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남산의 쌓인 눈을 바라보며終南望餘雪/당唐 조영祖詠
終南陰嶺秀 종남산의 북쪽 풍경 수려하니
積雪浮雲端 쌓인 눈이 구름 위에 떠 있네
林表明霽色 숲 위로 갠 하늘 빛 투명하니
城中增暮寒 성 안에 저녁 찬 기운 더하네
이 시의 제목은 당나라 때 과거의 제목으로 출제한 것이고 시의 형식은 5언 율시로 제한되어 있었다. 그런데 조영이 이런 시를 쓰고는 ‘나는 다 썼습니다. 이 외에는 한 마디도 더 보탤 것이 없습니다.’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세상에 대한 오만한 기세가 과도하지만 시의 수준은 높게 평가받고 있는데 이 시가 이 시인의 대표작이다.
이 시가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대체로 제목에서 제시한 것을 정확히 구현했다는 것이다. 제목에서 여설(餘雪)이라 한 것은 잔설(殘雪), 즉 종남산에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고 쌓여 있는 것을 묘사하라고 한 것인데 이 시인이 평지의 눈도 아니고 내리는 눈도 아닌 적설(積雪)을 제대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1, 2구는 마치 대구처럼 보이는데 대구로 보면 답이 안 나온다. 산구(散句)이다. 앞 짝은 ‘음령(陰嶺)’이 붙은 말이고 뒤 짝은 ‘운단(雲端)’이 붙은 말이다. 종남산은 장안 남쪽 60리에 동서로 뻗은 큰 산맥이다. 장안에서 볼 때는 당연히 그 등 뒤만 보인다. 산의 뒤를 산음(山陰)이라 한다. 령(嶺)은 단순히 고개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산맥이 길게 뻗은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동서로 길게 뻗은 진령산맥(秦嶺山脈)의 북면을 바로 음령이라 한 것이다. 서안에서 지금 한중(漢中)을 가자면 이 진령산맥을 관통하게 되는데 전에 서안에 있던 동생 차로 가보니 산세가 대단히 웅장하고 규모가 크며 바위가 드러나 매우 수려하였다. 지금 시인이 수려하다는 것은 바로 이걸 말하는 것이다.
두 번째 구에서 쌓인 눈이 구름자락 한 끝에 떠 있다는 말은 산의 상부에 구름이 감돌고 그 최상부가 하늘에 솟아 있는 것을 말한다. 산봉우리가 여러 개 되니 구름이 길게 떠 있다면 산 봉우리가 여기저기 구름 위로 드러날 것이다.
‘임표(林表)’는 숲 위를 말하고 ‘제색(霽色)’은 내리던 눈이 그쳐 갠 것을 말한다. 정선이 그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는 오래 내리던 비가 갠 인왕산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 바위 곳곳에 폭포수가 콸콸 흐르고 아래는 흰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지 않은가? 즉 비가 그친지 얼마 안 된 시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시에서도 산 정상 부위에는 구름이 있고 또 숲에는 개인 겨울 햇빛이 투명하게 빛나고 있는 것이다. 어제 소개한 시에서도 눈이 그친 풍경이지만 또 어떤 언덕에서는 들불이 타고 있었다. 이런 것은 좀 융통성 있게 활간(活看)해서 보아야 한다. 또 이 시의 제목을 ‘종남산에서 쌓인 눈을 바라보며’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종남산에서 종남산을 어떻게 바라보며 장안에 한기가 더해지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망종남여설(望終南餘雪)’이란 문장에서 종남산을 강조하기 위해 저렇게 쓴 도치구일 뿐이다.
이런 투명한 겨울 저녁의 하늘빛이 한겨울이라 더 차갑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보통 눈이 올 때는 푹하지만 눈이 그치면 춥다. 종남산에 쌓인 잔설에서 비치는 차가운 빛도 더 춥게 느끼게 한다. 시인이 제색(霽色)이라 한 말에는 이런 것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눈 쌓인 종남산의 차가운 하늘빛이 황혼 무렵에 장안 성안을 비추어 차가운 기운을 더해준다고 한다. 위에서는 종남산을 주로 시각적으로 묘사한 반면 마지막 구에서는 피부에 와 닿는 촉각으로 묘사하여 어느새 종남산의 한기에 몸이 오싹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기에 마지막 두 구는 대구이지만 병렬이 아니고 인과로 연결되는 유수대(流水對)가 되는 것이다.
이 시는 일차적으로 과장(科場)이라는 다소 어수선한 장소에서 지은 시라는 점을 고려할 때 매우 뛰어난 서경시이자 시제를 충족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조건에 안 맞아 당연히 떨어졌지만 시인의 호기는 시 속에도 숨어 있다. 구름 위에 뜬 눈 쌓인 종남산은 능운장지(凌雲壯志)를 암시하는 것이고 저녁 한기가 장안성을 휩싸는 것은 세상에 대한 강한 포부를 감추고 있는 것으로도 읽힌다. 그러기에 시인이 이 시지(試紙)를 제출하면서 ‘할 말을 다 했다.[意盡]’라고 말한 것이 아니겠으며 세상 사람들이 이 시를 전한 것이 아니겠는가?
조영(祖咏)은 낙양 사람으로 724년에 진사 시험에 급제하여 약간의 벼슬을 지냈다. 왕유와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고 나중에 여수(汝水) 이북의 별장에서 은거하며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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