잘못 기록되어 있는 것을 고치도록 주청(奏請)한 일로 조선전기 가장 중요한 외교 현안 중 하나였습니다.
명(明)의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는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재되어 있어 여러 차례 고쳐주기를 요구했습니다. 종계변무는 왕조의 계통을 바로잡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고, 명은 이를 빌미로 조선을 얕잡아 보는 등 외교적인 문제가 많았기에 종계오기(宗系誤記)를 수정하고자 사행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조선에서는 그간 수 차례의 주청사를 보내오다 1589년에 성절사 윤근수 일행이 <大明會典> 전부를 받아 귀국함으로써 200년간 골칫거리였던 해묵은 과제를 해결했습니다. 사행단의 임무가 가히 집요하고도 지난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종계변무 해결 과정에 통역을 담당하는 역관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는데요, 역관 홍순언(洪純彦, 1530~1598)의 일화는 『통문관지』나 『열하일기』 등에 잘 드러납니다. 홍순언은 통주의 유곽에서 만난 여인을 구명해준 인연으로 후일 종계변무를 해결하는데 공을 세웠습니다. 종계변무 공신록인 광국공신녹권(光國功臣錄券)에 기록된 공신 19명 중 역관은 홍순언 단 한 명 뿐이었습니다.
사행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 커
사행이 북경 회동관(옥하관)에 머무르는 동안 사행무역(使行貿易)이 이루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조공 책봉 체제에서 사행무역을 통한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는 것은 조선과 같이 약소국의 경우에는 더욱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양측의 교역은 예부(禮部)의 감시하에 이루어졌으며, 정해진 날에 정해진 물품만을 매매할 수 있었으며, 조선 상인들이 청상(淸商)과 사사롭게 교역하는 것을 엄금하였습니다. 이러한 사행무역은 주로 사행의 공식 외교업무가 마무리될 즈음이나, 귀국 일정이 잡히면 관소에서 무역 활동이 진행되는데요, 무역이 이루어지는 회동관은 상인들 간의 교역 장소를 넘어서서 조•청간 문화경제 교류의 현장이자 국제정세의 동향을 파악하는 중요한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다음 회에서는 조선의 지식인들이 빠지지 않고 드나들었던 당대 문화의 중심지 유리창(琉璃廠) 일대와 서구의 과학기술을 경험했던 천주당(天主堂)을 중심으로 한중 인문교류 공간을 소개하겠습니다.
<함께 보기>
하마연(下馬宴)과 상마연(上馬宴) : 예부가 주관하는 연회로, 조선에서 북경에 도착하면 위로하는 하마연(말에서 내리는 의미)과 조선으로 돌아갈 때 상마연(말을 다시 타는 의미)을 베풀었다. 당대의 사정에 따라 생략되기도 했으며, 사행단의 북경 활동이 시작되고 끝나는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