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과 해석 방법론-《홍루몽》의 텍스트 지위와 해석 문제 1

제3장 《홍루몽》의 텍스트 지위와 해석 문제
– 관통론, 유기설, 우열론, 구조학, 탐일학(探佚學)

1. 신홍학 이전의 《홍루몽》 정고본(程高本) 120회의 안정적 지위

신홍학이 출현하기 이전에는 《홍루몽》 정고본(즉 정위원과 고악이 출판한 판본)이 널리 유행했으며, 120회본 《홍루몽》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전체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때 120회본은 상당히 안정적인(stable) 해석의 대상이었다. 일반 독자의 마음에는 이른바 원작 혹은 속작의 문제가 걸리지 않았다. 청나라 때의 《홍루몽》 독자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현존하는 자료로 보면 뒤쪽 40회가 원작이 아니라고 의심하는 독자는 아주 드물었다. 《고전문학 연구자료》 《홍루몽권》에 보이는 바로는 뒤쪽 40회가 속작이라는 의견을 제시한 논자는 극히 적었다. 일반인들이 《홍루몽》에 대한 견해를 밝힐 때에는 늘 앞쪽 80회와 뒤쪽 40회를 함께 거론하면서 앞뒤가 관통된다고 여기며 전혀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청나라 때의 평점가들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청나라 때의 평점가 가운데 왕희렴(王希廉)과 장신지(張新之), 요섭(姚燮: 1805~1864)의 《증평보상전도금옥연(增評補象全圖金玉緣)》(속칭 ‘삼가평점본[三家評點本]’)이 가장 유행했다. (주기서국[鑄記書局]의 연활자본[鉛活字本]과 동문서국[同文書局]의 석인본[石印本], 상해서국[上海書局] 석인본, 구불부재[求不負齋] 석인본, 상해강동서국[上海江東書局] 석인본, 상해동음헌[上海桐蔭軒] 석인본이 있음.) 왕희렴과 장신지는 모두 120회를 하나의 총체로 여겼다. 예를 들어서 ‘태평한인(太平閒人)’ 장신지는 〈《홍루몽》 독법〉에서 이렇게 썼다.

이 책이 단지 80회뿐이고 나머지 40회는 다른 사람이 썼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속의 구조를 보면 상산(常山)의 뱀처럼 머리와 꼬리가 서로 호응하고 있으며 복선(伏線)을 깔아 놓아서 머리카락 하나를 당기면 온 몸이 흔들리는 묘미가 담겨 있다. 또한 어휘와 문장의 기세에서 앞뒤에 거의 차이가 없으니……

‘호화주인(護花主人)’ 왕희렴의 〈《홍루몽》 총평〉에서는 “《홍루몽》 120회는 20단락으로 나누어 봐야 비로소 구조와 층차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제79회에서 제85회까지를 제15단락으로 나누면서도 내용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구위훤(邱煒萲)은 〈소설한평(小說閑評)〉에서 이렇게 썼다.

《홍루몽》은 작자의 성명을 밝히지 않았는데, 어떤 이는 조설근이라고 여기지만 생각해 보면 그 또한 억측일 뿐이다. 작품 말미에 조설근이라는 성명이 있기 때문에 이 책은 예전에 필사본이 있었고 80회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혹자는 앞쪽 80회가 옛날 청나라 초기의 인물이 쓴 것이고 뒤쪽 40회는 조설근이 덧붙인 것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그 기운이 하나로 이어져 있고 맥락이 관통한다는 점에서 작품 전체의 문장을 조설근이 썼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장신지와 구위훤 모두 구조를 바탕으로 논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장신지가 “상산의 뱀처럼 머리와 꼬리가 서로 호응”한다고 하고 구위훤이 “기운이 하나로 이어져 있고 맥락이 관통”한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들은 작품 전체에 어떤 관통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추호도 느끼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평론가들도 대부분 뒤쪽 40회가 원작이 아니라는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을 아니라, 그들의 평론을 보면 그들이 120회를 수미가 관통하는 총체로 간주했음을 알 수 있다.

광서(光緖) 30년(1904)에 이르러 왕궈웨이(王國維: 1877~1927)는 〈《홍루몽》 평론〉(《고전문학 연구자료》 《홍루몽권》에 수록됨)을 썼는데, 그 역시 120회를 일체로 보았고 또한 해석할 때 주로 뒤쪽 40회의 문장을 인용했다. 차이위앤페이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