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잡사雜史 1

1966년 1월 8일, 구졔강 선생이 잡사(杂史)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미 ‘이십사사’에 대해서는 알아보았으므로, 오늘은 중국 사서에서 또 다른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잡사(杂史)에 대해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정사(正史)는 소수의 사람들이 쓰는 것이지만, 잡사는 아무런 제약이나 한계가 없으므로 역대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써놓았다. 그러므로 잡사에 속하는 책의 수량이 방대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잡사의 형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어떤 것은 정사의 체제를, 어떤 것은 필기(笔记)의 체제를 따르고 있다. 또 어떤 것은 시(诗)나 문(文)의 체제이며, 어떤 것은 소설의 체제다. 이런 저작들 속에는 어떤 정식 사서에도 기록된 적이 없는 역사적 사실들이 많이 실려 있다.

중국의 잡사 서적은 역대로 꽤 많은 분량이 전해 오는데 이제 하나씩 개괄해 나가기로 하겠다.

한대(汉代)의 잡사

먼저 한대의 잡사 서적부터 시작하자면,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서경잡기(西京杂记)》: 이 책에는 한대의 수많은 고사들이 기록되어 있다. 책의 작자에 대해서는 정론이 없는데, 류신(劉歆)이라는 주장과 진대(晋代)의 거훙(葛洪)이라는 주장이 있다. 예를 들어가며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한서(汉书)》에는 왕자오쥔(王昭君)에 관한 고사가 아무 것도 실려 있지 않다. 단지 후한예(唿韩邪) 찬위(单于)가 한 원제(元帝)에게 입조(入朝)했었는데, 이때 원제가 그에게 왕자오쥔을 하사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서경잡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당시 화공인 마오옌서우(毛延寿)는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려 주면서 그때마다 궁녀들에게서 돈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왕자오쥔이 그에게 돈을 주지 않자 마오옌서우는 고의로 왕자오쥔의 용모를 추하게 그렸다. 원제는 그 화상을 보고 왕자오쥔을 찾지 않았으며, 몇 년 뒤 찬위에게 왕자오쥔을 하사했다. 그러나 왕자오쥔을 떠나 보낼 때 원제는 그녀의 매우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마오옌서우를 죽였다고 한다. 이 고사는 후대에 이르러 정사가 되었다. 그러나 아마 이 사건은 사실이 아닌 듯 싶다. 《서경잡기》는 <한위총서(汉魏丛书)>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읽기에 편하다.

2) 《촉왕본기(蜀王本纪)》: 이것은 지방의 인사가 지방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쓰촨(四川) 사람인 양슝(杨雄)이 쓴 것으로 고대 촉국이 아직 진(秦)에 의해 멸망되기 이전의 촉 왕에 대한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신화적인 색채가 농후하게 남아 있다. 예를 들어 한밤중에 우는 자규(子规)라는 새는 촉왕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왜 왕이 새로 변한 것일까? 그가 재상의 아내와 사통했기 때문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 새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또 말하기를, 옛날에는 진(秦)에서 촉으로 가는 길이 매우 험난했다고 한다. 이에 진왕은 석우(石牛)를 하나 만들어 촉왕에게 선사했다. 그는 먼저 석우의 엉덩이 밑에 금을 깔아 놓고는 이 석우가 금 똥을 눌 수 있다고 촉왕을 속였다. 촉왕은 매우 기뻐하며 진왕이 선물한 석우를 촉으로 옮겨오려고 진으로 통하는 길을 닦았다. 그 길이 잘 닦여지자 진왕은 군사를 일으켜 그 길을 따라 촉을 공격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실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이 책은 원래 실전되었다가 청대에 이르러 다시 모아서 편찬된 것이다.

