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박曾樸의 『얼해화孽海花』 : ‘동아병부東亞病夫’의 꿈과 좌절 【부록】 『얼해화』 제9회

장거리 여행길에 오르자 의사가 최면술 시범을 보이고,

이웃한 아리따운 동행에게 애첩이 서양말을 배우네.

(遣長途醫生試電術 憐香伴愛妾學洋文)

증박曾樸

이야기인 즉, 여러 친구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부채운傅彩雲의 혼례 치장이 예법에서 벗어났다며 수근댔다. 이 때 갑자기 사람들 속에서 부인이 성장을 하고 걸어나오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여러 어르신들, 오늘 저런 거동과 차림새를 보시고 분명 놀라셨을 겁니다. 그렇지만 한 말씀만 올리겠습니다. 이번에 나리께서 해외로 파견 나가시는데 원래는 제가 마땅히 따라 가야 하겠지만, 몸이 약하여 갈 수가 없답니다. 그래서 오늘 시집오는 새 사람이 바로 저의 직분을 대신하게 될 겁니다. 공사의 부인에게는 일국의 이목이 집중되는 바 무엇 하나 적당히 할 수 없는지라, 제가 기꺼이 임시변통으로 고명보복誥命補服*을 잠시 그녀에게 빌려주었지요. 이후에 명을 받들어 조정으로 돌아올 때에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돌려받을 것입니다. 여러 어르신들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말을 함에 그 소리가 낭랑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녀를 칭찬했다. 이에 악사들을 정렬시키고 조상에 대한 제사를 준비했다. 김문청金雯靑과 부인이 앞에 서고 부채운은 뒤에 섰다. 예를 마치고서 채운은 문청 부부에게 절을 했고 이어서 여러 사람들이 두 사람을 신방에 들여보냈다. 문청은 이번 혼인에 마치 마음속에 꽃이 활짝 피어 꽃술이 이리저리 흩날리듯 기뻤으며, 부인에게 감격해 마지않았다. 그는 신방에서 나와 손님들을 접대했다. 반승지潘勝之․패효정貝效亭․사산지謝山芝 등 친한 이들은 벌주 마시기 할권豁拳 놀이**와 당승唐僧 찾기 놀이***를 하며, 하늘과 땅이 뒤집힐 정도로 떠들썩하게 술을 마셨다. 기녀들을 부르고자 했지만 문청이 지금 천자의 명을 받들어 외교사절로서의 임무를 맡고 있다는 점이 저어되어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문청은 흥겨운 술자리를 함께 하고서 밤이 아주 깊어서야 자리를 파하고 돌아갔다. 문청은 들어와서 의례 그래야 하는 것처럼 짐짓 부인의 방으로 갔는데 부인은 진작부터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문청은 그제야 신방으로 가서 채운과 회포를 풀었다. 오래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니 깊은 정이 무르익었음은 말할 필요 없겠다.

달콤한 시간은 쉬이 흘러 휴가 기일이 다 차 부인과 작별을 하고서 채운을 데리고 소주蘇州를 떠나 곧장 상해로 갔다. 그 당시 소주와 상해를 잇는 뱃길은 아직 제대로 개통되어 있지 않아, 지금처럼 ‘대동大同’이니 ‘대생창戴生昌’이니 하는 허다한 회사들의 여객선을 타고 아침에 갔다가 저녁 때 돌아올 수 있는 신속함과 편리함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문청은 흠차대신欽差大臣****인지라 상해도대上海道臺*****가 특별히 관아의 기선 한 척을 보내 그를 모셨는데 하룻밤을 움직여 다음날 새벽에 부두에 도착했다. 문청은 우선 가솔들이 뭍에 오르도록 조처하고 자신은 흠차대신을 마중하러 나온 도대며 현령 등 관리들을 접견했다. 임시 공관에서 또한 서울에서 온 서찰 몇 통을 전해 와 문청은 일일이 검토했는데, 친구들의 의례적인 축하 편지도 있었고 높으신 분들의 격려 편지도 있었다. 또한 여석농黎石農․이순객李純客․원상추袁尙秋 등 명사들이 보내 온 송별의 시와 사詞도 있었는데 청아한 말들과 아름다운 구절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훌륭했다. 마지막 한 통을 펼쳐보니 다름 아닌 장소연莊小燕의 것이었다. 문청은 서둘러 봉투를 뜯으며 속으로 이 사람의 외교 수완을 배우기를 청해야겠는데 하고 생각했다. ― 문청이 어째서 장소연의 이름을 대하면서 이처럼 정중했던 것이라고 생각하시는가? 이 장소연이란 이는 책에는 아직 출현하지 않았지만 부득불 한번 자세히 소개해야겠다. 소연小燕은 광동 사람으로 관청의 서리 출신이지만 책을 굉장히 많이 읽었으며 글의 기세가 삼협三峽을 흐르는 장강長江의 물처럼 도도했다. 또한 서학에 깊이 통달하여 여러 차례 외국에 나갔던 적이 있고 지금은 외국과의 교섭에서의 성과로 인해 천거되어 시랑侍郞의 자리에 올랐다. 그 명성이 자자했으며 조만 간에 미국․일본․필리핀에 파견될 것이라고 했다. 문청이 당장 뜯어 펼쳐보니 네 수의 칠언율시였다.

