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학經學과 한학漢學 1

1966년 1월 10일, 구졔강 선생이 고대 사료(경학과 한학)의 정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구졔강 선생은 역사학계의 대 스승이기도 하지만, 중국의 고대 경서(经书)들에 대해 독특한 견해를 갖고 있는 경학가이기도 하다. 경학이라는 것은 내게는 아주 생소하고 심오한 주제다. 나는 경건하게 가르침을 듣고 세세하게 기록했다. 그의 강좌가 시작된다.

우리는 그제에 이어 어제도 중국 역대의 잡사 저작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가 중국의 역사를 연구하려면 더 오래 된 사서, 곧 경서를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경서, 곧 ‘십삼경’은 중국의 주(周) 왕조와 주 왕조 이전의 역사다. 이 오래 된 경서가 최초로 편찬될 당시 작자들은 후대 사람들이 이 책들에 주를 달아야 할 필요를 느낄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공자가 나오고, 공자가 경서와 관계를 맺게 되면서부터, 경서를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교과서가 필요했고 그 교과서로서 경서를 채택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경을 강의할 것인가? 하나의 경서의 문자와 내용은 어떠한가? 이런 문제가 제기되었다.

경서는 공자 이전부터 이미 있어 왔다. 《서경(书经)》은 역사 문서로 이전부터 전해 왔고, 《시경(诗经)》은 공자 시대에 이르러 이미 책으로 이루어졌다. 단지 공자 이전의 고대 경서들이 공자 시대에 이르러, 그리고 공자 이후에 변화가 일어났고 그 모습이 달라지게 된 것 뿐이다.

孔子圣迹图

공자로부터 시작하여 유가는 대대로 경서를 전수했다. 한 세대, 또 한 세대의 스승들은 모두 경을 강의하기 위해서 경서에 해석과 훈고를 달았다. 다시 말하면 고어(古语)에다 그 당시의 언어로 주(注)를 단 것이다. 주석을 달고 해석할 때에는 모두가 대의(大意)를 드러냈다. 이렇게 주석을 달고 대의를 드러낸 것이 각 조대(朝代)마다 모두 달랐다. 점차적으로 당시의 상황과 사상, 대의로 옛 것을 논하고 옛 경서를 강론했던 것이다. 그래서 경서는 점점 더 자신의 본모습으로부터 멀어져 갔고, 어떤 것들은 근본적인 내용까지도 변화했다.

한대(汉代)에는 금문가(今文家)가 출현했다. 이 시기에 들어와 중국 문자의 서체가 새롭게 발전했기 때문이다. 즉 예서(隸书)가 출현했는데 이것이 금자체(今字体)다. 유가들은 새로운 글자체, 곧 예서로 고대의 경서들을 옮겨 적었다. 이렇게 하면서 빠진 곳도 있게 되었고 새로 더해지거나 틀린 글자도 생기게 된 것이다. 이때 책의 면모가 다시 한 번 변했으며, 이로부터 금문가가 등장했다.

한대의 금문가들 중에서 흔히 영향력 있고 내력 있는 사람은 경서에 자신의 말을 집어넣기도 했고 책 속의 옛 의미나 원래의 뜻을 한대인 자신의 사상으로 변화시키거나 전국시대 사람들의 사상인양 말하기도 했다. 경서는 이렇게 하여 변화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서를 연구할 때 그것을 공자의 사상이라고 볼 수 없으며, 더구나 공자 이전의 경서의 원래의 뜻으로 볼 수도 없다. 설사 원래 공자 자신이 했던 말이라 하더라도 경서의 원래 모습은 아닌 것이다.

한대에 이르러 경서는 새로운 자체(字体)로 쓴 경서와 경학으로 개편되었는데, 그 모두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나서 이미 원래의 면모를 잃어버렸다. 이 시대의 경학은 매우 많은 분파로 갈라져 나갔다.

《시경(诗经)》에는 제(齐)․노(魯)․한(韩) 3가가 있다. 제는 제(齐)나라 사람 위안구성(辕固生)이고, 노는 노(魯)나라 사람 선페이(申培)이며, 한은 연(燕)나라 사람 한잉(韩婴)이다. 《시경》에 대한 이 3가의 해설은 각각 달랐다. 이들은 곧 서한(西汉) 금문시학(今文诗学)의 개창자들이다.

