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박曾樸의 『얼해화孽海花』 : ‘동아병부東亞病夫’의 꿈과 좌절

청말의 소설 가운데에는 루쉰魯迅이 ‘따져 묻고 꾸짖는 듯한 내용과 문체’라는 의미에서 ‘견책소설譴責小說’이라고 이름을 붙인 일군의 소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네 편의 잘 된 작품으로 꼽히는 것이 오견인吳趼人의 『이십년목도지괴현상二十年目睹之怪現狀』, 李寶嘉의 『관장현형기官場現形記』, 유악劉鶚의 『노잔유기老殘游記』 그리고 본 강의에서 이야기할 증박曾樸(1872~1935)의 『얼해화孽海花』입니다.

이 소설은 김천우金天羽(1874~1947)가 쓰기 시작하다가 증박에게 이어서 쓰도록 부탁한 특이한 내력을 갖고 있는데, 증박이 일부를 쓴 뒤로 집필이 중단되었다가 한참 후에 이어지는 등 곡절이 많았습니다.

『얼해화』는 당시 지배층의 세태를 풍자하고 질책한 견책소설로 읽을 수 있을 것이며 한 시대의 흐름을 작가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역사소설로도 읽을 수 있고, 작가의 정치적 관점과 주장이 담긴 정치소설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또는 다양한 일화의 보고로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소설을 관통하고 있는 김문청金雯靑과 부채운傅彩雲의 비극적인 연애담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기실 작자인 증박은 『얼해화』의 집필 동기에 대해 중국의 정치적 변동과 문화적 추이를 두 남녀의 연애담을 서사의 축으로 삼아 풀어내고자 했다고 밝힌바 있지요.* 우선 이 소설에서 두 남녀 주인공 사이에 일어난 일을 추려보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① 아름답고 총명한 기녀는 상중喪中 금기를 깨고 뱃놀이를 나온 장원狀元의 눈에 든다. 기녀는 장원의 옛 정인情人과 닮았다.

② 기녀는 본 부인의 묵인 하에 장원의 첩이 된다.

③ 기녀는 외교 업무 수행을 위해 파견되는 남편과 동행한다.

④ 기녀는 무능한 남편과는 달리 사교계에서 맹활약한다.

⑤ 기녀는 외국인 남성들 그리고 남편의 서동書童과 사통한다.

⑥ 귀국 후 기녀의 외도가 발각되고 장원은 화병에 걸린다.

⑦ 기녀는 죽은 장원의 운구 행렬에서 이탈하여 새 남자와 살림을 차린다.**


여주인공 부채운의 모델이 되었던 기녀 새금화賽金花의 젊은 시절 모습

문인과 기녀의 사랑은 당대唐代로부터 숱한 이야기의 제재가 되었지요. 여기에는 그러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향유하던 이들의 모종의 이상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그 문인이 장원 급제한 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증박은 장원-기녀 이야기를 쓰고 있으면서 실상 그 전래의 구도를 비틀어 놓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일종의 ‘각색의 전도’가 일어나고 있다고 하겠는데요. 이렇게 전도된 각색 속에서 장원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속수무책인 무능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반면 여인은 여러 가지 긍정적인 자질을 담보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지요.*** 그녀는 아름답고 총명하며 발랄합니다. 외국어를 배우는 데에도 특별한 소질이 있으며 외국인과의 사교에도 적극적이고요. 우리는 그녀를 통해 새로운 시대의 여성의 한 측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장원이 상징하는 옛 세계의 질서로부터 벗어나 있으며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데 적극적입니다. 남자에 의해 그녀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에 의해 남자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증박이 설정한 전도가 유의미한 지점은 바로 이곳입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녀가 수동적인 욕망의 대상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욕망을 통어하는 주체라기보다는 욕망의 노예에 가깝게 그려집니다.

여인의 이러한 자질은 결국 자신의 남자를 파멸에 몰아넣는 것으로 귀결합니다. 여기에서 여성의 유능함이 비극의 씨앗이 된다고 여기는 예의 ‘상식’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서사의 표층에서 묘사되는 여인은 이처럼 당대의 대중적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고 하겠습니다. 증박이 중국의 정치적 변동과 문화적 추이를 두 남녀의 연애담을 서사의 축으로 삼아 풀어내고자 했다고 했는데, 두 주인공의 연애담에서 드러나는 위와 같은 여성의 상은 이 소설의 전체적 의미 망 속에서 매우 중요한 표상으로서 작용하지요.

1928년에 나온 진미선서점본眞美善書店本 18회 삽화. 하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리는 부채운의 모습. 이 야릿야릿한 여인은 외국인 선장과 장교, 남편의 동복童僕 등 가리지 않고 사내를 섭렵한다.

