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삼이 한운암에서 전생의 사랑빚을 갚다 3
장원은 왕 주지가 은자도 받고 자신의 청도 거절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마음이 다 홀가분하였다. 장원은 암자에서 나와 완삼을 찾아가 옥란이 준 금가락지를 받아들고 밤새 왕 주지에게 갖다 주었다.
왕 주지는 그날 밤늦게까지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일어나 소세를 마치고 옥란의 금가락지를 왼손에 끼고서는 예물 상자를 보살에게 들려서 진태상 댁을 찾았다. 진태상 부인이 왕 주지를 보더니 말한다.
“스님께서 뭐하러 이렇게 번거롭게 찾아오셨어요?”
“마님이 보시해 주신 덕택에 관음상 조성 불사를 마쳤으니 저의 암자의 홍복洪福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소승이 인사드리러 올 참이었는데 외려 음식을 다 보내 주셨으니 그 은혜를 어찌 그냥 지나치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암자에 먹을 것이 변변치 않을 것 같아 뭐라도 보내 드리려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강남의 관리 하나가 특산품을 보내왔기에 그 가운데 두 항아리를 스님께 보내 드린 것입니다. 변변치 않은 걸 가지고 그렇게 말씀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왕 주지는 합장하면서 말을 받았다.
“아미타불, 물 한 모금에도 불심이 담겨 있다지요. 우리들 불제자가 아무리 시방 대중의 시주를 받아 공양을 해결한다지만 시주 받는 걸 당연히 생각할 수야 없지요.”
“관음상은 이미 완성되어 보기에도 좋습니다만 문수상과 보현상은 아직 마무리하지 못하였으니 시주가 더 필요하시겠습니다.”
“그게 다 마님께서 공덕을 베풀어주신 덕분이지요. 마님께서 전생에 널리 보시하시면서 덕업을 쌓으셨기에 이렇게 부귀영화를 누리시는 것입니다. 한데 이생에서도 이렇게 덕업을 쌓으시니 다음 생애에서도 틀림없이 부귀영화를 누리실 것입니다.”
진태상 부인은 하녀를 시켜 왕 주지가 들고 온 예물 상자를 잘 받아 두게 하고 식사를 준비시키는 한편 점심을 들고 가라고 왕 주지를 붙들었다.
잠시 후, 부인과 왕 주지가 점심을 드는데 옥란도 같이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왕 주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소승이 염치도 좋게 마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 암자에서 이번 사월초파일에 불상 조성을 기념하는 불상 점안식을 거행하고자 합니다. 소승이 마님과 아씨를 특별히 초청하오니 부디 왕림하여 주십시오.”
“저야 꼭 갈 테지만 옥란이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소이다.”
왕 주지는 부인의 말을 듣더니 잽싸게 꾀를 내어 한마디 한다.
“어제부터 배가 살살 아프더니 아직도 낫질 않았나 봅니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습니다.”
사모하는 완삼을 만나지 못하여 마음에 병이 들어버린 옥란은 왕 주지가 자신을 암자에 초대하자 마음속으로 자못 기뻐하였다. 한데 어머니가 자신이 암자를 방문하는 걸 썩 내켜 하지 않는 눈치인지라 왕 주지에게라도 떼써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왕 주지가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일어나자 자신도 따라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스님, 제가 안내해드리지요.”
등 뒤에서 소곤소곤 아마도 무슨 꿍꿍이속 있으렷다,
남 몰래 꾀를 내니 아마 몰래 사랑 꾸미것다.
왕 주지는 변기통에 앉아 옥란 아씨에게 말을 건넸다.
“아씨, 사월초파일에 마님과 함께 꼭 암자에 들르세요.”
“저도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어머님이 허락하셔야죠.”
“아씨께서 꼭 가셔야겠다고 떼쓰면 마님도 허락하실 거예요. 마님이 허락하신 걸 나리께서 안 된다고 하실리 없겠지요.”
