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는 명나라를 훌쩍 뛰어넘은 차원이 다른 제국이었다. 대청제국이란 말로 요약할 수도 있다. 명대에서 청조로는 시간상 연접할 뿐이지 단순한 왕조교체가 아니다. 일단 영토가 두 배로 확대됐다. 민족구성이 완전히 달라져서 한족 중심의 나라에서 만주족이 한족 몽골 위구르 티벳을 포괄하여 지배하는 다민족 국가로 전변했다. 그에 따라 지배구조와 체제 등이 명과는 완전히 다른 제국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시대 순으로는 쑨원의 중화민국이 청나라를 국체를 바꿔 계승했고, 마오쩌둥의 신중국은 중화민국을 혁명으로 뒤엎어 승계한 것이다. 그러나 통치체제를 주목하자면 21세기 신중국은 청나라를 모태로 하는 격세 유전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지난해 봄 <만주족 이야기>(이훈, 만주사 연구자)라는 한 권의 역사서를 손에 잡게 됐다. 나는 책과 함께 지도를 펼쳤고 일주일 만에 답사용 손그림 지도 한 장을 완성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자와 조우하게 되었고 일년 뒤에는 답사여행까지 동행하게 됐으니 여행객으로서는 최고의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지난여름 이훈 선생과 함께 다녀온 15일간(7.1~15)의 <만주족 역사기행>을 몇 회에 나누어 변방으로의 여행을 이어간다.
답사여행은 하얼빈에서 시작했다. <금나라 상경유지 박물관>을 먼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박물관이 세워진 하얼빈시 아청구(阿城區)는 여진족의 금나라(1115~1234)가 수도[上京]로 삼았던 그들의 발상지이다. 여진족-만주족 천년 역사는 이 박물관을 출발점으로 삼을 만하다. 그러나 금년 내년에 걸쳐 대대적으로 수리하느라 문을 닫고 있어 크게 아쉬웠다.
첫 번째 답사지는 하얼빈의 허커우(河口) 습지공원이었다. 후란하(呼蘭河)가 남류하여 쑹화강에 합류하는 지역이다. 강이라지만 바다의 느낌이 들 정도로 수면이 넓다. 하얼빈 시민들이 좋아하는 여름 물놀이 공원이다. 이곳은 누르하치가 통일하기 이전의 여진족 분포와 관련이 있다. 15세기 후반 여진족은 건주여진 해서여진 동해여진 등 초기국가 수준의 느슨한 부족연맹체 세 개로 산재해 있었다.
후란하는 해서여진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해서(海西)는 쑹화강이 북류하다가 동류로 바뀌는 지역을 칭하는 ‘하이시’란 말을 음사한 것이다. 동류하는 쑹화강을 하이시강이라고도 한다. 해서여진의 울라부와 하다부의 선조는 훌룬강, 곧 지금의 후란하 일대에 살았던 훌룬이다. 훌룬은 몽골의 공격을 받고 남으로 밀려나 여허부 호이파부와 함께 해서여진을 이루었던 것이다.
후란하 습지공원에서 나와 동쪽으로 세 시간 넘게 차를 몰아 이란현(依蘭縣)으로 갔다. 무단강이 북류하여 쑹화강에 합류하는 곳이다. 이란현은 건주여진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누르하치의 6대조인 몽케테무르(1370?~1433, 청대 사서에서는 孟特穆, 조선에서는 猛哥帖木兒로 기록되어 있다)는 오도리부를 이끌고 이곳에서 살았었다. 그러나 우디거와의 상쟁에서 패배하여 남으로 이동해 조선의 회령에 정착했다가 훗날 압록강 북부로 이동하여 건주여진의 주력이 된 것이다.
이란현에는 금나라 이전의 여진족이 남긴 오국성(五國城)이 있다. 요나라(916~1125) 시대에 여진의 다섯 부족이 회맹한 곳이다. 지금은 토성의 기단 일부만 남아 있다. 난간이 쳐져 있고 표지가 있으니 고성이라고 알아볼 뿐 잡초가 무성한 흙더미로 보이기 십상이다. 이런 흙더미를 작은 삽으로 하나하나 긁어내 천년역사를 복원해내는 고고학자들의 노고에 감탄할 뿐이다.
오국성에는 금나라의 흥기했던 역사가 진하게 새겨져 있다. 북송의 마지막 황제인 휘종과 흠종을 포로로 잡아와 유배했던 곳이 이곳이다. 금나라의 빛나는 승리이자 북송의 처참한 말로인 정강의 변(1126)을 떠올리게 된다.
