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권 고아수는 기꺼이 시주물을 기부하고
최준신은 공교롭게 부용병을 만나다
顧阿秀喜舍檀那物 崔俊臣巧會芙蓉屛
그리고는 그곳으로 부임해오던 중 뱃사람들이 재물을 빼앗고 남편의 일가를 모조리 죽였는데 자기는 목숨을 부지하여 도망쳐 나왔다가 다행히 여승을 만나서 그곳에 머물게 되어 머리를 깎고 출가하게 되었다는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죄다 이야기해주었다. 왕씨는 그리고 나서도 계속 울었다. 부인은 그녀의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파 분노에 차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강도놈들 사람을 이렇게 해치다니! 하늘의 이치는 분명하다는데 왜 천벌을 내리지 않는 거야?”
“소승이 절 안에 일 년을 숨어 있으면서 바깥소식을 전혀 듣지 못하고 있었는데, 며칠 전 문득 어떤 사람이 부용꽃 그림 한 폭을 가지고 절에 와서 시주를 했어요. 제가 보니 다름이 아니라 그 배에서 잃었던 제 남편의 물건이었어요. 그래서 곧 주지스님께 그 시주의 이름을 여쭈었더니 이 곳 고아수 형제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남편이 세내었던 배를 기억하고 있는데, 그 뱃사람이 바로 고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지금 장물이 이미 드러났으니, 그 강도가 고아수가 아니면 누구겠어요? 당시 제가 배에서 헤어지게 되었던 일을 사 한 수로 지어 그 위에 써놓았었어요. 나중에 어떤 사람이 그걸 사갔는데, 며칠 전 이 댁 부중에서 한 사람이 절에 와서 부용꽃 그림에 사를 쓴 사람을 조사해 갔어요. 사실 그건 바로 제가 지은 것이고, 그 안에는 이런 원한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그리고는 부인에게 절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강도는 가까이 있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부인께서 대감님께 고하여 저를 위해 그놈들을 찾아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만약 죄인을 찾고 원한을 갚아 죽은 지아비께 보답할 수 있다면, 대감님과 부인의 은혜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단서들이 있는 이상 찾기 힘들지는 않을 테니 우선은 마음을 놓아요. 내가 대감님께 말씀드리기만 하면 되니까요.”
부인은 과연 이러한 사실들을 고납린에게 자세히 이야기해 주고는
“그 사람은 글도 알고 심성도 정숙해요. 절대 빈한한 집의 여자가 아니에요”
하고 덧붙였다. 그러자 고납린이 말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최현위가 말한 것과 똑 같군. 또 부용꽃 병풍에 사를 써놓은 것도 그녀고, 최현위 역시 그것이 자기 처의 필적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으니, 그녀가 최현위의 처임은 의심할 바가 없소. 부인은 그냥 그녀를 잘 대해 주기만 하고 당분간은 사실대로 말하지 마시오.”
고납린이 밖으로 나와 최준신을 만났을 때, 최준신 역시 고납린에게 자기를 대신해서 부용꽃 병풍의 종적을 조사해달라고 누차 재촉하였다. 고납린은 그저 아직 자세한 것은 모른다고 잡아뗄 뿐 혜원에 관한 일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고납린은 또 은밀히 사람을 보내 고아수 형제가 사는 곳과 평상시의 거동을 수소문해 본 결과 강도가 틀림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고납린은 이미 관직에서 물러난 관리인지라, 아직은 감히 함부로 손을 쓰지 못하고 몰래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최현위 사건에 대한 조사는 이미 십중팔구는 이루어졌으니 머지않아 그들 부부를 재회하게 해주게 될 거요. 다만 혜원이 아직 출가한 몸이니 후에 어떻게 서로 만나게 해야 다시 부인이 되기에 수월하겠소? 아무래도 당신이 천천히 그녀에게 머리도 기르고 꾸밈새도 좀 바꾸도록 권하는 것이 좋겠소.”
“그게 좋겠어요. 하지만 그녀가 남편이 아직 살아있는지도 모르고 있는데, 어떻게 머리를 기르고 꾸밈새를 바꾸려 하겠어요?”
“당신이 가서 그녀에게 권해 봐서 혹시 그 말을 따르게 된다면 좋은 거고,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때가서 내가 따로 말해보겠소.”
부인이 그 말에 따라 왕씨에게 와서 말했다.
“내가 이미 당신이 했던 말을 모두 대감님께 말씀드렸어요. 대감께서 말씀하시기를 도적을 잡는 일은 모두 그분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고, 틀림없이 당신을 위해 원수를 갚아주마고 하셨어요.”
왕씨가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해하자,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다만 한 가지 대감께서는 당신이 명문 출신이고 관리의 부인이니 어찌 불문(佛門)에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머물러 있게 할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시면서, 나더러 당신이 머리를 기르고 꾸밈새를 바꾸도록 권하라고 하셨어요. 당신이 만약 그 말을 따른다면 전력을 다해 당신을 위해 도적을 잡겠다고 말이에요.”
“소승은 미망인이관데 머리 기르고 모양새를 바꾼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만 아직 원한을 갚지 못했기로 대감님께서 그 일을 맡아주시길 부탁드린 것뿐입니다. 만일 강도들을 멸할 수만 있다면 그냥 이렇게 불문을 조용히 지키며 생을 마감하겠습니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당신이 이렇게 꾸미고 다니면 우리 부중에서도 불편하잖아요. 차라리 머리를 기르고 우리 노부부를 부모 삼아 과부로서 함께 살아간다면 안 될 것도 없잖아요?”