말을 마친 왕 주지는 화장실 종이를 집으면서 금가락지를 낀 손가락이 잘 보이도록 일부러 손을 높이 들었다. 옥란은 그 금가락지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스님, 그 금가락지 어디서 났어요?”
“두 달 전인가 어떤 잘 생긴 청년이 우리 암자에 왔었지요. 그 청년은 한참 동안 관음상을 바라보더니 이 금가락지를 관음상의 손가락에 끼우며 축원하더이다. ‘금생에 이루지 못한 사랑, 내생來生에서나마 이루게 하여주소서’ 하구요. 그 청년은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관음상 앞에서 눈물을 흘렸소이다. 내가 그 청년에게 대체 무슨 사연이냐고 거듭 물었더니 그 청년이 소승에게 ‘이 금가락지의 임자를 찾아가 내가 꼭 할 말이 있다고 전해 주시오’라고 말합디다.”
왕 주지가 자신의 마음속 일을 말하니, 옥란은 얼굴이 붉어졌다.
“그 청년의 성이 뭐예요? 스님 계신 암자에 자주 찾아오나요?”
“그 청년의 성씨는 완씨이고, 가끔 우리 암자에 찾아오곤 하지요.”
“그 금가락지의 다른 한 짝은 바로 제가 갖고 있지요.”
옥란은 자신의 보석함을 열어 금가락지 한 짝을 꺼내어 왕 주지에게 보여 주었다. 왕 주지가 두 개의 금가락지를 맞대어 보니 영락없는 한 쌍이라. 왕 주지는 갑자기 웃기 시작하였다.
“스님, 어째서 웃으시는 거예요?”
“완삼 도령은 오매불망 이 금가락지의 짝만을 찾아 헤매었는데 이제야 그 짝을 찾았군요. 아씨, 혹시 하실 말씀이라도?”
“스님, 전…….”
옥란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아씨, 우리처럼 출가한 사람들은 입이 무겁기가 자물통보다 더하다오. 염려 마시고 말씀하세요.”
“완삼 도련님을 꼭 한번 만나고 싶은데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완삼 도령이 부처님 전에서 빌었던 것도 다 아씨와 만나게 해달라는 거겠지요. 두 분이 서로 만나는 것이 뭐 어렵겠습니까. 다만 이번 사월초파일에 아씨와 마님이 우리 암자에 오셔야겠지요.”
“스님 계신 암자에 찾아가더라도 어머님이 계신데 어떻게 완삼 도련님을 만나지요?”
왕 주지는 옥란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사월초파일에 오시걸랑 예불과 식사를 마치신 후 몸이 피곤하다고 핑계를 대고 좀 쉬겠다고 하십시오. 그 다음은 소승이 다 알아서 할 것입니다.”
옥란은 왕 주지의 말을 다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차고 있던 금가락지 하나마저 왕 주지에게 주었다.
“이 금가락지면 불상을 도금하는 데 안성맞춤이겠군요. 아씨의 뜻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이니 염려 마세요.”
두 사람이 화장실에서 나와 방으로 들어서니 부인이 그 둘을 맞으며 말한다.
“화장실에서 뭐 그리 할 이야기가 많으신가?”
가슴이 뜨끔해진 왕 주지가 얼른 둘러댄다.
“아씨께서 불상을 씻어주는 의식에 대해서 물어 보시기에 말이 좀 길어졌습니다. 아씨께서 그 의식을 구경하고 싶어 하시니 마님께서 나리께 말씀 좀 잘하셔서 함께 오시지요.”
왕 주지는 부인의 배웅을 받으며 진태상 댁에서 나왔다.
꼼짝없이 걸려들 계책을 짜놓고서,
젊은 두 남녀를 맺어 주려 하는구나.
