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즈카이豊子愷-점점漸

점점

인생이 원활히 진행되게 하는 미묘한 요소를 들라면, 무엇보다 ‘점점[漸]’을 꼽겠다. 조물주가 인간을 속이는 수단을 들라면, 역시 무엇보다 ‘점점[漸]’을 꼽겠다.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천진난만한 아이가 ‘점점’ 야심만만한 청년으로 변해가고, 기개와 의협이 넘치는 청년이 ‘점점’ 냉혹한 성인으로 변해가고, 혈기왕성한 성인이 ‘점점’ 완고한 노인으로 변해간다. 한 해 한 해, 한 달 한 달, 하루 하루, 한 시간 한 시간, 일 분 일 분, 일 초 일 초…… 그 변화가 점점 진행된다. 마치 경사가 아주 완만한 기나긴 비탈을 걸어 내려오는 것과 같아, 사람들은 내려가는 흔적을 느끼지 못하고, 고도가 변하는 경계를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언제나 영원히 변하지 않는 같은 위치에 있다고 느끼고, 항상 삶의 재미와 가치가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인생을 긍정하고, 인생이란 것이 원활하게 진행된다. 만약 인생의 진행이 완만한 비탈을 내려오는 것과 달리, 풍금 건반에서 ‘도’에서 갑자기 ‘레’로 건너뛰듯 어제의 아이가 오늘 아침 갑자기 청년으로 변한다면, 혹은 ‘도’에서 갑자기 ‘미’로 건너뛰듯 아침의 청년이 저녁에 갑자기 노인으로 변한다면, 사람들은 틀림없이 경악하고, 감개하고, 슬퍼할 것이요, 혹은 인생무상을 통감하면서, 자기가 사람인 것이 싫어질 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생은 ‘점점’에 의하여 진행된다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여자의 경우에 더욱 그럴 것이다. 오페라에서 무대 위의 꽃같은 소녀가 미래 어느 화롯가에 앉은 노파라고 하면, 누구든 믿지 않을 것이요, 소녀 역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사실 지금의 노파는 모두 꽃같은 소녀가 ‘점점’ 변한 것이다.

사람이 처지의 몰락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도 순전히 ‘점점’의 도움 때문이다. 어마어마한 부잣집 도령이 여러 차례 파산하며 ‘점점’ 가산을 탕진하여 가난한 사람으로 변해가고, 가난하면 품팔이를 해야 하고, 품팔이하다 왕왕 노예로 전락하고, 그러면 무뢰한이 되기 쉽고, 그러다 거지가 될 지도 모르고, 그러다가 공공연히 도둑질을 하고…… 이런 예가 소설에서나 실제에서나 아주 많다. 10년 20년 긴긴 세월 동안 한 걸음 한 걸음 ‘점점’ 그 몰락에 도달하여, 당사자로서는 무슨 강렬한 자극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므로 춥고 배고프고 병이 들고 고통받고 수갑차고 곤장맞는 지경에 이르게 되어도, 여전히 그저 그런 듯이 눈 앞의 삶의 환희에 연연한다. 만약 천만장자가 갑자기 거지나 도둑으로 전락하면, 틀림없이 분통이 터져서 살고 싶지 않게 될 것이다.