(시 생략)

문청은 다 읽고 나서 책상을 치며 감탄했다:

“과연 백의명사白衣名士로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찌 낯을 들고!”

그리고서는 잘 집어넣어 집사에게 건네주었고 한편으로는 시종을 불러 뭍에 오르자고 했다. 쌍두마차를 타고서 가는 길에 각 관리들에게 인사를 하고 또한 독일과 러시아 영사 등을 방문했다. 임시 공관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오시午時가 되었을 때인데, 진작부터 그의 참찬參贊과 통역원, 수행원 등이 모여 그를 뵙고자 했다. 수본手本******이 전해지자 얼마 있지 않아 집사가 나와서 말을 전했다:

“광조봉匡朝鳳 대인과 대백효戴伯孝 어르신만 들어오시랍니다. 면담할 공무가 있다고 하십니다. 나머지 어르신들은 모두 내일 보자십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서는 흩어졌다. 광차방匡次芳과 대백효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는데, 이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집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에 이르니 문청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문청은 이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는 서둘러 인사를 하며 말했다:

“차형次兄, 백형伯兄 요 며칠 고생이 많았습니다! 어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세요. 우리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차방과 백효가 앞으로 나서며 보니 아복阿福 등 예쁘장한 시동 몇 명이 나서서 그들에게 옷을 갈아 입혀 주었다. 차방은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

“이 모두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 고생이랄 게 뭐 있겠습니까?”

말을 나누며 주객이 모두 앉았다. 문청은 여객선에 관한 일부터 물어보았다. 차방이 말했다:

“막 선배님께 말씀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이번에 외국으로 나가시게 되면 우선 독일로 갔다가 다시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의 나라로 가시게 되니까 당연히 독일 회사의 배를 타시는 것이 편하시겠지요. 십 수 일 전에 독일 영사가 알려 왔는데, 이번 달 이십이 일에 독일 회사의 융극삼蕯克森이라는 이름의 배가 출항한답니다. 이 배가 아주 크다는군요. 선장의 이름은 질극質克인데 소생이 이미 연락을 취해 놓았습니다.”

백효가 말했다:

“소인과 광 참찬이 상의하여 어르신을 위해 마련한 것은 일등 선실입니다. 광 참찬과 황 통역․탑 통역 등은 이등 선실에 타고 그 밖의 수행원과 학생들은 모두 삼등 선실입니다.”

문청이 말했다:

“내가 듣기로 외국 회사의 배는 매우 널찍해서 이등 선실이라도 우리 윤선초상국輪船招商局******* 배의 큰 식당보다도 훨씬 넓다고 하던데! 사실 나라고 꼭 일등 선실에 탈 필요가 있겠소!”

차방이 말했다:

“사신은 한 나라의 대표로 그 거동은 나라의 체통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전에 독일에 파견되었던 유석홍劉錫洪과 이풍보李豊寶, 러시아에 파견되었던 숭후崇厚와 증계담曾繼湛, 독일․이탈리아․네덜란드․오스트리아에 파견되었던 허경징許鏡澄, 저희들의 전임인 여췌방呂萃芳 등은 소생이 서류를 조사해 본 결과 모두 일등 선실을 탔습니다. 작은 비용을 아끼느라 큰 체면을 손상시킬 수는 없지요.”