《시경》은 중국 최고(最古)의 시가 총집으로써 대부분 민간 가요다. 이것은 주(周) 왕조로부터 춘추시대(春秋时代)까지 500여 년 간에 걸쳐 창작된 것들이다. 따라서 그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시경》 속에는 이 시기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필요한 귀중한 사료가 담겨 있다.

《상서(尙书)》에도 3가가 있다. 첫 번째는 어우양성(欧阳生 : 이름은 생(生))이고, 두 번째는 다샤허우(大夏侯:이름은 청(胜))이며, 세 번째는 샤오샤허우(小夏侯 : 이름은 졘(建))이다. 이 3가의 상서도 같지 않다.

《예기(禮记)》 역시 3가로 나뉜다. 첫 번째는 다다이(大戴: 더(德))이고, 두 번째는 샤오다이(小戴: 성(圣))이며, 세 번째는 칭(庆: 푸(普))이다. 3가는 세 개의 학파이기도 하다.

《춘추(春秋)》는 궁양(公羊: 이름은 가오(高)이고, 제나라 사람이다)의 《춘추공양전(春秋公羊传)》을 약칭한 《공양전(公羊传)》이란 것이 있고, 또 구량(谷梁: 이름은 츠(赤)이고, 노나라 사람이다)의 《춘추곡량전(春秋谷梁传)》을 약칭한 《곡량전(谷梁传)》도 있다. 이 두 책은 모두 춘추시대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평론을 가한 것으로 내용이 매우 공허하다.

《춘추》라는 책은 본래 노(魯)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서 노 은공(隐公)으로부터 노 애공(哀公)까지 200여 년 간의 역사가 서술되어 있다. 노 나라의 사서에는 당시의 다른 제후국들의 사실(史实)도 함께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이 이 시기의 역사를 ‘춘추시대(春秋时代)’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주역(周易)》은 스(施 : 이름은 처우(雠)), 멍(孟 : 이름은 시(喜)), 량츄(梁丘 : 량츄는 복성이고, 이름은 허(贺)) 3가로 나뉘는데, 이들의 해설은 각각 일치하지 않는다.

《주역》에는 《역경(易经)》이 포함되어 있다. 이 안에는 64괘(卦)의 괘사(卦辞)와 384효(爻)의 효사(爻辞)가 있으며, 나머지 다른 부분은 《역전(易传)》으로써 경을 해석해 놓았다. 이를테면 《서괘(序卦)》, 《설괘(说卦)》, 《잡괘(杂卦)》 등은 모두 10편이며, 《역경》에 대한 주석과 논술이다.

《역경》은 은나라 말기에서 주나라 초엽에 나왔다. 당시 사람들은 다양한 자연 현상과 사회현상들에 대해 이해를 못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을 찾고 점을 쳐서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고 길흉을 판단했다. 그것이 오래 되면서 몇 개의 부호와 문자로 정리되어 나왔으며, 《주역》은 이렇게 하여 점차 생겨나게 된 것이다.

《주역》은 점을 치는 미신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천문․역법․산술과 같은 고대 자연과학의 성취 및 그 시대의 사회 현상에 대한 설명이 반영되어 있다. 여기에는 풍부한 철학 사상뿐 아니라 사회 역사 및 자연과학 사상 등의 사료가 담겨져 있다.

《논어(论语)》는 공자가 죽은 뒤 그의 제자들이 펴낸 공자의 어록이다. 이 책도 한대에 이르러 제(齐)와 노(魯), 2가로 나뉘었다.

총괄하자면, 한대 유생들의 경서에 대한 설명은 일치하지 않으며, 금문파 내부에서도 서로 쟁론이 오갔다.

서한(西汉) 초년에서 동한(东汉) 시기에 이르기까지 국정본(国定本)의 경서는 모두 금문파의 것이다. 이때에는 금문파의 영수(領袖)를 ‘박사(博士)’라고 불렀다. ‘박사’는 대대로 세습되어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하고, 아들이 손자에게 전했다.

경서와 경학을 설명하는 데 왜 금문파 사이에 그렇게 많은 차이점들이 생기게 되었을까?

