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삼이 한운암에서 전생의 사랑빚을 갚다 4
완삼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옥란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완삼은 옥란을 두 손으로 잡아끌더니 침대 옆의 쪽문을 열고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갔다. 옻칠한 탁자와 등나무 침대. 소리가 전혀 새어나가지 않을 깊숙한 곳. 두 사람은 마침내 서로를 껴안았다. 몇 마디 밀어가 오간 뒤 서로가 서로의 옷을 벗기기 시작하였다. 이 황홀함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완삼은 옥란과 사랑을 나누면서 혼신의 힘을 다 기울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던 완삼인지라 몸도 마음도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상태였다. 병약한 몸을 돌보지 않고 사랑하기에 몰두하던 완삼은 갑자기 옥란의 배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단전에서 기가 빠져나가 버린 것이다.
하늘의 비바람 예측 못하듯,
인간의 길흉화복도 예측할 수 없는 것.
완삼은 이를 꽉 다물고 있었다. 옥란이 완삼의 몸을 쓰다듬어 보니 몸은 이미 차가워져 가고 있었다. 옥란은 당황하여 정말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옥란은 완삼의 몸을 밀쳐내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쪽문을 거쳐 곁방으로 나갔다. 거친 숨결은 진정되지 않고 그저 어머니가 부르시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에 전전긍긍하였다. 화장품 그릇을 열어 얼굴을 매만지고 거울을 보며 머리를 다듬었다. 얼추 몸 매무새를 수습하고 나니 밖에서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옥란은 황급히 문을 열었다.
“얘야, 예불도 다 마쳤는데 아직도 자고 있느냐?”
“방금 일어나 얼굴을 만지고 있었어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막 나가려던 참이었어요.”
“가마꾼이 기다리고 있단다.”
옥란과 부인은 왕 주지에게 인사하고 가마를 타고서 길을 나섰다. 왕 주지는 부인 일행을 배웅하고서는 암자로 돌아왔다. 진태상 부인을 대접하느라고 특별히 꺼내 놓은 그릇들을 챙기고 나서 불전에 향을 살랐다. 이때, 장원과 완삼의 형 완이가 암자로 들어왔다. 그들은 왕 주지를 보더니 연신 고맙다고 인사하였다.
“완삼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아직도 방에서 주무십니다.”
왕 주지는 장원과 완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완삼 도령이 잠이 푹 드셨네.”
그들이 연거푸 완삼을 불렀으나 아무 대답이 없다. 완이가 완삼을 흔들어 깨워도 아무런 기척이 없다. 다급해진 완이가 손가락을 완삼의 코밑에 대어 보니 완삼의 숨이 멈춰 있지 않은가.
완이가 놀라 물었다.
“스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일이 이렇게 꼬이다니.”
“옥란 아씨가 점심 공양을 마친 다음에 쉬고 싶다며 이 방으로 들어가셨지요. 그러고 나서 두 시간쯤 후에 예불을 마치고 부인 마님께서 옥란 아씨를 나오라 하여 데리고 가셨지요. 그게 얼마 전 일이라 소승은 완삼 도령이 계속 자나보다고 생각했지요. 이런 일이 있을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완이가 말했다.
“하여간 이제 어떡합니까?”
“마침 여기 장원 나리가 있으니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장원 나리가 소승을 찾아와 이 일을 도와주면 완씨 가문에서 섭섭지 않게 시주할 것이라며 부탁하셔서 소승이 나선 것입니다. 완삼 도령이 이렇게 허무하게 저세상으로 갈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원래 이 일이야 장원 나리가 소승에게 부탁한 거지 소승이 먼저 나서서 설친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을 가지고 관가에 찾아간들 피차 좋을 것이 없을 겝니다. 저번에 소승에게 준 은 두 덩이 가운데 한 덩이가 아직 남아 있으니 소승이 그 은을 다시 돌려드리리다. 그 돈으로 관을 사서 장사나 잘 지내주도록 합시다. 다른 사람에게는 절에서 요양 중에 잘못되어 급사하였다고 둘러대고요.”
왕 주지는 은자 한 덩이를 탁자 위에다 올려놓고는 물었다.
“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장원과 완이는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선 관이나 사고 나서 다시 이야기합시다.”
장원과 완이는 은자를 받아들고 함께 한운암을 나섰다.
“완이 형님, 사실 왕 주지의 말이 맞긴 맞아요. 그리고 완삼이는 평소 몸이 약골인지라 옥란 아씨와 사랑을 나누다가 일시에 양기가 빠져나가서 그리된 걸 거예요. 저도 사실 완삼이가 너무도 옥란 아씨를 그리워하면서 부탁하길래 차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나섰던 거예요.”
