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눠唐諾-부, 명예, 권력에 관한 단순한 사색我有關聲譽、權勢和財富的簡單思索:절대 수요에 관한 어떤 실험一次有關絕對需求的實驗

절대 수요에 관한 어떤 실험一次有關絕對需求的實驗

사실 그 절대 수요의 한계선에 관해 이야기한 책이 있는데, 단지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실제 삶으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의 진정한 설득력은 작가의 다소 가벼워 보이는 설명이 아니라 행동 그 자체와 그로 인한 결과에서 비롯되며 마치 탱크처럼 강력하게 우리의 회의와 불안을 깔아뭉개며 지나간다. 작가는 그렇게 일종의 완전무결한 삶을 3년간(1844년 7월 4일부터 1847년 9월 6일까지) 영위하는데, 그 삶의 기록인 이 책은 바로 누구나 잘 아는 『월든』이다. 작가인 ‘미국의 안연’은 젊고 정력적이며 느낌상 은사라기보다 개척자에 가까웠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였다.

그런데 『월든』이 “누구나 잘 아는” 책이라는 게 맞나? 아직도 그럴까?

『월든』은 일, 이차 세계대전 이전에 아직 탈바꿈하지 못하고 궁벽한 지역에 머물렀던(문화적으로 특히 그랬다. 바르고 성실한 청교도들이 무슨 문화가 있었겠는가) 미국의 얼마 안 되는 자랑스러운 문화유산 중 하나이다. 그밖에 나다니엘 호손과 마크 트웨인의 소설, 허먼 멜빌의 『백경』,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 등이 있으며 보르헤스가 우리를 위해 에드거 앨런 포, 랄프 왈도 에머슨, 월트 휘트먼, 이 세 사람을 추가해주었다. 물론 이 책들과 저자들은 전부 다 훌륭하다. 하지만 역시 훗날 미국의 중요도가 비할 데 없이 높아져 이 강국을 이해하는 게 전 세계인들의 필수 과제가 되면서 이 책들과 저자들도 덩달아 소급되어 주목을 받고, 읽히고, 해석되고, 동경의 대상이 된 것(사후 명예)을 잊지 말아야 한다. 꼭 그 속에서 미국이 강대해진 비밀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월든』은 오늘날 타이완과 중국에서 전혀 다른 대접을 받고 있다. 타이완에서는 기본적으로 이미 사라진 책이 되고 말았지만, 중국에서는 최대 인터넷서점 당당닷컴(當當網)에서 몇 가지 판본이 줄곧 문학 베스트셀러 순위에 나란히 올라 있고 수시로 10위권 안에 진입하며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이것은 모든 출판사가 바라 마지않는 판매 형태이다)가 된 상태이다. 이것은 곧 중국인들이 여전히 『월든』을 ‘꼭 읽어야 할 책’으로 보고 지금 자신들이 사는 사회의 모든 ‘알아야 하고 참여해야 하는 사물’ 속에 포함시키는 동시에 실제로 그것을 어떻게 읽든지 간에(사기만 하고 안 보든, 5쪽만 보든, 아니면 봐도 모르든 간에) 어떤 공공영역과 공공공간을 의식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표현을 바꾸는 것이 옳을 듯하다. 어떤 책이 타이완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타이완에서 점차 ‘꼭 읽어야 할 책’ 같은 개념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이다. 이렇게 표현을 바꾸면 유익하게도 우리의 시선은 어떤 책의 운명에 대한 애석함과 애도에서 우리가 사는 사회에 대한 여러 가지 확실한 인식 쪽으로 옮겨진다. 이를 통해 우리는 또 위의 사실이 타이완에서 공공영역과 공공공간이 지속적으로 쇠락하고 있고 공공적인 것 중 남은 것은 거의 시장밖에 없으며, 아울러 실질적인 내용의 공동화가 시작되어 겨우 충동과 감정만 남음으로써 계속 생각하고 논의할 거리가 제공되지 못하게 되었음을 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정말 이렇게 쭉 가려나?” 이 말은 내 오랜 친구가 타이완의 미래에 대해 웃으며 던진 질문이다. 요 몇 년간 우리도 점점 똑똑해져서 정색하지도, 초조해하지도, 또 기대를 품지도 않고 무슨 일이든 웃으면서 말하곤 한다.