첫 번째 원인은 무의식중에 다른 점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无意立异)이다. 각각의 경서를 해석할 때, 각 가는 나름대로 자신들의 스승이 있었다. 스승들의 해석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으며, 듣는 사람이나 기록하는 사람들도 착오가 생기는 것을 피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한 대 한 대 내려가면서 착오가 점점 더 많아지고 커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무의식중에 분파가 형성되고 변이가 발행하게 되었다.

두 번째 원인은 고의로 분파를 형성한 것이다. 곧 서로 ‘박사’가 되려고 계획적으로 다른 설을 내세운 것(故意立异)이다. 그래서 경서를 강의하면 할수록 착오가 많아졌으며, 경문(经文) 자체도 그러한 변화가 생길 때마다 점점 더 증가되었다. 심지어 경문을 고의로 다르게 적는 수도 있었다. 이것이 한대의 경서가 달라지게 된 상황이다.

금문파 사람들은 공부를 그다지 하지 않았으면서도 권세는 높았기 때문에 경학에 혼란이 생기게 되었고, 그 결과 고문학파가 나타나게 되었다.

고문파(古文派)는 한대 사람인 류신(劉歆)이 창립했다. 류신은 학문이 뛰어났고 책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황제는 그를 초빙하여 황실 도서관인 천록각(天禄阁)과 석거각(石渠阁)에서 책을 교열하도록 했다. 류샹(劉向)과 류신 부자 두 사람은 모두 책을 교열했으며, 관명(官名)은 중루교위(中垒校尉)라고 했다. 류샹은 매번 책을 교열할 때마다 책 속의 대의를 한 번 해석하고 나서 그 책에는 몇 종류의 판본이 있으며 판본마다 어떤 다른 점이 있는지 기록했다. 류샹은 그렇게 해서 《칠략별록(七略别录)》이라는 책을 지었다. ‘칠략(七略)’은 정식 서목(书目)이고 ‘별록(别录)’은 서평(书评)이다. 청대의 지샤오란(纪晓岚)은 류샹을 본받아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库全书总目提要)》를 지었던 것이다.

류신은 류샹의 뒤를 이어 《칠략》을 썼다. 그는 당시의 모든 책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박사들보다 견문이 훨씬 넓었다. 한대 황실의 장서는 모두 고문자체(古文字体)로 쓴 것이었기 때문에 류신은 고자체의 경서로 금문학파의 착오를 바로잡았다. 그래서 고문학파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류신의 목적은 좋았으나 그 방법이 나빴다. 목적이 좋았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고서(古书)와 금서(今书)는 서로 부합하는 곳이 그다지 많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떤 금문학가들은 경서를 위해 쓴 ‘전(传)’, 즉 주석을 달아 놓았으나, 옛날 경서의 본뜻과는 사뭇 달랐다. 그래서 류신은 다시 다른 ‘전’을 써서 옛 경전의 본래의 뜻에 합치시키려고 했는데, 이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류신의 방법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좌전(左传)》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좌전》은 쭤츄밍(左丘明)이 지은 것이 아니라 류신이 지은 것이다. 《좌전》은 류신이 《춘추(春秋)》라는 역사 경서를 위해 쓴 주해, 곧 ‘전(传)’이다. 그는 왜 《좌전》을 쓰려고 했던 것일까? 그는 공양(公羊)이 《춘추》를 위해서 쓴 ‘전’이나, 구량(谷梁)이 《춘추》를 위해서 쓴 ‘전’이 모두 시원치 않고 원서와도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따로 황실의 장서를 자료로 하여 《춘추》의 ‘전(传)’을 썼던 것이다. 한대의 황실 장서 중에는 《국어(国语)》라는 책이 있었다. 과거에는 이 책을 눈여겨 본 사람이 적었다. 쓰마쳰만이 그것을 보고는 ‘쭤츄(左丘)는 실명했지만, 그에게는 《국어(国语)》가 있다(左丘失明, 厥有国语)’고 말했을 뿐이었다.

구 선생은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고사(瞽史: 눈먼 사관)’는 마땅히 ‘고(瞽), 사(史)’로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고(瞽)’는 시를 노래하는 것이고, ‘사(史)’는 시를 쓰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쭤츄가 사실은 ‘고(瞽: 장님)’가 아니었으며 실명(失明)한 적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쭤츄밍이 《국어》는 썼으나 《좌전》은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좌전》을 편사(编写)한 것은 류신으로서, 그는 쭤츄밍의 《국어》에 근거하여 《춘추》에 관한 ‘전’을 썼다. 왜 《국어》에 근거했던 것일까? 그것은 《국어》의 내용이 대부분 ‘춘추시대’의 사건들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어》는 춘추시대의 대사기(大事记)다.