그렇다면 삼십 년 동안 중국이 겪은 정치적 변동과 문화적 추이를 드러내는 데 이처럼 전도된 장원-기녀상이 서사의 축으로 자리함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전통사회의 꽃인 장원이 처하게 되는 곤경은 아마도 증박에게 비친 ‘근 삼십 년 동안’의 정치적 변동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원은 상해라는 새로운 성격을 띠는 공간에서 무력하고 어색한 모습을 띱니다. 또한 유럽 순방의 임무를 띠고 중국 땅을 떠나자마자 선상에서 외국 여인에게 반하여 수작을 부리다가 결국 곤란에 빠져 큰 금전적 손실을 입습니다.(본 편의 부록: 『얼해화』 제9회를 보세요.) 급기야는 자신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순방 기간 중의 실수로 나라에 불이익을 초래합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자신이 부귀를 누리던 공간인 북경에서조차 여의치 못한 처지가 되어 종말을 맞게 되지요. 이러한 장원의 모습은 아편전쟁 이후의 변화된 시국에 적응하지 못하고 침몰하는 노제국의 모습을 닮아 있습니다.

장원이 아편전쟁 이래 흔들거리는 중국, 더 구체적으로 중국의 지배계층인 사대부의 운명을 상징한다면 기녀는 중국의 새로운 문화적 행보에 대응시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전통시기 중국에서 기녀란 사대부 문화의 주요한 부분을 구성하는 독특한 존재로서 『얼해화』의 부채운 역시 전통 문화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총명한 두뇌로 외국어를 쉽게 익히고 외국의 풍습에도 쉽게 적응하며 중국의 전통적인 윤리도덕이 용납하지 않는 자유분방한 행태를 보입니다. 이러한 부채운의 모습은 아마도 중국이 대면한 새로운 문화적 조건 특히 상해라는 공간에서 꽃피운 새로운 풍조, 동서의 문화가 어우러져 생성 중인 보다 자유롭고 거침없는 새로운 풍조를 상징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흐름은 장원으로서는 결국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 새로운 흐름 역시 장원의 힘이 되기보다는 그를 배반하고 파멸로 이끄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장원의 시신이 고도古都 소주蘇州로 옮겨지던 밤, 부채운은 미리 준비한 대로 운구 행렬에서 도주하여 상해에서 새 인생을 시작합니다. 거듭 장원을 배반하고 장원이 태어나고 자랐으며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소주로 시신이 운구 되는 중에 ‘죽은’ 옛 님의 곁을 떠나는 기녀의 모습은 바로 증박의 눈에 비친 신문화의 추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얼해화』의 서사의 표층 즉 두 주인공 사이의 연애담의 층위에서 <여인은 능력이 있다>, <여인은 외도한다>, <자신의 욕망을 자각한 여인은 남자를 파멸로 몰아넣는다>라는 형상이 제시된다면, 서사의 보다 깊은 층에서 여인은 이처럼 <가짜 영웅>, <모호하고 두려운 존재>, <불가해한 중국의 장래>의 표상으로 읽힙니다. 부채운은 『얼해화』에 등장하는 유일하게 중요한 여성 인물입니다. 그녀는 더럽고 추악한 남자들의 세계에 피어난 한 떨기 꽃으로서의 ‘가능성’을 표상하지만 그것은 이내 곧 부정되고 말지요. 회의의 대상이 되는 신문화의 표상으로서의 여성, 『얼해화』의 바탕에 깔린 여성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신문화에 대한 희구와 회의, 부정이 엇섞인 당대의 대중적 세계관과 호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앞에서 제시한 독법은 『얼해화』에서 역사와 사회의 큰 흐름에 대한 작자의 의식이 당시 형성되어 있던 신․구공간과 그 공간 속의 인물들의 운명에 대한 복잡한 정서를 매개로 드러나고 있으리라는 점에 착안하여 제시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증박의 소설 쓰기의 운명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증박이 『얼해화』를 쓰면서 사용한 필명은 ‘동아병부東亞病夫’였습니다. 상해는 증박에게 새로운 방식의 삶의 가능성을 열어준 곳이었지만 그 곳에서의 생활이 결코 이상적인 것은 아니었던 듯합니다. 포천소包天笑의 회고록인 『천영루회억록釧影樓回憶錄』에는 증박이 상해에서 『얼해화』를 쓰고 있을 당시 환경과 생활을 묘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당시 증박은 가족과 떨어져 소설림小說林 출판사가 세 들어 있던 건물 꼭대기 층의 단칸방에서 혼자 살았는데, 병든 몸에 아편에 절어 있었으며 저녁이 다 되어서야 침대에서 나와 정신을 차리고서는 밤새 집필에 몰두하는 파행적인 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얼해화』의 첫 20회가 매우 짧은 시간에 완성되었던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였지요. 그러나 ‘병부病夫’라는 자칭은 단지 사적인 의미만 지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병국지병부病國之病夫’라고 지칭되기도 했습니다. 그 개인만이 ‘병부’인 것은 아니고 그의 나라 역시 ‘동아’의 ‘병부’요 ‘병국病國’이었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소설 쓰기는 그러한 병든 나라와 병든 사내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는 이 소설을 통해 한 시대의 정치와 문화의 변화추이를 엮어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상당한 열정을 가지고 이 작품에 매달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소설을 그와 같이 거창하게 기획한 것은 당시 유행하던 소설에 관한 이론들의 영향도 있었을 터이고, 모름지기 어떤 글이건 의미있는 것을 다루어야 한다는 전통적 관념 그리고 역사를 자신의 붓끝으로 아우르려는 사대부적 욕망 등에 기인한 것일 터입니다. 그런데 다양하게 읽을 수 있는 매력을 갖춘 이 소설은 전통 장회소설章回小說의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으며 상당 부분 자잘한 일화의 배열에 그치고 있지요. 앞서와 같이 증박의 의도를 십분 감안하여 전체적인 흐름을 읽어보아도 전통적인 것의 몰락과 새로운 것의 불확실성을 드러내고 있을 뿐 어떠한 희망에 찬 비전도 제공하지 못합니다. 아마 증박은 『얼해화』의 첫 삼분의 일을 완성하고서 이러한 글쓰기가 갖는 힘의 한계를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증박의 소설 쓰기는 인간의 삶(역사/정치)과 그것이 엮이는 방식(문화)에 대해 탐색하는 층위를 갖는데 그것은 ‘재자가인才子佳人’ 이야기와 필기筆記로 대표되는 서사의 전통과 결합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읽기는 그것과 관련된 정황들을 살펴보건대 증박이 답습한 서사의 전통에서 비롯되는 유희적 층위에 중심이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통 서사 양식의 답습과 그것에서 비롯되는 유희적 층위의 강한 자장은 증박의 소설 쓰기가 ‘의도’한 의미의 장을 제대로 생성하는 데에도 장애 요소였으며 결국 이 소설이 삼분의 일 가량 쓰인 후 중단될 수밖에 없던 내재적 결함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증박의 소설 쓰기가 전통 서사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동시에 이러한 글쓰기가 결국 상해의 상업적 출판의 장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대중적 기호를 반영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본다면 김천우가 애당초 『얼해화』를 집필하며 혁명당의 일을 맨 앞에 두고 있는 것이나 증박이 이것을 그대로 이용한 것 역시 혁명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독자들의 기호를 고려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판을 거듭한 『얼해화』의 상업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증박은 상황이 바뀌자 애당초 집필 계획에 따라 계속 쓰는 것을 포기하고 정계로 뛰어듭니다. 자신의 소설 쓰기가 갖는 층위들 간의 충돌을 조정하지 못하고 내던져버린 것이라고 하겠는데, 이는 결국 상해에서의 소설 쓰기에 계몽지향의 층위가 결합되는 경우의 귀결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잘 팔리는 소설을 계속 쓰는 작업은 결국 병부病夫도 병국病國도 구제할 힘을 갖지 못했던 셈이지요. ‘죄악의 바다에 핀 한 떨기 꽃’ ‘얼해화孽海花’는 제 서글픈 모습을 다 드러내지도 못하고 져버리는 형국에 처한 것입니다. 『얼해화』는 증박 자신이 신구의 공간과 조건 속에서 갖고 있던 복잡하고 착잡한 심정이 녹아 있는 존재의 알레고리이면서 동시에 만청晩淸 시기의 특별한 시공 속에서 ‘문학의 최고 경지’라고 추켜지던 소설 쓰기가 놓여 있던 처경의 일단을 보여줍니다.