정말이지 대자연의 신비로운 법칙이요, 조물주의 미묘한 솜씨로구나! 음과 양이 소리 소문없이 움직이고, 계절이 차례로 바뀌고, 만물이 나고 번성하고 쇠퇴하고 죽는 것에 이르기까지, 슬그머니 이 법칙에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다. 싹 트는 봄에서 ‘점점’ 녹음 짙은 여름으로 변해가고, 조락하는 가을에서 ‘점점’ 고적한 겨울로 변해간다. 지금까지 추위와 더위를 수십 번이나 겪어왔어도, 화롯가에 모여들고 이불을 뒤집어쓰는 겨울 밤에는 얼음물 마시고 부채질하는 여름 모습이 여전히 상상이 잘 안된다. 반대 경우도 그렇다. 그러나 겨울로부터 하루 하루, 한 시간, 한 시간, 일 분 일 분, 일 초 일 초 여름으로 움직이고, 여름으로부터 하루 하루, 한 시간 한 시간, 일 분 일 분, 일 초 일 초 겨울로 움직인다. 그 과정에서 아무런 뚜렷한 움직임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밤낮도 이와 같다. 저녁에 창 밑에 앉아 책을 보고 있노라면, 페이지가 ‘점점’ 어둠에 젖는다. 끊임없이 보고 있으면 (빛이 점점 약해짐에 따라 눈에 점점 힘이 들어가며), 거의 영원토록 페이지의 글씨 흔적을 알아볼 수 있으며, 낮이 이미 밤으로 변한 것을 느끼지 못한다. 여명에 창가에 기대어, 아무리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동쪽 하늘을 보고 있어도, 밤에서 낮으로 움직이는 흔적을 찾아내지 못한다. 아침 저녁으로 만나는 부모는 자식들이 점점 크는 것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나는 먼 친척은 그들을 못 알아본다. 예전에 제야의 밤에, 붉은 촛불 아래에서 수선화가 피길 기다리며 지켜봤던 적이 있다. 얼마나 바보같은 짓이었나! 만약 그 때 수선화가 당장 우리가 보라고 피었다면, 그것은 대자연의 원칙의 파괴이며, 우주의 근본의 동요이며, 세계 인류의 종말이 아니겠나!

각 단계마다 차이가 극히 미미하고 완만하게 함으로써 시간의 흐름과 사물의 변천의 흔적을 은폐하여, 그것이 항구불변한 것이라고 사람들이 오인하게 하는 것이 바로 ‘점점’의 효과이다. 이는 정말 조물주가 인간을 속이는 엄청난 꾀이다! 비유 하나 들어보자.

한 농부가 매일 아침 송아지를 안고 도랑을 뛰어 건너 밭에 일하러 갔다가, 저녁에 또 송아지를 안고 도랑을 뛰어 건너 집에 돌아왔다. 하루도 그친 적이 없었다. 송아지는 점점 자라고 무거워져서, 그렇게 1년이 지나자, 거의 어른 소가 다 되었다. 그러나 농부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여전히 소를 안고 도랑을 뛰어 건넜다. 그러다 무슨 일 때문에 하루 일을 쉬었더니, 그 다음 날부턴 더 이상 그 소를 안고 도랑을 뛰어 건널 수가 없었다.

인간이 매일 매시 삶의 환희에 머물러 변천과 고생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조물주가 인간을 속이는 방법이다. 인간은 나날이 무거워지는 소를 안고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같이 도랑을 뛰어 건넌다. 변하지 않는다고 오인하고 있지만, 사실 매일 그 노고가 증가하고 있다.

시계야말로 인생을 가장 잘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상시에 얼핏 보면 시계의 분침과 시침은 움직이지 않고 늘 제자리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것 중에서 시계 바늘만큼 쉬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도 없다. 일상 생활 중의 인생 역시 이와 같다. 순간 순간 나는 나라고 느끼고, 이 ‘나’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 시계 바늘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변화한다. 숨이 붙어 있는 한 나는 언제나 ‘나’요 나는 변하지 않는다고 느끼며, 여전히 나의 삶에 머물러 있으면서, 가련하게도 끝까지 ‘점점’에 속는다.