한대 이전에는 《좌전》이라는 책이 없었고, 《국어》만 있었다. 그러므로 현재 전해 오는 《국어》가 이미 한대 이전의 《국어》가 아니라는 사실은 당연하다. 류신은 《좌전》을 편사하고 남은 자료들을 당시의 《국어》에 포함시켰으며, 그 후 이것이 후대에 전해져 현재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곧 원래는 《국어》라는 하나의 책이 류신의 손을 거치면서 《국어》와 《좌전》 두 종류로 나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두 책에는 진짜 사료도 있지만, 가짜 사료도 들어 있다.

류신은 한(汉) 애제(哀帝)로 하여금 《좌전》에 ‘박사’를 세우게 하여, 대대로 《좌전》을 강의하게 했다. 그 이후로는 고문학가에도 박사가 있게 되었다.

항차 《시경》에도 모공(毛公)의 《시경》이 나왔는데, 이것은 노(魯)지방 사람 마오헝(毛亨)이 《시경》에 전을 지어 다시 월(越) 지방 사람 마오창(毛苌)에게 전수한 것이다. 고문파의 《시경》은 금문파와는 달랐기에 당연히 박사를 세워야 했던 것이다.

또 고문파의 《상서(尙书)》 박사도 세워지고 《의례(仪礼)》에도 세워졌는데, 금문파의 경서에는 ‘왕(王)’에 대한 예가 없었으나 고문파의 경서 중의 예에는 ‘왕’에 관한 예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위해 박사를 세웠던 것이다. 《주관경(周官经)》은 곧 주 왕조의 관제(官制)를 기록한 것으로써 역시 박사를 세웠다. 또 《악경(乐经)》, 《이아(尔雅)》 등의 경서에도 박사가 세워졌다.

이렇게 난리를 치는 통에 금문학파가 크게 들고일어나게 되었다. 모두들 류신에 대해 악평을 늘어놓게 됨으로써 결국 류신의 작법(作法)은 성공하지 못하고 핍박을 받아 그 자신이 경성(京城)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뒤에 왕망(王莽)이 황제가 되자 다시 류신을 경성으로 불러들여 ‘희화(羲和)’라는 높은 관직을 내리고 문화를 전담시켰으며 국사(国师)까지 겸임하게 했다. 그러자 그는 금문파를 압박하고 그가 세우려 했던 고문파의 경서 하나하나에 모두 박사를 세웠다. 고문 경서를 잘 아는 이는 류신 자신뿐이었기 때문에 쉽게 파벌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그는 곧 고문을 아는 사람 1000 명을 경성으로 소집해서 그들로 하여금 공동으로 고문 경서의 착오를 바로잡도록 했다. 《설문해자(说文解字)》는 곧 그 당시 이런 상황 아래서 만들어진 것이다.

적미(赤眉)가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아마 왕망은 멸망하지 않았을 것이며 류신도 성공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왕망은 급속히 망해 버렸고, 류신이 세웠던 박사도 모두 취소되었다. 금문학파는 다시 새롭게 일어났으며, 동한 일대의 경서는 완전히 이 금문파의 경서가 되어 버렸다.

고문파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은 조정의 권좌로부터 물러나 다시 민간에 뿌리를 내려야 했다. 그들은 민간에서 경서에 대한 학설을 서로 전함으로써 고문파의 경학이 민간으로 전파되게 되었다. 그때 전수했던 동한 사람들은 쟈쿠이(贾逵)․정싱(郑兴)․마룽(马融)․정쉬안(郑玄:호는 康成) 등과 같은 인물들이었다. 청대에는 정쉬안을 매우 존중했다. 그 일파 사람들은 학식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그들을 신봉하게 되었다. 비록 뒤에 고문학파에는 박사가 세워지지 않았고, 고문 경서 역시 실전된 것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런 인물들에 의해 몇몇 경서들이 지금껏 전해 오는 것이다.

양한(兩汉)시대는 고문파와 금문파가 서로 투쟁하던 시기였다. 이때의 경학을 한학(汉学)이라고 부른다. 진(晋) 왕조 및 그 후에는 고문파와 금문파의 투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