“이 일이 어찌 그대의 잘못이며 왕 주지의 잘못이겠는가? 우리 완삼이의 타고난 명이 이것밖에 안 되어 이런 일이 생긴 것이겠지. 하지만 나는 그렇다 쳐도 아버님과 형님께는 이 일을 어떻게 말씀드린단 말인가?”
장원과 완이는 서둘러 관을 사 가지고 다시 한운암으로 갔다. 장원과 완이는 완삼을 염하고 입관한 다음 아버지와 형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술자리를 파하니 기쁨도 다하려나,
실의에 빠져드니 탄식 소리 잦아지려나.
마침내 완삼의 아버지와 큰형이 장사에서 돌아왔다. 아버지는 완삼의 병이 차도가 있는지 물었다. 완이는 하는 수 없이 그간의 일을 말씀 올렸다. 완삼의 아버지는 완이의 설명을 듣고는 목을 놓아 울었다. 완삼의 아버지는 고소장을 작성하여 옥란을 고발하려 하였다.
“돼먹지 않은 계집이 우리 완삼의 목숨을 앗아가다니.”
완삼의 큰형과 작은형은 아버님께 몇 번이고 말씀드렸다.
“아버님, 이번 일은 완삼이 자초한 면이 많습니다. 권세 등등한 진태상을 건들어 보아야 득 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완삼의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길일을 택해 한운암에 가서 재를 지내고 완삼의 장사를 치러주었다.
한편, 옥란은 한운암에서 돌아온 후 헛구역질이 자꾸 나고 연거푸 석 달 동안 달거리를 하지 않았다. 쉬 피로를 느끼는 딸을 보고 부인이 의원을 불러왔으나 그것이 의원이 치료할 수 있는 병이던가? 부인이 조용히 옥란을 불렀다.
“얘야, 너 혹시 이번 사월초파일에 무슨 일 있었던 게 아니냐? 나에게만 사실대로 이야기해다오.”
옥란은 더 이상 속일 수 없음을 알고선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부인은 놀라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였다.
“네 아버지가 너를 고관대작의 자제에게 시집보내겠다고 그렇게 벼르고 계시는데 이런 일이 생겼으니 어쩌면 좋단 말이냐? 네 아버지가 이 일을 아시면 어떡할꼬?”
“어머님, 기왕 일이 이렇게 된 거 소녀 죽음으로써 모든 걸 마무리하겠나이다.”
부인은 속상하고 걱정되어 죽을 지경이었다. 해가 저물어 궁궐에서 퇴청한 진태상이 부인의 얼굴을 보더니 물었다.
“부인, 오늘은 어인 일로 얼굴이 그렇게 어두우시오?”
“고민거리가 하나 있긴 있지요.”
“무슨 일이오?”
부인은 머뭇거리며 옥란의 일을 이야기했다. 노기충천한 진태상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 어미라는 자가 딸을 어떻게 간수했길래 이런 일이 생긴단 말이오?”
부인은 그저 눈물만 흘리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진태상은 전전반측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 날 외출에서 돌아온 진태상은 부인과 상의하였다.
“이 일을 가지고 시끄럽게 해봐야 좋을 것 없고, 괜히 관가에 고발한다 해도 우리 딸아이만 망신당하고 가문에 먹칠하는 꼴밖에 되지 않소. 옥란이를 불러 조용히 처리합시다.”
옥란은 그저 눈물만 주룩주룩 흘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니 한참 후에야 어머니에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소녀, 괜히 일을 저질러 완삼 도련님을 저세상으로 가게 했으니 그 죄 크고도 큽니다. 소녀 자결하여 모든 걸 깨끗이 정리하고자 하였으나 제 뱃속에 석 달 된 유복자가 자라고 있고, 또 그냥 있으려니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두렵습니다.”
옥란은 눈물을 훔치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조금만 참고 견뎌 아이를 낳으면 완삼 도련님에게 후사를 이어주는 것이니 이 역시 다행일 듯 싶습니다. 하루 부부는 영원한 부부. 하늘이 굽어 살피사 아들을 낳게 해 주신다면 그 아들을 잘 키워 완씨 집안에 보내 줄 것이옵니다. 그러고 난 뒤, 소녀 자결하여 아버님 어머님을 욕되게 한 죄를 조금이나마 씻을까 합니다.”
부인이 이 말을 진태상에게 전하니 진태상은 혀만 끌끌 차며 아무 말이 없다. 진태상은 아무도 몰래 완씨 집안에 사람을 보내어 완삼의 아버지를 불렀다.