아마 타이완과 중국이 전혀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각기 현대사회의 서로 다른 시간대에 처해 있을 뿐이다. 타이완에서도 과거에 의무처럼 열렬히 이 책을 사고 들춰보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중국이 이런 추세에 대해 어떤 특수한 저항력과 막고자 하는 바람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저 지연시키는 게 고작일 것이다. 더구나 늦게 출발한 쪽이 보통 더 빠르게 달리는 법인 데다 이 세계는 확실히 전체적으로 서로 닮아가는 경향이 있다.

타이완에서 『월든』은 초창기에 본래 『호반 산문』이라는 꽤 아름다운 제목을 갖고 있었다. 이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이 책을 인생에 대한 지혜의 잠언이 담긴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산문(전형적인 베스트셀러 유형이다)으로 잘못 알고 잘못 읽었다. 『월든』은 당연히 급진적인 책이고 특히 그 시대 타이완의 우파 독재체제의 민감한 기준으로 보면 더더욱 그럴 수 있었다. 좌파적이다 못해 무정부적이기까지 한 『월든』의 사유는 놀랍고 유해한 게 당연했다. 그런데도 이 책이 성대하게 출판될 수 있었던 것은 출판의 주체가 타이완 주재 미국공보원이었고 그 뒤에 막강한 CIA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국의 국위를 선양하기 위한 용도로 출판되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월든』은 본디 미국의 문제를 지적하는 책으로서 저자 소로는 당시 미국 정부에 의해 하룻밤 투옥을 당한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멕시코 전쟁에 항의해 인두세 납부를 거부한 것이 원인이었다). 하지만 세월의 신기한 작용으로 이 책은 ‘독소’가 희석되었으며 타이완에 와서 우리에게 ‘오독’되었다. 오독된 덕분에 중독도 발생하지 않았다.

최근에 또 우연히 『시민 불복종』 때문에 저자 소로의 이름이 다시 타이완에서 거론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저 ‘시민 불복종’이라는 5글자짜리 주문뿐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1848년의 그 강연 원고를 찾아 읽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울러 더더욱 그 책을 논할 필요가 없었던 까닭은, 책에 담긴 저항의 사유와는 무관한 상황이 현실에서 펼쳐졌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 학자 양자오楊照가 노파심에 ‘시민 불복종’에 대해 해설한 글을 보았다(과연 아무 내용 없는 비난만 잔뜩 불러일으켰다). 물론 그것은 그저 정당한 반란의 선언이 아니고 예외적인 위법의 허용은 더더욱 아니며 역사적으로 고대 그리스 소크라테스의 재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시 말해 일찍이 2천여 년 전에 이미 사람들은 그것이 매우 곤란하면서도 진퇴양난에 빠지기 쉽다는 것(예컨대 법치 수호와 개인적 신념의 충돌과 그 경계)을 깊이 헤아리고 있었다. 소크라스테스가 음독자살을 택한 것은 바로 어느 한쪽을 희생시키거나 훼손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2천 년 전 사람이 지금 우리보다 더 많이 알고 이성적이었으니 정말 체면이 말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역사의 반복과 관련해 처음은 비극이고 끝은 희극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나는 “인류 역사의 마지막 선택은 자신을 만화로 그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Henry David Thoreau, 사진 B. D. Maxham

시민 불복종에 관해서는 적어도 한나 아렌트의 정리된 논의를 볼 필요가 있다. 시보출판사時報出版社가 출판한 그 책은 당연히 『월든』보다 훨씬 어렵다. 그리고 분명히 절판되었을 것이다.
“1845년, 거의 3월 말이 되었을 때 나는 도끼를 빌려 월든 호수의 숲으로 갔다. 그리고 내가 집을 짓는 곳과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목재용으로 크고, 곧고, 수령樹齡이 높지 않은 백송을 베기 시작했다. 물건을 아무것도 안 빌리고 일을 시작하기란 매우 어렵다. 하지만 물건을 빌리는 것은 누가 자기 일에 흥미를 느끼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 도끼의 주인은 내게 도끼를 주면서 그게 자기가 애지중지하는 물건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빌렸을 때보다 더 잘 들게 해서 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