차방이 말하고 있는데 대 회계가 문청의 귓가로 다가와서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수행원 등이 타는 것은 삼등 선실이지만 모두 이등 선실로 보고를 했는데, 실제 경비와 차액을 계산해 보면 대인께서 편안히 품위를 유지하시는 데에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문청은 머리를 끄덕였다. 차방은 슬쩍 장화 목 속에서 쪽지 한 장을 꺼내어 문청의 손에 건네주며 말했다:

“이것은 출발 날짜를 서면 보고할 서류입니다. 이미 다 베껴 적었습니다. 선배님께서 한번 훑어보시고 날짜만 적어 넣으시면 올려 보낼 수 있습니다.”

문청이 보다가 갑자기 한참 동안 주저하더니 말했다:

“회사의 여객선이 출항하는 것이 이십이 일인데, 이 날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대백효가 말을 받았다:

“그건 대인께서 마음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소인이 일 때문에 백 리 길을 갈 때에도 길일을 잡아서 갑니다. 하물며 대인께서 어명을 받들어 만리 길에 오르심은 국가의 화복이 달린 일인데 어찌 경솔할 수 있겠습니까? 이 날은 대인의 동료 분으로서 역학易學에 가장 정통하신 여홀남余笏南 님이 가려 정하셨는데, 마침 이 날에 이 선박이 출항하게 된 것도 대인의 큰 복이십니다.”

문청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홀남이 여기에 있었구먼. 그가 정한 날이라면 분명 좋은 날일 테니 더 말할 것 없겠네.”

보아하니 날도 저물어가고 있어 차방 등은 물러 나왔고 그날에는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없었다.

다음날부터 문청은 연회에도 참석하고 인사도 다녀야 했다. 그렇게 며칠을 바삐 보내다가 이십이 일 오전이 되어서야 겨우 여러 가지 일들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오후에 일행은 융극삼호에 승선하여 천천히 오송강吳淞江 하구를 벗어났다. 하구에 있던 러시아․독일 등 각국의 군함에서는 깃발를 올리고 포를 쏘면서 경하의 뜻을 표했다. 출항 후 내내 바람이 고르고 파도는 잔잔하여,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항로를 따라 곧장 나아갔다. 채운은 큰배를 타는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크게 요동을 하지도 않았건만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눈이 가물가물하여 종일 곤하게 누워있었다. 문청은 할 일이 없어 차방을 오도록 하여 한담을 나누었으며 더러는 스스로 그들을 찾아가기도 했다. 번화한 홍콩․싱가폴․스리랑카 등의 항구를 지날 때면 문청은 나서서 현지의 영사며 신상紳商********들과 접촉하고자 했다. 채운 역시 종종 뭍에 올라 유람을 했는데, 신기한 사물을 얼마나 많이 보고 기이한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무료함은 느낄 수 없었다. 어느덧 벌써 아덴을 지나 홍해에 접어들어 수에즈 운하 구역에 접근해 갔다.

어느 날 점심을 먹고 나서 채운은 가서 눕고 싶다면서 문청에게 차방을 찾아 한담이나 나누라고 권했다. 채운이 아복에게 잘 모시라고 이르려는데 마침 아복은 그곳에 없었다. 문청이 말했다:

“부를 필요 없소.”

그리고서는 세 명의 어린 하인을 불러 데리고서 이등 선창으로 갔다. 안쪽에서 사람들 소리가 떠들썩했는데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문청은 어린 하인 한 명더러 먼저 가서 살펴보라고 했는데, 안에서 아복이 어린 하인을 불러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 어서 와서 외국인의 마술을 봐라!”

막 그렇게 소리 치고 있는데 문청이 이미 문 앞에 와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가운데 한 줄로 세 명의 중국인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는데 모두 고개를 푹 수그리고 눈을 감고 있는 것이 마치 조는 듯한 모습이었다. 수염을 기른 중년의 외국인이 세 사람 앞에 서서 혼신을 다해 정신을 집중하여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여러 중국인․서양인 남녀가 에워싸고서 고개를 빼고 바라보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얼굴에는 경이에 찬 표정이 드러나 있었다. 차방과 황씨․탑씨 두 통역원 역시 무리 속에 있었는데 문청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는 모두 함께 인사를 했다. 차방이 말했다:

“선배님 잘 맞추어 오셨습니다. 어서 필엽畢葉 선생의 신기한 술법을 보십시오!”

문청이 멍하니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있는 참에 그 외국인은 진작 몇 발짝을 다가와 문청과 악수를 하고서는 차방과 두 통역원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분이 바로 우리나라에 외교사절로 오시는 김 대인이십니까?”