3) 《월절서(越絶书)》: 강절(江浙) 오월(吴越) 사람의 책이다. 이 책에는 오와 월에 관한 사료가 많이 보존되어 있다. 이를테면 월 왕 거우졘(句践)이 오를 멸망시킨 뒤 지금의 산둥 반도 칭다오(靑岛) 부근인 랑예(瑯琊)로 천도했다고 한다. 이것은 《사기》에는 없는 내용이다. 《좌전(左传)》과 《맹자(孟子)》에서는 월나라가 도성을 산둥 반도로 옮겼다고 했다. 또한 《월절서》에 의하면, 그 당시 월은 배를 만들어 해상 교통을 고도로 발달시킴으로써 해상의 패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옌청(奄城)이 쟝쑤성(江苏省)의 창저우(常州)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과거에는 옌청이 산둥에 있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어째서 또 쟝쑤에 있다는 것일까? 이는 《맹자(孟子)》에서도 말한 바 있고 《여씨춘추(呂氏春秋)》에도 나오는 말로써, 주공(周公)이 동부 지역을 정벌하여 옌인(奄人)들을 강남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현재 유적이 이미 발견된 바 있으며, 창저우에는 3층으로 된 옌인들의 성곽 고적(古迹)이 남아 있다. 《월절서》의 작자는 동한(东汉) 사람이라고만 알려져 있을 뿐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4) 《오월춘추(吴越春秋)》: 이 책은 자오예(赵晔)가 지은 것으로 소설화되어 있다. 여기에는 월왕이 오를 어떻게 멸망시켰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적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시스(西施)라는 인물이 확실히 존재했다고 말하고 있다. 시스는 원래 판리(范蠡)와 사통하고 있던 사이였는데, 오왕에게 시집가서 대사를 성공시킨 뒤, 다시 판리와 함께 도망쳐 버렸다고 한다. 시스라는 인물이 정말로 존재했었는지의 여부는 당연히 확실한 것을 알 수 없다.

이런 책들은 모두 《한위총서》에서 볼 수 있다.

5) 《양도부(兩都赋)》: 부(赋)의 체제로 한대의 사실(史实) 들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반구(班固)가 지었다. 이 부에는 한대의 동경(东京)과 서경(西京)의 사실들이 서술되어 있으며, 그는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두 편의 부를 지었다.

장헝(张衡)은 동한 사람으로 태사령(太史令)을 지냈다. 그는 《삼도부(三都赋)》를 지었는데, 삼도(三都)란 곧 한대의 동경(东京)인 뤄양(洛阳)과 서경(西京)인 창안(长安), 그리고 남도(南都)―후한 광무제(光武帝)가 거사한 난양(南阳)―를 말한다. 이 책은 10년에 걸쳐 씌어졌는데, 장헝은 이 책을 쓰는 동안 곳곳에 좋은 종이와 붓을 놓아두고, 심지어 변소에까지 문구(文具)를 준비해 두었다가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옮겨 적었다고 한다. 《삼도부》는 《소명문선(昭明文选)》에 실려 있다.

육조(六朝)의 잡사

육조 시대에 나온 잡사에 관한 저작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1) 《세설신어(世说新语)》: 남조 송(宋) 황제의 친족인 류이칭(劉义庆)이 지은 이 책에서는 진대(晋代)의 일들을 많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어떤 경구(警句)를 남겼고, 어떤 기인(奇人)과 기이한 일(奇事)이 있었는가 하는 것들이 기록되어 있다. 진대(晋代)에는 청담(淸谈)의 기풍이 있었기 때문에 기담(奇谈)의 재료가 자못 많았다. 이 책의 내용은 당 태종의 《진서(晋书)》에 많이 채용되었다. 이 책의 내용은 20 종류로 나뉘어져 있으며, 요즘에는 단행본으로 쉽게 구해 볼 수 있다.

世说新语

2) 《화양국지(华阳国志)》: 진(晋) 사람 창쥐(常璩)가 지었다. 작자는 쓰촨(四川) 사람으로, 이 책에는 화산(华山) 이남의 인물과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한중(汉中)과 쓰촨(四川)․윈난(云南) 등지의 인물과 사건도 포괄되어 있다. 이 책에는 주로 인물이 기록되어 있으며,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3) 《불국기(佛国记)》: 진대 사람 파셴(法显) 화상이 쓴 것이다. 파셴은 인도에 갔다 온 적이 있는데, 그의 인도 행은 당대(唐代)의 쉬안좡(玄奘)보다 앞선다. 따라서 그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인도에 갔다 온 사람이다. 파셴은 육로로 갔다가 해로로 돌아왔는데, 이 《불국기》를 통하여 당시 중국과 인도 사이의 교통 항로를 알 수 있다. 이 책은 모두 9,500여 자로 되어 있으며 간명하고 간략하게 잘 되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인도로 갈 때 장예(张掖)․둔황(敦煌)․신쟝(新疆) 등지를 거쳐 카시미르에 도착한 뒤, 인더스 강을 건너 인도에 도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돌아올 때 바닷길을 통하여 스리랑카․인도네시아를 거쳐 광저우(广州)에 도착했는데, 태풍을 만나 산둥(山东)의 칭다오(靑岛) 부근 라오산(崂山)에 상륙했다고 한다. 이 책은 중국과 외국 사이의 장편 여행기 가운데 세계 최초의 것이다.

