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雪/당唐 나은羅隱
盡道豐年瑞 모두들 풍년의 상서라 하지만
豐年事若何 풍년이 들면 상황이 어떠한가
長安有貧者 장안에는 빈궁한 백성 있으니
爲瑞不宜多 그런 상서가 많아서는 안 되네
이 시는 눈에 대한 영물시가 아니라 눈을 매개로 하여 당시 지배자들을 비판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한 시이다. 당시 일반 사람들의 상식과는 정반대의 냉소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지만 역시 한 시대의 진실을 보여주고 있는 시이다. 역대로 위민(爲民) 시가 많이 있지만 이처럼 사회 현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빈민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시도 드물다.
이 시인은 매우 재기(才氣)가 있다. 제목에 눈이라고 썼으니 바로 그 말을 받아 본문을 시작한다. 그리고 군더더기가 전혀 없다. ‘진도(盡道)’는 모든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는 뜻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눈이 오면 풍년이 든다는 말을 모두들 한다. ‘서(瑞)’는 상서, 즉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을 말한다.
다들 눈이 많이 오면 올해 풍년이 들 조짐이라며 좋아하는데 이 시인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왜 그런가? 2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이 시인은 던진다. 풍년이 들면 부자나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창고에 쌀을 채워서 좋지만 백성들은 다 수탈당하니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는가? 이렇게 반문한다. 이미 습관적으로 실망에 가득 찬 냉소적인 말이다.
《승정원일기》에도 이런 일이 있다. 어떤 농민들은 차라리 흉년이 들 때가 좋다고 한다. 흉년이 들면 나라에서 급재(給災)라고 해서 세금 감면 혜택을 준다. 우우심(尤尤甚 너무너무 심함), 우심(尤甚 아주 심함), 지차(之次 그 다음), 초실(稍實 약간 곡식을 거둠) 등으로 등급을 나눈다. 그러니 농민들은 흉년이 들면 세금을 적게 내어 그런대로 먹고 살지만 풍년이 들면 세금으로 몽땅 거두어 갈 뿐 아니라 여러 잡세 명목으로 살기가 너무 힘들다고 한다. 차라리 흉년이 낫다고 한다.
풍년이 들 조짐으로 눈이 많이 오면 안 되는 이유가 또 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이 장안에도 빈궁한 사람이 많은데 눈이 오면 가진 것이 많은 놈이나 지위가 있는 놈들은 높은 누각에서 술을 마시고 가무를 감상하며 풍년이네 어떻고 하면서 풍월을 읊겠지만, 당장 없는 사람들은 안 그래도 옷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데 눈까지 오면 풍년은 고사하고 그 전에 얼어 죽고 굶어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마지막에 절규하듯 외친다. 풍년이 든다는 상서로운 눈! 우린 그런 상서도 필요 없고 그런 눈도 필요 없소! 그 눈 절대 많이 오면 안 됩니더!
지금도 사람들 하는 말을 들으면 이런 절규를 외치고 싶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연예인 비리를 수사하면 한류가 죽는다고 한다든지 이재용을 구속하면 삼성이 망한다고 한다든지 하는 것이 이와 꼭 같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사람이 죽어도 한류가 번창해서 돈을 벌어야 하며 삼성 일가가 회사에 손해를 끼치고 나라의 돈을 훔쳐가도 가만 두어야 하는가?
이 시인이 던진 문제의식은 아마도 오랫동안 유효할 것 같다.
나은(羅隱, 833~910)은 항주 사람으로 본명은 횡(橫)이고 호는 강동생(江東生)이다. 10번 과거에 낙방한 뒤에 이름을 은(隱)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일서(逸書)》라는 책을 썼는데 당시 통치자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구화산(九華山)으로 들어가 은거하다가 887년 55세의 나이로 오월왕(吳越王) 전류(錢鏐)에게 귀순하여 전당령(錢塘令) 등을 지냈다. 문집 《나소간집(羅昭諫集》이 있다.
그는 풍자시를 많이 썼는데 젊은 시기에 황소의 난 등 혼란기를 살면서 실의에 빠져 그런 의식이 시에 많이 반영되어 있다. 사회 불평등과 역사적인 사건을 날카롭게 지적한 시풍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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