“대감님과 부인의 은혜를 입었으니, 사람이 목석이 아니거늘 어찌 감사함을 모르겠습니까? 허나 지아비가 이미 돌아가셨는데 다시 머리를 기르고 분을 바른다면 제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하물며 저희 주지님이 저를 구해준 깊은 은혜를 하루아침에 저버린다면 역시 배은망덕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감히 분부를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부인은 그녀가 결연하게 말하는 것을 듣고는 그것을 다시 고납린에게 이야기해주었다. 고납린은
“이런 지조 있는 여인은 참으로 드물다”
하며 찬탄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부인더러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도록 하였다.
“대감께서 억지로 당신에게 머리를 기르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거기에는 까닭이 있어요. 전날 그 사건을 조사하는 일로 해서 평강로의 관리와 만났더니, 예년에 누군가 그 사건을 고소한 적이 있었는데 그 역시 영가현 현위였다는 거예요. 아마도 최현위가 아직 죽지 않았는지도 몰라요. 만약 머리를 기르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갑자기 그 도적들을 잡고 최현위를 찾아낸다면, 그 때는 신분이 서로 달라 재회하기가 어려워 후회해도 소용없게 된다고요. 그러니 잠시 머리를 길렀다가 일이 완전히 끝나고도 끝내 최현위의 행방을 알 수 없다면, 그때 마음대로 다시 머리를 깎고 절로 돌아가도 되잖겠어요?”
왕씨는 다른 누군가가 이곳에서 그 사건을 고소했었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속으로 ‘남편은 어려서부터 헤엄을 잘 쳤다. 그날 밤 송두리째 물속으로 던져지는 것을 보았지만, 혹시 천행으로 목숨을 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는 결국 부인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비록 바로 차림새를 바꾸지는 않았지만, 이로부터는 머리를 깎지 않고 당분간 여도사(女道士)의 모습으로 차리고 다녔다.
또 반년이 지나 조정에서 진사(進士)인 설부화(薛溥化)를 감찰어사로 파견하여 평강로에 순시를 오게 되었다. 이 설어사는 다름 아닌 예전에 고납린의 밑에 있던 관리로, 매우 영민하고 수완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임소로 와서 먼저 고납린을 배알하러 갔다. 고납린은 비밀리에 그 사건을 그에게 맡기면서 고아수의 이름과 거처까지 자세히 말해주었다. 설어사가 그것을 마음속에 잘 기억해 두었다가 일을 처리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한편 고아수 형제는 그해 8월 보름날 밤 날이 밝도록 자고 깨어보니 왕씨가 보이자 않자 도망간 것임을 알았으나, 정체가 드러날 까봐 감히 공공연하게 추적하지는 못하였다. 비록 부근에서 두어 번 알아보기는 했지만 종적을 알 수가 없었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도 뭣한 일이어서 그냥 꾹 참고 말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도 한 해 동안 십여 차례 도적질을 했는데, 최준신의 재산만큼 많지는 않았지만 요행히도 발각되지 않아 매우 득의양양해졌다.
하루는 집에서 왁자지껄하게 술을 마시고 있는데, 평강로의 포리가 포졸들을 이끌고 집 주위를 에워싸고 감찰어사가 발부한 체포영장을 내놓는 것이었다. 고아수가 첫 번째로 이름이 올라있는 강도였고, 나머지 수많은 이름들도 하나하나 조사해보니 도망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또 최준신이 고발한 장물목록을 꺼내 집안의 옷궤까지 샅샅이 뒤졌다. 도적선은 문밖의 부두에 정박되어 있었다. 증거물들을 모두 관아에 보고하고 범인들을 어사 아문으로 압송해 갔다. 설어사가 그 자리에서 심문을 하니 처음에는 발뺌을 했다. 그러다가 물건들을 조사함에 이르러 영가현 현위의 임명장이 상자 속에 아직 남아 있고 장물들도 낱낱이 확인되고 또 설어사가 최현위가 전날 신고했던 고소장을 그들에게 읽어 주자, 그제서야 모두 머리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설어사가
“그날 왕씨라는 부인이 또 있었는데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하고 묻자 고아수 등은 서로 쳐다보기만 할 뿐 한마디도 꺼내지 않는 것이었다. 설어사가 엄형으로 심문하라고 소리쳐 명하자 고아수는 이렇게 실토하였다.
“처음에는 정말이지 그녀를 살려두었다가 제 둘째 아들과 짝을 맺어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죽이지 않은 겁니다. 그녀가 신부가 되겠다고 한마디로 승낙을 하기로 더 이상 방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뜻밖에도 그때가 팔월 한가위라 깊이 잠든 틈을 타서 도망을 쳤는데 어디로 갔는지는 모릅니다. 이것만은 사실이옵니다.”
설어사는 범인들의 진술을 기록하고 모든 문건들을 취합하여 판결을 내렸는데, 당시 배에 있던 사람들은 주범과 공범을 가리지 않고 모두 사형에 처하기로 하되 지체 없이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장물들은 목록에 적힌 대로 원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였다. 설어사는 또 고납린에게 사람을 보내서 이 일을 알리게 하고, 장물들을 우선 고납린의 부중으로 보냈다가 최현위에게 주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최준신은 그 물건들을 하나하나 돌려받으면서 임명장이 아직 남아있고 가산도 여전히 보존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만 그의 아내의 행방만은 알 수가 없었는데, 도적들조차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있으니 정말로 막막한 일이었다. 최준신은 옛날 생각이 나서 자기도 모르게 통곡을 했다. 그걸 증명하는 시가 있다.
우습구나, 영민한 최준신도 환난에 빠져 잠시 우둔해졌는지
그림 덕에 도적 잡은 마당에 제화(題畫) 한 사람은 왜 못 찾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