문청은 이 외국인이 중국어를 할 줄 아는 것을 보고서는 대답했다:

“대인이라니요 별 말씀을. 제가 바로 김모입니다만, 존함을 여쭤보지 못했습니다.”

황 통역이 말했다:

“이 분은 필엽사극畢葉士克이라고 하는데, 러시아의 유명한 박사님이시고, 유화의 대가에다가 의술에도 정통하시답니다. 게다가 일종의 신기한 술법을 쓰시는데, 혼백을 사로잡을 수 있답니다. 선생께서 술법을 걸자마자 이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일거수일투족 모두 선생의 명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러다가 깨어나서는 조금도 기억을 못하는 겁니다. 어제 선생께서 우리에게 이야기를 꺼냈었는데 지금 막 여기서 시범을 보이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앉아있는 세 사람을 가리키며 또 말했다:

“대인! 저 중국인 노동자들을 보세요. 잠에 빠져 있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문청이 듣고서는 과연 대단하다며 단단히 칭찬했다. 필엽이 웃으며 말했다:

“이것은 무슨 술법이 아니라 우리 서양에서 ‘hypnotism’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탈리아 사람이 창안한 것으로 전기공학과 심리학으로부터 이끌어낸 것이지요. 신기할 것은 없답니다. 대인, 저 세 사람이 일제히 왼 손을 들어올리는 것을 보십시오.”

말을 마치고서는 다시 세 사람을 응시하는데 그 표정이 마치 도사가 부적을 쓰고 주문을 외는 듯 했다. “왼 손을 드시오”하고 한 번 외치니 세 사람의 왼 손이 마치 같은 줄로 잡아당기는 것처럼 일제히 높이 들어 올려졌다. 그가 또 말했다:

“제가 저들에게 오른 손도 들라고 해 보겠습니다!”

그리고서는 앞서와 같이 한번 소리를 치니 과연 세 사람의 오른 손 역시 그 말을 따라 모두 함께 들어 올려졌다. 선창 가득히 박수갈채가 우뢰와 같이 일어났다. 문청과 차방 그리고 통역원과 수행원들은 모두 놀라움에 혀를 내두르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필엽은 서둘러 사람들을 향해 손을 내저어 큰 소리를 내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는 다시 소리쳤다:

“여러분 보십시오. 저 세 사람이 모두 머리를 쳐들고서 입을 벌려 혀를 빼어 물고 손뼉을 치면서 저의 신기한 기술에 대해 찬탄할 것입니다!”

그가 조금 전과 같이 명령을 내리자 과연 세 사람이 일제히 손뼉을 쳤는데 그 모습이 필엽이 말한 것과 똑같았기에 사람들은 모두 크게 웃기 시작했다.

차방이 말했다:

“어제 선생께서 말씀하시길 사람들이 자신가 숨기고 있는 일을 자백하게 할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그것도 시험해 볼 수 있습니까?”

필엽이 말했다:

“그것을 시험해 보이는 것은 아주 쉽지요. 그렇지만 사람들 사이의 좋은 관계를 손상케 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모인 사람 모두들 해보라고 요구했다. 문청이 필엽에게 말했다:

“선생께서 한 사람 골라 좀 시험해보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필엽이 말했다:

“김 공사께서 시험해 보라고 하시니 제가 이 노인에게 한 번 시험해 보지요.”

말을 하면서 세 사람 가운데 오십 세 정도 된 이를 끌어내서는 따로 앉게 하였다. 필엽은 술법을 펼치고서 그에게 말하라고 외쳤다:

잠시 있더니 그 노인이 갑자기 고개를 떨구고 입으로 중얼중얼 지껄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뭐라는지 분명치 않더니 이내 그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 흠차대인의 두 번째 부인을 보고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 모두들 흠차의 두 번째 부인의 자태가 아름답다고 하던데, 내 생각에 예전의 저 설雪 아가씨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내 기억하지, 내가 아랫사람이었기 때문에 감히 어쩌질 못했지. 설 아가씨가 내게 ‘무측천 황후가 두 명의 환관과 관계를 맺고자 했을 때 그들이 아랫사람이라는 핑계로 거절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질 못했네. 내가 들은 바로는 조정의 어른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도 불사하고 황후를 즐겁게 했다고 하네. 이 쓸모 없는 인간아! 이런 작은 일도 두려운가!’라고 했었지. 나는 그래서 말씀대로 따랐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처럼 좋은 날들은 다시는 없을 거야.”