이란현에서 무단강(牧丹江)이 쑹화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은 소박한 강변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넓은 강물을 따라 걸어가니 바지선을 이용한 큼지막한 수상식당이 나타났다. 무단강은 후르카강 또는 후르하강이라고도 불렸다. 여진어로 큰 그물이란 뜻이다. 수상식당에 자리를 잡고는 후르카로 잡았을 게 분명한 큼직한 잉어를 골라 요리를 주문했다. 동반자 모두 ‘후르카’ 요리로 풍성한 저녁식사를 즐겼다.
답사일행은 닝안(寧安)의 닝구타(寧古塔) 고성을 향해 무단강을 거슬러 남하하기 시작했다. 닝구타는 탑의 이름이 아니라 여섯(닝구) 개(타)란 뜻의 만주어 지명이다. 이곳은 누르하치가 동해여진을 정복한 중심지였다. 닝구타 파견군 주둔지는 신성과 구성 두 곳이 있다. 신성은 닝안시 중심이다. 시내에 <닝구타 역사문화 박물관>이 있으나 전시내용이 빈약해서 실망스러웠다.
닝구타 구성은 하이린시(海林市)에 있다. 닝안시에서 30여 킬로미터 거리이다. 도로변에 있는 <닝구타장군부 주지 구성유지>라는 팻말이 안내해준다. 넓은 밭 중간에 성벽 일부가 남아 있다. 오국성 유지와 마찬가지로 토성이다. 어지럽게 가지를 뻗은 나무들이 뿌리를 박고 있는데다가 철조망까지 설치돼 있어 볼품은 없었다. 그러나 철조망에 걸린 해설판은 우리의 눈길을 잡아당겼다. 닝구타 장군부의 역사를 비롯해 진주 채취에서 해동청까지, 만주족 특유의 습속에서 이곳에 유배되었던 유명인사들까지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시내의 번듯한 박물관보다 내용이 훨씬 풍부했다.
이란현과 닝구타 일대를 비롯한 무단강의 동부는 동해여진이 넓게 흩어져 살았으니 닝구타 장군부는 누르하치가 동해여진을 정복한 징표인 셈이다. 누르하치는 1610년 처음 이곳을 정벌하여 상당수의 동해여진 부민들을 끌어갔다. 이후에도 포로 획득을 위한 원정이 수차례 있었다. 누르하치 후계자인 홍타이지는 1636년 주방(駐防)이라 하여 아예 정규군을 주둔시켰다. 정복해서 인구와 영토를 지배하기보다는 인적 자원을 확충하는 전략이었다.
닝구타 고성을 둘러본 다음날 지린과 창춘을 거쳐 선양으로 여정을 이어갔다. 해서여진의 울라부와 여허부의 고성을 찾아가는 길이다. 울라부는 지린시 북쪽 우라제진에 울라고성(烏拉古城)이 남아 있고, 여허부는 쓰핑시(四平市) 예허진에 여허고성(葉赫古城)이 남아 있다. 울라고성은 내성의 벽체가 일부 남아 있다. 울라부는 해서여진의 정통이란 자부심이 강했지만 굴기하는 누르하치의 힘에 맞설 수는 없었다.
여허고성은 구릉지대에 있었다. 여허부는 몽골인과 여진인이 혼합된 부락이라 건주여진에서는 몽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여허부는 누르하치의 처가였다. 홍타이지의 생모이자 누르하치의 부인인 몽고거거가 여허부의 공주였다. 그러나 정략결혼은 정략이 핵심이지 천생연분이 우선인 것은 아니었다. 누르하치가 명-조선 연합군을 상대로 벌인 사르후 전투(1616)에서 여허부는 명에게 지원군을 보냈다. 그러나 여허의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누르하치는 이미 대승을 거둬 판세는 기우루었고, 여허의 지원군은 전장에 나서지도 못하고 맥없이 돌아갔다. 그 후과는 참혹한 누르하치의 보복이었다. 해서여진의 다른 3부는 사르후 전투 이전에 이미 누르하치에게 정복된 상태였다. 홀로 남은 여허의 결과는 뻔했다.
훗날 홍타이지는 병자호란(1636)에서 인질로 잡아온 조선의 소현세자를 데리고 이곳 여허고성에도 왔었다. 소현세자는 “옛 땅은 비옥하나 사람은 없고 쑥만 자라 하늘에 닿았다.”라고 소회를 기록했다. 지금의 여허고성은 옥수수 바다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이다. 명맥은 끊어지고 부민은 만주족에 흡수된 그들의 처지가 연상된 탓이리라. 여허부를 끝으로 해서여진의 4부는 모두 누르하치에게 복속되었다. 누르하치의 여진족 통일이 완성된 것이다.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이제 본격적으로 대륙을 넘보기 시작했다. 우리는 누르하치를 대면하기 위해 선양에 짐을 풀었다.
중국여행객 윤태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