‘점점’의 본질은 ‘시간’이다. 음악이라는 시간 예술이 회화라는 공간 예술보다 훨씬 신비로운 것처럼, 시간은 공간보다 훨씬 불가사의하다고 생각한다. 공간의 경우는 얼마나 광대하건 무한하건 간에, 굳이 따져보지 않더라도 그 일단을 파악할 수 있으며, 그 일부를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은 전혀 파악할 길 없고 만류할 수 없이, 그저 과거와 미래가 막막한 가운데 끊임없이 쫓고 있을 뿐이다. 성질을 따지면, 막막하고 불가사의하고, 분량을 따지면, 인생에서 너무나 많은 것 같다. 보통 사람들은 시간의 본질을 깨닫는다 해도, 그저 배나 차를 타는 짧은 시간 동안만 그 지배를 제대로 받을 뿐, 저마다 타고났다는 백년이라는 수명의 오랜 기간 동안에는 감당을 못하고, 왕왕 국부에 빠져서 전체를 돌아보지 못하곤 한다. 기차에서 승객들을 보면, 항상 그 중에는 통달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잠시의 안락을 희생하며 자리를 약자에게 양보하여 마음의 태평을 (혹은 잠시의 칭찬을) 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이 앞다투어 먼저 내리려는 것을 보고 뒤편에 물러나 있으면서 “밀치지 말아요. 어차피 다들 내릴텐데!”, “모두 내리는 거예요!”라고 소리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사회’ 혹은 ‘세계’라는 커다란 기차를 탄 ‘인생’이라는 장기 여객 중에는 이렇게 통달한 사람이 드물다. 그래서 나는 백년이란 수명은 너무 길게 정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각자 배나 차를 타는 기간 정도로만 수명이 정해졌다면, 아마 인류 사회에서 수많은 흉악하고 잔인하고 처참한 싸움이 줄어들 것이요, 기차에서와 똑같이 양보하고 평화롭고 그럴 지도 모르는 일이다.

허나 인류 중에는 백년 혹은 천고의 수명을 타고났다 해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도 몇몇 있다. 그런 사람이라면 ‘위대한 인격’ ‘위대한 인생’이라고 할 만하다. 그들은 ‘점점’에 기만당하지 않고, 조물주에게 속지 않고,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한조각 마음에 아울러 수축해 놓는다. 블레이크(Blake)의 노래를 한 번 들어보자!

모래 한 알에서 세계를 보다.
들꽃 한 송이에서 천국을 보다.
너의 손에 무한이 담겨 있다.
한 시간이 바로 영겁이다. (주작인(周作人) 선생의 번역을 인용함)

(1928년 망종)
(1928년 6월 <一般> 제5권 제2호)

使人生圆滑进行的微妙的要素,莫如“渐”;造物主骗人的手段,也莫如“渐”。在不知不觉之中,天真烂漫的孩子“渐渐”变成野心勃勃的青年;慷慨豪侠的青年“渐渐”变成冷酷的成人;血气旺盛的成人“渐渐”变成顽固的老头子。因为其变更是渐进的,一年一年地、一月一月地、一日一日地、一时一时地、一分一分地、一秒一秒地渐进,犹如从斜度极缓的长远的山坡上走下来,使人不察其递降的痕迹,不见其各阶段的境界,而似乎觉得常在同样的地位,恒久不变,又无时不有生的意趣与价值,于是人生就被确实肯定,而圆滑进行了。

假使人生的进行不像山坡而像风琴的键板,由do忽然移到re,即如昨夜的孩子今朝忽然变成青年;或者像旋律的“接离进行”地由do忽然跳到mi,即如朝为青年而夕暮忽成老人,人一定要惊讶、感慨、悲伤,或痛感人生的无常,而不乐为人了。故可知人生是“渐”维持的。这在女人恐怕尤为必要:歌剧中,舞台上的如花的少女,就是将来火炉旁边的老婆子,这句话,骤听使人不能相信,少女也不肯承认,实则现在的老婆子都是由如花少女“渐渐”变成的。

人之能堪受境遇的变衰,也全靠这“渐”的助力。巨富的纨绔子弟因屡次破产而“渐渐”荡尽其家产,变为贫者;贫者只得做佣工,佣工往往变为奴隶,奴隶容易变为无赖,无赖与乞丐相去甚近,乞丐不妨做偷儿……这样的例,在小说中,在实际上,均多得很。因为其变衰是延长为十年二十年而一步一步地“渐渐”地达到的,在本人不感到什么强烈的刺激。故虽到了饥寒病苦刑笞交迫的地步,仍是熙熙然贪恋着目前的生的欢喜。假如一位千金之子忽然变了乞丐或偷儿,这人一定愤不欲生了。