사람들이 듣자하니 이 노인의 하는 말이 갈수록 가관이었는지라, 문청이 공연히 마음을 쓸까봐 걱정이 되었다. 필엽은 서둘러 최면을 거두었다. 문청은 의외로 전혀 개의치 않았고 웃으며 차방에게 말했다:

“보기와는 달리 이 늙은이가 풍류객이었네 그려! 참으로 이른바 ‘풍류의 정에 늙은이 몫이 없다고 말라, 복사꽃은 석양빛에 더욱 붉다네(莫道風情老無分, 桃花偏照夕陽紅)’일세.”

사람들이 함께 웃었다. 문청은 아복을 불러 잎담배를 재라고 말했다. 어린 하인 하나가 대답했다:

“조금 전 저 늙은이가 헛소리를 할 때 자리를 떴습니다.”

문청은 듣고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필엽이 저편에서 그 세 사람을 툭툭 건드리자 잠시 후 모두 눈을 비비며 꿈에서 막 깨어난 듯 했다. 사람들이 방금 전의 일을 물었지만 조금도 기억하지 못했다. 필엽은 문청과 여러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술법으로는 각 사람의 영혼을 서로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답니다. 지금은 이 사람들이 지쳤으니 다른 날 다시 시험해 보지요.”

문청이 이 말을 듣고 있는데 문득 눈앞에 한 가닥 특이하게 아름다운 광채가 선창의 서쪽 모퉁이 어느 방문 옆에서 뿜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눈여겨보니 다름 아니라 이십여 세 정도의 대단히 아름다운 서양 여인이었는데, 몸에는 새카만 색의 웃옷과 치마를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코에는 푸른 색 유리 안경을 걸치고 있었다. 비록 꾸밈은 매우 소박했지만 희디흰 얼굴과 금빛 머리카락, 긴 속눈썹, 잘록한 허리, 푸른 눈동자와 붉은 입술, 참으로 말할 수 없이 절묘한 한 폭 미인도였다. 상반신을 비스듬히 문에 기대고서는 김 대인의 혼백을 거의 앗아가 버렸다. 문청은 자신도 모르게 넋을 잃고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필엽 선생에게 청하여 저 사람에게 한 번 시험해 보도록 하면 참으로 재미있겠다 싶었지만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문득 머리에 한 가지 계책이 떠올라 필엽에게 말했다:

“선생의 신기한 기술은 참으로 기묘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군요. 이 세 사람의 중국인이 어찌 선생이 매수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소?”

필엽이 듣더니 얼굴에 크게 화난 기색이 나타났다. 문청이 이어서 말했다:

“결코 제가 선생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선생이 다시 한 번 보여주시길 청하고 싶어서입니다.”

이렇게 말하고서는 서양 여인을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선생께서 저 서양 여인을 대상으로 묘한 기술을 한 번 펼치신다면 그때는 이 사람이 한치 의심 없이 승복하겠습니다.”

차방과 두 사람 통역관 역시 문청의 뜻에 동조했다.

필엽이 발끈하여 말했다:

“무엇이 어렵겠소! 제가 당장 저 아가씨더러 저 동쪽 편의 탁자 위에 있는 과일 쟁반을 들어 옮겨 공사의 면전에 가져다 놓도록 하면 되겠지요?”

이와 같은 말은 문청의 한 마디에 인해 격발된 것이었다. 무릇 유럽 사람들의 성정은 매우 시원시원하고 또한 남에게 이기길 좋아하며, 다른 이들이 자신이 속임수를 쓰는지 의심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여 모든 일을 다 밝혀야 직성이 풀리니, 그때까지는 다른 일은 전혀 아랑곳 않는다. 필엽은 문청의 저 한마디에 격분하여 그 아가씨가 누구인지도 불문하고 무턱대고 자신의 술법을 실시했다. 그의 술법은 또한 백발백중인지라 순식간에 그 아가씨의 얼굴이 멍해지더니 나긋나긋하게 동편의 탁자로 가서 섬섬옥수를 뻗어 시원한 배와 설탕에 저린 연근 접시를 받쳐 들고서 천천히 걸어와서는 단정하게 문청 앞의 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미소를 머금고 비스듬히 바라보는데, 아리땁게 웃는 모습은 한 나라의 성을 기울게 할 만 했다. 이때 문청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어, 전시殿試********* 후 궁궐에서 진사 누구누구라고 호명되었을 때보다 열 배는 더 한 듯 했다. 그런데 누가 알았겠는가, 이편에서 술법을 편 필엽이 느낀 놀라움도 역시 심상치 않아, 마치 사형 선고를 받는 순간을 방불케 했다. 서둘러 모자를 벗어 들고서 선창 가득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먼저 서양말로 그리고는 중국어로 여러 사람들에게 부탁하길 아가씨가 깨어나거든 절대로 이 일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그러마고 응답했다. 그때 선장 질극이 소란스런 소리를 듣고서는 선창으로 와서 살펴보았다. 필엽은 그에게도 당부했고 질극은 미소를 지으면서 응낙했다. 필엽은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천천히 그 아가씨가 스스로 방으로 돌아가도록 한 뒤 최면을 풀어주었다.

