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은 연암 박지원도 인연이 많은 곳이죠. 개성 인근에서 은거할 당시 생활이 궁핍했던 연암 개성유수관을 지내던 친구 유언호의 도움을 받아 서당 훈장으로 생계를 꾸렸습니다. 과거시험을 거부했던 연암은 중국 연행 이후에 음서로 관직에 나간 후, 개성의 제릉(이성계의 정비 신의왕후 묘)을 관리하는 제릉령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연암은 1805년 사후 개성 초입의 언덕에 묻혔습니다
개성에서 만나는 연암의 흔적
북한은 2011년 조선중앙TV를 통해 송도삼절(松都三絶)인 황진이의 묘와 연암 박지원의 묘소를 말끔히 단장하여 개방했다는 보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조선중앙TV는 황진이의 무덤이 개성시 선정리에, 박지원의 묘는 개성시 전재리 황토고개 옆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 두 묘는 향후 개성에 가면 꼭 한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는 유적입니다.
몇 년 전의 일입니다. 개성 관광을 통해 북한과의 민간교류가 진행되었을 때, 저 역시 개성의 주요 역사 유적과 명소를 둘러본 적이 있죠. 북한당국이 개발하여 공개하는 숭양서원, 선죽교, 박연폭포, 성균관을 직접 확인했을 때의 기쁨은 매우 컸습니다. 지금은 남북교류가 답보상태입니다만, 북녘의 역사문화유적들을 마주 대할 날이 하루속히 오기를 고대합니다.
《열하일기》에서는 국내 지역에 대한 기록이 없어 연암의 국내 의주길 행적에 대해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함께했던 노이점의 《수사록》을 통해 당시 연암 일행의 북한지역 동선을 파악해 볼 수 있습니다.
사행의 접대, 지방관아 책임
사행은 한양에서부터 의주에 도착하기까지 객관(여관)과 쉼터가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관아의 부속건물인 객사(客舍)에서 해결했습니다. 사신에 대한 접대 매뉴얼이 제도적으로 규정되어 있었지만, 실제 해당 관아에서는 규정보다 과한 접대를 했을 것입니다. 중국으로 가는 사신의 경우 역시 종실이거나 중앙 고위관리들이어서 홀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학연·지연· 인척 관계로 엮인 양반사회의 특성상 지방관뿐만 아니라 인근 고을의 수령까지 인사차 삼사의 객관으로 방문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었을 테죠.
사행은 의주까지 약 보름에서 한 달 가량 일정으로 시간에 쫓기지 않고 여유롭게 관서지역을 여행할 수 있었습니다. 사행의 명소 유람은 개성을 지나 서흥의 총수참과 평양 대동강 및 강변의 누대, 안주 청천강변의 명승과 의주 압록강으로 이어지는데요, 여행가사 중 기록이 풍부한 홍순학의 《병인연행가(丙寅燕行歌)》(1866)나 유인목의 《북행가(北行歌)》(1866) 등에 관서지방의 명승을 유람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관서지역 의주로의 주요 도시는 개성, 황주, 평양, 정주, 선천 등을 꼽을 수 있죠. 이들 도시는 명승 유람지로서 사행의 접대와 향연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또 이 도시들은 지방행정의 중심이기도 하거니와 오랜 역사와 문화적 전통을 유지하는 공간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죠.
의주에 도착하기까지 약 3~4회의 사대(査對)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황주, 평양, 안주, 의주에서 주로 이루어집니다. 사대는 의정부대신과 삼사, 조정 관리들이 모였던 한양의 경우와 다릅니다. 각 고을에서의 사대는 삼사와 지방관, 인근 고을의 수령과 역참의 우두머리인 찰방(察訪)까지 참여하여 외교문서를 점검하였습니다. 사행의 목적이자 가장 중요한 업무가 외교문서를 전달하고 답신을 받아오는 것이기에 사신들은 압록강을 넘기 전까지 수시로 점검하고 꼼꼼히 내용을 살폈죠.
사대가 끝나면 관아에서는 전별연이 펼쳐지고, 기녀들의 춤과 노래가 이어집니다. 대표적인 전별연 장소는 평양의 대동강과 연광정, 부벽루, 살수대첩으로 유명한 안주의 청천강과 백상루, 항장무(項莊舞, 항우의 조카 항장이 유방을 죽이려고 칼춤을 추던 일을 극화한 무극)로 유명한 선천의 의검정, 의주의 통군정과 검무(劍舞), 배따라기 노랫소리 구슬픈 구련정 나루가 있습니다.
사행단 접대 비용은 백성들의 고혈
‘매일이 주지육림(酒池肉林)이요, 선경(仙境)이 따로 없을 만큼의 연향’을 누가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행단 접대에 소요되는 비용을 조달하기 위한 체계나 제도를 생각하면 관행(慣行)이라는 명목 하에 이루어지는 극심한 폐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이 짊어지게 됩니다. 조선 사신은 물론 중국 사신들까지 챙겨야 하는 상시 행사로서 사행 접대는 국가적 의전이지만, 지방재정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조선시대 평안도는 중국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지형적 위치 때문에 늘 물자를 비축해 둬야 하는 도시였습니다. 사실 군수물자의 확충은 전쟁 시를 감안하여 추진되는 일이었지만, 일반적으로 평안도의 물자는 이 지역을 오가는 사행접대에 쓰였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외교사절 관리 명목을 가졌다고는 해도 쉼 없는 접대와 지속적인 지역특산물 공출로 재정은 고갈됐고, 이로 인한 백성들의 고달픈 삶은 중앙정부와 관료, 제도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런저런 명목으로 백성들을 수탈하던 삼정(三政: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은 정주, 안주 일대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1811)과 같은 민중의 봉기로 표출되기도 하였습니다. 백성들의 아픈 곳을 어루만지지 못하는 정책은 민심의 버림을 받게 마련이죠. 시대가 변한다고 해도 결코 바뀌지 않는 진리임을 상기하게 됩니다.
한양을 출발하여 약 보름간의 국내 여정을 마치면, 사행은 도강 날짜를 정하고 드디어 압록강을 건너게 됩니다. 강을 건너면 조선 지식인들과 관료들에게 찾아온 일생일대의 기회, 세계로 향하는 길이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