4) 《뤄양가람기(洛阳伽蓝记)》: 북위(北魏) 때 저술된 책이다. 가람은 곧 묘우(庙宇)를 말한다. 이 책의 내용은 세간(世间)의 전란을 겪은 뒤, 뤄양의 가람을 다시 둘러보고 여전히 보존되어 있는 몇몇의 것들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묘우를 기록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 가운데에는 수많은 대관(大官)들의 사건 및 정치적인 대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5) 《수경주(水经注)》: 북조(北朝) 때 북위(北魏) 사람 리다오위안(郦道元) 이 지은 것이다. 중국 고대에 《수경(水经)》이라는 책이 있었는데, 이것은 물길(水道)에 관한 전문적인 저술이다. 그런데 내용이 지나치게 간단하고 또 약간의 착오가 있었기 때문에 진대(晋代) 이후 이 《수경》에 주를 단 사람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리다오위안은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허베이(河北)의 줘루(涿鹿) 사람으로 지리학자였던 그는 고대의 수많은 중요한 지리학 서적들, 이를테면 《산해경(山海经)》․ 《우공(禹贡)》․ 《한서(汉书)》의 <지리지(地理志)> 등을 읽고 만족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직접 여러 지방, 즉 허베이(河北)․쟝쑤(江苏)․안후이(安徽)․산시(山西)․산시(陕西)․내몽골(内蒙古) 등지를 돌아다니며 상당히 많은 양의 실제 조사를 하여 각지의 물길 사정을 기록했다. 그는 《수경》을 뼈대로 삼아 새로운 종합 지리서를 쓰기로 결정했다. 《수경주》는 역사 지리라고 할 만하며, 《한서․지리지(汉书地理志)》보다 낫다. 《수경주》에는 1252개의 물길이 기록되어 있어 《수경》에 기록된 것보다 열 배나 더 많다. 하천의 원류와 흘러가는 방향 등을 기록했을 뿐 아니라 물길 유역의 산악․도시․산물, 심지어 적지 않은 민간 전설․민요․방언 등 귀중한 사료들을 채록해 놓았다.

리다오위안은 실지(实地) 조사를 중시하여 고서에 나오는 루허(汝河)의 원류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직접 탐색한 결과 다위산(大盂山) 멍보구(蒙柏谷)에서 그것을 찾아내었다. 또 고서에서는 산둥 쓰수이(泗水)의 기원에 대해 서로 다른 주장을 내세웠는데, 그는 직접 그 원류를 찾아 나서, 결국 《수경》과 《한서․지리지》의 기록이 모두 틀렸다는 것을 증명했다.

쿤룬산(崑崙山)은 원래 허구의 산으로 실제로 그런 산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한 무제 때에 이르러서는 무제가 신쟝의 카라코룸 산을 쿤룬산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수경주》에서는 이 산을 히말라야 산 속에 집어넣었다.

그는 또 인도 갠지즈강의 원류가 히말라야 산에서 유래한다고 했다. 리다오위안의 책에는 이 밖에도 고대 인도에 관한 사정들이 적지 않게 기록되어 있다. 옛 인도의 역사는 항상 하대(下代)가 상대(上代)를 뒤엎은 역사였다. 《수경주》에는 이러한 인도의 역사적 사실들과 캄보디아의 옛 사정들이 적지 않게 기록되어 있다.

이 지리학 거저(巨着)는 중국 역사지리학의 불후의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이 책으로부터 수많은 지리도를 그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리다오위안은 북조의 북위 사람으로서 남부 지방에는 가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북방의 역사 지리에는 큰 공헌을 했으나 중국 남방에 관한 약간의 지리 자료들은 그다지 정확하지 못하다. 이 책은 40권, 100만 자(字)로 되어 있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약 30만 자 정도다. 그야말로 거저(巨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