문청 등은 필엽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에게 이유를 묻자 필엽은 웅얼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저 아가씨는 우리나라의 유명한 인물로 학문도 깊어 십여 개 나라의 말에 능통하답니다. 함부로 모독할 수는 없다는 얘기지요.”

차방이 물었다:

“필엽 선생께서는 그녀의 이름을 아십니까?”

“기억하기로는 하아려夏雅麗라고 합니다.”

문청이 물었다:

“그녀가 중국말도 잘 합니까?”

“어디 말뿐이겠습니까, 중국의 시문도 지을 줄 안다고 합니다!”

문청은 이 말을 듣고서는 기분이 좋아졌다. 이유인 즉 문청은 이 아가씨의 풍모를 보고서는 매우 흠모하게 되었지만 접근할 방도가 없던 터에, 지금 그녀가 중국어를 할 줄 안다고 듣고 보니 이것이 아주 좋은 구실이 되어 줄 것 같았다. 그는 당장 필엽에게 말했다:

“제가 분별 없이 좀 드릴 말씀이 있는데, 다만 감히 외람되이 굴 수가 없어서요.”

필엽이 말했다:

“김 대인께서는 너무 겸양치 마시고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십시오.”

문청이 말했다:

“다름 아니라 저의 안사람이 전부터 서양말을 배우고 싶어했는데, 여 선생님이 계시질 않아 여의치 않았답니다. 지금 선생의 말씀에 따르면 귀국의 아가씨가 어학에 정통하고 또한 중국어도 할 줄 안다고 하니, 더 기막히게 좋은 기회는 없겠습니다! 요즘 배 위에서 일도 없으니 가르침을 청하기에는 딱 좋겠지요. 선생께서는 어째든 하아려 아가씨와 같은 나라 출신이시니 저를 위해 좀 소개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필엽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이 일을 이미 위탁받은 셈이니 어찌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저 아가씨의 성미가 괴팍하여 소생이 의중을 좀 떠보고 내일이나 회답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

이때 차방과 황․탑 두 통역원이 다시 문청을 거들어 몇 마디 부언하였고 필엽이 꼭 그러마고 대답하자 이에 모두들 헤어졌다.

문청은 방에 돌아와 필엽의 기이한 술법을 채운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채운이 말했다:

“기이할 것도 없어요. 그 중국 사람들은 분명 그 사람의 패거리일 거예요. 우리 소주의 마술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속이는 거지요.”

문청은 다시 서양 여인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 서양 여인은 내가 해 보라고 시킨 것이었소. 설마 그녀 역시도 한 패거리였을라고?”

채운은 이에 역시 신기해하기 시작했다. 문청은 또 서양말 배우는 것에 관해 처음서부터 죽 이야기해 주었다. 채운은 그지없이 좋아했다. 사실 채운은 진작부터 이런 뜻이 있어서 문청에게 몇 번 이야기했던 터였다. 그 날 저녁에는 별 일 없었다.

다음날 아침, 문청이 막 일어났는데 차방이 벌써부터 큰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문청은 그를 보고서 바로 물었다.

“어제 일은 어찌 되었는가?”

차방이 말했다.

“되었습니다. 어제 선배님께서 가신 후, 그가 가서 그 아가씨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어 그럴듯한 말로 추켜세우다가 나중에 천천히 본론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아가씨는 처음에는 허락하치 않더니 필엽 선생이 거듭 설득하자 비로소 받아들였습니다. 마침 그 아가씨도 독일에 간다는데, 독일에서 아마 한 두 달 정도 머무른 후 러시아로 갈 것 같다고 합니다. 저희들과 움직이는 길이 비슷하니 늘 가르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만약 부인께서 그녀를 쓰시려면 매월 급료로 팔십 마르크를 원한답니다.”

