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음사로 음란함을 잠재우려 설법하고
여색으로 색욕을 말하기 시작하다
止淫風借淫事說法 談色事就色慾開端
검고 찰진 머릿결 오래지 않고
발그레한 얼굴 쉬이 주름져
인생은 늘 푸른 소나무가 아닐지니
돈도 명예도 한 순간에 흩어져
한 조각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 같아
젊음 잃고 서러움에 후회한들
풍류를 즐기던 곳도
늙은이는 쫒아낸다.
있는 집 자식들은
금루의 노래를 듣고
여색이라는 약을 사랑하지
세상살이
진정한 즐거움은
아무리 헤아려도
잠자리에 있다오,
부귀영화에 비할소냐?
고통 끝 행복 시작이로세
아침마다 편안하고
달콤한 잠자리에
새벽종이 울릴까 걱정.
눈을 떠서 보거라
대명천지 펼쳐진
사랑의 궁전을
黑髮難留, 朱顔易變, 人生不比靑松. 名消利息, 一派落花風. 悔殺少年不樂, 風流院, 放逐衰翁. 王孫輩, 聽歌金縷, 及早戀芳藥.
世間, 眞樂地, 算來算去, 還數房中. 不比榮華境, 歡始愁終. 得趣朝朝燕, 酣眠處, 怕響晨鐘. 睜眼看, 乾坤覆載, 一幅大春宮.
위에 글은 ‘뜰에는 꽃들이 만발하네’라는 의미의 만정방滿庭芳이라는 노래로 날마다 힘들고 우울하여 즐거움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도 태곳적 세상을 만든 성인께서는 남녀 사이 교합의 정을 만들어 사람의 고통과 번뇌를 풀어주고 매우 힘든 지경에 이르게 하진 않으셨지. 물론 융통성 없는 고루한 유생儒生들은 말한다.
“여인네 허리 아래 물건은 우리를 낳은 문이요, 우리를 죽이는 문이다.”
하지만 이런 방면으로 도통한 친구들은 말하지.
“인생살이 이런 즐거움이 없었다면 진작에 머리털이 파뿌리 되고 명줄도 짧아졌을 걸.”
믿지 못하겠다고? 그럼 절간의 중들을 봐. 사오십에 머리가 하얗게 쇠지 않은 이가 몇이나 되고 칠팔십에 몸을 제대로 가누는 이가 몇이나 되는지?
어떤 이들은 말하지.
“비록 중들이 출가를 하여 수도생활을 하다가도 때론 몰래 부인네와 정을 통하고 상좌 중도 슬쩍 건드려. 속인들과 마찬가지로 근본을 지키지 못해 장수하지 못하는 거야.”
그렇다면 서울에 사는 태감(환관)들은 어때? 부인들과 몰래 정을 통하지도 제자들을 건드리지도 못할뿐더러 그리할 거시기도 없잖아? 이치대로라면 마땅히 젊고 싱싱해 백세 장수를 이루어야 하거늘 얼굴에 쪼글쪼글 주름은 왜 이리도 많은 거야? 머리는 왜 그리도 빨리 하얘지는 건지. 이름은 공공[환관을 일컫는 말이지만 할아버지라는 의미도 있음]이지만 사실은 노파잖아? 오래 살았다는 장수長壽의 편액匾額을 걸어놓은 서울 사는 평민들은 더러 있지만 백세까지 살았다고 패방牌坊을 세운 환관, 내시들은 들어보지 못했어. 그러니 여색女色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거지. 다만 《본초강목本草綱目》같은 책에 실리지 않아 설명이 없을 뿐이라고.
어떤 이는 여색이 사람을 살린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사람을 해치는 것이라고도 말하지. 이것을 만일 증명해본다면 여색은 사람을 살리는 것뿐 아니라 약효가 인삼이나 부자附子처럼 될 수 있어. 인삼과 부자는 몸을 크게 보補하는 약이라 반드시 오래 복용해야하고 많이 복용하면 안 되는 것이야. 약이지 밥이 아니거든. 만일 무턱대고 시도 때도 없이 배불리 먹는다면 사람을 상하게 할 거야. 성관계도 마찬가지지. 보약처럼 오래 복용하듯 하면 음양이 조화를 이뤄 건강해지고, 지나치면 심장과 신장의 기능이 상충하여 건강을 해치게 된다. 약으로 삼으면 가슴이 갑갑하고 옆구리가 결린 증상을 풀어주는 즐거움이 생기고, 밥처럼 먹으면 정기, 혈맥과 진액을 고갈시키는 해가 있게 되는 거야.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여색을 약처럼 여겨야해. 너무 드문드문 하거나 너무 자주 하거나 하지 않으면 좋지 않을 것도 아주 좋을 것도 없는 거라고.