【注】

* 曾樸, 「修改後要說的幾句話」, 魏紹昌 編, 『孽海花資料』(增訂本), 上海古籍出版社, 1982.

** ①~⑥은 1904년에서 1907년 사이에 쓴 小說林本 第25回까지의 내용이며, ⑦부분은 1930년에 나온 修改本 第30回에 나오는 대목이다. 修改本에 이어 쓰여진 35回까지의 내용을 보면 상해에 정착한 傅彩雲이 한 남자에게 안주하지 못하고 여러 남자의 품을 전전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 사실 전통 시기 才子佳人 소설에서도 남자 주인공은 다분히 수동적이고 평면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그런 의미에서 『孽海花』에서 나타나는 바를 ‘각색의 전도’가 아닌 전통적 각색의 극단화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孽海花』의 전체적 의미 구조에 대한 분석은 李培德(Peter Lee), 「『孽海花』的戱劇結構」(伍曉明 譯, 『從傳統到現代-19至20世紀轉折時期的中國小說』, 北京大學出版社, 1991; The Chinese Novel at the Turn of the Century, Univ. of Toronto Press, 1980); 민정기, 「新舊空間 속의 狀元과 妓女 – 曾樸의 『孽海花』에 나타난 時代意識」(『中國現代文學』 제14호, 1998. 6)을 볼 것.

***** 包天笑, 『釧影樓回憶錄』(香港: 大華出版社, 1971), 3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