왕 주지는 옥란이 건네준 금가락지를 들고서 곧장 장원의 집으로 달려갔다. 장원은 자기 집 대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왕 주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왕 주지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집에서는 주변의 이목이 있어 마음 놓고 이야기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장원은 왕 주지가 오는 것을 보고 다급히 맞으며 말했다.
“스님, 어서 암자로 돌아가시지요.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왕 주지가 한운암으로 발걸음을 돌리자 장원도 곧 뒤따랐다. 왕 주지는 장원에게 자초지종을 세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스님이 아니었다면 두 남녀의 만남이 어찌 가능이나 하겠습니까? 완삼이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장원은 돌아오는 길에 완삼을 찾아갔다. 완삼은 짝을 이룬 금가락지를 손가락에 끼워보고서 뛸 듯이 기뻐하였다.
사월 초이렛날, 왕 주지는 다시 진태상 댁으로 가 부인 모녀를 암자로 초청하였다.
“마님, 사월초파일에는 누추한 우리 암자에 왕림하여 주시옵소서. 다른 사람들은 오늘 다 예불을 마치고 돌아갈 것이니 초파일에는 특별히 부인 마님만을 모시겠나이다. 내일 아침 일찍 뵙기를 바라나이다.”
옥란에게 달달 볶인 부인은 옥란에게 암자에 같이 가도 좋다고 허락하였다. 그날 저녁 장원은 완삼에게 먼저 찾아가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였다. 황혼이 지고 사위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완삼은 여자들이 타는 가마를 타고 한운암에 도착하였다. 왕 주지가 직접 나와 완삼을 맞아 한운암의 깊숙한 방으로 안내했다.
돼지와 양이 제 발로 백정의 집에 찾아들 듯,
한 걸음 한 걸음 죽음의 길로 접어드는구나.
왕 주지는 오경에 일어나 보살을 깨워 불전에 향을 사르고 공양을 짓도록 하였다. 또 날이 밝기가 무섭게 화공을 불러 불상에 색칠을 하도록 하였다. 진태상 부인 모녀가 도착하기 전에 번거로운 일을 다 끝내놓자는 심산이었다. 일을 다 끝낸 후 암자에는 왕 주지와 보살들만 남아 독경을 하였다.
사시巳時가 되자 부인과 옥란이 가마를 타고 도착하였다. 왕 주지는 황급히 달려나가 그들을 주지 방으로 맞아들였다. 먼저 차를 마시고 법당에 나가 향을 사르며 예불을 올렸다. 부인은 암자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적이 안심하였다. 왕 주지는 부인 모녀에게 방에 들어가 편히 쉬게 하는 한편 수행원들도 다른 방에 들어가 쉬도록 안내하였다. 안내를 다 마친 후, 왕 주지는 부인과 옥란에게 암자를 구경시켜주고 방에 들어와 같이 점심을 들었다. 옥란은 마치 밥알을 세기라도 하듯, 그저 깨작거리기만 할 뿐 당최 밥을 넘기지 못하고 눈꺼풀이 무거운 듯 눈을 감았다 떴다 하였다. 부인이 옥란을 보더니 말한다.
“얘야, 아침에 일찍 일어났나 보구나.”
왕 주지가 기회를 놓칠세라 말을 받았다.
“마님, 저희 암자에는 부랑배들은 전혀 없고 착실한 보살들만 있는데 그들도 소승의 방에는 함부로 출입을 못합니다. 아씨는 소승의 방에 들어가 잠시 쉬게 하시고 마님은 소승과 같이 산책이라도 하시지요. 언제 또 다시 오시겠어요?”
“얘야, 피곤하면 스님이 안내해 주시는 방에 가서 좀 쉬려무나.”
옥란은 왕 주지가 안내해 주는 대로 따라갔다. 방문을 닫으니 완삼이 침대 저편에서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완삼은 옥란을 보더니 읍하였다.
“아씨, 오랜만이외다.”
옥란은 황급히 손을 젓더니 그 손을 자기 입에 갖다 대었다.
“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