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회도(繪圖)
다음은 회도이다. 그림도 역시 이미 볼 수 없게 된 도시를 탐색하는 우리에게 다시없는 좋은 사료이다.
당시에 이미 기념품으로서 사고팔았던 그림이 있었다는 것은 미야자키 노리코(宮崎法子)가 논증한 바이다. 이를테면, 항저우(杭州) 인근에 있는 시후(西湖) 그림이 관광 토산품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듯하다. 왕안스(王安石)가 은퇴지에서 보았던 것도 그런 류의 회도였는지 모른다. 이것은 같은 종류의 그림이 상당히 유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리라.
그 가운데 백미가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이다. 북송 말 장쩌돤(張擇端)이 그렸다고 하는 이 그림은 직선을 구사한 계획(界畫)이라는 방법으로 묘사됐는데, 이것은 통상 북송의 수도 카이펑(開封)의 것이라 일컬어진다. [그것은] 그림 가운데 몇 가지 정경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카이펑의 경물과 합치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청명절이라는 것은 당시 연중행사 가운데 가장 중시되었던 절기 가운데 하나였다. 동지에서 105일째 되는 날을 대한식(大寒食)이라 칭한다. 이 시기의 풍습으로 불을 사용하지 않고 차가운 음식을 먹는다. 그래서 한식인 것이다. 또 사람들은 모두 교에서 성묘를 하고 새로운 묘를 청소하러 나선다. 당연하게도 성묘에 나선 김에 사람들은 봄을 즐기고 유람하는 데 빠져들었다.
이것은 민간에서만 이루어졌던 행사는 아니었고, 궁중에서도 행해졌다. 화려한 수레를 탄 궁녀의 모습과 화려한 군악을 연주하면서 행진하는 근위군(近衛軍)이 보였다. 거기에 맞춰서 똑같이 교외에 나와 흥청대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던 것이다.
그 무렵은 스포츠도 성행했다. 특히 축구(蹴毬)라는 일종의 폴로 경기가 성행했다. 얼마나 성행했던 것일까? [이것은] 북송 말을 제재로 한 대하소설 《수호전(水滸傳)》에서 최대의 악역을 맡았던 가오츄(高俅)가 축구로 출세했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청명절이라는 것은 카이펑 사람들이 찾아온 봄을 즐기는 때였던 것이다.
그런 청명절의 풍속을 화제로 삼은 장쩌돤의 작품은 후대에 계승되어 여러 가지 《청명상하도》가 등장했다. 그것들은 모두 성 바깥과 성 안을 명확하게 묘사했다. 그러나 장쩌돤의 그림의 경우에는 반드시 카이펑 성 안팎만을 그렸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청명절이 성 바깥에 나가는 절기이고, 카이펑의 메인 스트리트를 그린 것이라고 하기에는 기록에 합치되지 않는 점이 있다는 등의 이유 때문이다. 그밖에도 다른 이유가 있지만, 그건 그거고 이 그림이 도시적인 그림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어쩌면 카이펑 교외의 시끌벅적한 행락지를 중심으로 짜 맞춘 청명절의 흥청거리는 풍속을 그린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당시의 평균적인 도시 경관을 그려낸 것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카이평과 같이 거대하고 특수한 도시를 그대로 그린 게 아니라는 바로 그 사실이야말로 당시의 평균적인 도시 경관의 복원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된다.
그 밖의 사료
이와 같은 도시의 형태와 경관, 또는 구조를 탐색하는 데 지도가 필요하지만, 문자의 왕국인 중국이기에,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이를테면, 루유의 일기도 그 가운데 하나다. 미지의 장소를 여행하기 위해서는 그런 기록을 얼마든지 읽어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 파도를 넘어 중국으로의 여행길에 올랐던 선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우리가 여행하기 전에 열심히 가이드북을 읽는 것처럼 가능한 한 많은 선인들의 기록을 모아서 숙독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열심히 읽었다.
그들은 얼마나 열심히 연구하고 읽었을까? 무심결에 선인의 문장을 그대로 전사(轉寫)한 경우도 있었다. 또 여행에 즈음해서는 그들의 책을 갖고 다니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 일기는 때로 주의가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귀중한 기록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중국의 경우 이른바 지방문서가 극단적으로 적다. 개인의 일기나 가계부 류는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 때문에 세세한 잡사는 알기가 어렵다. 물가나 색채 감각, 일상의 즐거움이나 이웃과의 다툼, 이러한 생활 속의 세세한 일들이 의외로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런 일기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여행 가이드인 것이다.
그건 그렇고 중국 도시 연구의 기본적인 사료는 여기에서도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인쇄된 서적이다. 지방문서의 결여로 인하여 왕조의 역사나 일어난 일을 적은 기록이나 지방지 등의 이른바 관방 문서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것은 서민 생활을 깊이 파고 들어간 자료로서는 뭔가 남의 다리 긁는(隔靴搔痒) 느낌이 있다.
서민 생활을 훔쳐보기 위한 사료를 어떻게 구하면 좋을까? 필요한 것은 사소한 사료다. 유명, 무명의 지식인의 저작집이나 괴담, 기담을 위주로 한 소설집-이런 것으로부터 세세한 사료를 모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모든 것을 기록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쓰마쳰(司馬遷)의 나라 중국이다. 서민 생활을 생생하게 기록한 《이견지(夷堅志)》라는 괴담 이야기도 있고, 지식인들의 저작집에는 정부 안건이나 상주문에서 시나 묘지명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장이 기록되어 있다.
그밖에 특정의 도시에 관한 오리지널한 사료도 있다. 북송의 수도 카이펑에 관해서는 북송의 멸망과 함께 남으로 도망간 수도의 여행자 멍위안라오(孟元老)가 남긴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 여러 가지 것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남송의 수도인 린안(臨安), 곧 현재의 항저우(杭州)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쯔무(吳自牧)의 《몽량록(夢梁錄)》, 저우미(周密)의 《무림구사(武林舊事)》라는 상세한 사료 외에도 《도성기승(都城記勝)》, 《서호노인번승록(西湖老人繁勝錄)》 등이 있다.
이것들 외에도 송대 쑤저우(蘇州)의 기록으로는 당시의 지방지인 《오군도경속기(吳郡圖經續記)》, 《오군지(吳郡志)》 등이 있다. 근대에 편찬된 《송평강성방고(宋平江城坊考)》 등의 편리한 자료들도 있다. 이런 게 도시 연구의 기본적인 재료가 되는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도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런 것을 실마리로 중세 도시의 경관을 방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