문청이 말했다.

“팔십 마르크라, 비싸지 않아 비싸지 않아. 오늘 바로 공부를 시작하나?”

차방이 말했다.

“가능합니다. 그녀가 이미 한참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문청이 말했다.

“작은 아씨는 머리를 만지고 씻은 후에 바로 갈 터이니 자네는 가서 이야기를 전하게.”

차방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하고서 물러났다. 문청이 들어가 보니 채운은 차방의 이야기를 벌써 듣고서 서둘러 머리를 다 빗어 놓고 있었다. 문청은 아복더러 채운을 모시도록 하고 자신 역시 이등 선창으로 가서 차방 등과 한담을 나누었는데, 하아려의 방을 마주하고 있었다. 말을 하는 중에 수시로 그 쪽을 훔쳐보았다. 채운은 그 아가씨를 만나 매우 의기투합하였다. 하아려는 그녀더러 먼저 독일어를 배우라고 했는데, 독일어는 독일은 물론 러시아 등 여러 나라에서 두루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매일 아침에 가서는 저녁에야 돌아왔다. 채운은 타고난 천성이 총명하여 십 일이 채 되지 않아 말은 이미 대략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하아려 역시 매우 기뻐했다.

어느 날, 융극삼 호가 막 지중해를 가로질러 이탈리아의 화산에 접근해 갈 때였다. 시간은 이른 아침이었는데 먼동이 어슴푸레 트고 있었다. 문청과 채운은 막 침대에서 일어나 함께 선실에 난 창문가에 있었다. 서남 일각에 어렴풋이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으며 푸른 섬들이 둘러 있는데 거기에는 비취빛 집들이 모여 있었다. 이국의 풍경이 장관인지라 즐겁고 평온한 마음으로 한참 푹 빠져 감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문을 밀치고 뛰어 들어와 왼손으로는 문청의 소매를 거머쥐고 오른손으로는 채운의 팔을 잡고서는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말했다.

“너희 둘에게 묻겠는데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다면, 내가 너희를 용서한다고 해도 내 탄환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문청과 채운이 고개를 쳐들어 보고서는 놀라 눈은 휘둥그레지고 입은 떡 벌어져,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했다. 다름 아닌 다음과 같은 상황이었다:

하루아침에 혼백은 마술사의 수중에 떨어지고, 아가씨가 일으킨 바람에 백장 높이 파도가 이네.

뒷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으시다면 다음 회의 설명을 보시길.

― 35회본 중 제9회

(민정기 역)

【注】

*誥命은 封號받은 부녀를 일컫는다. 補服은 明淸代 文武官員의 大禮服을 뜻한다. 가슴과 등 부분에 문관은 날짐승을 무관은 들짐승을 수놓아 관급을 나타냈다. 가슴과 등에 또한 ‘補’자를 붙이던 데에서 補服이란 명칭이 유래했다.

**술자리에서 흥을 돋우기 위해 하는 놀이로 각자 숫자를 부르며 손가락을 내밀어 상대편에서 낸 손가락 수와 내가 부른 숫자가 일치하면 이기는 놀이다. 진 사람이 벌주를 마신다.

***역시 술자리에서 하는 놀이. 종이에 ‘唐僧’과 ‘孫行者(孫悟空)’, 요괴의 이름 등을 적어 뽑아 가지고서 손오공을 뽑은 이가 唐僧을 뽑은 이를 알아내는 놀이다. 맞추면 唐僧이 한 잔을 마시고 찾지 못하면 요괴를 뽑은 이와 가위 바위 보를 하여 진 사람이 마신다.

****淸代에 특별한 업무 수행을 위해 황제를 직접 대리하도록 파견된 관리.

*****상해의 행정 장관.

******명청대에 문하생이 스승을 만나거나 부하가 상사를 만날 때 사용하던 명함 혹은 소개장 같은 것으로 자신의 이름과 직위 등을 적었다.

*******李鴻章이 주도하여 1873년에 설립한 중국 최초의 기선 회사.

********紳士層과 상인. 혹은 신사 계층으로서 상업에 종사하는 자.

*********과거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시험으로 여기에 합격하면 정식 관료로 임용될 자격을 갖는 進士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