성 관계를 멀리하는 사람은 마땅히 “이것은 약이지 독이 아니야. 뭐가 두렵겠어?”라고 생각을 해야 하고 이미 이것을 자주하는 사람은 “이것은 약이지 밥이 아니야. 어찌 욕심을 부리겠어?”라고 생각을 해야 해. 이렇게 하면 음양이 조화를 이루게 될 테니 어찌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어? 다만 한 가지 여색이라는 약은 인삼, 부자와 약성은 서로 같으나 생산지와 사용법은 다소 상반되는 점이 있어. 약을 복용하는 사람은 반드시 알아야 하지. 인삼이나 부자는 유명한 산지의 제대로 된 것이 좋고 중국 토종은 별 볼일이 없어. 하지만 여색은 토종이 좋고 외래종은 백해무익할 뿐 아니라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지. 뚱딴지같이 무슨 토종이고 외래종이냐고?
관계를 맺을 때 자기 집의 처나 첩은 멀리서 구할 필요가 없고 돈을 쓸 필요도 없으며 당기면 오고, 하고 싶을 때 하니 이것이 바로 토종이지. 내 맘대로 함께 널브러져 잠을 자도 구애받지 않고 누가 문을 두드려도 놀라거나 경기를 일으킬 이유가 없으니 원기가 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손의 대를 잇는 데도 도움이 돼. 또 한 번의 교감으로도 온 몸이 거뜬해지니 어찌 몸에 이롭하고 하지 않겠어?
한편 권세 있는 집안의 아름다운 여인이나 돈푼 꽤나 있는 집구석의 예쁘게 꾸민 치장한 아가씨들은 마치 야생 오리의 신선한 맛과 같아서 집에서 키우는 닭들은 짐짐하게 느껴진다고나 할까.? 노쇠한 마누라를 어찌 푸릇푸릇한 젊은 애들에 견주겠어? 그래서 이런 여인들을 외래종이라고 한 거야.
만일 이런 부인네에게 빠지면 잠을 자도 생각나고 꿈을 꿔도 그리우며 손에 넣으려 부단히 애쓰지. 처음에는 사랑에 빠져 심란해지고 나중에는 선물공세를 퍼부으며 어떨 땐 담을 넘어 약속한 장소로 달려가고 혹은 담벼락에 구멍을 뚫어 서로 만나 정을 통한다. 급기야는 색정행각이 하늘을 찌를 만큼 대담해져 결국 작은 일에도 쥐새끼마냥 혼비백산하고 비록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누가 오는 것처럼 느껴져 관계를 맺을 땐 땀을 흘리지 않아도 두려움에는 식은땀을 흘린다. 아녀자의 정이 깊어질수록 영웅의 기상과는 멀어져 결국 깊은 수렁에 빠지고 엄청난 재앙에 얽혀 도덕적 내상을 입고 법을 어겨 죽임을 당하게 돼. 목숨으로 보상할 사람은 이미 죽어 없고 그의 처는 오히려 살아있으니 그의 아내는 먹고 살기위해 마치 정절을 잃은 아녀자와 같이 되어 갖가지 음란한 짓에 연루되고 종국에는 그 비참함이 이루 말할 수 없게 된다. 때문에 여색이라는 두 글자는 절대로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찾거나 옛 것에 싫증이 난다고 새 것을 구하면 안 되는 거야.
이 소설을 지은 이는 그저 쓸데없이 남을 걱정하는 마음이 앞서 세상 사람들에게 욕망을 절제하기를 권하고 욕망대로 방종하면서 사는 것을 권하는 게 아니며 사람들에게 음란함을 은밀하게 하려는 것이지 대놓고 까발리려는 것이 아니야. 독자 여러분은 그의 뜻을 잘못 알면 안 된다. 사람들의 욕망을 절제하고 음란하지 않게 하려면 유가 경전이나 지어 풍속을 교화할 일이지 어째서 이런 음담패설을 썼냐고? 여러분들이 모르는 것이 있어.
낡은 풍속이나 습관을 고치는 법은 시류에 따라 이끌어야 그 말이 잘 먹히는 거야. 요즘의 세태를 보면 성현의 말씀이나 일생을 기록한 책을 읽는 것은 꺼리고 소설나부랭이나 읽는 것을 좋아하지. 소설나부랭이도 충효, 절개, 의리 같은 것을 다룬 것은 싫어하고 외설스럽고 황당무계한 책들만 좋아해. 오늘날의 풍속은 윤리가 무너지고 음탕함이 정점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어. 만약 그래도 윤리, 도덕을 논하는 책을 써서 사람들에게 착하게 살라 권한다면 사람들이 돈을 주고 사보지 않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을 것이야. 마치 좋은 일하기를 즐겨하는 집에서 불경을 펴내는데 보시를 하여 경전을 간행하고 한 질로 장정하여 사람들에게 돈을 받지 않고 나누어 주어도 사람들이 책을 부수고 갈라서 장독을 막고 이를 찢어서 담배종이로 쓰는 것과 같으니 어디 책에 눈길이라도 한 번 주겠어? 차라리 욕정의 소재로 그들을 자극하면 그들은 흥미진진하게 이를 보다가 불현 듯 몇 구절 훈계의 말에 두려워 탄식하며 “여색을 좋아함이 이렇구나. 어찌 몸을 보존하여 오래도록 즐거움을 누리지 않겠는가! 모란꽃 아래 귀신이 되고 허명에 힘써 실상을 잃어버리겠는가!”라고 할 것이다. 또한 인과응보가 쓰인 부분을 보고 가벼이 한 두 마디의 훈계의 말에도 철저히 대오각성하여 “간음의 업보가 이와 같으니 어찌 나의 처첩과 즐거움을 누리지, 헛돈으로 빚을 감는 듯 귀중한 것을 버려 하찮은 것을 얻겠는가?” 라고 할 거고. 여기까지 생각하면 자연 나쁜 길로 가지 않을 것이고 나쁜 길로 가지 않으면 자연스레 남편은 그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그 남편을 공경할 것이니 《주남》과《소남》의 교화가 바로 이것이지.
