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한시-육유陸游 十一月四日風雨大作11월 4일에 비바람이 몰아치기에

十一月四日風雨大作 11월 4일에 비바람이 몰아치기에/송宋 육유陸游

1
風卷江湖雨暗村 강호에 비바람 몰아쳐 마을 어두우니
四山聲作海濤翻 사방의 산에는 뒤집힐 듯한 파도소리
溪柴火軟蠻氈暖 약야계 장작 잘 타고 담요도 따뜻하니
我與狸奴不出門 나와 고양이는 대문 밖을 나가지 않네

2
僵臥孤村不自哀 외딴 마을 누워 있어도 슬퍼하지 않고
尚思爲國戍輪臺 오히려 나라 위래 윤대를 지키고 싶네
夜闌臥聽風吹雨 깊어가는 밤 누워 비바람 소리 듣자니
鐵馬冰河入夢來 언 강을 달리는 철마 꿈으로 찾아오네

이 시는 육유(陸游, 1125~1210)가 1192년 68세에 고향 산음에서 지낼 때에 지은 시이다. 그는 3년 전 1189년에 관직을 그만둔 처지이다. 나이도 많고 관직에서도 밀려난 처지이지만 우국의 정열만큼은 조금도 쇠하지 않아 밤에 풍우가 치는 것을 보고 감정이 일어나 다시 전장으로 달려가고 싶다는 자신의 소망을 피력한 작품이다.

시가 2편의 연시로 되어 있다. 낮부터 밤에 잠이 들도록 풍우가 크게 친 것을 알 수 있다. 앞의 시는 낮의 상황을, 뒤의 시는 밤의 상황을 노래하고 있어 2편을 함께 감상하는 것이 마땅하다. 통상 뒤의 작품이 유행하며 그 가치를 높이 인정받고 있다.

‘계시(溪柴)’는 육유가 다른 작품에 스스로 단 주석을 보면, 약야계(若耶溪)에서 생산되는 땔감을 말한다. 작은 단으로 묶어 시장에서 파는데 숯보다 더 좋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거주 공간 외부에 주로 아궁이가 있어 방안은 아주 깨끗하고 따뜻하지만 불을 때는 사람은 추위에 노출이 된다. 그런데 중국에서 본 난방이나 부엌은 방 안에 있거나 옆에 붙어 있어 그 안은 좀 지저분해 질 수 있지만 안에서 일하는 사람은 덜 춥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 흔히 화항(火炕), 즉 ‘화깡’이라 하는데 아궁이에 불을 때서 거주하는 공간 일부만 우리 온돌과 비슷한 방식으로 난방을 한다. 지금 시인은 남방 소수민족이 짠 담요를 뒤집어쓰고 그 불이 참 부드럽게 잘 탄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이노(狸奴)’는 고양이를 말하는데 여기서 노(奴)자를 쓴 것은 고양이가 사람에게 길들여져 순종하기 때문이다. ‘야란(夜闌)’은 밤이 깊어간다는 말이다.

첫 구에서 ‘풍권강호우암촌(風卷江湖雨暗村)’은 같은 구에서 대구를 쓴 것이다. 그러므로 앞 부분이 ‘바람이 강호에 거세게 분다.’로 해석되므로 뒷부분 역시 ‘비가 마을을 어둡게 한다.’로 해석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문장의 의미가 ‘강호에는 바람이 불고 마을은 비가 내려 어둡다.’는 뜻일까? 이 말은 대구이면서 호문이기 때문에 ‘강호와 마을에 비바람이 쳐서 어둡다.’는 의미를 한자 언어의 미학을 살려 저렇게 표현한 것이다.

강호와 마을에 비바람이 쳐서 마치 바다에 해일이 뒤집힐 듯이 몰아치는 것 같은 날이다. 그러니 방 안에서 불을 때면서 가만히 있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 첫 시의 내용이다. 이 내용은 단독으로 한 편의 시를 이루기보다는 뒤에 나오는 시에 더욱 큰 감정을 싣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과 같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뒤의 시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뒤의 시가 좋은 작품으로 이루어진 것은 이 앞의 시가 그만큼 감정과 의미를 축적한 때문이니 이 시를 알지 않아서 되겠는가?

강와(僵臥)를 쓴 것은 시인이 스스로 늙어 몸이 뻣뻣해지고 병든 것을 반영한 말이다. 늙은 사람은 몸도 약해져 병도 잦고 마음도 쉽게 삐치고 상심에 젖기 쉽다. 그런데 시인은 지사적 의지가 강렬해서 나라를 위해 윤대에 가서 보초를 서는 상상을 한다고 한다. 앞뒤의 내용이 반대로 연결되어 ‘오히려 상(尙)’ 자를 놓았다.

윤대(輪臺)는 한나라 때 서역 지역의 전진 기지이다. 이 말을 이 시에 왜 쓴 것인가? 변방에 나가서 지킨다는 의미로 이 말을 쓴 것인가? 그렇지 않다. 단순히 변방이라는 의미로 쓴다면 당시 금나라와 송나라의 국경에 있는 지명을 쓰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굳이 많은 변방 중에서 시인이 이 말을 고른 것은 당시 송나라 조정의 화친론을 비판하는 의미가 들어 있다.

한 무제가 평생 서역 정벌에 힘을 쏟아 국력이 많이 고갈되자 만년에 이를 깊이 후회하여 마침내 윤대 지역을 포기하면서 자신을 반성하는 조서를 내린 사건이 《한서》 <서역전(西域傳)>에 실려 있다. 보통 이 고사를 원용할 때는 한무제가 이런 평화 정책으로 백성들을 편안하게 했다는 차원에서 주로 인용한다. 그러나 육유는 이 당시 죽고 없는 화친파인 진회(秦檜, 1090~1155)와 공사 간에 원한이 있었다. 주전파로서 중원을 회복해야 한다는 신념이 공적인 것이라면 자신이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진회가 손자를 장원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을 차석으로 밀어내고 그것도 모자라 진회가 있을 동안은 조정에 발을 못 붙이게 만든 것은 사적인 원한이기도 하다. 이런 화친파는 그 이후에도 송나라 조정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지금 육유가 관직에서 밀려나 있는 것이다.

육유는 1172년 48세 시절에 주전파 장군 왕염(王炎)의 막부에서 3년 간 군대 생활 체험이 있고, 그 이후에도 범성대(范成大)의 막료로 성도(成都)에 있었던 적이 있다. 깊어가는 밤에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은 나라의 위기도 떠오르게 하고 군대 생활도 떠오르게 한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잠이 들자 철갑으로 무장한 기마를 타고 얼음이 꽝꽝 언 강을 건너 금나라를 쳐 없애고 중원을 회복하는 꿈을 꾼다고 한다.

노년에 산음에서 지낼 때는 전원적인 시가 많은데 이 시는 육유 시의 주요한 특징인 애국적 정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인의 색채가 선명이 드러나 있다. 첫 작품이 다감하면서도 진솔한 인간적 면모를 보여준다면 두 번째 작품은 노년에도 쇠하지 않는 정신적 기백이 드러나 있다. 우리나라에 노년에 와서 자기 인생을 망치는 문인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동안 살아온 세월을 물거품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이런 시를 읽으며 정신을 길러야 한다.

明 戴进 《风雨归舟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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