这真是大自然的神秘的原则,造物主的微妙的功夫!阴阳潜移,春秋代序,以及物类的衰荣生杀,无不暗合于这法则。由萌芽的春“渐渐”变成绿荫的夏,由凋零的秋“渐渐”变成枯寂的冬。我们虽已经历数十寒暑,但在围炉拥衾的冬夜仍是难于想象饮冰挥扇的夏日的心情;反之亦然。

然而由冬一天一天地、一时一时地、一分一分地、一秒一秒地移向夏,由夏一天一天地、一时一时地、一分一分地、一秒一秒地移向冬,其间实在没有显著的痕迹可寻。昼夜也是如此:傍晚坐在窗下看书,书页上“渐渐”地黑起来,倘不断地看下去(目力能因了光的渐弱而渐渐加强),几乎永远可以认识书页上的字迹,即不觉昼之已变为夜。

黎明凭窗,不瞬目地注视东天,也不辨自夜向昼的推移的痕迹。儿女渐渐长大起来,在朝夕相见的父母全不觉得,难得见面的远亲就相见不相识了。往年除夕,我们曾在红蜡烛底下守候水仙花的开放,真是痴态!倘水仙花果真当面开放给我们看,便是大自然的原则的破坏,宇宙的根本的摇动,世界人类的末日临到了!

“渐”的作用,就是用每步相差极微极缓的方法来隐蔽时间的过去与事物的变迁的痕迹,使人误认其为恒久不变。这真是造物主骗人的一大诡计!这有一件比喻的故事:某农夫每天朝晨抱了犊而跳过一沟,到田里去工作,夕暮又抱了它跳过沟回家。每日如此,未尝间断。过了一年,犊已渐大,渐重,差不多变成大牛,但农夫全不觉得,仍是抱了它跳沟。有一天他因事停止工作,次日再就不能抱了这牛而跳沟了。

造物的骗人,使人流连于其每日每时的生的欢喜而不觉其变迁与辛苦,就是用这个方法的。人们每日在抱了日重一日的牛而跳沟,不准停止。自己误以为是不变的,其实每日在增加其苦劳!

我觉得时辰钟是人生的最好的象征了。时辰钟的针,平常一看总觉得是“不动”的;其实人造物中最常动的无过于时辰钟的针了。日常生活中的人生也如此,刻刻觉得我是我,似乎这“我”永远不变,实则与时辰钟的针一样的无常!一息尚存,总觉得我仍是我,我没有变,还是流连着我的生,可怜受尽“渐”的欺骗!

“渐”的本质是“时间”。时间我觉得比空间更为不可思议,犹之时间艺术的音乐比空间艺术的绘画更为神秘。因为空间姑且不追究它如何广大或无限,我们总可以把握其一端,认定其一点。时间则全然无从把握,不可挽留,只有过去与未来在渺茫之中不绝地相追逐而已。性质上既已渺茫不可思议,分量上在人生也似乎太多。因为一般人对于时间的悟性,似乎只够支配搭船乘车的短时间;对于百年的长期间的寿命,他们不能胜任,往往迷于局部而不能顾及全体。

试看乘火车的旅客中,常有明达的人,有的宁牺牲暂时的安乐而让其座位于老弱者,以求心的太平(或博暂时的美誉);有的见众人争先下车,而退在后面,或高呼:“勿要轧,总有得下去的!”“大家都要下去的!”然而在乘“社会”或“世界”的大火车的“人生”的长期的旅客中,就少有这样的明达之人。所以我觉得百年的寿命,定得太长。像现在的世界上的人,倘定他们搭船乘车的期间的寿命,也许在人类社会上可减少许多凶险残惨的争斗,而与火车中一样的谦让,和平,也未可知。

然人类中也有几个能胜任百年的或千古的寿命的人。那是“大人格”“大人生”。他们能不为“渐”所迷,不为造物所欺,而收缩无限的时间并空间于方寸的心中。故佛家能纳须弥于芥子。中国古诗人(白居易)说:“蜗牛角上争何事?石火光中寄此身。”英国诗人(Blake)也说:“一粒沙里见世界,一朵花里见天国;手掌里盛住无限,一刹那便是永劫。”