“우리가 여식을 잘못 키워 그대의 귀한 자식을 저세상으로 보내게 하고 말았소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한데 우리 여식의 배에 완삼의 씨가 자라고 있으니 이를 어쩐단 말이오? 지금 생각해 보건대 우리 여식이 그대의 아들에게 마음을 주었다가 나중에 한운암에서 만나서 서로 사랑을 하였고, 당신 아들 역시 내 딸을 그리워하다가 병에 걸려 이렇게 불행한 일이 생겼으니, 서로 마음이 맞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소? 우리 여식이 아들이라도 낳으면 그나마 다행이니, 그때 우리가 나서서 두 집안 사이의 연을 맺어 보도록 합시다.”
완삼의 아버지가 이를 받아들였고 이날 이후로 두 집안은 왕래하기 시작하였다.
사월초파일 후 십 개월, 옥란은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세 살이 되자 옥란은 친정어머니에게 아이를 데리고 완삼 집안에 가서 완삼의 부모에게 인사 올리고 완삼의 무덤을 찾아보고 싶노라 하였다. 어머니가 진태상에게 전하니 진태상은 두말없이 허락하였다. 옥란은 예물을 준비하고 길일을 택하여 완삼의 부모를 찾아뵈었다. 다음 날 옥란은 완삼의 무덤을 찾아가 온갖 설움의 눈물을 마음껏 쏟아내었다. 옥란은 고승을 불러 완삼을 위하여 재를 지내주도록 하였다.
그날 밤 옥란의 꿈에 완삼이 나타났다.
“옥란, 그대는 우리의 오래된 인연을 알고 있소? 전생에 그대는 양주의 명기였고, 나는 금릉의 한량이었다오. 그대와 나는 서로 사랑을 나누게 되었지요. 내가 그대 곁을 떠나면서 일 년 후에 꼭 다시 와서 그대를 데려가겠노라고 맹세하였으나 집에 돌아가 차마 그 일을 부모님께 말씀드리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장가들고 말았다오. 그리고 그대는 매일같이 나를 그리워하다가 병들어 죽었소. 하나 우리의 인연이 아직 끝날 때가 아니었던지 이생에서 다시 만나 이렇게 사랑을 나누게 된 거라오. 한운암에서 우리가 나눈 사랑은 그대에게 진 죄를 내가 갚는 의식이기도 하였다오. 그대가 나를 이렇게 챙겨 주시다니 나는 이제 마음 놓고 저 먼 곳으로 떠나오. 그대는 전생에서 사랑 때문에 일찍 생을 마감하였나니 이생에서는 온갖 복을 누릴 자격이 있소이다. 그대가 낳아 준 아들은 나중에 귀히 될 것이니 잘 길러주길 바라오. 이젠 더 이상 나를 그리워하지 마시오.”
옥란은 완삼을 붙들고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완삼은 대답은 하지 않고 옥란을 밀쳤다. 옥란은 놀라서 꿈에서 깨었다. 옥란은 그제야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이 모두 전생의 업보에서 말미암은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날 이후로 옥란은 모든 정념에서 벗어나 오직 아들 키우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그 아들은 자라면서 영락없이 완삼을 빼닮았으며 총명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진태상은 그 아이를 무척이나 귀여워하였으며 자신의 성을 따라 진종완陳宗阮이라 이름 붙여주고 스승을 모셔와 글을 가르쳤다. 진종완은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이미 다섯 수레의 책을 읽었으며 열아홉 살에는 과거에 장원급제하였고 돌아와서 장가도 들었다. 완씨 집안과 진씨 집안은 앞 다투어 진종완의 장원급제를 축하하였고, 친지들을 모두 모아 잔치를 열었다.
옥란이 진종완을 출산하였을 때 소문이 퍼져 동네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거렸으나, 진종완이 장원급제하자 태도를 바꾸어 옥란의 정절과 현숙함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였다. 세속적인성패로 사람을 논하는 세상의 인심은 대체로 이와 같은 법. 후에 진종완은 이부상서유수관吏部尙書留守官에 올랐다. 옥란이 열아홉 살에 과부가 된 후 재가하지 않고 아들을 훌륭하게 키운 공로가 조정에까지 알려져 옥란은 열녀 칭호를 받게 되었다. 권세가 높고 돈이 많으면 열녀 칭호 받기도 쉬운 모양이렷다. 여하튼 진옥란이 절개를 지키고 아들 잘 키운 이야기는 지금까지 두고두고 하남부에 전해온다.
토연항에서 한 번 보고 상사병 걸리더니,
한운암에서 사랑 나누고 전생의 빚을 갚았구나.
행복한 결말 이룬 것은 옥란이 절개를 지킨 덕,
그 덕이 온 누리에 퍼져 모두 복을 입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