이것을 ‘사실에 입각하여 시비를 논하고 사람으로 사람을 다루는 법’이라고 하지. 이는 패관야사를 다루는 사람이 사용하는 방법일 뿐만 아니라 경전에 나오는 성현들도 앞서 이렇게 한 이가 있었어. 못믿겠다고? 이제 전국시기 맹자가 제선왕에게 왕도정치를 이야기하는 것을 보자. 제선왕은 가무와 여색, 재물과 이익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왕도정치는 그가 좋아하는 바가 아니었어.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되는대로 말했지.
“선생의 말씀이 너무 좋습니다.”
“왕께선 왕도정치를 좋다고 하시면서 어찌하여 실행하지 않습니까?”
“과인은 병이 있는데 재물을 좋아합니다.”
맹자는 공유가 재물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로 제선왕을 끌어들이지. 제선왕은 또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과인은 병이 있는데 여색을 좋아합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지금껏 걸왕, 주왕과 같은 짓을 기꺼이 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왕도정치 같은 것은 하지 않겠다는 답변이 분명했어. 맹자가 융통성 없고 고루한 사람이었다면 정색을 하고 선왕이 여색에 빠진 것을 충고했겠지. 예로부터 제왕에게는 권계하는 바가 있어 백성이 여색을 좋아하면 몸을 망치고, 대부가 색을 좋아하면 지위를 잃고 제후가 색을 좋아하면 나라를 잃으며 천자가 색을 좋아하면 천하를 잃는다고 말이야. 만일 제선왕이 이 말을 들었다면 입으로는 말하지 않아도 마음속으로는 반드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이처럼 과인을 구제불능에 백약이 무효로 여기니 선생도 별 소용이 없겠군.’
그런데 맹자가 오히려 태왕이 여색을 좋아한 선정적인 연애 이야기로 제선왕을 꾀어 그가 흥미진진하게 듣고 멈추지 못하게 할 줄 누가 알았겠어? 생각하면 태왕은 말을 타고 난리를 피할 때에도 여전히 강녀를 데리고 다닐 정도로 평생 여색을 좋아하였다. 이처럼 한시도 부인과 떨어지지 못했으니 음탕한 군주라는 것을 알 수 있지. 그런데 어찌하여 몸을 망치고 나라를 잃지 않았을까? 도리어 태왕이 여색을 좋아하여 부인을 데리고 다니는 것을 본받은 그 나라의 남자들이 난리 통에도 부인을 데리고 다녀 태왕이 부인 강녀와 즐거움을 나눌 때 온 나라의 남자와 부인들도 즐거움을 나누었어. 이는 따뜻한 봄볕이 모든 이를 비추듯 천지간에 사사로움이 없는 교화라고 할 수 있으니 어느 누가 태왕을 칭송하지 않고 감히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겠어? 제선왕은 여기까지 듣고 자연스레 왕도정치를 하고 싶어졌고 다시는 “과인은 병이 있습니다” 따위의 말을 꺼내지 않았어.
이 소설을 지은이는 이와 같은 것에 출중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세상의 독자여러분들은 경전이나 역사책을 사본다 여기고 단순한 소설로 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독자 여러분들이 맞닥뜨리는 곳은 훈계의 말이거나 교화의 말이니 마음속에 담아 깊이 깨달아야 할 거야. 소설 가운데 남녀교합의 정을 형용한 것이나 방사의 즐거움을 묘사한 것은 외설에 가까운 것이 없지는 않으나 결국 독자들을 끝까지 읽게 하여 그 결과를 보고 경계함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감람 열매와 같은 책이 되어 뒤에 설령 음미할만한 뒷맛이 있다고 하더라도 마치 입에 넣으면 시고 떫으니 사람들이 무엇을 씹으려고 하겠어?
내가 남녀의 교합을 묘사한 것은 감람 열매를 대추 과육으로 싼 것처럼 사람들을 끝까지 음미하도록 이끌기 위해서니 싫어하지 말고. 서두부터 지나치게 번잡했군. 본격적인 이야기는 다음 회를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